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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6) 

法의 본색은 폭력, 정의와 같은 편 아니다 

법의 폭력성이 정의 방해하지만 법 없는 세상 더 끔찍
정의와 법, 견제·협상 통해 서로 영감주고 인도해야


▎사진:이정권 기자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순간 세상은 지옥이 된다.”

칼 포퍼의 말처럼 우리는 ‘정의’와 ‘옳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저질렀던 참혹한 역사를 밟고 서 있습니다. ‘법의 정의’를 구현한다는 명목으로 저질러지는 폭력, ‘법은 곧 정의’라는 사회적 믿음이 법의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행하는 차별은 지구상 어느 곳에서나 존재합니다.

우리는 앞서 문학적 언어를 빌려 ‘법은 곧 정의’라는 확고한 맹신이 저질러놓은 인간 세상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문학은 법에 대한 집착이 인간성을 훼손하고 정의의 발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동한다는 것을 드러내며 법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법과 정의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법의 선의(善意)에 배신당한 경험이 조금씩이라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할 때는 ‘나쁜 법’이라고 일갈합니다. 그러나 타인들이 법의 폭력 앞에 서 있을 때는 눈을 감아버리거나 법의 편에 서서 박수를 칩니다. 어쩌면 법이 정의롭다는 도그마는 이러한 인간들의 이기심과 질투심에서 자양분을 얻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법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 끔찍합니다. ‘무법천지’라는 말 자체가 갖는 그 음험하고도 위험한 세상. 우리는 그래서 법이 곧 정의라고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법의 폭력은 일정한 절차를 거치지만 무뢰한의 폭력은 예측 불가능한 재앙의 형태로 다가올 것이므로 우리는 어쩌면 법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눈 감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데카메론’을 시작한 이후 줄곧 사회적 정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은 단순화하자면 ‘윤리적 옳음이 이기는 세상’이기보다 ‘공정하고 안전한 세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공정함과 안전을 담보하는 정의는 주어진 환경에 의지하고 아첨하며 나 자신을 보호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깨어있는 의식’으로 우리가 정의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법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좀 더 깊은 통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깊은 통찰은 철학적 사고를 요구합니다.

실제로 많은 현대철학자들은 법의 부정의함과 폭력성을 통찰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자크 데리다 류(流)의 관점이 생각납니다. 법은 그 자체로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법은 보편성, 정의는 독특성에서 실현되는 것이어서 충돌한다고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이번에도 ‘법의 폭력성’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정의가 조우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철학적인 담론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법의 폭력성은 어디에서 발원하는 것이며, 법과 정의는 어떤 관계일까요. 우리가 정의로 다가가기 위해 성찰해야 하는 것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 전에 현대 철학적 관점에서 이 문제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진태원 선생님께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법은 정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장애물


▎법과 정의의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해석한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법의 폭력성’에 대한 통찰을 얘기하려면 먼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벤야민이 문예이론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1921년 발표한 논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는 현대 정치철학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글 중 하나입니다.

‘법의 폭력성’을 통찰한 철학자로 대부분 자크 데리다를 떠올립니다. 그는 현대정치철학과 법철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철학자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이 분야의 대표적 철학자로 부상하게 된 대표 저작인 [법의 힘](1994)은 벤야민의 통찰을 재해석한 것입니다. 또 데리다와 비슷한 시기에 [호모 사케르](1995)를 내놓은 조르조 아감벤도 역시 벤야민의 논문을 기반으로 정치철학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을 얘기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 ‘해방’의 이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해방의 개념은 ‘정의’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정의를 얘기하고 있으니 여기선 ‘정의’라는 용어로 말하도록 하지요.

그는 논문에서 법 일반을 정의의 대척점(타자)으로 설정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적인 정의감에 따르면, 법은 정의의 타자가 아니라 정의의 수호자,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수단 중 하나입니다. 우리 정부 부처 중 하나인 법무부를 영어로는 ministry of justice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벤야민에게 법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본질적인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장애물입니다. 법은 본질적으로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따라 실행되는 폭력’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벤야민이 폭력의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게발트(Gewalt)’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폭력’이라는 한 마디로는 설명하기 힘든 매우 다의적인 용어입니다. 권위·권한·권력으로 풀이할 수도 있고, 신적인 권능을 표현할 때도 게발트 고테스(Gewalt Gottes)라고 합니다. 이런 뉘앙스를 기억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벤야민은 당대 법철학의 두 사조인 자연법사상과 법실증주의를 비판합니다. 이 두 사조는 겉보기에는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실은 공통적인 독단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정당한 목적은 정당화된 수단을 통해 성취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은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법실증주의에서는 폭력을 ‘적법성’이라는 기준에 기대어 승인된 폭력과 승인되지 못한 폭력으로 구별합니다. 곧 적법한 목적을 위해 수행되는 폭력은 적법한 폭력이며, 그렇게 인정되지 않고 자연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폭력은 불법적 폭력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구별 자체는 가설일 뿐입니다. 곧바로 한계를 드러내죠.

