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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20)] 조·일 교류의 선봉장 아메노모리 호슈의 지모(智謨) 

“차이를 알아가는 일이 상호 이해의 출발점”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외교관… 조선과 돈독한 우정 쌓아
“입신출세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이 되는 길이 학문” 강조


▎‘2016 조선 통신사 축제’에서 조선 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가 부산 광복로 일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한·일 관계는 독도와 역사 문제 등으로 냉각되고 있다. 영토와 과거사 문제 때문에 무역 전쟁과 국제 신질서가 태동하는 중차대한 시절을 양국은 허송세월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한·일 외교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라고 있음에도 악화일로로 치닫는 까닭은 무엇인가? 편협한 역사관과 양국 정치 세력의 유치한 권력욕에서 비롯된 성급한 책동 때문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는 300여 년 전, 에도시대에 소중화를 자처하던 ‘유교의 나라’ 조선의 문화를 숭상하며 조·일 교류에 성심성의를 다한 인물이다. 그는 철저하게 배우고 준비했으며 때를 기다렸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에도시대 중기의 유학자다. 원래 한자 이름은 아메노모리 히가시(雨森東)다. 조선 통신사들의 기억에 의존한 조선의 문헌에서는 한자음을 그대로 읽은 우삼동이라 칭했다.

그는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했다. 규슈(九州)와 조선반도의 중간에 있는 섬인 약소국 쓰시마번(對馬)의 명운을 쥔 줄타기 외교에서 경계를 넘나든 외교관이었다. 당시 일본은 쇄국의 시대였지만 조선과는 ‘통신의 나라’로서 ‘선린우호’의 교류가 있었고, 에도막부 시대에 쓰시마번은 일본과 조선을 잇는 외교 창구였다.

유학자인 호슈는 약 40년간 제후들을 대상으로 강의했고, 외교·무역 등에 관해서도 다양한 역할을 했다. 또 조선과 서로 우정을 맺는 통호(通好) 실무에 종사하기도 했다. 아라이하쿠세키(新井白石), 무로큐소(室鳩巢)와 함께 기노시타 준안(木下順庵) 문하의 삼걸(三傑), 십철(十哲)의 한 명으로 꼽혔다.

호슈는 1668년, 지금의 사가현(滋賀縣)인 오미국 이카군에서 개업의(開業醫)의 아들로 태어났다. 1679년 12세 때부터 교토에서 의학을 배웠고, 1685년께 에도로 나가서 성리학자 기노시타 준안의 문하에 들어갔다. 당시에 의학을 배우는 사람은 한문을 매개로 유학도 함께 익혔다. 1689년 기노시타 준안의 추천으로 조선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재력을 쌓았으며, 우수 인재를 찾던 쓰시마번에 출사했다.

1592년부터 7년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 침략은 조선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쌀농사 등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자연 환경 때문에 쓰시마번 입장에서는 조선과의 교역이 필수였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자 사절을 보내던 쓰시마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수호(修好)의 임무를 부여받게 됐다.

이렇게 1609년 기유약조(己酉約條)가 체결돼 교역이 재개된 이후로는 조선의 쇄국정책이 채택된 뒤에도 조선과의 외교는 계속됐다. 그리고 그 실무는 쓰시마 도주가 맡았다. 외교문서는 모두 한문으로 기록됐고, 조선은 유교의 나라이므로 번에는 뛰어난 유학자가 필요했다.

호슈는 출사(出仕) 이후 4년간은 에도의 번저(藩邸)에 살며 유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깨달은 바가 있어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24세에 번에 청원을 내고 중국어 습득의 선진 지역인 국제항 나가사키로 가서 중국어를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1693년 26세에 쓰시마에 들어간 호슈는 젊은 영주 소우 요시쓰구(宗義倫)를 교육하는 학자인 지코우(侍講)로서 조선과의 외교 문서에 관련된 신몬야쿠(眞文役)를 맡았다. 그리고 29세에 쓰시마번의 명문가 딸과 결혼한 호슈는 쓰시마를 축으로 나가사키·에도·부산을 오가며 외교관으로서 바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목숨을 5년 줄인다는 각오로 일했다”


▎일본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자 협상가인 아메노모리 호슈.
호슈는 1699년 조선 외교 담당 보좌역(朝鮮方佐役)에 임명돼 조선 외교 관련 실무의 중책을 맡았다. 외교나 무역 실무 경험이 없었던 그는 특유의 향학열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다. 쓰시마와 조선에는 양국 외교사절들이 있었다. 조선에서 온 사절은 ‘역관사(譯官使)’로, 일본에서 온 사절은 ‘참판사(參判使)’로 부르며 번주가 바뀌면 상호 파견했다.

