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선비 정신의 미학(41)] 울릉도를 관리한 첫 수토사 운암(雲巖) 장한상 

325년 전 독도를 관측하고 기록 

150명 수토단 이끌고 울릉도 들어가 13일간 주변 탐색
백두산 조사하고 호남 대기근 때 도적떼 평정하는 애민 실천


▎장자진씨가 의성 경덕사에 모셔진 절도사 장한상의 위패를 보여주고 있다.
좁은 2차로 지방도 양쪽으로 마늘밭이 이어진다. 6월 13일 마늘은 수확이 임박했다. 이 지역을 먹여 살리는 농산물이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너른 들녘 한쪽에 3층 건물이 보인다. ‘의성조문국박물관’이다. 삼한시대 초기 이 지역에 흥성했던 조문국(召文國)을 주제로 세워진 군립 박물관이다.

박물관에서 최강국 학예연구사를 만났다. 조문국이 아닌 울릉도·독도가 주제다. 학예연구사를 따라 2층 전시실로 올라갔다. 그가 멈춘 코너에는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43호)이라는 명패 아래 고서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복제본이다. 의성군이 최근 들어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자랑하는 비장의 자료다.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다. “숙종 20년(1694) 9월 19일부터 10월 6일까지 삼척 영장이 울릉도를 돌아보고 남긴 기록으로 일본에 대한 방비책과 울릉도에 관한 기록, 특히 독도를 우리 땅으로 언급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시된 건 그게 전부였다. 학예연구사에게 ‘울릉도사적’ 원본과 기탁 받은 자료 120여 점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관련 자료가 모두 수장고에 들어 있다며 난처해했다. 박물관장의 허가를 어렵게 받아 지하 수장고로 내려갔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 자료 서랍 한 층을 당겼다. 그 안에서 묶어 놓은 나무 상자를 꺼내 조심스레 풀자 한지 속에 보존 처리돼 제목이 보일 듯 말 듯한 [절도공양세실록(節度公兩世實錄)]이 나왔다. 그 안에 ‘울릉도사적’이 있었다.

울릉도에서 육안으로 대관령과 독도를 확인


‘울릉도사적’은 제법 길다. 핵심인 독도 부분은 이렇다. 울릉도 중봉(中峰) 즉, 성인봉에서 육안으로 독도를 본 것을 기록했다. 한아문화연구소 유미림 박사의 한문 국역은 이렇다. “울릉도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대관령의 구불구불한 모습이 보이며 동쪽을 바라보니 바다 가운데 섬이 하나 있는데, 동남쪽 방향에 있으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에 못 미치고, 거리는 300여 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325년 전 독도의 존재를 육안으로 확인한 기록이다. 조선의 관리가 공문서에 남긴 독도에 관한 첫 기록이기도 하다. 당시 울릉도에 들어간 관리는 누구일까.

삼척 영장(營將)이란 자리에 있던 운암(雲巖) 장한상(張漢相, 1656∼1724)이다. 이름이 익숙지는 않다. 그는 의성에서 태어났다. 운암은 1694년 8월 울릉도 수토사(搜討使)로 임명된다. ‘수토(搜討)’는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울릉도 관리 정책은 시대별로 달랐다. 처음에는 쇄환, 후기에는 수토 정책을 쓴다. 태종 시기는 울릉도에 거주하는 백성을 보호하고자 육지로 데려왔다. 쇄환정책이다.

숙종 시기가 되면 울릉도 정책이 확 바뀐다. 1693년 안용복 사건이 발단이다. 조선은 울릉도 영유권을 공고히 하고자 일본인의 울릉도 어로를 금지시키는 수토 정책을 실시한다. 장한상은 바로 이 정책을 집행한 첫 관리였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 하나. 장한상은 어떻게 독도를 볼 수 있었을까.

울릉도와 독도의 거리는 87.4㎞. 독도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곳으로 안개가 많이 낀다.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은 연간 60∼90일. 그나마 9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안개가 덜하다. 하지만 이때는 바닷길이 험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장한상은 당시 일본 측과 생겨난 울릉도 쟁계(爭界)로 급작스레 9월 울릉도로 들어간 것이다. 그가 독도를 관측한 배경이다.

