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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8)] 로마가 잊고 싶었던 황제 칼리굴라 

‘믿을 건 혈통뿐’ 광적인 집착에 근친상간까지 

피해망상증 도지자 공동상속자·원로원 무차별 숙청
보복정치 고집할수록 ‘내 사람’ 의존 심해지기 마련


▎로만 포럼에서 바라본 팔라티니 언덕. 황제 칼리굴라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 사진:gettyi mages bank
'역사’라는 단어는 정치인이 가장 즐기는 말 중 하나다. 특히 한국 정치인의 경우, ‘민족’과 더불어 24시간 입에 달고 지내는 단어다. ‘당장 먹고 사는 데 수십 수백 년 전 역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했다가는 한 방에 날아갈 수도 있다. 언제는 세우자고 하더니, 최근에는 무너뜨리고 파묻는 데 올인 하는 듯하다. 역사라 말하면 너무도 장구하고 엄숙하게 들리니까, 시기적으로 그렇게 멀지 않고 간단한 차원의 신조어 ‘과거사’라는 말도 등장한다. 모두가 실감하 듯, 최근 한국은 과거사 문제로 날과 밤을 새우고 있다.

서방 선진국이 볼 때, 역사라는 말을 하면 어떤 부분이 가장 먼저 떠오를까.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누구나 동의하는 공통분모가 하나 있다. 로마사다. 이탈리아 역사로서의 로마사가 아니다. 영국·프랑스·독일을 포함한 유럽 전체, 나아가 미국이 연구하는 인류 역사의 모델로서의 로마사다. 자국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로마라는 제3국의 흥망성쇠를 객관적 눈으로 살펴보면서 오늘과 내일의 방향을 모색한다. ‘모든 길’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도’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동과 서, 남과 북 모두를 연결한 글로벌 대제국이다.

유럽 지식인들이 글로벌 차원의 역사에 주목한 것은 16세기부터다. 신대륙 발견 이후 이어진 대항해시대가 계기다. 유럽 외 세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로마사에 주목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로마를 대제국 모델로 삼는다. 마침내 유럽에서 처음으로, 문명사관에 기초한 로마 역사서가 등장한다. 6권에 달하는 [로마 흥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다. 옥스퍼드 대학 출신 영국인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저자다.

내부의 적이 더 냉혹하고 잔인하다

흥미로운 것은 책이 최종 완성된 때가 1789년이란 점이다. 프랑스 시민들이 유혈혁명에 돌입하던 해, 영국 시민은 로마사 연구에 들어간다. 파리가 로베스피에르 공포정치로 숨도 못 쉴 당시 영국은 기본의 역사서를 바탕으로 한 글로벌 패권 확보에 나선다. 바이블이 아니라, 로마사의 교훈을 통한 해외 진출이다. 이후 로마사 연구는 세계 지식인의 중심 테마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로마사를 공부할 땐 황제별 연대기로 접근하는 편이 수월하다. 황제에 오른 인물을 중심에 두고 로마사 전반으로 시야를 넓혀가는 방식이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대통령을 키워드로 한 현대사 연구와 동일하다.

주목할 부분은 로마사의 종점에 관한 부분이다. 로마 멸망이 언제인지에 대한 논의가 다양하다. 당연하지만, 로마의 종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연구 내용도 달라진다. 로마사의 출발은 쌍둥이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and Remus)를 시조로 한, 기원전 753년 로마왕국에서 시작된다. 이후 기원전 509년, 로마는 독재자 왕을 쫓아낸 뒤 직접 공화정체제로 들어간다. 남성 시민 개개인에게 권력을 부여한, 그리스 폴리스와 같은 정치체제다.

기원전 27년, 로마 왕국과 로마 공화정의 중간 형태인, 제정 로마에 들어간다. 초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다. 4세기, 로마 제정은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된다. 현재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즉 현재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 대제국이다. 역사학자들은 이탈리아 로마를 서로마, 콘스탄티노플 비잔틴을 동로마라 부른다.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에 의해 멸망한다. 동로마 비잔틴은 서로마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지속한다. 이슬람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아메트(Sultan Ahmet)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것은 1453년이다.

서로마와 동로마의 멸망 시기가 달라지면서 로마 흥망사에 대한 기준도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좁은 의미의 로마사는 서로마, 넓은 의미의 로마사는 비잔틴까지로 보는 것이 대세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전혀 다른 제3의 로마 멸망기를 제시하기도 한다. 서로마와 동로마 사이 지속했던 동류의식이 사라진 때가 로마 최후의 날이란 의미다. 외부의 침략이 아닌, 내부의 분열에 의한 로마사 단절이 로마 최후의 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시기는 1204년이다. 서로마가 제 4차 십자군 전쟁이란 미명 하에 동로마를 침략한 해다. 이른바 라틴 제국(Latin Empire)이라는 이름 하의, 서로마에 의한 동로마 침략 시기다. 1261년까지 무려 57년간 지속한, 서로마에 의한 동로마 통치다. 금으로 치장된 콘스탄티노플의 부(富)를 탈취하기 위한 서로마의 욕(慾) 그 자체가 주원인이다. 성전(聖戰)을 가장해, 형제국이자 같은 크리스천 대제국을 초토화한다. 당시 동로마 역사가들은 “서로마의 침략이 이슬람 침략보다 한층 더 잔인하고 교활하다”고 기술했다.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 내부의 적이 한층 더 참혹하고도 차갑다.