초량 왜관 부지는 약 33만㎡(10만 평) 정도로 1675~1678년 3년에 걸쳐 연인원 약 125만 명을 동원해 건설했다. 쓰시마주의 허가를 받은 통역, 외교관, 무역 실무자 등 500여 명의 일본 남성이 그곳에서 살았다. 쓰시마인은 주로 면사·인삼·쌀을, 조선인은 은·유황·서양 물품을 구입했다.

호슈는 사절의 일원으로 처음 조선 땅을 밟고 이곳에 들어와 대접을 받았다. 스스로 직분을 다하기 위해 조선어의 완전한 습득에 심혈을 기울였다. 훗날 그는 “목숨을 5년 줄인다는 각오로 밤낮으로 빈틈없이 일했다”고 회고했다.

당시의 대(對)조선 외교는 필담외교(筆談外交)라 불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호슈는 “말을 모르고서 어찌 선린이랴”라며 부산에서 3년에 걸친 유학을 통해 조선어를 습득한다. 또한 언어뿐 아니라 조선 사회의 실정·관습·지리·역사·인정·풍속도 열심히 익혔다. 호슈의 향학열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교린수지(交隣須知)]라는 조선어의 실용적 학습서까지 저술했다. 이 책은 메이지 초창기까지 널리 활용됐다고 한다. 호슈는 중국어·조선어·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국제통 유학자였다.

조선 통신사는 1607년부터 초기 세 차례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로 불리며 일본군이 포로로 데리고 왔던 사람들에 대한 조사와 조선인의 귀환이라는 전쟁 사후 처리가 주된 임무였다. 나중에 통신사는 단순한 외교 사절이 아닌 문화 사절로 그 역할이 확장됐다.

호슈는 조선 통신사의 일본 방문 때 쓰시마의 수행 관료 임무를 맡았다. 1711년 제8차, 1718년의 제9차 통신사와 동행하는 등 활약이 적지 않았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 외교 지침서인 [교린제성(交隣提醒)]을 저술하고, 국제 관계에서 문화의 상호 이해를 설파하는 등 일본과 조선의 선린외교에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호슈는 1711년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徳川家宣)의 취임을 축하하는 통신사 자격으로 조선을 찾아오게 됐다. 이에노부는 원래 고후(甲府) 영주였지만 5대 쇼군 쓰나요시(綱吉)의 양자로 들어와 6대 쇼군이 됐다.

번주의 시강학자(侍講学者)였던 호슈의 기노시타 학숙(學塾)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쇼군의 측근이었다. 하쿠세키는 과다한 경비가 소요되는 조선 통신사 응대 등의 방식 변경을 결정했다.

난제를 풀어주는 ‘해결사’


▎조선 통신사 일행을 축제 분위기 속에서 환영하는 에도 시민. 1748년 작품으로 일본 고베 시립박물관 소장.
그러나 외교에서 상대국의 입장과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호슈 입장에서는 경비 절감 등에는 동의할 수 있다 해도 쇼군을 ‘일본 국왕’이라고 문서에 변경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었다. 교토에 엄연히 천황이 있기 때문이었다.

호슈는 이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막부에 보냈다. 막부의 결정에 공공연히 이의를 제기하면 엄한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깊이 몸부림치며 쌓아온 학문과 사상 때문인지 그는 사사로이 몸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역시 주자학을 익힌 선비다웠다.

또 국서 중에 조선 국왕의 ‘휘(諱)’에 대해 조선 측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점이 발견되면서 큰 문제로 비화됐다. 문장에서 임금이나 높은 이의 이름자가 나타날 경우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체하는 것을 피휘(避諱)라 한다.

