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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8)] 글로벌 금융의 원조(元祖) 제노바 

“상인에 의한, 상인을 위한, 상인의 정부” 

국가 주도 베네치아와 달리 시장 기능 중시한 제노바式 자본주의 모델
스페인·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 뒷받침하는 자금 조달, 해상보험도 발명


▎도시국가 제노바의 전경 그림.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과 명반을 운송하는 범선이 눈에 띈다. / 사진:위키피디아
영국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 전 세계 영화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베니스국제영화제.’ 아름답고 다양한 가면과 복장으로 거리를 가득 메우는 ‘베네치아 카니발’ 등 바다 위의 낭만 도시 베네치아의 빛나는 명성은 현재진행형이다. 도시가 점차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비극조차 지구촌의 관심과 열정을 자극할 정도다.

반면 중세에 베네치아와 함께 지중해를 지배했던 제노바 공화국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이탈리아의 제노바와 스위스의 제네바를 혼동하거나 착각하는 경우도 많다. 제노바는 영어로 제노아(Genoa)라 불리는데 인구가 백만 명이 넘는 현대 이탈리아의 6대 도시 중 하나다. 제노바는 12세기 독립을 쟁취한 시점부터 18세기 프랑스에 병합될 때까지 700여 년 동안 지중해를 무대로 활동했으며 한때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기도 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여러 면에서 닮았다. 둘 다 이탈리아 북부의 항구에 자리 잡은 도시국가인 데다 군사력과 무역을 통해 유럽·북아프리카·서아시아를 묶는 제국을 형성했다. 또한 개척자 정신으로 먼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상업적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이는 두 도시국가를 살찌우는 밑천이었다.

그러나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일란성 쌍둥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베네치아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관리 자본주의를 대표했다면, 제노바는 민간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의 유형에 가까웠다. 이처럼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서로 경쟁하고 자극하면서 발전했고, 때로는 전쟁까지 치르면서 대립했다. 제노바의 ‘상업 자본주의’와 베네치아의 ‘국가 자본주의’ 모델은 이후 역사에서 전개될 자본주의의 다양성을 미리 알리는 전조(前兆)였다.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지리도 무척 닮았다. 이탈리아 반도는 지중해 한가운데 장화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다. 인도가 인도양의 중심에 혹처럼 튀어나와 무역과 교류를 지배했듯이 이탈리아도 지중해의 심장이 될 수밖에 없는 이점을 타고났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각각 동쪽과 서쪽을 차지하고 성장한 항구 도시다.

산으로 둘러싸인 항구도시

19세기 산업혁명 이전의 교통은 육지보다 바다에서 이동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다. 이런 이유로 베네치아와 제노바 두 항구 도시가 발달했다. 동시에 육지의 교통도 필요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도시는 반도 중간이나 남쪽보다는 가장 북부에 있었던 것이다. 북부에 자리 잡아야 유럽 대륙의 육로와 가장 쉽게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나 남부 독일과 가까이 있었고 발칸 반도와 폴란드 쪽으로도 육로로 연결될 수 있었다. 제노바 역시 스위스와 프랑스 인근에 위치해, 지중해 각지에서 가져온 상품을 그 당시(12~13세기) 유럽 대륙의 무역 중심지였던 프랑스 상파뉴에 공급하기에 가장 훌륭한 항구였다. 제노바 함선이 흑해나 서아시아에서 가져온 상품들을 제노바 항에 풀면 이탈리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이를 구매해 육로로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샹파뉴까지 이동해 판매했던 것이다.

이처럼 닮은꼴의 베네치아와 제노바였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면 차이도 상당했다. 베네치아는 해변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석호 지역에 땅을 메워 도시를 건설된 도시다. 반면 제노바는 이런 노력 없이 자연스레 항구에서 발달한 도시다. 베네치아는 육지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서 내륙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제노바는 산으로 둘러싸인 항구 도시라 천혜의 방어벽을 가진 모양새였다.

