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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입수] CIA 문서로 보는 1987년 한국 정치 비화(秘話) 

“盧는 개혁적, YS·DJ는 극단적이며 논쟁적” 

미 정보기관, 여야 넘나들며 직선제 선거동향 파악
면밀 분석 위해 국내 유권자 분포까지 세세하게 기록


▎1987년 6월 10일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의 손을 치켜들고 환호하고 있다.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며, 국민의 뜻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직후인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발표한 ‘6·29선언’의 한 대목이다. 1971년 이후 16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같은 해 12월 16일 치러진 제13대 대선은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득표율은 36.6%였다. 당시 투표율은 89.2%. 현재로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수치다. 그만큼 전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선거였다.

‘양김’으로 불렸던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는 28.0%, 김대중 평화민주당 후보는 27.0%에 그쳤다. 정치적 동지이자 맞수였던 두 거물 가운데 승자는 없었다. 두 사람의 권력욕이 낳은 ‘양김의 분열’은 민주정부로의 정권교체를 갈구했던 야권 진영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결과를 초래했다.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작성했던 1987년 대선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당시 여권이 광범위한 부정선거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폭로가 나온 것이다. 올 7월 20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정보 공개 요구를 통해 입수한 미국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이하CIA) 자료를 토대로 “(1987년) 기념비적인 선거를 앞두고(한국)여당이 투표결과 조작 등 부정선거를 구체적으로 기획했다”고 보도했다.

선거 무효 가능성 수차례 언급돼


▎1987년 당시 여당에서 부정선거 시도를 고려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국가정보 일일보고’. 투표 조작을 포함해 선거 무효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 사진:www.scribd.com 캡쳐
월간중앙은 관련 내용이 담긴 CIA 보고서를 확보했다. 총 9개의 문서로 분량이 A4용지 74쪽에 이른다. 이 가운데 6개는 ‘국가정보 일일보고(National Intelligence Daily)’ 형식의 문서로, 작성 시점은 1987년 10월부터 선거가 끝난 12월 말에 해당한다. 나머지 3개의 문서는 CIA 정보실(Directorate of Intelligence, DI)의 ‘정보 평가보고서(An Intelligence Assessment)’다.

눈길을 끄는 문서는 12월 선거를 앞둔 11월경에 작성된 것으로 직업, 나이 등을 중심으로 한국 유권자 성향을 분석하고 선거에 미칠 영향을 예측했다. 또 대선 직전인 12월 초에 작성된 문서는 선거 결과를 결정지을 요소와 당시 여당과 야당의 상황에 대해 면밀히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문서는 미래를 예측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현황 파악과 동향 보고와는 또 다른 차원의 관점이 투영돼있다고 하겠다.

그외 나머지 보고서는 1987년 12월 24일에 작성된 것으로 시험대에 오른 노태우 대통령 당선인의 행보를 분석했다. 이 문서들은 1987년 당시 16년 만에 부활한 직선제를 둘러싼 한국의 상황을 CIA, 즉 미국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다.

SCMP 보도 내용의 핵심은 당시 대선을 앞둔 여권이 당시 노태우 후보의 낙선을 심각하게 우려해 선거 전부터 개표 부정, 선거 무효 선언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내용은 11월 말 작성된 ‘국가정보 일일보고’에 언급된다. CIA는 “선거가 다가올수록 여당의 초조함이 커지고 있다”면서 “다양한 소식통의 보고에 따르면 여당 캠프에서 야당의 승리를 막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들(여당 캠프)은 부정투표를 포함해 흑색 선전(black propaganda)과 지저분한 술책(dirty tricks)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일부 관리들은 더 나아갈 준비가 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앞서 언급된 수단 이외에도 선거와 관련해 다른 수단이 존재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CIA는 선거 이후 여당이 고려하고 있는 방안도 자국 정부에 보고했다. 한 소식통은 당시 CIA에 “여당 전략가들은 개표 초반 결과 노태우 후보가 패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경우, 여당이 증거를 조작해 전두환 대통령이 선거 무효(the election null and void)를 선언하는 방안을 검토해왔다”고 주장했다.

투표일을 5일 앞둔 시점에서 작성된 보고에는 당시 여권의 불안이 더 진하게 감지된다. 이날 보고에는 “한 청와대 수석 고문은 이번 주 미국 관료들에게 노 후보가 더 이상 당선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고 나와 있다. 그러면서 “김영삼 후보가 전국 최대 선거구가 있는 서울에서 노 후보와 김대중 후보를 여유 있게 앞서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말한다.

