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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6)] 방송가 석권한 ‘반지의 제왕’ 안정환 

“굿판 음식 얻어먹던 시절 축구만이 빛이었다” 

중·고생 때는 운동 쉬는 날 공사판 나가 생활비 벌어
숱한 고난 딛고 월드컵 3골… 예능·축구 해설도 발군


▎인터뷰 장소인 서울 청담동 호텔 엔트라 커피숍에서 만난 안정환 위원. 워낙 광고·화보 등을 많이 찍은지라 포즈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안정환(43)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축구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 것이다. 그의 삶에는 많은 고비와 반전이 있었고, 그 거센 파도타기에서 끝내 살아남아 ‘레전드’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업적과 명예를 쌓았다.

안정환과 인터뷰 약속을 잡는 건 어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보다 힘들었다. 당초 5월에 만나려고 에이전트와 연락했지만 방송 일정 때문에 날짜를 뽑을 수 없다고 했다. 6월에도 폴란드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20세 이하(U-20) 월드컵 중계 때문에 몇 차례나 일정을 바꿔야 했다. U-20 결승전 중계를 마치고 돌아온 안정환과 겨우 날짜를 맞춰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안정환의 공식 직함은 MBC 축구 해설위원이다. JTBC [뭉쳐야 찬다] 등 여러 TV 채널에서 만날 수 있는 방송인이기도 하다. 전국 20여 곳에 있는 ‘안정환 축구교실’을 돌아다니며 운영을 체크하고 클리닉을 열기도 한다.

안정환은 1997∼2010년 국가대표 축구 선수로 A매치 71경기에 출전해 17골을 넣었다. 2002 한·일, 2006 독일, 2010 남아공 월드컵에 연속 출전했으며, 박지성·손흥민과 함께 월드컵 최다 골(3골)을 기록한 선수다. 한국 K리그를 포함해 이탈리아-일본-프랑스-독일-중국에서 뛴 ‘저니 맨’이기도 한 그는 조각 같은 외모와 귀공자풍 분위기와는 달리 참혹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누구보다 열심히 산 생활인이다. 미스코리아 출신 이혜원 씨와 결혼해 딸 리원, 아들 리환을 두고 있다.

안 위원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와의 U-20 월드컵 결승전에서 1-3으로 져 우승컵을 들어 올리지 못했지만 “이들이 우리의 진정한 영웅” “내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를 FIFA 주관대회 결승전”이라며 감격에 젖기도 했다. U-20 대회 얘기부터 시작했다.

이강인 보면 부러워… 선배들 노력 잊지 말길


▎1. 2002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 골든골 직후 장면. / 2. 2002 월드컵 미국전 동점골을 터뜨린 안정환. / 3. 2006 독일 월드컵 토고전 결승골의 주인공 안정환.
이강인(18·발렌시아) 선수는 20세 선수들보다 두 살 어린 데도 골든볼(MVP)을 받았습니다.

“이강인은 그 연령대에서는 한 클래스 위 선수입니다. 한국에서 보기 드문 유형의 선수가 나왔습니다. 그동안 타깃형 스트라이커나 스피드 좋은 선수는 많았지만 세계 정상권에서도 통할 만한 기술을 갖춘 선수는 거의 없었거든요. 하지만 이강인 선수가 지금 나이로 성인 대표팀에 가는 게 맞는지는 물음표입니다. 더 성장해야 할 시기인데 너무 어린 나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아닌가 약간 걱정도 되고요. 물론 튀는 성격이 아니고 의지가 굉장히 강한 선수라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만.”

어린 나이에 유럽에 나가 잘 성장한 이강인을 보면서 부럽기도 했겠습니다.

“그런 건 있죠. 우리 위 선배님들도 유럽 진출을 시도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축구가 알려지지 않았죠. 저희 때도 마찬가지고요. 만약 환경이 좋고 조금이라도 인정을 받아 외국에서 시작했으면 더 좋은 선수가 됐을 수도 있겠죠. 요즘 축구 하는 친구들에게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게 부럽기도 합니다. 그건 위 선배들부터 두드렸기 때문에 문이 열린 겁니다. 자기가 잘해서 혜택받는 것도 있지만 선배들의 노력이 큰 도움이 됐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2002 월드컵 세대와 U-20 준우승 세대는 많이 다르죠?

