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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1부)] 진흥왕, 한강 유역을 점령하다(8) 김춘추 연개소문과의 담판 

고구려에 정변 발생하자 혈혈단신 호랑이굴로 뛰어들어 

아버지 김용춘은 진지왕 큰아들로 진평왕과는 4촌
대장군 김유신과 손잡고 훗날 삼국통일 위업 이뤄


▎신라 태종무열대왕 김춘추가 참모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1976년 이종상 화백 작품으로 전쟁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 사진:민족기록화
진평왕은 재위 43년인 621년 큰딸 덕만(德曼)을 후계자로 내정했다. 그 사실은 [삼국사기] 기록으로 증명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21년 7월 진평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자 당 고조(高祖)도 사신을 파견해 국서와 함께 비단과 화병풍(畵屛風)을 전했다고 한다. 그 화병풍은 말 그대로 꽃을 그린 병풍인데, 모란꽃을 그린 병풍이었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전한다. 진평왕 때 당나라에서 모란꽃 그림과 모란꽃 종자 석 되를 보냈다. 진평왕이 모란꽃 그림을 큰딸 덕만에게 보이자 덕만은 “이 꽃은 아름답지만 분명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진평왕이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묻자 덕만은 “그림을 보니 꽃에 벌과 나비가 없기에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모란꽃을 심었더니 과연 덕만의 예언처럼 향기가 없었다.

위 전설에 등장하는 모란꽃 그림은 당연히 모란꽃 병풍이다. 이 전설은 덕만이 뛰어난 예지력을 가진 여성이라는 사실과 함께 그 즈음 덕만이 진평왕 후계자로 내정됐음을 알려준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그렇다.

우선 진평왕이 덕만에게 모란꽃 병풍을 보여준 이유는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진평왕은 모란꽃이 어떤 꽃인지 몰랐고, 그래서 모란꽃 병풍을 보낸 당 고조의 저의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큰딸 덕만에게 보여줬는데, 덕만은 모란꽃도 알아 보고 당 고조의 저의도 읽어냈다. 그것은 진평왕이 외교 현안을 덕만과 논의했다는 말이나 같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당시 덕만이 후계자로 내정됐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 사실은 [삼국유사]로도 확인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재위 중일 때 신하들이 어떻게 모란꽃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는지 묻자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나의 배우자가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 기록은 모란꽃 병풍을 보낸 당 고조의 내심이 복합적임을 시사한다. 첫째, 당 고조는 모란꽃 병풍을 진평왕이 아닌 덕만에게 보냈다. [삼국유사]의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나의 배우자가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라는 선덕여왕의 언급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둘째, 당 고조가 모란꽃 병풍을 보낸 이유는 후계자 내정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전통시대 외교 관례로 볼 때 자명하다. 만약 덕만이 진평왕의 후계자가 아니라면 굳이 화병풍을 보낼 이유가 없었다. 전통시대의 외교 관례상 중국 황제가 선물을 보내는 대상은 왕·왕비·대비·세자 등이었다.

이런 사실에 비춰 본다면 621년 7월 진평왕이 당나라에 파견한 사신이 덕만을 후계자로 내정한 사실을 알렸고, 그 결과 당 고조가 축하 차 화병풍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병풍 그림이 하필 모란꽃인 이유도 진평왕의 후계자가 여성임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621년 당시 진평왕은 덕만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그 사실을 당 고조에게 알리기까지 했지만 정작 국내에서 공포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진평왕은 덕만이 뛰어난 예지력을 가진 여성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자 화병풍 전설을 퍼뜨렸던 것이다. 그 이유는 덕만을 후계자로 공포하기 어려운 현실 상황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이해할 수 없다.