물론 이런 지리의 차이는 제노바의 단점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베네치아는 여러 강의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 바다에서 세력을 키운 다음, 강을 따라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하기가 수월했다. 하지만 제노바는 내륙으로 가려면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야 했기에 내륙 진출이 훨씬 어려웠다. 베네치아가 해양국가와 동시에 육지 국가를 발전시켰던 것과는 달리 제노바는 해양 확장에만 의존해야 하는 지리적 한계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의 관점에서 베네치아가 동유럽을 향한 전진 기지였다면, 제노바는 서유럽으로 뻗어 나가는 길목이었다. 이런 지리적 지향은 두 도시 국가의 역사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가 독일이나 비잔틴과의 관계에 민감했다면 제노바는 프랑스, 스페인 등과 직접 연결됐고 이들 역사의 파도와 함께 출렁거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아펜니노 산맥을 등에 업고 지중해 티레니아 해를 바라보는 리구리아 지역의 제노바는 동양에서 말하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도시다. 제노바를 표현하는 그림들은 하나같이 산과 바다 사이에 자리 잡은 도시와 함께 항구의 수많은 배를 그려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임을 암시한다.

제노바는 아펜니노 산맥 덕분에 육지의 혼란으로부터 어느 정도 고립돼 있었지만 바다에서 위력을 떨치는 바이킹, 노르만, 아랍 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따라서 강력한 해군을 마련해 키우는 것은 제노바의 생존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발판이었다. 11세기 이탈리아 서쪽 연안에서 이런 전략으로 성공한 사례가 바로 제노바와 피사였다.

티레니아海의 타고난 상인


▎흑해 크림반도에 제노바인들이 세운 수다크성. / 사진:위키피디아
제노바는 11~12세기 힘을 키워 아랍 세력을 티레니아 해에서 물리치면서 코르시카와 사르데냐 등을 정복했고 이어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해 무역 기지를 설립하는 데 성공했다. 아프리카와 교역의 장을 열었다는 사실은 사하라를 넘어오는 금(金)을 확보했다는 의미다. 이 금은 서아시아에 가서 필요한 상품을 구매해 유럽으로 가져올 수 있는 자금이 됐다.

1099년부터 제노바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자치도시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1162년에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베네치아가 비잔틴으로부터 독립했듯이 제노바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독립해 새로운 정치 단위로 탄생한 것이다. “제노바 시민은 타고난 상인”(civis Ianuensis, ergo mercator)이라는 속담이 보여주듯 이제 독립 제노바는 바다를 통해 활발한 무역의 시대를 여는 개척자로 발전했다.

아랍 세력을 누르고 지중해 서부에서 부상한 제노바는 십자군 원정에 함선을 제공함으로써 지중해 동부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제노바는 십자군이 서아시아에 수립한 왕국에서 특혜 무역을 누릴 수 있었고, 베네치아와 경쟁적으로 비잔틴 제국에 해군력을 제공하면서 또 다른 특혜 무역의 길을 개척했다. 물론 제노바의 부상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지중해 서부에는 제노바 말고도 해양 세력이 되려고 경쟁하는 국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부 이탈리아의 피사는 티레니아 해에서 제노바와 영향력 싸움을 벌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카탈루냐를 중심으로 하는 아라곤 왕국 역시 제노바의 패권에 도전해 왔다.

제노바는 1284년 피사를 해전에서 물리치면서 티레니아 해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지만 베네치아와의 경쟁에서는 쉽게 승부를 가를 수 없었다. 그 결과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13~14세기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네 차례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어느 한 편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고, 지중해 무역은 두 세력이 균형을 이루며 공유하는 형식으로 종결됐다. 베네치아가 서아시아와 이집트와의 교역에서 우위를 점했다면, 제노바는 흑해와 비잔틴 제국에서 우세를 유지했다.

역사학자 로페즈는 [중세의 상업혁명, 950~1350]이라는 역작을 통해 18~19세기 산업혁명 이전에 이미 일련의 혁명적 변화가 중세 유럽에서 이뤄졌고 향후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주장을 폈다. 분석에 따르면 상업혁명의 전형적 사례가 바로 제노바인데 말 그대로 “상인에 의한, 상인을 위한, 상인의 정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정치권력을 가진 세력은 두 가지 기능을 동시에 추구했다. 한편으로 폭력을 사용해 무력 통치를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도덕 또는 종교적으로 지배를 정당화했다. 무력은 지배의 가장 노골적인 수단이었지만 무력만으로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려면 너무 많은 비용을 치러야 했다. 반면 도덕이나 종교적 정통성으로 지배를 정당화하면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비용도 절감하고 통치도 수월해지는 것이다.

