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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꽃밭에서’ 정훈희의 감사하는 삶 

“주신 것도 다 못하면서 욕심부리면 되나요?”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1967년 여고생 시절 작곡가 이봉조 눈에 띄어 가수로
때론 방송에서, 때론 고향 부산시 기장군 라이브카페에서…


▎53년차 가수 정훈희는 “70세 가까운 이 나이에도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1967년 여름 어느 날. 부산에서 상경한 17세 소녀는 남대문 인근 한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연습에 한창이었다. 클럽 악단장이 피아니스트인 작은아버지였다. 소녀는 작은아버지의 반주에 맞춰 미 8군 가수들이나 부르던 팝송 ‘러브레터’를 유창하게 소화했다. 특유의 미성과 고음에 감탄한 나이트클럽 직원들은 넋을 잃은 듯 소녀를 쳐다봤다.

그 시간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스타 작곡가 이봉조(1931~87)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클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녀를 본 이봉조의 첫마디. “얘는 누구야? 가시나 쪼깐한 게 건방지게 노래 잘하네.” 이봉조는 자신이 만든 곡 ‘안개’의 색소폰 연주가 담긴 음반을 소녀에게 쥐어 주며 당부했다. “이 곡 멜로디를 꼭 외워 놓아야 한다. 알았지?” 이봉조는 누구에게도 곡을 주지 않은 채 연주 음반만 제작했다.

며칠 뒤 소녀는 가수 오디션에 참가하는 친한 언니들을 따라 워커힐 호텔 나이트클럽에 갔다. 언니들이 마이크를 잡을 때 무대 밑에서 발을 까닥이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우연히 소녀의 노랫소리를 들은 호텔 지배인의 한마디. “얘는 누구야?”

작은아버지로부터 “내 친형의 딸”이라는 말들 전해들은 지배인은 “얘, 너 오늘부터 당장 일해라”며 소녀의 등을 떠밀어 무대 위로 올렸다. 때마침 나이트클럽에 놀러 왔던 황정태 TBC PD는 노랫소리에 시선을 소녀에게 고정했다. “쟤는 누구야?”

‘안개’ ‘무인도’ ‘꽃밭에서’로 친숙한 정훈희(68)는 그렇게 해서 가수가 됐다. 정훈희는 7월 15일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50년 세월도 돌아보면 한순간 같다”며 “52년 전 여름 ‘얘는 누구야’ 세 마디가 오늘날 나를 가수로 만들어준 셈”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여고생 정훈희는 1967년 필생의 파트너 이봉조를 만나 ‘안개’를 취입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아버지도 오빠도 남편도 조카도… 음악 가족


▎2012년 JTBC [패티김쇼]에 출연한 정훈희가 MC인 패티김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바닷가 아름다운 집에서 (남편) 김태화씨랑 수평선 바라보며 열심히 노래하며 살고 있지요. 주로 주말에 공연을 하는데 한 번에 200명 이상 모이기도 해요. ‘5~6학년(50~60대)’들로 바글바글합니다. 다른 지방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오기도 하고요.”

정훈희-김태화 부부는 정훈희의 고향인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정훈희·김태화의 꽃밭에서’라는 라이브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부부의 공연은 매주 토·일요일 오후 3시에 열리며, 입장료는 커피값을 포함해 1인당 1만5000원.

정훈희는 “25년 전에 남편이 다 쓰러져 가는 이 집을 매입하면서 ‘나중에 당신과 내가 70세쯤 됐을 때, 아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을 때, 우리 집에서 마음껏 노래하자’며 나를 설득했다”고 말했다. 당시 정훈희는 “왜 이런 집을 사려 하냐”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지만 지금은 남편의 선견지명에 감사한다.

가수가 천직인 것 같아요. 음악 가족의 일원이죠?

“제 형제가 6남1녀인데 다들 음악과 친했어요. 특히 아버지나 오빠들이 음악을 하니까 저 역시 말을 배우면서부터 팝송을 따라 할 정도였어요. 가수가 된 걸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요.”

정훈희의 아버지 정근수씨는 피아니스트였고, 작은아버지 정근도씨는 피아니스트 겸 악단장이었다. 오빠 넷도 모두 색소폰이나 기타를 연주한 음악인이다. 정훈희의 남편 김태화도 가수, 조카 제이(정재영) 역시 가수다.

국제가요제 입상이 유독 많았던 가수로 기억됩니다.