우선 신라 역사상 여성이 국왕에 즉위한 전례가 없었고, 다음으로 진평왕의 정치적 입장이 특수하기 때문이었다. 본래 진평왕은 비상한 방법으로 즉위한 왕이었다.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인데 진흥왕에게는 큰아들 동륜(銅輪)과 둘째 아들 사륜(舍輪)이 있었다. 진평왕은 동륜의 큰아들로서 진흥왕에게 큰손자가 됐다. 따라서 특별한 사연이 없다면 평화적으로 왕이 될 신분이었다. 그런데 진흥왕 후계자였던 동륜이 572년(진흥왕 33) 요절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576년(진흥왕 37) 진흥왕이 승하했을 때 진평왕이 아직 어려 동륜의 동생인 사륜이 즉위했는데 진지왕이 그였다. 하지만 진지왕은 재위 4년 만에 황음무도하다는 명분으로 살해되고 진평왕이 즉위했다. 당시 진지왕을 살해하고 진평왕을 옹립한 주역들은 신라의 전통과 관행을 중시하는 구 귀족들이었다. 그들 구 귀족의 입장에서 여성 국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진평왕이 큰딸 덕만을 후계자로 내정하고도 공포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진평왕이 구 귀족의 반발을 제압하고 큰딸 덕만을 후계자로 만들자면 무엇보다도 두 가지를 극복해야 했다. 첫째는 여성 국왕이 전혀 없었던 정치문화였다. 그런 정치문화를 극복하고자 진평왕은 안함 법사의 밀교와 불국토 이론을 적극 이용했다.

구 귀족 제압 위해 김용춘·김서현 중용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초상.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었던 진평왕의 딸로 신라의 첫 여왕에 올랐다.
둘째는 진평왕의 후계 자리를 노리는 구 귀족들 자체였다. 그들은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 국왕이 전혀 없었던 정치문화를 이용해 자신들이 즉위하고자 했다. 그런 구 귀족들을 제압하기 위해 진평왕은 당시 비주류 인물 김용춘(金龍春)과 김서현(金舒玄)을 중용했다.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은 진지왕의 큰아들로서 진평왕과 4촌 관계였지만 원한 관계이기도 했다.

김용춘의 입장에서 본다면 4촌 진평왕은 아버지 진지왕을 살해하고 자신의 후계권을 강탈해 간 주인공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런 관계가 아니었다면 진평왕 당시 후계서열 1위는 단연 김용춘이었다. 하지만 김용춘은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구 귀족들에게 기피 인물이었다.

또한 김서현은 김해가야 출신인 김무력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아버지인데 신라 전통을 중시하는 구 귀족들에게 당연히 기피 대상이었다. 이 같은 김용춘과 김서현인지라 진평왕 시대 정치 핵심에서 소외돼 있었다.

그런데 진평왕은 덕만을 후계자로 내정하면서 김용춘과 김서현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22년(진평왕 44) 2월, 진평왕은 김용춘을 내성사신(內省使臣)에 임명했다. 신라의 내성사신은 궁중 비자금과 궁중 인력을 총괄하는 요직 중의 요직으로서 조선시대 내수사 책임자와 같았다. 진평왕이 4촌이자 원한 관계인 김용춘을 그런 요직에 임명한 이유는 구 귀족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

불국토설 완성 위해 첨성대·분황사 건립 추진


▎부여 능산리에 있는 의자왕의 가묘(假墓).
진평왕이나 김용춘 입장에서 본다면 구 귀족 중 누군가가 후계 왕이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덕만이 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덕만은 진평왕의 큰딸이고, 김용춘의 조카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시 덕만은 미혼 상태였기에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김용춘이 기왕의 원한을 접고 적극 협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622년 내성사신에 임명됐던 김용춘은 7년 후인 629년(진평 51)에는 대장군이 돼 대장군 김서현과 함께 고구려 낭비성을 공격해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내성사신으로서 궁중 실세가 됐던 김용춘은 629년 즈음에는 대장군으로서 김서현과 함께 군사권까지 장악했던 것이다.

그 시점을 전후로 김용춘 가문과 김서현 가문 사이에 본격적인 협력관계가 성립됐을 듯하다. 그런 협력관계 속에서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와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 사이에도 끈끈한 유대관계가 이뤄졌을 것 역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덕만을 후계자로 세우려던 진평왕의 시도는 구 귀족들의 큰 반발을 사 역모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진압에 성공하고 632년(진평왕 54) 1월 진평왕 승하 후 선덕여왕이 즉위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선덕여왕 즉위에 앞장섰던 인물은 김용춘과 김서현 그리고 안함법사 등이었다.

