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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0)] 불교를 둘러싼 정몽주-정도전의 두뇌 싸움 

“유교는 연속돼있고, 불교는 단절돼있다”_ 정도전 

역성혁명 앞둔 이성계의 망설임속에 공양왕의 반격과 정도전의 결기가 정면 충돌
척불론 선봉에 선 성균관… 조선 건국은 불교적 세계관 교체 위한 사상적 변혁


▎성균관은 불교에서 유교로 조선의 사상적 헤게모니를 바꾸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강당인 명륜당.
1390년 12월 사직 상소 이래 이성계는 거취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그 무렵은 군권을 완전히 장악해, 역성혁명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권력의 최정점에서 오히려 고민이 깊어졌다. 생존이 아니라 방향이 문제였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역성혁명이고, 물러서면 죽음이었으며, 그 자리에 머물면 영원히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성계의 결론은 정계 은퇴, 그리고 동북면으로의 낙향이었다. 고향에 돌아가 사냥이나 즐기며 산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정도전은 더 큰 불행이 닥칠 거라며 강력히 반대했다. 1391년 6월경, 이성계는 길을 잃고 고민만 하고 있었다.

이성계가 심리적 혼란에 빠지자 이성계파의 예봉은 날카로움을 잃었다. 공양왕과 정몽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단 반(反)이성계파 인물들을 차례로 복권시켜 정부를 착실히 장악해나갔다. 위화도회군 이후 반이성계파 진영을 끊임없이 괴롭혀 온 역모사건들의 사슬을 끊고, 옥사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고자 했다.

1391년 4월 26일(계미) 공양왕의 구언교서는 그런 시도의 일환으로 생각된다. 구언교서를 내리는 공식적 이유는 천문상의 이변 때문이었다. 공양왕은 자신의 정치를 반성했다. “상벌의 도리가 어그러진 것이 있는가?”, “하정이 다 진달되지 못해 원망하고 억울함이 해결되지 못한 것이 있어서인가?”가 옥송(獄訟)과 관련된다.

억울함이 사무치면 하늘이 그에 감응해 음양의 조화가 깨지고, 그 결과 자연재해가 발생한다는 게 당시 사람들의 자연관이자 정치관이었다. 5월 2일(무자), 공양왕은 형조판서 조면 등을 불러 옥사의 신속히 처리를 촉구했다.

“지금 천변이 누차 일어나고 가뭄이 더욱 심하니 이는 반드시 원옥(寃獄) 때문이다. 무릇 옥에 갇힌 죄수 가운데 마땅히 사형에 처할 자는 처형하고 마땅히 사면해야 할 자는 사면하되, 마땅히 속히 결정하고 보내어 오래 지체시키지 않음으로써 천심(天心)에 순응하도록 하라.”([고려사] 공양왕 3년 5월 무자) 천변과 가뭄이 원통한 옥사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공양왕의 구언교서는 역효과를 초래했다. 이를 기화로 이성계파가 일제히 공세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 공세에는 역성혁명의 결기가 느껴진다. 정도전과 남은의 상소는 공양왕의 무능과 위선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여차한 경우 시해가 벌어질 것이라고 위협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스승 이색의 처형도 주장했다. 이 모든 것이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선 것이었다. 아마 혁명파는 이성계의 정신적 방황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결기는 공양왕을 겨누고 있을 뿐 아니라, 이성계를 붙잡기 위한 필사적 노력으로 보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출가’를 대체하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척불논쟁이 제기됐다. 논쟁의 서막을 연 것은 성균관 대사성 김지수였다. 구언교서에 대한 답으로 그는 먼저 왕의 모친에 대한 효성, 그리고 세자 책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세 번째로 공양왕이 불교 신앙에 빠져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고 백성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전하께서는 즉위 초에 연복사의 탑을 수리하고 확장하면서 민가 30~40호를 파괴하셨는데, 이제 또다시 불교를 크게 일으켜 토목공사를 번거롭게 시작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농사일이 바야흐로 바쁠 때인데, 교주도 전체가 나무를 베고 목재를 운반하느라 사람과 가축이 모두 초췌해졌으나 일찍이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 사후의 복을 바라면서 현재의 생령들에게 실질적 화를 끼치고 계시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렇게 하셔서야 되겠습니까.”([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5월)

척불론은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다. 성리학이 유입되기 전에 유교의 관점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불교를 검토한 것은 최승로였다. 그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제왕과 백성의 불교 신앙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왕은 백성의 힘과 재물을 쓰기 때문이다. 둘째, 불법은 내세를 위한 것이고 금생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요, 유교는 치국의 근원이다.([시무28조]) 그러나 역대 고려의 국왕들은 불교 의례에 재정을 과도하게 낭비했으며, 정치적 노력보다 불공에 더 힘을 기울였다. 불교가 국가에 도움이 되기보다 짐이 된 것이다.