호슈는 양국의 대등한 관계를 중요시한 만큼 우호 관계를 해치지 않도록 조정에 힘썼다. 그리고 고쳐 쓰기로 했다. 시간이 지난 뒤 호슈의 풍부한 학문적 업적과 인간성은 만인에게 인정받게 됐다. 하지만 조선으로 갔던 통신사 사절의 일만은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쓰시마번은 주로 은을 조선에 수출하고 인삼·생사(生絲)·견직물을 수입해 수익을 냈다. 은의 대량 유출을 우려하는 중앙 정부의 하쿠세키는 쓰시마번에 대해 수출 제한을 가하는 한편 조선 측에도 그 같은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은 수출이 제한되면 영지가 좁은 쓰시마 번정(藩政)의 살림은 어려워진다. 이런 난제를 풀어가는 데 호슈의 역량은 필수였다.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하쿠세키처럼 중앙정부에서 일하고 싶다는 호슈의 욕구가 커졌다. 그러나 7대 쇼군 이에쓰구(徳川家繼)가 옥좌에 오른 지 3년 만에 서거하자 하쿠세키 역시 실각했고, 호슈의 중앙 진출 희망은 완전히 소멸됐다.

호슈가 다음으로 통신사 사절을 맞이한 것은 1719년 8대 요시무네의 장군직 취임을 축하하는 행사 때였다. 이때 호슈는 일본 기행문 [해유록(海遊錄)]을 남긴 제술관 신유한(申維翰, 1681~1752)과 교류했다.

475명에 이르는 통신사 일행은 부산에서 출발해서 쓰시마·이키지마(壱岐島)·아이노시마(藍島)를 거쳐 간몬해협(關門海峽)을 빠져나가 세토우치(瀬戸内)로 들어갔다. 그런데 기상이 악화되면서 쓰시마와 이키지마에 오래 머물게 됐다. 일행은 우마도(牛窓)·무로쓰(室津)등의 경승지를 경유해 오사카에서 교토까지는 강을 다니는 배로 갈아탔다.

통신사 일행은 오쓰(大津)에서 오가키(大垣)를 거쳐 도카이도(東海道)로 가는 길은 육로를 이용했다. 4월에 조선을 떠난 일행이 에도에 도착한 것은 9월 26일이었다. 힘든 여행이었다. 화려한 의상에 피리, 북 등의 음악 소리와 함께 구경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행은 에도성에 들어갔다.

양측은 큰 탈 없이 국서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조선 통신사 일행이 돌아오는 길에 교토에서 성가신 일이 생겼다. 교토에서 숙박 장소로 막부가 정한 곳은 조선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히데요시의 명으로 건립된 호코지(方廣寺)였다. 더구나 그 절 앞에는 조선 침략 전쟁에서 조선인의 수급(首級) 대신 귀와 코를 베어 묻은 ‘이총(耳塚)’이 있다. 조선 측에서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호슈는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겨우 이 사태를 넘겼다. 그러나 그는 이 같은 설득을 괴롭고 부끄러운 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호슈가 61세 때 지은 [교린제성(交隣提醒)]에서는 “이런 짓을 하면 우리나라 학문의 부재와 무지를 드러낼 뿐”이라고 지적했다.

절친 현덕윤과의 심교(心交)


▎조선 통신사 일행을 이끈 삼사(정사·부사·종사관)가 묵었던 히로시마현 도모노우라의 후쿠젠지(福禪寺).
1721년 조선 외교 담당 보좌역에서 사퇴한 뒤로도 호슈는 소바요닌(側用人, 잡무처리직), 사이반(裁判, 외교관)은 오랫동안 맡아서 했다. 조선과의 교제가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쓰시마번에 머물며 여러 가지 역할을 자임한 것이다.

호슈는 [한학생원임용장(韓學生員任用帳)]이라는 통역 양성책을 번에 제출했다. 수십 년 앞을 내다보고 번 내에서 인재를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파했다. 조선어뿐만 아니라 번의 쓰임에 도움이 되도록 학문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1727년 조선어 학교 한어사(韓語司)가 창설됐다. 호슈는 “양국이 진지하게 외교를 할 때 통역만큼 중요한 역할은 없다”며 “그러나 말만 중요한 게 아니라 통신사의 왕래와 조선 실상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61세에 [교린제성]을 썼다. 이 책에서는 조선과의 교제에서 주의해야 할 점을 54개의 항목으로 정리했다. 호슈는 성신 외교에 대해서 “성신은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고 진실을 가지고 사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듬해 호슈는 조선의 쌀과 쓰시마의 목면을 교환해 주던 공작미(公作米)의 기한 연장 협상권을 위임받고 2년 정도 조선에 체류했다. 이것이 마지막 부산 출장이었다. 협상 상대는 현덕윤(玄德潤, 1676∼1737)이었으며, 둘은 서로를 인정하고 존경했다. 한마디로 둘은 심우(心友)이자 심교(心交)였다.