인류의 정치사에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경제적 부가 정치권력을 동반하는 기반일 뿐 아니라 이제는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무역을 통해 세력을 팽창하고 부를 획득하면서 번성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상업은 비천한 활동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여전히 전쟁에서 얻은 명예의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러나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귀족이 국제무역에 직접 뛰어들어 활동했을 뿐 아니라 도시국가의 정치와 정책도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집중됐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반복되는 전쟁에서 종교적 차이나 왕위 계승과 같은 정치적 명분은 전무했다. 대신 전쟁의 목적은 상업 이익을 추구하는 두 세력의 지중해 무역을 둘러싼 이권 다툼이었다.

앞선 분석에서 베네치아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원동력을 제시한 주체가 국가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제노바는 이런 점에서는 베네치아와 대립각을 이룬다. 베네치아는 국가가 함선을 제작하는 조선소를 운영했고, 주요 무역 노선의 관리도 국가가 나섰지만 제노바는 이 모든 기능을 민간에서 담당했다.

일례로 1150년부터 제노바 정부는 화폐를 주조하는 일이나 소금 사업, 은행업 등의 사업권을 민간에게 일임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심지어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도 사업가 집단에게 일정 기간 양도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에서도 세금을 거두는 사업을 민간에 맡겼던 사례가 있었다. 조세징수도급(租稅徵收都給, Tax farming)이라 불리는 세금 사업이 현대에서 생각하듯이 그리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국가 기관에서 관리했던 베네치아와 비교해 보면 제노바의 선택은 대조적이었다.

식민도시나 무역거점을 관리하는 방법도 달랐다. 베네치아는 정부가 식민도시를 직접 관리하면서 도시마다 정부에서 파견한 대표와 무장조직을 뒀다. 반면 제노바는 각각의 식민도시에 체류하는 민간 상인들이 자율적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는 형식이었다. 전자가 피라미드식 위계조직이었다면, 후자는 그물과 같은 자율적인 망(網)이었던 것이다.

제노바의 정치는 주요 상인 가문들이 정쟁을 벌여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됐다. 권력을 획득하고자 치열하게 다투는 일은 일상이었다. 폭력을 통한 정부의 전복도 제노바 정치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1257년부터 1528년 사이 제노바에는 81차례의 반란과 정권 교체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상황에서 놀라운 점은 오히려 제노바가 급격하게 몰락하지 않고 나름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상업적 이익의 추구에 국력 집중


▎제노바의 상징인 산조르지오 은행. 제노바 상업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명반 사업은 제노바의 국운을 좌우했던 핵심적인 전략 상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종국 교수는 [이탈리아 상인의 위대한 도전: 근대 자본주의와 혁신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제노바와 명반의 운명적 관계를 조망했다. 명반이란 광물은 수공업의 재료나 약재 등 다양한 용도가 있지만 특히 섬유 산업에 필수적인 요소다. 직물이나 옷감을 염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매염제이기 때문이다.

제노바의 자카리아 가문은 13세기 중반 비잔틴 제국의 황실과 혼인을 통해 소아시아 지역에서 명반 채굴권과 무역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다. 당시 소아시아는 지중해 최고 품질의 명반을 집중 생산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명반 사업권은 제노바 상인들이 섬유 산업을 좌우하는 힘을 획득하게 된 것을 의미했다. 14~15세기가 되면서 명반 생산은 에게해의 키오스 섬으로 이동했지만 여전히 제노바 상인조합이 이를 독점적으로 관리했다. 이런 상황을 빗대 베네치아인들은 키오스를 제노바의 ‘오른쪽 눈’이라고 불렀다.

지중해 동부에서 생산된 명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지역은 모직 산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대서양 지역의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였다. 13세기까지 지중해 무역에 치중하던 제노바 상인들은 1278년부터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대서양으로 진입한 뒤 영국과 네덜란드까지 가는 항로를 개발해 정기무역 노선으로 삼았다. 일명 플랜더스 함대를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육지를 통해 이뤄지던 유럽의 남북 무역이 이제 제노바 함대를 통해 바다에서도 연결된 셈이었다. 제노바에 이어 베네치아와 카탈루냐, 피렌체까지 같은 노선에 뛰어들면서 경쟁은 날로 심해졌다.