최승로의 이원론은 이론적 수준이 높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현명한 것이다. 형이상학 차원에서 불교 비판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의 유입 이후였다. 성리학은 유학이 불교에 대항해 1000년간 숙고를 거듭한 결과였다. 불교는 기원전 2세기 전한시대에 중국에 들어왔다. 중국인들은 불교의 심오한 형이상학에 매혹됐다. 그러나 곤란했던 것은 진리가 가족과 국가 밖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출가’란 개념이 그것이다. 가족과 국가는 중국인들이 알았던 유일한 세계였다. 어떻게 가족과 국가 밖에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질문이 1000년간 계속됐다.

그러나 중국 고유의 사상적 역량으로는 그 질문에 근본적으로 답할 수 없었다. 무력감이 중국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주자는 그런 상황에 분노를 느꼈다.

“진·한 이래로 성인들이 전한 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끊어져 버리고, 유학자들은 글을 짓고 시를 암송하는 것에만 공력을 기울여, 그들이 남긴 것은 일상의 비루하고 깊이 없는 내용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풍조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노자나 불교의 가르침에서 도리를 구해보고자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참된 도리와 그들의 거짓 가르침이 서로 보는 바가 다르고, 본질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의 결과가 다름으로 해서, 진리의 가르침은 숨겨지고 어두워져, 그렇게 장장 1000년을 흘러왔습니다.”([주희집])

중국 유학이 불교에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은 천리(天理)의 개념에 의해 코스몰로지를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천리 단 하나로 인간, 가족, 국가, 그리고 우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하나의 사슬처럼 연결돼있다. 이제 가족과 국가를 떠나지 않고도 자기완성부터 평천하까지 가능하다. 유학은 비로소 불교의 출가를 당당히 비판할 수 있게 됐다.

“불교, 도교의 이론은 깊이 따지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가르침이 삼강오륜을 폐지하려고 한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최고의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니 그 이외의 일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주자어류])

유교와 불교는 공존할 수 있는가?


▎불교는 출가의 사상이다. 이에 대응해 유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론을 완성했다.
한국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이다. 중국보다 무려 550여 년이나 뒤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유입된 불교는 한반도의 사상과 종교를 석권하고, 이후 고려까지 1000년간 사상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150여 년이나 늦었다. 토착신앙이 강했던 신라인들은 무당과 귀신을 두려워하고 섬겼다. 그래서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다.

하지만 삼국에서 불교의 수용을 둘러싼 사상적 갈등은 거의 없었다. 중국처럼 가족과 국가에 관한 정치적, 형이상학적 문제 제기도 없었다. 그러나 불교는 진리를 구하려는 한국인들의 열정에 불을 붙였다. 혜초는 진리를 찾아 인도까지 갔다. 그 길은 얼마나 험했던가.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왕오천축국전])

고려는 사상적으로는 신라와 연속적이다. 왕건은 독실한 불교도였다. 그의 유훈 [훈요십조] 제1조는 “우리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모든 부처의 호위하는 힘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건도 불교와 정치 사이에 근본적 갈등을 느꼈다. 진철대사 이엄(870~936)은 나말여초 9산선문의 일파인 수미산문의 개조이다. 그는 왕건의 개국을 도왔다. 개성의 사찰 사나내원에 머물던 어느 날 왕건이 찾아왔다. 왕건은 후삼국 전쟁의 살육에 괴로워했다. “대사는 1만 리를 사양하지 않고 와서, 삼한을 교화하여 불타는 강토를 구하고, 도리에 맞는 말로 깨우쳐 주십시오.”