현덕윤은 조선 후기 부산포에서 출발하는 통신사 일행의 역관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1711년 제8차 조선 통신사를 수행해 도일(渡日)했고, 1718년(숙종44)에는 품계가 올라 문위역관사(問慰譯官使)로 쓰시마를 다녀왔다. 이듬해 제9차 통신사 때는 쓰시마에 들어가 사전 실무를 협의했다.

1725년(영조 원년) 여름, 재차 동래에 부임한 현덕윤은 빈일헌(賓日軒), 유원관(柔遠館) 등 역관들의 숙소가 여전히 낡고 허술한 것을 보고 대대적인 개축과 보수를 건의했다. 조정에 건의안이 받아들여지자 그는 사재까지 털어 건물 16칸을 수리하고 68칸을 신축했다.

빈일(賓日)은 ‘일본을 접대한다’는 뜻이고 유원(柔遠)은 ‘원방(遠邦)을 회유(懷柔)한다’는 뜻이다. 조선의 대일 외교의 근간이 성신과 회유였다. 현덕윤은 건물은 개축한 뒤 외교에서 근간은 성신이라는 뜻의 성신당(誠信堂)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에 깊은 감명을 받은 호슈는 [성신당기](誠信堂記)를 저술했다.

현덕윤은 공직에 오른 사람은 이것을 “신중해야 하고 스스로를 경계하고 후진에게 성신을 권유하며 한결같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덕윤은 쓰시마와의 쌀 협상에서 쉽게 많은 양보를 했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으면서도 협상 타결을 이루는 집념을 보였다.

호슈는 조선의 역관사 일행 65명이 전원 연루된 대형 밀수 사건의 처리를 두고 번의 중진과 대립한 적이 있다. 이는 교린 나라 사이의 중요한 문제이므로 조선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호슈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대신 이 사건에 연루됐다 사면돼 조선으로 돌아온 역관사 일행은 쓰시마번에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사면의 대가로 그들이 제공한 정보는 조선 팔도의 동식물 정보였고, 당시에는 국외 유출 금지품목인 인삼의 생초(生草)가 일본으로 넘어간다.

호슈는 조선과의 외교에서 에도의 쇼군을 왕으로 칭하는 문제 즉, 왕호 논쟁에서는 쇼군을 무력에 의해 통치하는 일개 제후로 치부했다. 천황은 중화의 황제와 동격이며 왕은 그 아래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는 하쿠세키의 주장에 대해 호슈는 “분수에 맞지 않는 궤변”이라고 반박한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통신사 일행에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신사가 있는 닛코(日光)와 대불(大佛)을 보여줘 웅장함과 화려함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통신사 일행이 감탄한 것은 사절이 지나는 도로변의 가로수였다. 고목임에도 불구하고 가로수에서 나뭇가지와 잎사귀가 손상된 곳이 없음을 보고 법령의 엄숙함 때문이라고 감탄한 것이다. 호슈는 양국 가치의 기준이 다름을 이야기하며, 조선을 깊이 있는 문명국이라고 칭송한다.

만년에는 와카 지으며 생애 마무리


▎조선 전기 정치가인 신숙주의 영정.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다니는 고관의 가마꾼을 일본에서는 멋스럽게 여기지만, 조선은 무례하다고 생각한다. 하인이나 짐꾼이 가짜 수염을 달고 다니는 것을 조선은 이상한 짓이라고 여긴다. 조선인이 상중에 소리 내서 우는 것을 일본인이 보면 비웃는다고 했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호슈는 주장했다. 그는 “차이를 알아가는 일이야말로 이해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직을 사임한 후에도 호슈의 집필 작업은 이어졌다. 66세에 중국·조선·일본의 학술과 역사·풍속·언어에 대해서 상·중·하 세 권의 수필집 [다와레구사(たはれ草)]를 썼다. 또 68세에는 [치요칸켄(治要管見)]을 써서 쓰시마 영주에게 바쳤다. 나라를 다스리는 번주로서 유의해야 할 점을 군덕(君德)·무비(武備)·재물의 이용·사치·검약·상벌·호령·교린·인재양성 등 다방면에 걸쳐 말했다. 저술 동기에 대해서 호슈는 “이 쓰시마 땅에 뼈를 묻기로 결심했고, 선대부터 후은(厚恩)을 받아 왔으므로 후일의 교훈이 될까 싶어 말씀드렸다”고 썼다.

80세가 넘도록 정정했던 호슈는 한문으로 수필집 [깃소사와(橘窓茶話)]를 저술했다. 호슈는 “단지 지식을 늘려 입신출세나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학문”이라고 힘줘 말했다.