그 결과 즉위 초 선덕여왕 왕권은 김용춘과 김서현의 정치력과 군사력 그리고 안함법사의 밀교 사상에 의해 옹위됐다. 첨성대,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9층탑 등 선덕여왕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를 창조한 주역들도 그들이었다. 특히 세계 최초의 천문대로서 현재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재 중 하나인 첨성대는 안함법사의 밀교와 경주 불국토설을 바탕으로 창조됐다.

안함법사가 제창한 경주 불국토설은 7처가람설을 핵심으로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완전하지 않았다. 과거 7부처님이 경주에서 수행했다는 7처가람설은 부처님의 수행 인연만 주장할 뿐 득도 후 교화 인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경주 불국토설을 완성하려면 7처가람설에 더해 교화 인연까지도 필요했다. 특히 스스로 정반왕을 자처하며 석가족(釋迦族)과의 인연을 강조하던 진평왕의 입장에서 보면 석가부처와의 교화 인연은 더욱 절실했다. 이런 진평왕의 요구에 더해 불국토설 자체의 완성을 위해 안함법사가 제시한 대안이 첨성대였다.

주지하듯 붓다가야에서 6년 수행 끝에 득도한 석가부처는 녹야원을 거쳐 마가다국 왕사성(王舍城)으로 갔는데 마가다국의 빈바사라왕(頻婆娑羅王)이 죽림정사(竹林精舍)를 기증해 그곳에서 오랫동안 교화했다. 이 죽림정사가 불교 교단의 최초 사원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함법사의 7처가람설과 연관해 생각하면 가섭불과 석가불이 강연(講演)했다는 황룡사 연좌석은 석가부처가 6년 간 수행했다는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 금강좌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황룡사 연좌석에서 득도한 후 석가부처가 마가다국 왕사성의 죽림정사에 해당하는 곳으로 가서 교화했을 것임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죽림정사란 말 그대로 죽림(竹林) 즉 대나무 숲에 세워진 정사이다. 당시 신라에서 가장 유명한 숲은 당연히 월성 주변의 계림(鷄林)이었다.

그 계림은 여러 면에서 왕사성 주변의 죽림과 비교될 수 있었다. 우선 왕성 주변이라는 면에서 비교될 수 있었고, 둘째 숲이라는 면에서도 비교될 수 있었다. 따라서 안함법사는 황룡사 연좌석에서 득도한 석가부처가 계림 주변으로 왔고, 월성의 신라왕이 계림정사를 기증해 그곳에서 석가부처가 교화 활동을 전개했다고 주장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첨성대 건립을 제안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제안은 석가부처의 수행 인연에 더해 교화 인연도 필요로 하던 진평왕의 요구에도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에 따라 첨성대 건립은 진평왕 대에 확정돼 선덕여왕 즉위 직후 완성될 수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633년(선덕여왕 2) 첨성대가 건립됐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647년(선덕여왕 16) 건립됐다고 하는 [증보문헌비고]보다 훨씬 신빙성이 높다. 첨성대가 건립되고 1년 후인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가 건립됐고, 다시 1년 후인 635년(선덕여왕 4) 영묘사가 건립됐다.

분황사와 영묘사는 각각 7처가람의 하나로 신라 불국토설의 연장선에서 건립된 것이 분명하고, 첨성대 역시 신라 불국토설의 연장선에서 건립됐다고 이해된다. 선덕여왕은 632년에 즉위했으므로, 첨성대가 건립된 633년이나 분황사가 건립된 634년은 진평왕의 장례기간이라 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 첨성대나 분황사 건립은 선덕여왕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선왕인 진평왕의 결정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당연히 진평왕은 안함법사의 경주 불국토설에 입각해 첨성대·분황사 등의 건립을 확정했을 것이다.

경주 첨성대는 정방형의 2단 기단, 병 모양의 27단 몸통, 그리고 우물 모양의 2단 정자석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형태의 첨성대는 죽림정사에서 여래삼매(如來三昧)에 든 석가부처를 상징한다. 여래삼매란 수나라의 대흥선사에서 수도하던 나련제련야사가 한역(漢譯)한 [일장분불현신통분(日藏分佛現神通分)]에 나오는 삼매다.