“시대와 환경이 변했으니까요. 요즘 아이들은 자유로움 속에서 열심히 합니다. 운동장 밖에선 편하게 할 거 다 하고 운동장에선 초집중하죠. 그런 게 유럽 스타일이거든요. 밖에 사생활은 터치 안 하고, 운동장에서 보여주는 것으로만 평가합니다. 팬들도 ‘내가 이 사람을 축구선수로 좋아하는 거지 외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는 마인드가 있고, 선수들도 그걸 압니다. 옛날에는 TV 출연하면 안 된다, 뭐 하면 안 된다 같은 규제가 많았지만 요즘 그런 거 없잖아요.”

[뭉쳐야 찬다] 프로그램 컨셉트는 안 위원이 제안하신 건가요?

“[뭉쳐야 뜬다]라는 여행 다니는 프로가 있었어요. 그 스태프들과 회의 중에 조심스럽게 누가 제안을 했어요. 고민을 많이 했죠. 몇 년 전 비슷한 컨셉트의 [청춘 FC]도 했는데, 이번에는 스포츠 종목별 레전드를 모아서 축구팀을 만들고 감독을 해야 하니까 부담이 더 컸죠. 그래도 내가 이걸 함으로써 축구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고, 축구에 비해 조명을 덜 받는 종목들에 대한 홍보도 될 것 같았습니다. 왜 현장에 안 나가고 예능에서 그런 걸 하느냐고 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축구를 통해 다른 스포츠 종목까지 소개하는 시너지 효과를 생각하니까요.”

예능에서 잘 팔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능 하는 분들한테 죄송한 면이 있는 게, 그분들 자리인데 내가 끼어든 것 같기도 해서거든요. 그래서 출연 요청은 많지만 사양도 하고, 저하고 안 맞는 건 안 하려고 하죠. 아무래도 축구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기 있는 선수였으니까 찾아주시는 거 아닐까요. 그리고 제가 갖고 있는 것, 저도 잘 몰랐던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 주시는 PD나 작가 선생님들 덕분에 제가 좀 팔리는 것 같아요. 좋은 프로그램을 만난 덕도 있고요.”

방송을 통해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까?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요즘은 출연자가 진정성이 있는지 없는지 시청자들이 더 잘 알아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잘하면 하는 대로 솔직하게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방송하면서 배우는 게 정말 많아요. 축구 쪽에서는 만나는 사람이 정해져 있지만 방송하면서는 다양하게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살아왔고,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이런 것 때문에 힘들어 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하는구나…. 그게 인생을 배우는 거죠.”

서장훈(농구)·강호동(씨름) 등 스포츠 스타가 예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요. 스포츠와 예능이 본질상 통하는 게 있나요?

“아무래도 있겠죠. 스포츠 스타가 관중을 즐겁게 해야 하는 것처럼 예능에서는 시청자를 즐겁게 해 주는 거잖아요. 또 운동했던 사람들은 색다른 점이 있는데 늘 봐온 모습이 아니고, 내가 알던 안정환·서장훈이 이런 모습도 있네 하면서 고정관념이 깨지는 쾌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축구 해설을 하면서 예능의 이미지와 겹치는 부분이 있지 않나요?

“아직도 축구를 딱딱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차범근 선배님(전 SBS 해설위원), 이영표(전 KBS 해설위원) 같은 분은 저보다 언변 좋고, 논리정연하게 상황을 전달하잖아요. 전 색다른 걸 하고 싶었어요. 내가 전문 용어를 쓰면 매니어들 말고 일반인은 잘 알아듣지 못해요. 그들의 관심을 끌면서도 재미있고 편하게 얘기할 수 없을까 생각하다가 생활체육 하는 분들이 쓰는 용어(꽈배기 슛, 가랑이 슛 등)를 써 봤죠. 재밌다는 반응이 많고, 관심 없던 분들도 관심을 갖게 되고…. 재미있어서 자꾸 보다 보면 축구의 본질적인 내용도 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해설을 너무 예능처럼 하느냐 하는 분들이 있는데, 계속 들어보면 제가 많이 준비하고 제 경험과 요즘 축구 트렌드·정보 등도 전달하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가장 좋은 해설은 ‘축구를 재밌게 보게 하는 것’


▎안정환이 감독으로 나온 JTBC 예능 프로 [뭉쳐야 찬다].
너무 현장감과 경험을 앞세우다 보니 콘텐트가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소리도 들립니다만.