그런 한계는 ‘개인들에 맞서 폭력을 독점하려는 법의 이해관계’에서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법이 추구하는 최상의 목표는 ‘법 자체를 보존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법이 법 이외의 폭력을 금지하는 것은 그것이 부당한 목적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법 바깥에 있다는 사실 자체’ 때문에 위협을 느껴서입니다. 왜 이러한 위협을 느낄까요? 그것은 ‘법적 상황의 객관적(sachliche) 모순’ 때문입니다.

법은 폭력 없이 자신을 보호할 수 없어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시민이 전면에 등장하는 새로운 체제를 정립했다.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 이 말은 법이 다른 폭력들을 자신이 맞서 싸울 대상으로 취급하지만, 실은 법 차제가 그 기원부터 폭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폭력 없이는 자신을 보존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법은 자신이 독점한 폭력을 적법한 힘 내지 강제력으로 규정합니다. 이와 함께 자신과 다른 폭력은 불법적인 폭력으로 규정하면서 양자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를 부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폭력을 독점하지도 못하고 폭력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도 못합니다.

예를 들어 파업권과 전쟁권의 사례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파업권은 법질서 내부에 국가와 별개의 폭력권을 부여받은 법적 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따라서 법질서 자신이 폭력을 독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전쟁권의 경우 처음에는 강탈적인 폭력으로 보였던 전쟁이 사실은 새로운 법을 부과하고 정립하는 폭력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개의 폭력에서 법은 그들의 절대적 타자가 아니라 새로운 법질서를 만들려는 주체, 즉 자신들의 폭력과 맞서 있는 하나의 폭력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이를 토대로 벤야민은 두 가지의 게발트, 곧 두 가지의 폭력을 구별합니다. 하나는 ‘법정립적 폭력’이고, 다른 하나는 ‘법보존적 폭력’입니다.

법정립적 폭력이란 새로운 법을 창설하는 폭력입니다. 혁명을 통해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법과 국가를 세우는 것이 이에 해당하지요. 이는 혁명적 폭력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혁명이 성공하면 새로 세운 법과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폭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체제는 구체제의 반동적 세력이나 외부의 힘에 의해 다시 무너질 수 있을 것이니까요. 따라서 혁명이 성공하면, 혁명적 폭력은 자신들이 세운 법과 국가를 보존하려는 목적의 ‘법보존적 폭력’으로 바뀝니다. 혁명가들이 무너뜨린 것은 구체제의 ‘법보존적 폭력’인데 혁명적 폭력은 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법보존적 폭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제를 무너뜨린 법정립적 폭력은 정의로운 폭력인가?”

“새로 세워진 법과 국가를 보존하려는 법보존적 폭력은 정의로운 것인가?”

벤야민은 그렇지 않다고 답변합니다. 왜냐하면 법은 자기를 설립한 세력을 정당화하거나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 종사할 뿐,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벤야민이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래서입니다.

법은 마피아나 조직폭력배 같은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력한 무력을 지닐 수는 있어도 새로운 법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법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 또는 자신을 보호하는 법보존적 폭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법과 국가 혹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폭력입니다. 즉 법정립적 폭력 또는 혁명적 폭력에 대한 두려움인 셈입니다.

이렇게 보면 새로운 법과 국가를 만든 혁명적 폭력이 어느덧 보수화·반동화되고, 다시 새로운 혁명적 폭력에 자리를 물려주는 것이 역사의 영원한 순환 법칙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숙명적 사이클을 벗어나는 방법은 있을까요.