“이봉조 선생님과 손잡고 1970년 제1회 도쿄 국제가요제에 나가서 ‘안개’로 가수상을 받았고, 이듬해 아테네 국제가요제에서는 ‘너’로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상을 받았어요. 1979년에는 칠레 가요제에서 ‘무인도’로 최고가수상을 수상했지요.”

국제가요제 수상 횟수 면에서 정훈희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다. 그는 무려 6차례나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대마초 때문에 잃어버린 7년


▎정훈희가 2008년 7월 30일 열린 데뷔 40주년 기념 쇼케이스에서 큰아들 김유진씨와 함께 노래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과 곡은 얼마나 될까요?

“저는 가수 경력에 비해 발표한 앨범과 곡 수는 그리 많지 않아요. 1970년대 초 일본에서 2년 동안 활동했고, 그러다 1975년에 ‘무인도’로 칠레가요제에서 상을 받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곧바로 대마초 파동이 터졌어요. 훈방되긴 했지만 이후 활동이 막히고 말았어요. 한창 잘나갈 때라 저도 모르게 붕 떠 있었던 것 같아요. 제 사정을 안타깝게 여긴 TBC에서 1시간짜리 쇼를 마련해 줬는데, 일부에서 ‘말썽을 일으킨 사람에게 1시간짜리 쇼를 마련해 주는 게 말이 되냐’고 반발한 겁니다. 아무래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죠. 그래서 결국 방송을 중단하게 됐어요.”

그 이후로는 어땠나요?

“1975년부터 1980년까지 만 5년을 쉬고 난 뒤에 (활동 금지 조치가) 풀렸어요. 그런데 김태화씨랑 연애하면서 스캔들이 나니까,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가요계 분위기를 흐렸다며 2년간 방송 활동 금지 조치를 내리더라고요. 결국 1975년부터 1982년까지 7년간 발이 묶이고 만 거죠. 그 기간 동안에는 앨범도 못 냈고 방송도 못했지요. 그래도 1978년에 발표된 이봉조 선생님의 ‘꽃밭에서’를 들고 1979년 칠레 가요제에 나가서 최고가수상을 받고 들어왔어요. 혹시라도 시끄러워질까 봐 ‘국제가요제에 나간다’ 이런 거 일체 알리지 않고 조용히 다녀왔어요.”

정훈희는 1975년 대마초 파동에 연루돼 방송 출연을 정지당했다. 1981년 규제가 풀렸지만 재기는 뜻대로 이뤄지지는 못했다. 또 1980년 록밴드 ‘라스트찬스’의 리더인 김태화와 약혼한 정훈희는 집안 반대 등의 이유로 헤어졌다가 재회했고, 1983년 첫아들을 낳았다. 1989년에는 만삭인 상태에서 김태화와 듀엣곡 ‘우리는 하나’를 발표했고, 2008년에는 데뷔 40주년 기념앨범을 냈다. 40주년 기념앨범은 독집으로는 30년 만의 작품이었다.

특별히 아끼는 곡은 어떤 노래인가요?

“제 인생을 확 바꾼 노래가 몇 곡 있어요. 데뷔할 때 ‘안개’ 그리고 또 한 번 저를 업그레이드시켜준 ‘무인도’가 특히 기억에 남아요. 또 1978년에 발표한 ‘꽃밭에서’를 영원히 잊을 수 없어요.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라이브카페를 찾아오는) 팬들은 ‘어쩌면 이 나이에도 그렇게 노래를 부를 수 있냐’며 좋아합니다.”

가수로서 가장 큰 보람은 무엇인가요?

“보람이란 건 남들이 하지 않은 걸 했을 때 느끼는 게 아닐까요? 저는 여러분이 사랑해 주시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요즘에는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려고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이런 목소리와 끼를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돈에 큰 욕심은 없어요. 이미 젊었을 때 돈도 많이 벌었잖아요? 많은 분이 즐기며 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잘 키운 남편 하나 열 아들 안 부러워


▎2004년 KBS [열린음악회]에서 열창하고 있는 정훈희.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나 아쉬움은 무엇인가요?

“젊어서는 왜 지금처럼 철이 들지 않았을까 이따금 생각하게 돼요. 조금 더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더라면, 조금 더 의식 있는 가수로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지금은 감사한 마음속에 미안함이 깊어요. 조금 더 일찍 지금처럼 감사함과 미안함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 거란 반성을 하게 됩니다.”

1시간 남짓 진행된 인터뷰 동안 정훈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 활기차고 진솔한 답변을 거침없이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정훈희도 인생에서 후회와 아쉬움을 묻는 말에는 목이 메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훈희는 “조금만 더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 같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극복해 왔나요?