황제 연대기에 의한 로마사는 주로 좁은 의미의 로마사에 적용된다. 바로 서로마의 역사다. 제정 로마의 출발점 아우구스투스 이후 476년 멸망까지, 449년간 흥망성쇠 연대기다. 이른바 로마 융성기를 대표하는 5현제(賢帝)에 관한 연구는 황제 연대기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명암(明暗)은 교차한다. 황제 연대기는 반드시 명의 역사에 그치지 않는다. 암으로서의 황제 연대기, 즉 폭군 황제에 대한 역사도 중요하다. 폭정을 통해 선정(善政)의 가치와 방향을 잡아가는 식이다.

황제는 목에 죽음을 걸고 산다


▎다큐멘터리 [로마 황제]에서 재현한 칼리굴라 암살 순간. 오른쪽은 그의 흉상. / 사진:넷플릭스, 유민호 객원기자
한국에서 폭군이라고 하면 제정 로마 5대 황제 네로(Nero)가 가장 먼저 떠오를 듯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크리스천을 탄압한 황제라는 점에서 한국인에게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폭군 황제라 말할 때, 로마사 최악의 인물은 네로가 아닌 칼리굴라(Caligula)다.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로도 자주 활용되는 폭군이다. 제정로마 3대 황제로, 41년 암살된다. 집권 3년 10개월 만에 당한 비극적 종말이다. 당시 28살이다. 칼리굴라는 사후(死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 직전까지 간 인물이다. 원로원에 의한 기억 말살형이다. 특정 인물에 관련된 기억 전부를 영원히, 소각 매장하는 형벌이다. 후임 황제인 클라우디아의 반대로 형벌은 면했지만, 남아있는 조각상이 극히 드문 인물이 칼리굴라다.

팔라티니 언덕(Palatine Hill)은 로마에 들르면 반드시 찾아가는 곳이다. 로마 한복판, 콜로세움 근처에 있다. 칼리굴라 암살극이 벌어진 비극의 땅이다. 팔라티니는 영어로 Palace, 즉 왕궁을 의미한다. 칼리굴라는 왕궁 아래 건물에서 행해진 연극을 보러 가던 중 암살됐다. 정확한 위치는, 콜로세움 광장에서 카피톨리니 언덕(Capitoline Hill)으로 이어진, 500m 길이의 로만 포럼(Roman Forum) 왼쪽 언덕이다.

황제의 집이었다고 하지만, 과거의 영화를 느낄만한 그 어떤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는 높이 10m 정도의 소나무로 뒤덮인 언덕으로 변해있다. 불과 50m 떨어진 곳인데도 관광객으로 뒤덮인 콜로세움 주변 분위기와 전혀 다르다. 개인적 느낌이지만, 차갑고도 고독한 공기만이 표류한다. 출입을 금지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로만 포럼 내 사각지대가 팔라티니 언덕이다. 입체적으로 보기 위한 최적의 장소는 카피톨리니 박물관 반대편 전망대다. 카피톨리니 박물관이 워낙 커서 놓치기 쉬운 장소다. 아예 처음부터 들러 조망하는 것이 좋다. 칼리굴라만이 아니라, 역대 로마 황제들이 살았던, 음울하고도 싸늘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로마는 검투사와 크리스천만이 아니라, 황제의 피로 얼룩진 도시이기도 하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목에 죽음을 달고 다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마사 전체를 통틀어 스스로 황제 자리를 마다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의 영광이라도 최고 권력에 집착했다. 권력욕은 로마인의 DNA 그 자체다. 로마 건국신화를 보자. 서로 세력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형 로물루스가 동생 레무스를 살해한다. 형제만이 아니라, 부모·모자·부부·자매도 서로 죽이는, ‘권력=죽음을 동반한 일상사’라는 것이 로마 건국 이래 상식이다.

필자가 칼리굴라에 주목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인간 칼리굴라에 대한 연구다. 황제로서만이 아닌,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보낸 1세기 로마인에 관한 관심이다. 절치부심 끝에 황제에 오른 인물에 관한, 심리학·정신분석학 차원의 연구라고나 할까.