“해설을 하면서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들을 저는 다 경험해 본 겁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있는 그대로 심정을 얘기해 주는 게 맞지, ‘현대 축구는 어떻고’ 하면서 주저리주저리 얘기하는 게 얼마나 임팩트가 있을까 싶어요. 좋은 해설은 ‘축구를 재밌게 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와 감동이 있어야지 너무 시청자들한테 가르치려 하면 오히려 불편해 할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하는 거 되게 어렵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 보세요. 그 어려운 걸 저 선수가 해냈네요’ 이런 식으로 말해 주는 게 맞다고 보죠.”

안정환은 힘든 청소년기를 거쳤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할머니와 함께 판자촌에서 자랐다. 한강 둔치의 굿판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얻어먹고, 한강에 방생된 물고기를 잡아서 되팔아 용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서울 대림초 축구부에 들어간 것도 빵과 우유를 준다고 해서였다. 국내 프로축구팀 1호인 할렐루야의 창단 멤버 피은형 씨가 84년 선교 차원에서 형편이 어려운 선수 13명을 뽑아 대림초 축구부를 만들었다. 그때 뽑힌 선수 중 한 명이 안정환이었다. 피감독은 혹독하되 폭력적이지 않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선수들을 조련했다. 독특한 건 유연성을 길러주기 위해 선수들에게 기계체조를 시킨 것이다. 안정환의 폭발력은 체조 선수처럼 앞구르기ㆍ뒷구르기를 하면서 체득한 ‘부드러움’에서 나온 것이다.

남서울중-서울공고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한 안정환은 화려한 개인기와 발군의 골 감각으로 돋보였다. 그러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쉬는 날에는 공사판을 전전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목동역 건설 현장에서 일한 적도 있다. 안정환은 목동역 근처를 지날 때마다 “저 목동역 내가 지은 거다”라며 감회에 젖었다고 한다.

안정환은 아주대에 진학해 ‘박지성의 스승’ 김희태 감독의 지도를 받았고, 98년 프로축구 부산 대우에 입단해서는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아름다운 동작으로 골을 넣어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99년 수원 삼성과의 K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패했음에도 안정환은 K리그 MVP를 받았다. 2000년 7월에 이탈리아 페루자에 입단했다.

힘든 청소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환경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건데, 그 환경이 너무 싫고 절망스러웠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부유하고 편안했다면 운동을 더 열심히 안 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어요. 분명히 저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많았겠죠. 목표가 아예 없이 살다가 축구를 통해 뭔가 가능성이 보이고 빛이 보이니까 더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미한 빛, 축구밖에 없었으니까 그걸 찾아간 거죠.”

지하철역 공사장서도 일해 “목동역 내가 지었다”


▎1. 안정환의 20대 시절 모습. / 2. MBC 축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안정환. / 3. 2014년 아들 리환이와 함께한 안정환. / 사진:베스트일레븐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나’ 하고 포기하려는 젊은이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제가 잘살아온 사람의 표본이 아니라서…. 살다 보면 물꼬 하나는 트이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잡느냐가 문제죠. 막살고 있다가 빛이 보인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죠. 어느 정도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온 베이스가 있어야 찬스가 오면 그걸 잡는 거지. 막말로 개판 인생 살다가 기회 잡았다고 해도 끝이 별로 안 좋은 걸 많이 봤어요. 누구한테나 고생에 대한 보상이 오는데 그건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죠.”

축구황제 펠레는 “안정환은 내가 본 아시아 선수 중 기술이 가장 뛰어난 선수”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런 기술을 갖기까지 어떤 노력을 했나요?

“사람들은 저의 외모나 풍기는 이미지 때문에 ‘훈련을 열심히 안 했을 거다’ ‘부잣집 도련님처럼 살았을 거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굉장히 내성적이어서 감독님한테 보이려고 일부러 열심히 하고 그러질 못했어요. 하루에 개인 운동 네 번 하고, 노력 정말 많이 했어요.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안 믿어줘도 됩니다. 이미 은퇴한 마당에 지금 알아달라고 하고 싶지도 않아요. 새벽에 제일 먼저 나가고, 오전ㆍ오후 운동 끝난 뒤에 밤에 몰래 나가서 운동하고, 쉬는 날에도 하고…. 그때 같이 했던 형과 친구가 있어요. 그들은 압니다.”