부정선거 징후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 CIA는 “노 후보 당선 가능성에 대해 여당 관계자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다”며 “선거를 조작하려는(fix) 압박감이 가중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광범위한 사기를 위한 계획이 이미 시행되고 있다”고도 나온다.

선거 무효 가능성은 이날 보고에도 나온다. CIA는 “한국 관료들은 선거 이후 정치적 불안정을 경고하고 있다. 아마도 투표 후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거나 야당이 승리할 경우 심지어 선거를 무효화(nullifying) 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밝힌다. 87년 대선 당시 한국 정치권에 ‘선거 무효’ 시나리오가 공공연하게 퍼져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여당, 미국 측에 당선 지지 독촉


▎CIA 정보실에서 작성한 ‘한국 유권자 분포’ 분석 보고서 가운데 지역별 유권자 분포를 나타낸 지도. / 사진:www.scribd.com 캡쳐
이러한 사실은 이미 한국 야당 측에서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투표 전날인 12월 15일 보고에서 CIA는 “지난주 미 관료들과 대화에서 김대중 후보의 지지자들이 사기(fraud)를 주장하기 위한 사전작업을 이어가고 있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김 후보의 지지자들은 부재자 투표의 정부 조작을 제기하고 있으며, 투표 당일 광범위한 속임수가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도 대화에서 오갔다고 전했다.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 야당과 야당 지지자들의 반발과 우려가 커지자 당국에서는 계엄령 선포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CIA는 본국에 보고했다. 대선 이튿날인 12월 17일 ‘노태우, 사기 의혹 속에 당선되다(Roh wins Amid Charges of Fraud)’라는 제목의 보고에 따르면 CIA는 “야권 단체들은 어제 실시된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의 승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며 “광주에서 김대중 지지자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고 전했다.

CIA는 국민들의 반발이 커질 것을 염려한 정부에서 강경 진압을 준비하고 있다고도 전한다. 이날 보고에는 “노태우 승리에 따른 광범위한 불안이 확산될 경우 계엄령(martial law)을 위한 비상계획, 또는 보다 제한적인 비상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어제 군과 안보 관계자들이 소집됐다”고 나온다. 특히 서울과 광주, 부산을 비롯해 김대중 후보의 고향이 요주의 지역에 포함됐다고 덧붙였다. 이어 “이르면 오늘(17일) 오후 단속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다”고도 적었다. 아울러 낙선한 김대중 후보가 선거 결과에 대해 민중 봉기를 선동하려 할 경우 공개 체포 명령이 준비됐다고도 설명했다. 다만 ‘공개 체포 명령’을 언급한 주체는 보고서에서 지워져 있다.

일부 지역에서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것을 우려한 여당 측은 노태우 후보 당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 측에 당선 지지를 지속적으로 요청했다고 CIA는 기록했다.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대해 워싱턴의 즉각적인 공식 지지를 요구하는 한국 여당의 요청이 반복됐다. 이는 부정 투표로 노태우가 승리했다고 주장하는 야당 인사들과 한국 국민들이 손잡는 것을 한국 정부가 우려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당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선거일이 3일 지난 1987년 12월 19일 주한 미국 대사를 통해 축하 친서를 보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제19대 대선일 이튿날인 2017년 5월 1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당선 축하 통화를 했다.

9개의 문건에서 CIA가 가장 주시하고 있었던 것은 군의 개입으로 보인다. 이 같은 내용은 여러 문건에서 수차례 언급된다. 10월 10일 ‘국가정보 일일보고’에는 선거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오는 있는 상황에서도 단일화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YS와 DJ의 갈등 양상이 정밀하게 묘사돼있다. CIA는 “양김은 여전히 어느 쪽이 야당의 후보가 될 것인지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여당의 후보(노태우)가 수혜자가 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그러면서 “DJ가 야당 후보로 지명되면 육군의 개입 우려와 DJ 신변에 대한 걱정이 급격히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CIA는 또 “노동계 불안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7년) 8월에는 육군이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컸다”고도 했다.