둘째는 청산과 보복이라는 한국 정치와의 유사성에서 시작된다. 간단히 말해 칼리굴라를 보면 오늘은 물론 내일의 한국 정치가 눈에 들어온다. 로마사가 세계 지식인 모두의 관심거리가 된 가장 큰 이유는 ‘로마사의 보편성과 일반화’에 있다. 로마사를 통하면, 언제 어디서든지 적용 가능한 교훈이나 모델을 발견할 수 있다. 암살된 독재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보면 권력자의 야망과 비극, 나아가 권력의 성격과 특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살해 공포에 시달린 칼리굴라의 유년

칼리굴라라는 이름은 로마 군인들이 신던, 가죽으로 만든 작은 군화에서 유래한다. 1세기 초 로마를 대표하는 장군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를 아버지로 둔 칼리굴라는 전쟁터에서 태어나, 전쟁터에서 성장한다. 가죽 군화를 신고, 전선을 오가는 아버지 주변을 맴돌았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관점에서 본다면, 로마군의 아이돌 같은 것이 칼리굴라 인생의 출발점이다. 로마군과 함께 동고동락한, 친근감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원인 모를 이유로 죽으면서 180도 달라진 삶에 빠져든다. 역사가들은 게르마니쿠스의 죽음 뒤에 2대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가 있다고 본다.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인기가 올라가자 미리 제거한 것이다. 곧이어 칼리굴라 가족 모두가 비극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칼리굴라는 6명의 형제자매 중 3번째다. 형 두 명이 처형 당하고, 여동생 3명만 살아남는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어머니는 기아로 사라진다.

정작 칼리굴라를 살려준 인물은 티베리우스 황제다. 유배지를 전전하던 칼리굴라가 열아홉 살 되던 때 티베리우스의 별장, 카프리(Capri)에 불려온다. 티베리우스는 로마 정치에 환멸을 느끼던 인물이다. 아우구스투스 양자로 들어가 황제에 오르지만, 원로원의 지지도 미약한 이방인에 불과했다. 집권 후 잠시 로마에 머무는 동안, 죽음의 공포에 빠지게 된다. 언제 어디서 암살될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증이다. 티베리우스는 아예 로마를 떠나, 나폴리 근처 카프리 섬으로 거처를 옮긴다. 절벽 위에 세워진 왕궁 속에서 암살의 위협 없이 생존하는 식이다.

티베리우스가 없는 로마는 거의 무법지대로 변해간다. 로마가 자랑하던 탁월한 행정력도 사라진다. 원로원이 로마 정치를 좌지우지하지만, 부정부패가 하늘을 찌른다. 칼리굴라는 이런 상황에서 카프리 섬에 불려온 것이다. 이미 저세상에 간 가족들을 고려하면, 언제라도 티베리우스에게 살해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분, 1초의 공포가 카프리 섬에서 보낸 5년간 칼리굴라 인생의 전부였다고 볼 수 있다.

피를 먹고 자란 피해망상증


▎티베리우스는 서기 26년 근위대장에게 로마를 맡기고 나폴리 만에 위치한 카프리 섬에 은둔한다. 그의 거처로 올라가는 길은 마차도 드나들 수 없었다. / 사진:gettyi mages bank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불러낸 이유는 무엇일까. 칼리굴라보다 일곱 살 어린 손자, 게메루스(Gemellus) 때문이다. 최전선에서 암살된 아버지 덕분이겠지만, 칼리굴라에 대한 로마시민들이 지지와 사랑은 특별했다. 칼리굴라는 카이사르는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로마 제정의 성골에 해당한다.

이에 비해 티베리우스와 손자 게메루스는 성골이 아닌, 6두품 정도 방계 혈통에 불과하다. 티베리우스는 손자 게메루스와 칼리굴라 두 명을 후계자로 임명한다. 티베리우스 사후(死後) 공동 황제가 된다는 의미다. 칼리굴라의 정통성과 인기를 게메루스에 나눠주면서, 때가 되면 제거하자는 것이 티베리우스의 생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칼리굴라가 선수를 친다. 37년 3월,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칼리굴라 본인, 나아가 칼리굴라를 지지한 세력에 의한 암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칼리굴라의 나이는 24살이다.

17세 게메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칼리굴라를 진짜 황제로 받아들인다. 로마 시민의 인기를 배경으로 칼리굴라의 초기 행적은 성군(聖君) 그 자체다. 로마시민에 대한 세금도 내리고, 티베리우스식 정치보복도 금지한다. 각종 공공건물도 늘리고, 티베리우스 이래 중단된 검투사들을 통한 ‘피의 이벤트’도 벌여 인기를 끈다. 티베리우스의 공백을 한순간 메워준, 젊고 능력 있는 황제로 추앙된다.

그러나 재임 7개월째부터 상황은 급변한다.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지면서 3개월에 걸친 병상 생활에 들어간다.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칼리굴라 본인은 음식을 통한 암살 후유증이라 믿는다. 완쾌되는 순간 칼리굴라는 180도 변한다. 성군에서 로마 최악의 폭군으로 변신한다. 학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도 많다.