명반 무역은 기존의 사치품 중심 무역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우선 명반 자체가 무거운 광물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갤리(galley)보다 더 커다란 범선이 필요했다. 15세기 베네치아의 대형 갤리선들이 250~330t 정도의 규모일 때 제노바가 보유한 원형 범선은 1000t 이상의 짐을 실을 수 있는 거대한 규모로 발전했다.

명반(明礬, Alum) 사업의 명암


▎제노바 바다와 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등대. / 사진:위키피디아
제노바 함선이 내륙에 위치한 런던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사우샘프턴에 정박해야 했던 이유다. 무거운 명반을 싣고 북유럽에 간 거대한 함선들은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물량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북유럽에서 대량의 마른 생선이나 양모를 싣고 올 수 있게 되면서 무역 상품의 범위는 사치품에서 일상용품이나 원자재로 확산됐다. 덕분에 이탈리아 피렌체 등의 도시에서는 북유럽의 양모를 수입해 모직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명반 사업은 다시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베네치아는 무역이 국가 재정에 기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모든 지중해 상품을 일단 베네치아 항을 통과하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민간 중심의 제노바 함선들은 명반 생산지인 에게해에서 곧바로 수요지인 북유럽으로 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상인들은 독점무역의 엄청난 이윤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제노바 정부와 국가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독점무역은 자본이 집중되고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 제노바 출신 자본가들이 유럽 무대에서 급격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제노바의 자본주의는 분명 새로운 단계에 돌입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이한 형태였다. 제노바 사람들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데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모험심을 발휘함으로써 혁신의 선두주자로 달려나갔다. 산맥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향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제노바는 티레니아 해에 만족하지 않고 베네치아의 영역이었던 지중해 동부의 비잔틴이나 흑해에 비집고 들어갔으며, 몽골 제국을 통해 중국이나 인도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뻗어나갔다. 14세기 중엽 선교사 조반니 데이 마리뇰리에 따르면 중국 남부 항구도시 취안저우(泉州)에는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운영하는 3개의 교회와 목욕탕은 물론 제노바 상인들의 상관(商館)도 있었다고 한다.

지중해를 넘어 대서양으로 나아가 북유럽 항로를 개척한 것도 제노바 상인들이고 1290년 투철한 모험정신으로 무장하고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아프리카 해안을 내려간 것도 제노바인들이다. 아쉽게도 이들은 유럽으로 돌아오지 못했지만 제노바인들은 15세기 포르투갈 왕실에서 추진한 아프리카 해안 탐사에 동원됐다. 그리고 이 개척정신의 유전자는 1490년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제노바 사람인 콜럼버스에게까지 전달된 셈이다.

제노바를 상업 자본주의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상업 정신이 모든 사람에게 광범위하게 퍼진 대중 자본주의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제노바가 남긴 자료를 분석해 보면 거대한 자산가나 귀족 상인만이 무역에 참여했던 것이 아니라 요즘 표현으로 ‘개미 투자자’들 역시 모험적 무역에 돈을 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역 거래에 귀동냥을 했던 공증인들이나 잡화상, 빵집 주인이나 수공업자와 같은 시내의 다양한 일반인들도 투자에 동참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는 국가가 자본주의를 조직하면서 공공재를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제노바에서는 국가가 정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민간의 협력만이 공공재를 생산하는 중요한 장치가 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기관이 1407년에 만들어진 산조르지오 은행(Casa di San Giorgio)이다. 사실 이 단체는 제노바 정부에 자금을 빌려준 자본가 집단이다. 베네치아의 보호 성인이 산마르코이듯, 산조르지오는 제노바의 상징이다. 예를 들어 제노바 기는 산조르지오 붉은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결국 산조르지오 은행이라는 명칭은 제노바 은행이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원래 국채를 관리하고 정부와 협상을 벌이기 위해 만들어진 채권자 집단이 여러 개 있었는데 이를 15세기 들어 하나로 통합한 결과가 바로 이 은행이다. 나중에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중앙은행의 모태를 여기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금융 분야에서 제노바의 혁신적 기여는 최초의 해상보험을 발명했다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베네치아는 국가가 함대를 조직해 운영했기에 보험을 만들 동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에 비해 모든 것을 민간의 협력에 의존했던 제노바가 해적이 날뛰는 지중해 무역을 위해 해상보험을 개발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국경을 초월한 금융가 집단


▎외젠 들라크루아의 ‘콜럼버스의 귀환.’ 신대륙의 시대를 연 콜럼버스는 제노바 출신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명반 사업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듯이 제노바 상인들은 거대한 자본가가 됐지만 도시 국가 제노바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제노바 자본가들은 이제 새로운 모험과 사업에 투자하는 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사업이 제노바 인들이 독자적으로 추진하거나 제노바 정부가 중심이 되는 일이 아니더라도 상인들은 이익만 보장된다면 투자에 나서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16세기에는 세계를 향한 미래 지향적 사업의 중심이 이베리아 반도였다.