▎제13대 대선은 양김(金)의 분열 속에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과거처럼 군 부재자 투표 조작 쉽게 못할 것”

군부 개입에 대해 미국 측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대목도 나온다. CIA는 “내년(1988년) 여름 올림픽을 위협하는 광범위한 사회 불안 혹은 북한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과 같은 합당한 명분이 없다면 그들(군)의 개입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촉발시키고 미국과의 관계를 긴장시키는 동시에 군의 신뢰를 완전히 떨어뜨릴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CIA가 군과 관련해 가장 주목하고 있던 부분은 선거 개입이다. CIA 정보실(Directorate of Intelligence, DI)이 작성한 한국 유권자 관련 ‘정보 평가보고서’에는 군의 선거 개입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여당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65만 명의 군부대 투표 조작에 의존한다면 목표(당선) 달성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과거보다 자유로운 선거 환경에서 노태우 후보는 젊은 징집자들의 표를 조작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을지 모른다.”

CIA는 같은 보고서에서 A4 용지의 반을 할애하며 군부대 투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CIA는 “유권자의 2.5%에 불과한 군부대 투표는 전통적으로 군인들이 공공장소에서 투표용지를 표시하도록 하거나 장교들이 부재자 투표용지를 직접 표시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조작돼 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특히 올해 대통령 선거가 치열한 경합으로 이어질 경우, 여당이 다시 이러한 기술(techniques)들을 사용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CIA)는 거의 의심하지 않는다”고도 단언했다.

그러면서도 CIA는 이전보다 군부대 투표 조작이 녹록치 않을 것이라고 바라봤다. 보고서에는 “이전보다 이 같은 전략(군부대 투표)을 쓰는데 위험성이 훨씬 높아졌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미 야당에서 주시하고 있고 12월에 있을 선거를 감시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군 장교 사이에 노태우 후보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지 않다고도 부연했다.

군부대 부재자 투표 조작은 1987년에도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CIA는 12월 15일 보고에서 “반체제 단체들이 한 병사가 노태우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아 구타당해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한국 정부는 해당 병사가 상급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치명상을 입었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군 보안 기관에서 노태우 후보 집계에서 뒤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공군본부가 부재자 투표를 중단시켰다”고 부연했다. 이 문장에서도 중단시킨 주체에 대해 지워진 상태다.

단순 구타사망 사고로 마무리됐던 이 사건은 1989년 13대 국회에 구성된 ‘양대 부정선거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됐으나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다. 이후 결국 2004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해당 병사가 부정투표에 저항하다 선임병에게 맞아 숨졌다며 의문사 인정 결정을 내렸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 당시 이 부대 간부들은 투표장에서 노태우 후보의 기호 1번이 위로 올라오도록 접어 1번을 찍도록 유도하거나 투표용지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도장을 찍게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군부대에서 특정 후보에게 투표하라는 행위에 대해 CIA는 부정적 시각을 내비친다. CIA는 “우리(CIA)는 육군(the Army)이 병사의 인생관을 바꿔왔다고 의심하고 있다”며 “군대가 북한의 위협을 더 크게 인식하게 하고 더 보수적인 정치 시각을 갖도록 주입시키는 것에 주목해왔다”고 말한다.

노동자·여성·농민·학생까지 면밀한 분석


▎CIA 정보실에서 작성한 ‘한국 유권자 분포’ 분석 보고서에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평가가 나온다. / 사진:www.scribd.com 캡쳐
16년 만의 직선제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한국 유권자 분포 지형을 분석하는 보고서로 이어진다. CIA 정보실은 1986년 12월 미국 문화정보국(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이 한국인 2000명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와 1985년 9월 [경향신문] 여론조사(1000명 대상)를 기초로 클러스터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클러스터 분석은 다양한 특성을 지닌 대상을 집단으로 분류하는데 사용하는 통계 기법이다.

CIA는 해당 보고서에서 “경제적 성장과 전후(post-Korean war generation) 세대의 출현이 유권자 구성을 크게 달라지게 했다“고 봤다. 또한 “1971년과 비교해 모든 사회적 계층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다”며 초등교육과정을 밟는 비율이 1971년 36%에서 1987년 62%로 증가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 같은 변화를 토대로 CIA는 1971년과 비교해 한국 유권자를 분석했다. 예컨대 ▷노동자 ▷화이트 칼라 ▷여성 ▷농민 ▷학생 등으로 나눠 각 계층의 특성과 예상 투표 성향 등을 논했다. 가령 1971년 22%에서 32%로 늘어난 노동자 계층은 나이와 경제적 수준, 성별에 따른 성향을 분석했다.