“사실 우리 남편도 ‘학교(교도소)’에 두 번 다녀온 사람이에요(웃음). 한 번 실수했으니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연예계를 보면 남편에게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경우 대체로 결혼생활이 중단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부부는 39년째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어요. 얼마 전에 이효리가 TV에 나와서 자신의 결혼생활을 공개하며 ‘특별한 남자는 없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효리야 너도 이제 나이가 마흔이 되니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라며 혼자 많이 웃었어요. 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표현을 못할 뿐이지(웃음). 요즘에는 (라이브카페에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서비스하는 남편을 보면서 ‘잘 키운 남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고 느껴요.”

남편의 건강은 어떤가요?

“3년 전에 김태화씨에게 위암이 발견됐는데 다행히 초기라 수술이 잘됐어요. 그런데 잘됐다니까 아무거나 먹다가 8개월 만에 재발해서 다시 수술했고, 그런 과정에서 체중이 52㎏까지 줄더라고요. 이후로는 열심히 치료받고 건강관리 했죠. 얼마 전 정밀검진을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더라고요. 이 나이에 바닷가에서 수평선 바라보며 마음껏 노래하는 가수는 우리 부부밖에 없다는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아들 둘도 가수죠?

“네, 분명히 끼는 있는데 솔직히 우리 아들들보다 잘하는 가수가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요즘에는 가수로 활동하진 않아요. 본명은 큰아들이 대한, 작은아들이 민국입니다. 예명으로 유진·유성을 썼죠.”

정훈희-김태화 부부 슬하에는 아들 둘이 있다. 큰아들은 김유진, 작은아들은 김유성이다. 김유진은 2008년 정훈희 데뷔 40주년 기념행사 때 함께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수는 천직… 후회한 적 없어


▎1967년 데뷔 때의 정훈희. 당시 정훈희는 부산여상에 재학 중인 여고생이었다.
가수의 길을 후회한 적은 없나요?

“우리 때만 해도 가수나 배우 같은 연예인이 된다고 하면 ‘딴따라’라고 흉보고 그랬어요. 특히 여자에겐 더 그랬죠. 그래도 저는 후회라는 게 있을 수 없어요. 가수가 아니면 어디 가서 이 나이에 노래하고 몸 흔들고 그러겠어요? 저는 진짜 가수가 되길 잘했어요. 최고예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남들을 즐겁게 해주고, 그러면서 돈까지 벌잖아요? 가수는 다 차려진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만 하면 되니까 연예인 중에서도 가장 좋은 직업인 것 같아요. 그런데 한창 인기가 있을 때는 자기가 얼마나 큰 걸 누리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그렇지만 그게 없어지고 나면 ‘엄청나게 큰 걸 주셨는데 내가 관리를 못했구나’라는 후회가 듭니다.”

인생의 신조나 좌우명이 궁금합니다.


▎1989년 정훈희-김태화 부부의 다정한 한때.
“해결되지 못할 고민이라면 끌어안고 살지 말자는 게 제 생활신조입니다. 예전 같으면 며칠씩 고민할 걸 요즘에는 한두 시간 만에 털어버립니다. 그리고 좋은 걸 생각하려고 합니다. 주신 것도 다 못하면서 안 주신 것까지 욕심부리면 되나요?”

젊은 시절 가수로서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남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 감사하며 사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어느 날 조용히 (세상을)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남편과 약속한 것 가운데 하나가‘(건강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인위적으로) 생명 연장 치료하려 하지 말고 편하게 보내 주자’는 겁니다. 혹시 둘 중 하나가 치매에 걸리면 곧바로 병원으로 보내자고 했어요. 치매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병원에 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나머지 한 사람이 끌어안고 있으면 같이 힘들어지고 그 사람마저 건강을 잃을 수 있어요. 그런데 늘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하며 살아서 그러는지 몰라도 선배 가수들을 보면 치매에 걸린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노래는 언제까지 부를 생각인가요?

“서서 부를 힘이 없으면 앉아서 부르면 되죠(웃음). 부를 수 있을 때까지 부르는 게 목표입니다. ‘정훈희와 김태화의 노래를 듣고 난 뒤에 좋은 기(氣)를 받아서 간다’는 말을 들으면 진짜 뿌듯하고 감사해요.”

연예계에서 격의 없이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분들이 있나요?

“인순이나 이자연과 많이 친해요. 참 좋은 동생들이죠. 다른 후배들하고도 두루 친하게 지내는데 제가 선배라고 해서 뭘 가르치려 들지는 않아요. 우리 때는 부모님 말씀도 잘 안 들었잖아요?”