장한상은 울릉도 수토사로 임명된 뒤 항해에 필요한 큰 배를 만드는 사이 8월 16일 군관 최세철을 먼저 보내 답사시킨다. 그 내용은 2001년 발견된 박세당의 [울릉도]에 기록돼 있다. “8월이 이미 반이 지났고 바람이 거세 우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배를 건조하는 사이 해로(海路)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정탐하겠다는 내용으로 일찍이 여쭌 적이 있습니다. 이곳의 가볍고 빠른 작은 어선 두 척을 골라 사격(沙格, 사공과 도와주는 격군)과 식량을 지급하고 토착 군관 중 1인을 임명해 바다를 건너게 했습니다.”

장한상은 사전답사 뒤 직접 수토단을 지휘한다. 그리고 최세철의 보고와 본인이 직접 관찰하고 조사한 울릉도 현황을 비변사에 보고한다. 기록을 보자. ‘울릉도사적’은 울릉도에 관한 생생한 현장보고서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갑술년(1694) 9월 모일, 강원도 삼척 영장 장한상은 치보(馳報)합니다. 울릉도를 수토하는 일로 9월 19일 사시(巳時) 삼척부 남면 장오리 나루 대풍소(待風所)에서 배를 출발한 연유를 이미 보고한 바 있습니다.”

당시 장한상의 지휘를 받으며 함께 울릉도로 떠난 대원은 역관 안신휘 등 자그마치 150명이다. 기선 1척과 화물선 1척, 급수선 4척이 동원됐다. 이들 배는 서풍을 타고 나아가다 바다 한복판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뿔뿔이 흩어진다. 낭패를 당하지만 용케 모두 울릉도에 도착한다. 이들이 울릉도에 머문 기간은 9월 20일부터 10월 3일까지 13일간. 체류하는 동안 비가 자주 오고 맑은 날은 별로 없었다.

대원들은 배를 타고 섬을 돌았다. 동쪽으로 5리쯤에 작은 섬 하나(죽도)를 목격한다. 섬 내부에서는 서쪽 골짜기에 사람 살던 터가 세 곳, 북쪽 두 곳, 동남쪽에 터 일곱 곳과 돌무덤 19개를 확인한다. 멀리서 사람 말소리가 들리는 동굴도 탐색한다. 군관 박충정과 포수 20여 명을 먼저 석굴로 들여보낸다.

장한상은 보고서 끝에 자신이 판단한 요충지도 제시한다. “산골짜기에 동구(洞口)가 있습니다. 만일 왜구를 막을 방책이 염려된다면, 이곳은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수 있는 곳입니다.”

‘울릉도사적’은 장한상의 울릉도 수토 활동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일찍이 일본을 경험했다. 1682년(숙종 8) 장한상은 통신사(通信使)의 좌막(佐幕)으로 일본에 간 적이 있다. 수토사가 되기 12년 전이다. 장한상의 묘갈명(墓碣銘)에는 “일본에 가서 맹기(猛氣)와 영풍(英風)이 왜인을 놀라게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동북아역사재단 이원택 연구위원은 “1978년 발견된 ‘울릉도사적’은 울릉도·독도 연구를 한 단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조선의 울릉도·독도 통치를 입증하는 사료”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 영유권 주장의 핵심인 조선이 공도(空島) 정책을 취하면서 80여 년간 버려둔 울릉도와 독도를 자신들이 관리했다는 허구를 밝히는 자료인 것이다.

장한상의 수토 활동이 보고되자 강경파 영수(領首) 남구만은 임금에게 아뢴다. “백성이 울릉도에 들어가 살게 할 수도 없고, 한두 해 간격을 두고 수토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임금도 받아들였다.

150명 수토단 울릉도에서 일본인 샅샅이 탐색


▎드론으로 촬영한 경덕사의 전경. 왼쪽 건물이 위패와 영정이 있는 사당이다.
장한상은 이렇게 3년에 한 번 수토하는 제도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조문국박물관 지하수장고에는 ‘울릉도사적’ 이외에 장한상이 받은 교지와 유서(諭書, 임금이 내린 명령서) 등이 더 있었다.


▎장한상의 영정. 한양에 나타난 호랑이를 제압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이들 자료는 본래 의성군 구천면 장한상의 위패를 모신 경덕사(景德祠)에 보관돼 왔다. 사당 경덕사 주변은 순천 장씨가 세거한 지역이다. 조문국박물관을 나와 29km 떨어진 서북 방향 안계면 소재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장한상의 방계 후손인 장자진(82) 옹을 만났다. 수 년째 수토사의 독도 관측 등 장한상 알리기에 매달려온 사람이다.