벤야민은 법과 국가를 ‘비정립’해야 한다고 방안을 제시합니다. 법이나 국가를 세울 목적도 없고, 자신이 세운 새로운 질서를 지키기 위해 작동하지도 않으며, 수단과 목적의 사이클을 벗어난 ‘폭력의 순수’ 상태. 그런데 이 부분에서 벤야민은 “순수한 폭력이 어떤 특정한 경우에 실현될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가능하지도 절박하지도 않다”고 말합니다. 결론은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아포리아’로 끝을 냅니다. 그리스어인 a + poros에서 유래한 아포리아라는 말은 말 그대로 하면 ‘길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 ‘아포리아’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자크 데리다로 넘어가서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강제할 힘없으면 정의는 발현되지 않아


▎법과 폭력의 관점을 통찰력 있게 역설했던 발터 벤야민. 그의 논문 ‘폭력비판을 위하여’는 이후 자크 데리다 등 현대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데리다의 저작 [법의 힘]의 핵심 테제 중 하나는 ‘법은 그 자체가 하나의 힘 또는 폭력이며, 중립적이거나 초월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법은 곧 힘’이라는 것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판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모든 판단은 항상 어떤 세력의 이해관계나 관점의 표현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의와 힘의 관계에 대해서 데리다가 논평한 것을 보도록 하죠.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298번째 단상에 대한 논평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사람들이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들 인용구를 통해 데리다는 말합니다. 정의로운 것이 지속되면 이상적이겠지만, 실제로는 정의로운 것보다 강한 것이 지속되어온 현실. 이상과 현실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강제할 힘이 없다면 정의는 정의가 아니며 실현되지 못합니다. 무기력한 정의는 법이라는 의미에서 정의가 아닙니다. 즉 무기력한 정의는 말뿐인 정의로 사악한 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정의와 힘 또는 폭력은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결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폭력의 결합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아니면 강한 것이 정당해지는 것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영웅을 다루는 영화라든가 드라마 또는 소설이나 연극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정의로운 주인공이 강한 힘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스토리 말입니다.

그런데 후자는 조금 미묘합니다. 이것은 강한 힘을 가졌지만 그 자체로는 정의롭지 않은 어떤 것이 정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정당화를 통해 자신의 힘을 정의로운 것으로 꾸미거나 미화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강한 것은 자신을 정의롭게 미화해 정의 자체를 왜곡하거나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결국 ‘정의로운 것이 강하게 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죠. 그런데 정의가 법적 강제력을 지닌다는 것은 평화롭고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정의가 법적 강제력을 갖기 위해서 정의는 자신의 정의로움을 얼마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데리다는 몽테뉴 [에세이]의 한 단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여기에서 바로 [법의 힘]의 부제인 ‘권위의 신비한 토대’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법들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한다. 이것이 바로 법들이 가지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며, 그것들은 이것 외에 다른 어떤 토대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의 법 역시 적법한 허구들을 갖고 있으며, 그것은 이 허구들 위에 자신의 정의의 진리를 정초한다.”

그렇다면 법의 근거 혹은 법의 기원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을까요. 데리다는 영국의 철학자 존 오스틴의 개념인 ‘수행문’(performative) 개념을 도입해서 법의 기원이라는 문제에 답변합니다.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법의 토대는 바로 ‘자신이 법이라고 선언하는 수행적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에 정당성의 기반이 되는 객관적인 토대가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모멘텀을 만듭니다. 이 말은 곧 ‘법이 해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존하는 이런저런 법보다 더 나은 또는 더 나쁜 법들은 언제든지 만들어지고 ‘내가 법’이라고 선언할 수 있게 됩니다. 심지어 법체계 자체가 폐기되거나 새로이 정초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데리다는 “이는 불행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역사적 진보의 가능성이 여기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뒤에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법과 정의가 조우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앞서 우리는 법과 정의의 관계, 법은 정의가 아님에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관계에 대해 얘기해야 합니다.

법은 보편성, 정의는 독특성을 지향


▎법의 폭력성과 환대의 개념으로 현대 정치철학과 법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자크 데리다.오른쪽은 데리다의 저작[법의 힘]과 [환대에 대하여] 한국어판 표지.
데리다는 법은 정의가 아니지만 법과 정의는 분리하여 성립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법은 정의가 아니다. 법은 계산의 요소이며, 정의는 계산 불가능한 것이면서도 우리가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법이 공평무사한 것, 보편적인 것이 되려면, 법은 한쪽으로 편중되지 않도록 계산해야 합니다. 반면 정의가 계산 불가능하다는 것은 보편성이 아닌 독특성(singularity)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단지 법적 보편성을 실현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말입니다. 곧 법 조항을 엄격하게, 객관적으로 적용하고 이해관계나 정념에 구애받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판결을 내리는 것만으로는 정의를 구현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법적 보편성을 잘 구현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보편성으로 구제할 수 없는 독특한 타자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데리다는 법 조항이나 판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기계적 결정에 불과하다고 일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판결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무런 결정(decision)도 내리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럼 어떻게 판결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 개념에 부합하는 결정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마치 지금까지 (관련된) 법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판사 스스로 새로운 법 또는 규칙을 만들어낸 것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사가 자의적으로 판단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그 독특성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결하되 동시에 법에 일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비슷한 부류라고 해서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매 사건은 그 자체의 독특성과 사연이 있고 각각 다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정의로운 결정, 정의로운 판결에 대해 데리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 중지적이어야 한다. 매 경우가 각각 다른 것인 만큼, 각각의 결정은 상이할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특유한 해석을 요구한다.”