CIA는 “빈부격차와 같은 사회적 평등과 개혁에 관심이 있는 젊은 여성 노동자는 근본적인 사회 변화에 정체성을 두고 있는 김대중과 같은 후보에 흔들릴 것”이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노동자층은 외국산 제품과의 경쟁에서 보호와 복지 혜택 등을 내세운 야당의 공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CIA는 화이트칼라 계층이 막판까지 부동층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도 점쳤다. 보고서에 따르면 화이트칼라는 박정희·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한 항의로 야당 선호 성향을 보였다. CIA는 “온건한 김영삼 후보나 카리스마가 있고 개혁 성향의 김대중 후보 등 야당에 투표할 것으로 본다”고 예측했다.

변수도 언급했다. CIA는 “과거 조사 데이터와 최근 대선 여론조사에 근거하면 화이트칼라 계층은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점진적 개혁의 소망, 야당 분열의 불만족에 따라 여당 후보인 노태우에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화이트계층에서) 김대중은 불신 받고 있고, 김영삼의 리더십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평가가 있으며, 노태우는 민주적인 개혁을 하겠다는 데 회의적인 대중의 시각에 직면해 있다”며 “우리(CIA)는 선거 전날까지 화이트칼라 유권자가 유동층으로 남아 있을 것이라 보고 있다”고 전망했다.

광주 항쟁을 폭동이라 표현… 全 연관성도 언급

CIA는 유권자 가운데 3%(76만 명)에 불과하지만 선거에서 중요한 그룹으로 꼽힌 학생층은 대부분 야당 후보를 찍을 것으로 봤다. 그렇지만 일부 학생층에 대해서는 “노태우 후보를 완전한 민주화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받아들이는 역할로 계산하고 있을 수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1987년 대선을 전후해 작성된 CIA 보고서를 전반적으로 훑어보면 CIA는 부정선거에 대한 우려는 지속적으로 보내면서도 이를 딱히 제지하거나 경고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여당 후보인 노태우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가 눈에 띄는 한편, 야당 후보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다. CIA는 ‘유권자 분포 지형’ 분석 보고서에서 미 대사관 보고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노태우는 개혁적 마인드를 가진 리더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노동과 사회 복지 이슈에 관심이 있고, 평양(북한을 의미)과의 대화처럼 다른 영역에서의 유연성도 보여주고 있다. 야당 후보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미군 철수나 대기업 해체 등 야당의 정강과 같은 더 극단적이고 논쟁적인 주제에 집중한다.”

12월 초에 작성된 CIA 정보팀 분석 보고서에는 “여당이 대대적인 부정행위(wholesale cheating)를 자제하는 것처럼 한국 국민들에게 인식되기만 하면 근소한 차이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한국 국민들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한다”고 전망했다. 이어 “그럼에도 노태우 후보는 우세를 유지하면서 시위의 부활을 막자면 정치 개혁 공약에서 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마치 선거 전략을 조언하는 듯한 모습이다.

대선 이후인 12월 18일 ‘국가정보 일일보고’에서는 “3위로 선거를 끝낸 김대중은 시위에 대한 정부의 과잉반응이 폭넓은 지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더 도발적인 전략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고, “김영삼은 대중의 신중한 반응에 조심스러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대중과 함께 반(反)노태우 시위에 나설 경우 온건한 야당 세력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진단인 것이다.

CIA 문서에서 눈에 띄는 점은 광주 항쟁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12월 24일, 대선 이후 노태우 당시 당선인의 과제에 대해 분석하는 보고서에서 CIA는 많은 정부 관계자들이 전두환의 퇴장을 군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폭동(riot)을 잔혹하게 진압하는데 그(전두환)의 권력과 역할이 밀접한 연관성이 있고 군의 이미지는 더럽혀졌다”고 설명한다. 1987년 당시 광주 항쟁을 폭동이라 보고 있는 미국의 시각과 함께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전두환의 연루를 은연중에 드러낸 대목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CIA는 같은 보고서에서 “선거 결과에 불만을 가진 급진주의자들이 극단적인 수단을 꺼낼 수 있다”면서 한국인이나 미국 시설에 대한 테러 공격도 가능하다고 봤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5년가량 지난 시점에서 이 같은 분석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 허인회 월간중앙 기자 heo.inhoe@joongang.co.kr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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