운암 장한상은 1656년 절도사와 양주목사를 지낸 장시규(張是奎)의 둘째 아들로 의성군 구천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 세상이 놀랄 만큼 힘이 셌다고 한다. 21세에 무과에 급제한 운암은 선전관을 시작으로 내외 무관직을 두루 거쳤다. 키가 8척(1m80cm)으로 장대한 기골에 무예는 출중했다. 묘갈명에는 “1686년 숙종대왕이 친히 서총대에서 무예를 시험할 때 공은 훈련정 겸 내승으로 신수가 효웅하고 말달리고 활 쏘는 솜씨가 날아가는 듯해 임금이 넓적다리를 치며 칭찬하고 내금위장을 제수했다”고 적혀 있다. 또 희천군수와 자산군수, 태안군수 등 지방 수령에도 임명된다. 운암은 1692년 36세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오른다. 종 2품으로 경상좌도의 국방을 책임지는 자리다. 요즘으로 치면 몇 개 사단을 거느리는 군단장쯤 될 것이다.

하지만 당쟁이 극심해지면서 반대파의 공격에 시달린다. 1694년(숙종 20) 운암은 장희재(장희빈의 오빠) 사건에 연루돼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서 파직된다. 사헌부지평 이정익의 논계를 통해 간신에게 빌붙고 탐오의 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이다. 그러나 파직 뒤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임금의 특명으로 다시 삼척 첨사(僉使)와 영장(營將)이 된다. 울릉도 수토사가 된 과정이다.

호랑이가 기세에 눌려 꼬리를 내렸다는 장수


▎유서(諭書). 숙종 임금이 전라도병마사 장한상 앞으로 내린 명령서다. / 사진:의성조문국박물관
장자진 옹의 안내로 구천면 용사2길 44 경덕사를 찾았다. 안계면 소재지에서 위천을 건너 남쪽으로 5km쯤 떨어진 언덕이다. 한적한 시골. 과수원 뒤 콘크리트 담장을 두고 사당 건물이 보였다. 출입문을 열었다. 기가 막혔다. 사당 앞뜰에 온통 풀이 우거졌다. 잡초는 무릎을 덮고도 남을 만큼 무성했다. 진입이 어려웠다. 장 옹이 풀을 헤치며 앞장을 섰다. “그동안은 내가 해마다 풀을 베고 관리했는데…. 힘이 부쳐 젊은 층에 맡겼더니…. 쯧쯧.”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 끝에 파란 관복을 한 영정이 눈길을 끌었다. 사모관대에 홀을 든 운암의 모습이다. 그 뒤로 두 눈을 번득이는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영정에 호랑이가 함께 그려진 것은 아마도 유일할 겁니다. 운암은 호랑이를 제압할 만큼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장 옹이 전한 이야기는 이렇다.

운암이 힘이 넘치던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다. 한양에 대호(大虎)가 나타났다. 그것도 대호 한 마리가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대낮에 궐 안을 휩쓸고 다녔다. 백성들은 온통 겁에 질렸지만 누구도 막을 장사가 없었다. 조정은 장병사(兵使, 병마절도사의 별칭)를 급히 불러 내렸다. 장 병사가 도착하자 대호는 기세에 눌린 듯 그 앞에 그만 엎드렸다. 장 병사가 호랑이를 타고 궐 안을 한 바퀴 돌자 새끼들이 뒤를 따랐다. 장 병사가 궐 밖으로 나가면서 대호 소동은 끝이 났다는 것이다.

경덕사에는 두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가운데는 운암의 아버지로 역시 절도사를 지낸 장시규의 위패가 놓여 있다. 영정을 마주한 오른쪽 끝에는 ‘가선대부행절도사장공(嘉善大夫行節度使張公)’이라 쓴 운암의 위패가 있었다. 문중이 조문국박물관에 기탁한 [절도공양세실록]의 양세(兩世)도 바로 대를 이어 절도사를 지낸 이들 부자(父子)에 관한 기록이다.

장 옹은 “경덕사에 갑옷 등이 보관돼 있었는데 30년 전쯤 도난당했다”고 아쉬워했다. 천정 등 사당 곳곳은 흙이 떨어져나가는 등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장 옹은 “문화재 지정 신청도 검토했지만 사당 뒤쪽으로 콘크리트 옹벽이 둘러쳐져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경덕사 아래에 민가 한 채가 보였다. 인기척이 없다. 운암의 주손이 살다가 서울로 떠난 집이라고 한다.

1708년(숙종 11) 운암은 함경북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한다. 연보에는 1712년 장한상 등이 백두산 남쪽 지세를 치계(治界)하고 도본을 그려 보고했다고 정리돼 있다. ‘백두산 정계비’ 관련으로 보인다. 그가 영토의 동쪽 끝 울릉도 수토사로 활약한 뒤 18년이 지나 이번에는 다시 영토의 북쪽 끝 백두산을 관리하는 중책을 수행한 것이다.