주로 어떤 연습을 많이 했나요?

“볼을 갖고 운동을 많이 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땐가 유럽 선수가 축구 기술 시범을 보이는 비디오테이프 3개를 어렵게 구했어요. 우리집에 비디오 기계가 없으니까 친구 집에 가서 보고 또 보고, 테이프가 닳을 정도로 봤어요. 그 영상을 따라서 해 보고, 일지도 많이 쓰고 했죠. 그런데 중학교 때 이사하면서 그 테이프를 잃어버린 겁니다. 빚쟁이들한테 쫓겨 다니다시피 이사를 하다 보니 제대로 못 챙긴 거죠. 그거 잃어버리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서울공고 때 감독님인 박윤기 선생님이 프로축구 초대(1983년) 득점왕 출신이거든요. 그분한테서 골키퍼 키 넘기는 찍어차기, 슈팅 하는 척하다가 슬쩍 접고 때리기 등 문전에서 침착한 플레이를 많이 배웠습니다.”

안정환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2002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헤딩 골든골을 터뜨린 장면이다. 역설적이게도 그 골 때문에 그는 스텝이 꼬여버렸다. 괘씸죄에 걸린 안정환은 이탈리아의 공적(公敵)이 됐고 결국 페루자에서 쫓겨났다. 당시 페루자의 가우치 구단주는 “그 녀석은 처음 이탈리아에 왔을 때 샌드위치 하나 살 돈 없는 ‘길 잃은 염소’와 같았다. 자신을 키워준 이탈리아를 몰라보고 적대적인 행위를 했다. 그는 더 이상 페루자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로 페루자에 있던 그의 차가 망가졌고, 마피아의 살해 협박을 받기도 했다.

안정환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블랙번에 입단하기로 했으나 페루자 측에서 “우리 허락 없이는 어떤 팀도 갈 수 없다”고 몽니를 부려 결국 이적이 무산됐다. 설상가상으로 페루자와 안정환의 원소속팀(부산 아이콘스) 사이 분쟁이 FIFA 소송으로 번졌고 FIFA는 안정환 측이 페루자에 380만 달러(당시 약 35억원)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35억원 빚’에 묶인 안정환이 갈 곳이 없어 속을 태울 때 일본 연예기획사인 PM에서 손을 내밀었다. PM은 안정환의 빚을 다 갚아주는 조건으로 일본에서 선수생활과 방송연예·광고 활동까지 하도록 했다. 안정환은 J리그(시미즈 S-펄스,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발군의 활약을 하면서 연예인 역할까지 해야 했다. 3년 만에 빚을 다 갚은 안정환은 30억원 연봉을 제시한 J리그 팀의 제안을 뿌리치고 유럽 재진출에 도전했다. 그가 입단한 프랑스 FC 메츠에서 연봉은 8억원이었다. 이후 안정환의 ‘저니 맨’ 여정은 독일(뒤스부르크)-한국(수원 삼성, 부산 아이파크)을 거쳐 중국(다롄 스더)까지 이어졌다.

선수 시절에 불운하게 이루지 못한 게 많았는데 가장 아쉬운 건 뭔가요?

“스페인리그를 한번 뛰어보고 싶었어요. 내 스타일에도 맞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앞두고 스페인에 갈 기회가 있었죠. 프랑스 메츠에서 나를 스페인으로 임대 시키려고 했어요. 그런데 당시 한국 대표팀 아드보카트 감독이 ‘월드컵 준비를 위해서는 독일로 가는 게 좋겠다. 팀을 정해줄 테니 거기 가라’고 하는데 안 갈 수 없잖아요. 독일이 내 스타일에 맞는 것도 아니어서 고민이 많았는데 대표팀 감독이 가라는데 어떻게 거부를 합니까.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사상 원정 첫 승(토고전 2-1승)을 이끈 결승골로 만족하고 사는 거죠.”

스페인리그서 못 뛴 게 가장 아쉬워


▎안정환-이혜원 커플의 웨딩사진. / 사진:베스트일레븐
인생 최고의 골은?

“아무래도 2002 월드컵 이탈리아전 골든골 아닐까요. 2002 월드컵 미국전 동점골, 2006 독일 월드컵 토고전 역전골까지 월드컵 골은 다 기억나죠. 제 자랑 같지만 모두 다 결정적인 골이었으니까요.”