먼저, 공동 황제 게메루스를 암살 음모범으로 살해한다. 원로원 장로들도 사형장으로 보낸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수단과 방법 안 가리고 공공연하게 겁탈한다. 자신의 말(馬)을 원로원의 대표 격인 집정관(Consul)에 임명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원로원을 아예 정면으로 부정한 행동이다. 언제 어디서 암살될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증이 나은 ‘미친 정치’다.

후계자 문제는 칼리굴라가 보여준 피해망상증의 극치다. 주변 모두를 불신하는 과정에서, 오직 자신의 혈통만 믿게 된다. 자신의 직계만이 미래의 후계자가 될 수 있고, 돼야만 한다고 맹신한다. 결국 피의 후계자 창조를 위해 살아남은 세 명의 여동생들과의 근친상간도 벌인다. 로마 당시 성도덕이 21세기 현재와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여동생, 그것도 세 명 모두와 한꺼번에 성관계를 갖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첫째 여동생의 경우 이미 남편을 둔 유부녀이기도 하다. ‘운 좋게’ 첫째 여동생이 임신하지만, 출산과정에서 숨진다. 자신의 미래를 지켜줄 피가 사라지면서 칼리굴라의 피해망상증은 한층 더 해간다. 죽은 여동생을 신으로 승격하면서, 로마 곳곳에 여동생을 기리는 신전을 건설한다. 물론, 칼리굴라 자신도 신으로 행동한다. 칼리굴라의 ‘미친 행적’에 공포를 느낀 두 여동생은 참다못해 ‘오빠 암살’에 나선다. 그러나 직전에 발각돼 섬으로 유배된다.

권력자가 직계 상속에 집착하는 이유


▎기원전 44년 3월 15일, 종신독재관 카이사르는 원로원파로부터 23군데를 찔려 죽임을 당한다. 바티칸미술관에 전시된 카이사르의 입상.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원로원과 대립한 칼리굴라는 국민적 지지기반을 넓히고자 갑자기 영국 침략에 나선다. 로마 정치의 특징이지만, 전승 무용담은 황제가 갖는 권위의 기본요소다. 대규모 군대와 함께 영국 침략에 나선다. 그러나 현장 장군들의 반발에 직면한다. 겨울의 영국해협을 건널 만한 배나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장군들 모두 공격을 주저하게 된다. 보급도 부족한 상태에서 칼리굴라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로마로 돌아온다.

그렇지만, 신으로서의 칼리굴라 숭배 이벤트도 계속 이어진다. 재정난이 한층 더 심해지고 원로원은 물론, 군인들의 불만도 가속화된다. 칼리굴라의 운이 다한 것은 41년 1월 24일이다. 암살에 가담한 군인들은 살해 후 칼리굴라의 살점을 씹어 먹었다고 한다.

칼리굴라의 미친 정치는 어릴 때 겪은 정신적 트라우마에서 비롯됐을 듯하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물론, 전임 황제 티베리우스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장래도 어둡게 보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두 형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피해망상증으로 발전되면서 폭정에 들어간다. 칼리굴라는 무표정 연기의 달인으로 불리는 황제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눈도 깜짝 안 하는 냉혈한이다. 티베리우스 별장 카프리에 머물 당시 체득한 생존법에서 비롯된 버릇이다.

흥미롭게도, 칼리굴라의 최후는 카이사르와 비슷하다. 두 사람의 암살 음모자 이름이 카시우스(Cassius)란 점과 최후의 순간 약 서른 군데 가까이 칼에 찔려 숨졌다는 부분도 똑같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암살의 역사조차 되풀이되던 곳이 로마다.

‘칼춤을 통한 굿판’은 언제부턴가 주기적으로 나타난 한국 정치의 일상적 풍경이다. 권력을 잡기 무섭게 시퍼런 칼 춤이 시작된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숙청과 청산’ 중간 어디쯤에서의 굿판이 벌어진다. 감옥행만이 아니라, 자살자도 늘어난다.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가 벌인 ‘업보’로 인해 두려움을 갖게 된다. 피해망상증으로 발전되기 쉽다. 주변의 충고는 물론 경고도 무시한다. 억지를 부리며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방팔방 휘두른다. 정권 말기로 접어들면서 직계세습에 올인한다. 당장은 직계세습에 성공할지 몰라도, 자신이 뿌린 업보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칼리굴라는 로마에만 존재하는, 2000년 전 폭군에 그치지 않는다. 2019년 현재 세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로서의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로마사가 갖는 보편성과 일반화를 믿는다면, 권력욕에 빠진 정치의 실체를 알고 싶다면, 칼리굴라 공부가 최적의 방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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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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