[일장분불현신통분]에 의하면 죽림정사에서 석가부처님이 수행할 때 빈바사라왕이 찾아와 보살의 광명과 여래의 광명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질문하자 석가부처님이 일체여래경계일월삼매(一切如來境界日月三昧)에 들어 여래의 광명을 보이셨다고 한다.

그러자 사바세계의 삼천대천세계가 그림자처럼 나타나 부처님 몸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렇게 부처님 몸 안으로 들어간 삼천대천세계가 곧 하나의 불찰(佛刹) 즉 하나의 불국토다. 한편 사바세계가 여래삼매에 든 석가부처님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석가부처님의 몸이 한량없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석가부처님의 몸 형태가 사바세계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또한 사바세계가 석가 부처님의 화신(化身)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화엄사상에서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과 사바세계가 하나라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고구려·백제 연합군의 당항성 협공

첨성대의 미묘한 기울기는 바로 여래삼매에 든 법신불의 배·가슴·목을 상징한다. 이 같은 여래삼매를 근거로 안함법사는 첨성대 축조를 제안했고, 그 첨성대를 통해 신라 경주가 과거 석가부처님이 수행하고 교화하던 인연의 땅이며 아라한·제천(諸天)·제불이 항시 강림하고 나아가 하늘의 뜻이 늘 인간에게 전달되는 신성한 국가 즉 불국토임을 주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선덕여왕 즉위 후 10년간 신라는 김용춘·김서현 그리고 안함법사 등의 노력에 의해 안정을 유지했다. 그 사이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와 김서현의 아들 김유신이 성장해 새로운 실세로 등장했다. 선덕여왕 재위 10년인 641년에 김춘추는 39세, 김유신은 47세였다.

그런데 선덕여왕 재위 11년인 642년 전후로 한반도 국제 정세가 급변했다. 우선 641년에 즉위한 백제 의자왕이 642년 7월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해 낙동강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았다. 관산성 전투에서 김무력에게 살해된 성왕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8월에는 백제 의자왕과 고구려 영류왕이 합세해 신라 당항성을 공격했다. 이에 따라 신라인들의 위기의식은 크게 높아졌다. 무엇보다도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공격했다는 사실 자체가 무서운 일이었다. 고구려·백제·신라로 삼분된 당시 현실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해 공격했다는 것은 그들이 군사 동맹을 맺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신라가 군사·외교적으로 고립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구나 당시 백제는 일본과도 동맹 관계였기에 신라는 오직 당나라와만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항성을 잃게 된다면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당항성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으로 당시 신라인들이 당나라로 갈 때 이용하는 거점 항구였다. 그 당항성을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해 공격한 것은 신라인들이 당나라로 가는 핵심 항로를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다급해진 선덕여왕은 당 태종에게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대야성 몰락… 위기에 몰린 김춘추


▎국보 제31호 경주 첨성대.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당시 의자왕은 신라를 멸망시키려 작정한 듯이 행동했다. 642년 7월 낙동강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고 뒤이어 8월 한강 하류의 당항성을 공격하던 의자왕은 갑자기 대야성을 공격했다. 대야성은 현재의 합천으로 당시 낙동강 서쪽 방어를 총괄하던 군사 요충지 중의 요충지였다. 만약 대야성을 잃는다면 낙동강 방어선 자체가 뚫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신라에서는 김품석을 파견해 방어하게 했는데 그는 김춘추의 사위였다.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이 김품석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품석은 대야성주로서 제대로 처신하지 않았다. 그는 부하 검일의 부인이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빼앗아서 자신이 차지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제의 명장 윤충은 원한에 사무친 검일을 포섭했다. 642년 8월 의자왕의 명령에 따라 윤충은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대야성을 공격했다. 그때 윤충과 내통한 검일이 창고에 불을 질러 군량을 없애버렸다. 전의를 상실한 김품석은 윤충에게 부하를 보내 “만약 장군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면 성을 바쳐 항복하겠소”라고 협상했다. 그러자 윤충은 “만일 그렇게 한다면 당신과 나에게 모두 좋은 일이 될 것이요.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리다”라고 호응했다.