여기에서 그는 판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규칙의 판단중지’라는 아포리아(aporia)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법과 정의에 대한 철학적 통찰이 도착하는 곳은 진퇴양난의 ‘아포리아’입니다. 길이 없으니 포기하라고요? 아닙니다. 이렇게 길이 없는 상황에서 물러서거나 돌아가지 않고, 이 불가능한 상황을 견뎌내는 것, 그것을 통과하는 것이 바로 ‘정의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데리다가 법보다 정의를 우선시하거나 정의를 위해 법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데리다는 법과 정의를 구분하기는 하지만 양자를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더욱이 법과 구분되는 정의를 추구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산 불가능한 정의, 선물과 같은 정의라는 이념은 그것 자체로 고립될 경우 항상 악이나 심지어 최악에 더 가까운 것이 되고 만다.”

데리다는 정의라는 계산 불가능한 것, 그 자체가 낳을 수 있는 최악의 위험을 경계하면서 ‘계산 가능한 것과 계산 불가능한 것의 관계를 계산하고 협상하라’고 합니다.

즉 ‘법만’ 혹은 ‘정의만’ 고수하는 게 아니라 보편성과 독특성의 상호견제와 협상, 법과 정의의 상호견제와 협상을 통한 결합이 정의로 가는 최상의 작업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독특성을 배제하고 보편성만 고수하려고 하거나 독특성을 모두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 둘 다 심각한 폭력과 도착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립된 정의는 최악의 결과 가져와


▎파업권은 법이 부여한 노동자의 기본권이지만 정부 당국은 파업을 기존의 법 질서를 파괴하려는 일종의 폭력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해결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데리다는 ‘환대’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데리다는 환대를 두 가지로 구별합니다. 하나는 ‘조건적 환대’이고 다른 하나는 ‘무조건적 환대’입니다.

‘조건적 환대’는 우리가 이방인 혹은 타자를 맞이할 때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그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환대를 가리킵니다. 반면 ‘무조건적 환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방인 내지 타자를 있는 그대로 환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법적ㆍ정치적으로 본다면 조건적인 환대가 일반적이지만, 윤리적ㆍ철학적으로는 무조건적 환대야말로 정의롭고 훌륭한 환대로 여겨집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폐허가 된 거리에서 구호대원이 부상당한 소년을 옮기고 있다. 시리아 난민 문제는 유럽 각국의 현안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도록 하죠. 가령 우리가 외국에 갈 때 외국 공항에서는 누구나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권과 비자가 있는지, 이름과 국적이 옳은지, 입국 목적이 무엇인지 등을 묻고 살펴본 다음에 문제가 없다고 하면 입국을 시킵니다. 또한 난민을 받아들일 때도 아무나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조건적 환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윤리적으로 ‘무조건적 환대’가 옳다는 관점에서 이런 절차는 잘못된 것일까요. 데리다는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 사이의 이율배반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첫째, 환대를 하기 전에 나를 찾아온 타자에게 질문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 지배적인 법적·정치적 또는 문화적 형태 아래에서 수행되는 환대는 우선 상대의 신원을 확인하고 입국의 목적을 묻는 데서 시작합니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서 보편적인 절차와 방식, 형태로 이루어지는 신원 확인은 근대 국민국가 체계에 고유한 것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신원이 확인된 이방인만이 정당한 이방인, 합법적 이방인으로서 대우를 받고 그 나라에 입국할 수 있습니다.

둘째, 환대는 질문하지 않고 맞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도래하는 이의 신원을 확인하고 입국의 목적을 묻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입국하려는 이들을 분류하기 위한 것입니다. 곧 어떤 사람이 좋은지 나쁜지, 어떤 이가 환대할 만하고 어떤 이는 거부하거나 배제해야 하는지 분류하고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테러 혹은 범죄의 목적으로 입국할 수도 있고, 전염병을 지닌 채로 입국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절차 없이 입국하는 이들을 모두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러한 환대야말로 정의로운 환대일까요?

이러한 환대는 사실상 국경을 모두 개방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경이 없는 사회, 세계 모든 나라가 국경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모든 나라를 자유롭게 왕래하게 된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로운 곳이 될까요?