유럽인들의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이베리아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뒤에서 자금을 대고 이익을 챙겼던 세력은 그 나라의 자본가들이 아니라 바로 제노바의 자본가들이었다. 또한 제노바는 자본뿐 아니라 지중해와 유럽에서 수백 년간 축적한 제국과 무역의 노하우를 이베리아 지역에 전달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브로델은 1557년부터 1627년의 기간을 ‘제노바인들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스페인의 황금 세기(Siglo de Oro, 1559~1659)와 겹친다. 당시 스페인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진정한 세계 최초의 글로벌 제국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 시기가 동시에 제노바인들의 시대로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스페인의 배후에서 세계 자본주의를 하나로 묶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 카를로스 5세는 유럽에서 오스트리아·스페인·네덜란드 등 주요 국가를 계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1522년 팽창하던 프랑스의 위협에 직면한 제노바의 독립을 지지했고, 1528년부터 제노바 은행가들은 카를로스에게 융자를 해주기 시작했다. 마침내 제노바인들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스페인의 은행가로 첫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그때까지 스페인 왕실의 재정을 지원했던 것은 독일의 금융자본 푸거 가문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래전부터 게르만 자본과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이후 카를로스의 아들 펠리페 2세는 1557년 파산을 선언하는데 이로써 오스트리아 및 스페인 왕실에 큰 자금을 제공했던 독일 남부의 푸거 가문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대신 제노바인들이 스페인 제국의 핵심 금융가 역할을 맡게 됐다.

부국은 사라지고 부자만 남다

이런 관점에서 스페인 제국의 세계 지배는 사실상 스페인의 무력과 제노바의 자본이 결합한 결과라고 봐야 한다. 제노바 자본가들은 스페인이 아메리카로부터 들여오는 막대한 은을 유럽 전역에 공급하면서 다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스페인은 네덜란드가 독립을 위해 일으킨 80여 년의 전쟁 기간(1568~1648년) 동안 막대한 자금을 스페인에서 네덜란드 군대로 이전시켜야 했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전역에 지점을 갖고 있던 제노바 자본가들은 쉽게 자금을 이전할 능력을 가진 금융 중개업자였던 것이다. 16~17세기 스페인과 함께 세계 바다를 누비며 해양 제국을 건설했던 포르투갈 역시 제노바 자본에 의존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왕실의 재정을 담당했던 것은 제노바 로멜리니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브로델의 역사적 분석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이론을 결합시킨 아리기는 [장기 20세기: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에서 베네치아보다는 제노바가 전형적인 자본주의의 길을 걸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 방식은 자본이 상품과 화폐라는 두 형태를 번갈아가면서 취하는 과정이라고 봤고 무역이나 생산의 단계 다음에는 당연히 화폐의 단계, 즉 금융자본주의의 단계로 돌입한다는 설명이다. 아리기에 따르면 제노바야말로 세계 최초로 상업 자본주의에서 금융 자본주의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자본주의 주기를 완성한 사례다.

아리기는 제노바 이후 네덜란드나 영국, 미국 등이 각각 상업 및 산업 자본주의에서 금융 자본주의로 이행해 갔다고 분석한다. 이런 거시 역사적 이론을 통째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제노바의 경우 특정 영토에 중심을 둔 자본주의 시기와 본국과는 상관없는 초국적 금융 자본주의가 활동하는 시기가 나뉘는 것은 분명하다.

그 결과 제노바인들, 정확히 말하자면 제노바의 자본가들이 국제적으로 활약하던 시기에 도시국가 제노바는 고난과 멸망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제노바는 프랑스와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의 잦은 침략에 풍전등화의 상황에 직면하다가 18세기 말 프랑스혁명군이 제노바를 점령하면서 급기야 프랑스에 병합됐다. 부국은 사라지고 부자만 남게 된 것이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 두 풍경] 등이 있다.

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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