이 말을 믿은 김품석은 성문을 열고 병사들을 내보냈다. 하지만 윤충은 복병을 출동시켜 신라 병사들을 다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품석은 먼저 처자식을 죽인 후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 대야성까지 함락당한 신라는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수도 경주도 위험해졌다.

당시 신라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선덕여왕이 국왕으로서 나라의 위기상황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의자왕의 공격에 신라가 이토록 무기력하게 당하는 이유는 선덕여왕의 외교적·군사적 식견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선덕여왕의 외교적·군사적 식견이 부족한 것은 여성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그런 선덕여왕을 김춘추가 제대로 보좌하지 못해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비판여론이 확산됐다. 그런 비판여론은 자연스럽게 신라에도 의자왕 같은 강력한 남성 국왕이 필요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능한 선덕여왕과 김춘추를 몰아내야 한다는 여론으로 이어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야성이 함락되고 김품석과 고타 소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김춘추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슬프다! 대장부가 돼 어찌 백제를 손에 넣지 못하겠는가”라고 일갈했다 한다.

얼핏 보면 이 기록은 원한에 사무친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처럼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당시 김춘추는 원한 이상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음을 읽어낼 수 있다.

대야성 함락 후 김춘추는 선덕여왕과 마찬가지로 책임 추궁에 시달렸다. 그 추궁에서 벗어나려면 백제를 멸망시켜야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김춘추는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은퇴하든가 아니면 실제로 백제를 멸망시켜야 하는데 어느 것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642년 10월 고구려에서 결정적인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살해하고 실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동생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했는데 그가 보장왕이었다.

김춘추의 입장에서 본다면 연개소문의 등장은 분명 결정적인 기회였다. 우선 연개소문이 의자왕과 군사동맹을 맺었던 영류왕을 살해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영류왕을 살해했기에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반대로 의자왕과의 군사동맹을 파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반대의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즉 연개소문이 백제와의 군사동맹을 더욱 강화해 신라를 멸망시킴으로써 배후의 불안을 없애려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이든 절박한 김춘추는 연개소문을 만나 담판을 벌여야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실권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춘추가 곧장 선덕여왕에게 가서 “제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 백제에 복수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니 여왕이 허락했다고 한다. 김춘추는 고구려로 떠나기 전 당시 신라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유신을 만나 “나와 공은 일심동체로 나라의 초석인데 이번에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이 어찌 무심할 수 있겠소?”라고 했다.

외교적·정치적 책략 부족했던 연개소문의 ‘선택’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김유신의 영정.
그러자 김유신은 “공께서 만약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백제 두 왕의 궁궐을 짓밟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김춘추가 감격해 곧장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마시고 맹서하기를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요, 만약 그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요”라며 작별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춘추가 고구려에 다다르자 보장왕이 연개소문을 보내 머물 곳을 정해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담판장에는 연개소문 대신 보장왕이 들어왔지만 담판에 임하는 보장왕의 입장은 실권자 연개소문의 입장에 지나지 않았다. 보장왕은 김춘추에게 “죽령 이북은 본래 우리나라 땅이니 만일 이를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는 당시 신라에 대한 연개소문의 입장을 단적으로 드러낸 발언이었다.

죽령 이북의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기도는 본래 고구려 영토였는데 신라 진흥왕이 점령했다. 연개소문은 김춘추가 온 기회를 이용해 신라에 빼앗겼던 고토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김춘추는 “나라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니, 신은 감히 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거부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억류했다가 김유신의 공격이 추진되자 그대로 석방하고 말았다.

김춘추와 연개소문의 담판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만약 당시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삼국시대 역사는 전혀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다. 연개소문에게 외교적·정치적 책략이 풍부했다면 우선 김춘추와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 다음 신라를 멸망시켰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삼국통일의 대업은 연개소문이 차지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에게는 그런 책략이 없었다.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의 고토에 연연하다가 손안에 들어온 김춘추를 놓쳤던 것이다. 연개소문에게 거절당한 김춘추는 다른 곳에서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안은 결국 당 태종일 수밖에 없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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