아마 세계가 대혼란에 빠지게 될 거라는 게 더 개연성이 있을 겁니다. 한 예로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 주변국들만이 아니라 유럽으로 수백 만 명의 난민이 몰려들면서 유럽은 큰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가 많은 수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고, 특히 독일의 경우는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수용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 대륙으로 몰려드는 많은 난민이 존재하며, 유럽의 각 나라는 난민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많은 수의 난민을 받아들일수록 인종주의와 국민주의적 반동이 격렬해지면서, 반(反)이민, 반(反)이슬람 감정이 고조되고, 그에 편승하여 극우파 정당들이 득세하게 되었으며, 치안과 검열 활동이 강화되었습니다. 이 경우 오히려 환대는 더욱더 제한될 수 있습니다. 절대적인 환대를 실행하려는 것이 환대를 제한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묻는 게 정당한가, 묻지 않는 것이 정당한가?

입국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목적을 따지는 것은 환대를 제한하는 것이지만 이는 국민국가의 질서를 자연적이고 그 자체로 정당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반면 입국자에게 무조건적인 환대를 실행하는 것은 앞에서 본 것처럼 환대를 실행할 수 있는 주체의 자기 보존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가 윤리적으로 옳다고 긍정하면서도, 그렇다고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무조건적 환대가 정의로운 것이 되려면 조건적인 환대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역으로 조건적인 환대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외국인들을 편의적으로 선별하는 것에 그치면 이는 이익 추구의 논리에 불과한 것으로 정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조건적 환대는 항상 무조건적 환대의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무조건적 환대의 윤리와 달리 조건적인 법들은 이방인들을 선별하고 분류하며, 그들 중 부적격한 이들을 배제합니다. 따라서 조건적인 환대의 법들은 어떤 의미에서 환대의 무조건적인 법, 절대적인 명령을 배반하고 타락시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법과 정의의 상호견제가 아포리아를 견디는 힘


▎베네수엘라 난민들이 트럭을 타려고 애쓰는 모습. 남미 난민들은 미국에 국경개방을 요구하며 이민을 제한하는 미국 당국과 맞서고 있다.
“법들은 항상 그렇게 무조건적인 환대의 법 자체를 부정하고 타락시키거나 도착되도록 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사실 이 도착 가능성은 본질적이고 비환원적이며 필수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가를 치름으로써 법들은 개선될 수 있다. 따라서 법들의 역사성도 마찬가지다.”

데리다에 따르면 조건적인 환대의 법들이 무조건인 법 자체를 도착시키는 일, 퇴락시키는 일은 필수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착 가능성으로 인해 (환대의) 조건적 법들이 개선될 수 있고, 따라서 이러한 법들이 역사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조건적인 법들은 무조건적인 환대의 법에 의해 인도되고 영감을 받고 고취되고 요구되지 않는다면, 환대의 법들이 되기를 그치게 될 것이다.”

정의(justice)에 의해 인도되고 영감을 받고 고취되고 요구되지 않는 법은 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실정법들, 개별적인 법률들은 정의의 구현을 자신들의 존재 이유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결론이 통쾌하지는 않습니다. 정의는 독특성에서 실현되는 것이며 타자를 환대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태생적으로 독특성을 포괄할 수 없는 법이 정의를 억압하는 상황을 용인하는 듯한 인상도 줍니다.

그러나 이 방안은 절묘합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독특성과 함께 이 사회에는 그 독특성들이 모여 있는 다원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타자를 무조건 환대해야 한다는 윤리적 정의가 옳다고 해도 타자는 하나가 아닙니다. 복수입니다. 특정한 한 사람에게만 윤리적 정의를 실현했을 때 나머지 타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의도 각각의 독특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정의도 바뀔 수 있습니다. 또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오직 하나의 길이 있는 게 아니라 다원적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 진보·보수 양 진영이 바라보는 보편성의 원칙이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보편성과 독특성, 보편성과 보편성, 독특성과 독특성들이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법과 정의’의 관계는 항상 아포리아를 향해 돌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가진 자원과 수단과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포리아를 단숨에 해결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데리다가 제시하는 계산적인 것과 계산할 수 없는 것 사이의 상호 견제와 협상, 법과 정의 사이의 영감과 소통 등은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정의의 원칙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끊임없는 선택과 상호 소통 속에서 법이 끊임없이 바뀌어 간다는 것이 희망적인 소식일 수 있습니다.

법에 대한 맹신이 가져오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무조건적 ‘옳음’에 대한 맹신 역시 최악의 폭력을 생산하고 상황을 도착적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최악을 피하는 길은 인간이 가진 ‘회의하는 능력’ ‘협상과 타협의 능력’ ‘상호소통의 능력’일 수 있습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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