1748년 장남을 잃은 호슈는 손자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주고 공식 은퇴했다. 호슈는 평생 학습의 선구자였다. 이때부터 1만 수의 와카(和歌)를 짓는 일에 뜻을 두고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을 1000번 읽기를 2년 만에 마치고 2만여 수의 와카 초고를 완성했다. 배움에 대한 향상심, 향학의 집념은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1755년 은거소에서 88세로 생애를 조용히 마쳤다.

2017년 10월 한국과 일본의 공동 제안으로 신청된 [조선통신사에 대한 기억: 17~19세기 한일 간의 평화 구축과 문화 교류의 역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등록 건수는 111건 333점(한국 63건 124점, 일본 48건 209점) 있고, 그중 36점이 호슈의 저작이다.

조선 조정에서 왜 성신을 국정 수행의 최우선 기조로 삼았을까. 두 차례에 걸친 주변국과의 전쟁 참화 속에서 얻은 결론은 한 나라가 살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 싸우지 않고 생존을 영위하는 성신의 외교술이 아니었을까.

호슈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국적을 초월한 성신의 우정을 맺었던 현덕윤의 묘갈명(묘비에 새겨진 죽은 사람의 행적과 인적 사항)은 정내교(鄭來敎)라는 문인이 썼다. 정내교 역시 1705년(숙종 31) 역관으로 제7차 통신사의 일원이었다. 그는 “왜인은 조급하고 사나우며 변덕스러워 움직이면 반드시 사단이 난다”면서도 “이러한 일본인을 엄숙한 태도로 대하니 감히 방자하게 굴지 않았다”라고 현덕윤을 칭송했다.

또 ‘큰일을 맡길 만했으나(可大受也) / 끝내 작은 일에만 쓰이니(而卒以小用) / 시세 탓인가 운명이었나(時耶命耶)’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외교 채널은 가동되고 있을까


▎조선시대 일본인의 입국 및 교역을 돕고자 설치했던 왜관의 모습. 1783년 변박의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중국·일본 세 나라의 한자 음에 통달하고 백가서를 알고 있으니 한문 해석의 옳고 그름과 시문 저작의 어렵고 쉬움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호슈를 칭찬한 신유한은 통신사 일정을 마치고 석별의 정을 나눈 시문을 통해 호슈를 재평가한다.

“위인이 음험하고 겉으로는 말을 꾸미고 안으로는 칼을 품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나라의 요직에 앉아 권세를 잡는다면 반드시 이웃 나라에까지 일을 낼 작자”라고 평하고 있다. 신유한 역시 회재불우(懷才不遇)의 관료여서 자신을 철저히 숨겼는지 모르나 일이 무르익을 때까지 일희일비하지 않는 타고난 외교관이었다.

한·일 두 나라의 관계를 종종 ‘일의대수(一衣帶水, 냇물 하나를 사이에 둔 가까운 이웃)’라 표현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쉽게 좁히기 어려운 문화적 이질성도 존재한다.

제8차 조선통신사의 제술관(製述官, 문서 담당)으로 신유한에 앞서 일본에 다녀온 동곽공(東漷公) 이현(李礥)이 호슈에 대해 쓴 시문이 그 답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우차방주(又次芳州)’
아처부상북(我處扶桑北)
군거대해남(君居大海南)
심간동상조(心肝洞相照)
여사불수담(餘事不須談)
내 거처는 일본의 북녘이고
그대는 대해의 남쪽에 있으니
가슴을 열고 서로 비춰 보면
남은 일은 말할 필요도 없다네


이웃과는 부딪히는 일이 많아 사이가 좋기 어렵다. 신숙주는 조선의 대표적인 지일파 외교관이었다. 그는 일본과의 통교 관계를 밝힌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남긴다. 신숙주는 사대(事大, 중국과의 외교)와 교린(交隣, 일본과의 외교)에 많은 저술을 남긴다. 그런 그가 임종을 앞두고 남긴 말은 “원컨대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도록”이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은 과거의 아픈 상처가 있지만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현대의 보편타당한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다. 상호 무지와 악의를 뛰어넘어 서로의 흉중을 털어놓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보면 어떨까?

18세기 격랑의 해협을 사이에 두고 왕래하며 성신의 우정을 쌓았던 아메노모리 호슈와 현덕윤 같은 이 시대의 외교 채널은 과연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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