건강관리 비결이 궁금합니다.

“뭘 해도 살이 안 쪄서 진짜 고민이 많았어요. 50대 중반이 됐는데도 너무 말라 있으니까 사람이 좀 없어 보이기도 하고 안 돼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남편은 사람들이 자기만 보면 ‘아직도 부인 속 썩이고 다니냐’고 핀잔한다며 ‘제발 살 좀 찌라’고 하소연하더라고요. 그런데 새벽 2시에 고추장에 밥을 비벼 먹어도, 라면을 끓여 먹어도 얼굴이 안 부어요. 그래도 굳게 마음먹고 하루에 네 끼씩, 다섯 끼씩 열심히 먹은 결과 젊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7~8㎏쯤 쪘어요. 그랬더니 어떤 후배들은 제 얼굴을 만지면서 ‘언니 (보톡스 주사) 맞았지’라며 씩 웃는 거 있죠?(웃음)”

특별한 관리는 없으시군요?

“사실 제가 쉰세 살 때까지 담배를 피웠어요. 그런데 교회에 다니면서 담배를 피우려니까 죄지은 것 같더라고요. 또 방송국 흡연실 같은 데서 제 아들들보다 더 어린 친구들과 맞담배를 해야 한다는 것도 좀 불편했고요. 그래서 ‘주님 저는 제 의지로는 담배를 끊지 못합니다. 주님이 제발 끊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꽃밭에서’를 부르는데 가성(假聲) 부분에서 제대로 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아, 정말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얼마 뒤 담배를 한 개비 물었는데 예전에 없었던 구토 증세가 갑자기 나타나는 거예요. 그날부터 담배를 끊게 됐고, 목소리도 예전으로 돌아왔어요.”

정훈희는 금연과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저는 담배 같은 건 몰라요”라는 식의 내숭은 떨고 싶지 않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조관우 덕에 잘 먹고 잘살지요 ”


▎1970년 도쿄 가요제에서 상을 받은 정훈희와 작곡가 이봉조가 김포공항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손을 흔들고 있다.
‘꽃밭에서’는 여러 가수가 리메이크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처음에(1994년쯤) 조관우씨가 전화를 걸어서 ‘선배님, 리메이크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왔어요. ‘관우씨는 목소리 컬러가 나랑은 다르니까 더 잘 부를 거야’라며 흔쾌히 허락했지요. 결과적으로 조관우씨 덕분에 잘 먹고 잘살게 됐지요(웃음). 왜냐면 제가 1978년에 발표했을 때만 해도 ‘노래가 너무 어렵다’고들 했는데 관우씨가 부른 이후 노래방에서 다들 잘 따라 부르더라고요. 제가 만든 ‘꽃밭’을 조관우씨가 리모델링한 셈이에요(웃음). 이후에 소향을 비롯해 노래 잘하는 후배 가수들이 다시 리메이크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기립박수를 칩니다.”

최근에는 젊은 후배와 음악 작업을 함께하신 적이 있죠?

“네, 맞아요. 얼마 전 정재일이라는 젊은 음악가와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데 참 대단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대중음악부터 클래식·재즈·국악까지 모든 장르에서 걸출한 실력을 보여주는 뮤지션은 정말 보기 드문 것 같아요. 앞으로 그 친구를 주목해야 할 겁니다.”

올해 초 방송된 JTBC 프로그램 [너의 노래는]에서 가수이자 음악 PD인 정재일은 박효신·아이유·이적에 이어 정훈희와도 음악 작업을 선보였다. 정재일은 지난해 4월 남북 정상회담 때는 ‘하나의 봄’을 편곡·연주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인생 후반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역시 건강이죠. 그런데 매일 잘 챙긴다고 해서 병이 안 오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모든 일에는 다 원인이 있어요. 되짚어 보면 뭔가 결부되는 게 있지요. 원인을 미리 제거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나이를 먹을수록 나잇값 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멋있게 늙어야 하는 거죠. 그래서 담배도 끊은 거고요(웃음).”

데뷔 시절부터 고락을 함께해 온 동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돌아보면 선배들도 고맙고 후배들도 고맙지요. 옛날에는 ‘나 하나쯤이야’ 하는 마음으로 살았지만, 지금은 ‘나 하나라도 잘하자’는 마음으로 살아요. 우리는 우리가 대단히 큰 걸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해요. 특히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네요. 그리고 혹시라도 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상처를 받은 분들이 계시다면 이 인터뷰를 통해서 ‘죄송하다’고 꼭 사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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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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