그 골든골 때문에 이탈리아에서 쫓겨나면서 축구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는데, 이탈리아·페루자·가우치 등을 떠올리면 어떤 감정이 듭니까?

“그때 이탈리아리그는 어마어마했고 가서 정말 많이 배웠죠. K리그에만 있던 우물안 개구리가 이탈리아 경험을 통해 월드컵에서 꽃을 피웠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 미워한다고 해서 이젠 어쩔 수 없잖아요. 당시에는 화도 나고, 나라를 위해 뛰었는데 무적(無籍) 신세 되고, 아무도 해결해 주는 사람 없고, 실업급여도 나라에서 안 주고(웃음). 어차피 지나간 일이고 저로 인해 후배들이 그런 일을 안 당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중계약·위약금 이런 게 뭔지도 몰랐는데 무지하면 이렇게 치명적인 손해를 보는구나 하는 걸 알려줬잖아요. 그리고 제 앞길 막았던 사람들, 희한하게 잘 된 사람 하나도 없어요. 그걸 보면서 ‘아 하늘이 정말 공평하구나’ 실감했죠.”

아들 리환이가 초등학교 5학년인데, 축구를 안 시키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힘들게 축구를 한 것도 있고, (차)두리를 보고 느끼는 게 많았어요. 아버지(차범근 감독)가 워낙 크니까 평생 운동을 하면서 아버지와 비교되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고 하잖아요. 내 아들이 나보다 잘하면 다행인데 조금이라도 못하면 두리처럼 힘들어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운동 못 시키는 겁니다.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되는 거잖아요.”

앞으로 안정환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 같습니까.

“방송 열심히 하고, 해설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고, 지도자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방송계 떠날 수도 있겠죠. 프로팀에서 (감독) 오퍼도 있었는데 제가 준비가 안 돼 있었죠. 흥행을 위해 얼굴마담으로 가고 싶진 않았어요. 간다면 방송 다 접고 가야지 이슈 메이커로 가는 건 제가 축구인으로서 절대 해선 안 될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축구로 받은 사랑을 축구를 통해 보답하겠다는 마음도 크죠.

“2012년에 프로축구 홍보대사를 맡아 1년 동안 무보수로 지방 곳곳을 다녔어요. 2017년 FIFA U-20 월드컵 때도 홍보대사로 정말 열심히 뛰었죠. 사람들이 그런 건 잘 모르지만 크게 섭섭하지도 않아요. 앞으로는 더 큰 걸 해야겠죠. 형들은 ‘네가 빨리 현장으로 와야 프로축구 흥행에도 보탬이 되지 않겠나. 준비가 덜 됐다니 무슨 소리냐. 너만큼 많은 걸 경험하고 축구를 아는 사람 누가 있나’고 합니다. 기분 좋으라고 하는 얘기지만, 그건 아닙니다. 예능은 잘 모르니까 실수해도 용서가 되지만 축구는 다릅니다. 평생 해 왔는데 하나라도 실수하면 제가 잘못하는 거잖아요.”

돈은 건물주(서장훈)만큼 벌었나요.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실 건가요?

“재테크는 제 나름의 스타일로 하고 있고요. 지금은 장학재단을 준비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중학교 감독하는 축구인이 ‘어렸을 때 장학재단에서 후원금 받았는데 아직도 못 잊는다. 어려울 땐 축구화 한 켤레를 받아도 그걸로 운동할 수 있어서 기분만 좋았을 뿐인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다. 나이 들어서 더 못 잊겠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다는 필이 왔어요. 환경이 어려운 친구들한테 조금이나마 도움 주는 걸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정환에게 붙은 ‘테리우스’ ‘반지의 제왕’ ‘안느’ 같은 별명은 말랑말랑한 멜로드라마 주인공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는 ‘의리의 상남자’에 가깝다. “내가 손해를 볼지언정 남한테 피해 주는 건 정말 싫다”고 말하는 안정환은 실제로 어처구니없이 당하면서 살아왔다. 지금은 그가 ‘위너(Winner)’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SUNDAY에 ‘스포츠 오디세이’ ‘스포츠다큐-죽은 철인의 사회’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 스포츠부장을 역임했고, 2013년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다. 연세대 국문학과,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서 공부했고 한국체대에서 스포츠산업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희대와 한양대 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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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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