대기근 도적떼를 평정하고 구휼미를 요청하다


▎‘울릉도사적’이 실린 [절도공양세실록]. / 사진:의성조문국박물관
운암은 애민(愛民)정신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묘갈명에는 “계사년(1713) 호남이 대기근으로 도적떼가 봉기하니 공이 아뢰기를 ‘전에 본도(本道)에 임관했을 때 민심을 얻은 바 있다’ 하니 다시 병마사로 임명됐다. 그가 도적을 평정하고 민심을 수습한 뒤 재민(災民)을 구제하니 향인들이 살아 있는 사람의 사당을 짓고 동비(銅碑)를 세워 송덕했다”고 적혀 있다. 1716년 경기수군절도사로 있을 때는 기근에 시달리는 섬 주민을 위해 구휼미를 요청하는 장계를 올린 기록도 있다. 인(仁)의 실천이다.

직후에는 영변부사를 맡는다. 1723년에는 경상좌도·함경북도에 이어 황해도병마절도사에까지 오른다. 임명 한 달 뒤 그는 삼사(三司)의 공격을 받아 낙마한다. 그리고 이듬해 68세를 일기로 한성부에 위치한 사위 이삼(李森, 병조판서)의 집에서 세상을 떠난다. 장 옹은 “사위 집이 운암의 유물을 상당 부분 보관 중”이라고 말했다. 운암이 세상을 떠나자 경종 임금은 매우 슬퍼했으며 시신을 고향으로 옮기도록 담군(擔軍, 상여 운반 일꾼)을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의성군 구천·비안·안계 등지 유림은 지난해까지 해마다 3월 경덕사에서 운암의 애민과 영토 수호를 기리는 향사를 올렸다고 한다. 올해는 유림 대신 후손 40여 명이 4월에 모여 조촐한 향사를 지냈다. 그동안 지역 유림을 이끌던 어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면서 뒤를 이은 젊은 층이 그런 의식을 번거로워하면서다.

지난해 3월 일본 문부과학성은 고등학교 ‘학습지도요령’을 확정·고시함으로써 일본의 모든 초·중·고 교과서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이름)는 일본 고유의 영토”임을 명시하고 가르치도록 의무화했다. 독도 영유권은 지금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박스기사]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갔는데 어찌 구속하는가?”- 안용복 항의로 ‘독도=조선 영토’라는 사실 일본도 인정

1693년(숙종 19) 3월 안용복은 울산 어부 40여 명과 함께 울릉도 근해에서 고기를 잡는다. 여기서 조선 수역을 침범한 일본 어부들과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안용복은 사람 수에 밀려 이들에게 사로잡힌 뒤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안용복은 자신을 심문하는 호키주(伯耆州) 태수에게 강력 항의한다. “울릉도가 조선에서는 하루 길이요, 일본에서는 닷새 길이니 분명 조선 땅이다.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갔는데 너희들이 어째서 나를 구속하는가?”

그의 당당한 주장에 탄복한 태수가 달랬지만 심문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그는 태수에게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이 아니라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서류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태수는 막부에 유권해석을 요청한다. 막부는 울릉도가 지리적으로 조선의 땅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므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 조선의 영토라는 서계(書契)를 내리면서 안용복을 조선으로 송환토록 지시했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은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싸고 다투는 이른바 ‘울릉도쟁계’를 시작한다. 일본이 보낸 서계에 대한 조선 측 답서의 문구 수정을 두고 교섭은 교착에 빠진다. 그런 중에 소론의 영수인 남구만 정권이 들어서면서 울릉도에 대한 강경 대책이 마련된다. 조선 조정은 울릉도를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수토사를 파견한다. 1694년 장한상이 울릉도 첫 수토사로 임명된 배경이다.

안용복은 1696년 5월 다시 울릉도에 침범한 일본 어부들을 쫓아가 호키주 태수에게 일본 어부의 침범을 항의한다.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문제가 다시 양국의 현안이 된다. 1699년 양국은 외교 문서를 교환하며 두 섬이 조선의 영토임을 재확인한다.

안용복의 도일 활동 이후 일본의 각종 문헌은 두 개의 섬이 조선 땅 임을 명기하고,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편찬한 지도는 두 개의 섬 옆에 아예 ‘조선의 영토임’이라고 표기하기까지 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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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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