왕건은 단순한 정치가를 넘어 종교적으로 진지한 인물이었다. 이엄의 답은 백성을 구하기 위한 전쟁은 홍제(弘濟), 즉 큰 구제라는 것이었다. “제왕과 필부는 닦을 바가 다릅니다. 비록 전쟁을 행한다 하더라도 백성을 더욱 불쌍히 여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왕자가 사해를 집으로 삼고 만민을 자식으로 삼아 무고한 무리를 죽이지 않고 죄 있는 무리를 처단함은 모든 선행을 맡는 바이니, 이를 홍제라고 합니다.”([진각 국사어록])

홍제, 백성을 구하기 위한 전쟁

‘정의의 전쟁’(just war)은 불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살생은 불교의 절대정신이다. 그렇다면 불도와 왕도는 공존할 수 없는가? 이엄은 ‘홍제’라는 사상으로 이 갈등을 넘어선다. 정치적 영역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것이다. 원광법사의 살생 유택과 같다. 그런데 어떤 살생은 더 큰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불교는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 놓인다.

고려의 유교 지식인들도 정신적 갈등을 느꼈다. 무신집권 시대 불교정화운동을 이끈 진정국사 천책(天頙, 1206~?)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속명이 신극정인 그는 20세에 급제했다. 천책은 천재적 문인이었다. “만약 문단의 저울대를 잡은 자에게 신라와 고려에서 3인을 고르게 한다면 최치원, 천책, 이규보가 그 머리가 될 것”이다. 정약용의 후대 평가이다.([여유당전서] 1집 14권)

그러나 천책은 유학의 가르침에 회의했다. “예로부터 유업(儒業)을 닦는 선비의 마음은 몸 밖으로 나와 억지로 장구를 지어내니, 기껏해야 사륙병려(四六騈儷)의 글장난일 뿐이었다. 문집을 저술하여 세상에 요란하게 내보인다 해도 이미 마음은 유탕하고 말은 번지르르하여 그 죄가 작지 않으니,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호산록])

1228년 23세의 천책은 만덕산 요세에게 출가했다. 요세는 불교 정화와 민중불교 운동인 백련결사의 개조다. 천책이 1266년부터 시작한 시사(詩社)인 이른바 연사(蓮社)에는 저명한 관인과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이장용, 유경(柳璥), 정가신 등이 그들이다. 유경의 시를 보자.

“밤마다 백련을 꿈꾸지 않은 날 없었건만 / 재상 되어 공명을 떨치고자 반생을 그르쳤네.”([동문선])

문무 최고위직을 한 몸에 누린 유경.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백련을 꿈꾸었다. 이런 정신적 분열은 진지한 고려의 지식인들에게 전형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성리학은 불교의 정신세계가 분열적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유교는 하나요, 불교는 둘이며, 우리 유교는 연속돼있고, 불교는 단절돼있다.”(정도전, [불씨잡변])

고려 불교의 상징 연복사를 둘러싼 이념투쟁

성리학이 고려에서 하나의 정신운동으로 꽃핀 것은 1367년 성균관이 설립되면서부터였다. 이색과 함께 문인 정몽주·정도전·이숭인·권근 등이 이곳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척불론의 선봉도 그들이었다.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이단이 날로 성하고 우리의 도는 날로 쇠잔해져서 백성들을 금수와 같은 지경에 몰아넣고 또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온 천하가 그 풍조에 휘말려 끝이 없으니, 아아 통탄할 일입니다. 그 누가 이를 바르게 하겠습니까?”(<삼봉집>)

이들은 척불을 시대적 소명으로 생각했다. 불교적 세계관을 바꾸지 않곤 정치적 변혁이 불가능할 뿐더러 무의미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건국에는 사상운동이 동반됐다. 한국사에서 정치 변동이 사상과 직접 연계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색은 불교에 유화적이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불경도 간행했다. 권근의 이색 행장에 따르면, “부처에게 아첨한다는 비방이 있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정몽주가 척불의 소명을 대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391년 척불논쟁의 직접적 원인은 공양왕의 불교 신앙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연복사 중창 문제였다. 공양왕은 이 일에 집착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양왕 2년(1390) 1월, 연복사 승려 법예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절 안에서 5층 탑전과 못 3개, 우물 9개소가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으니, 지금 탑전을 다시 짓고 못과 우물을 파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할 것(國泰民安)입니다.”([고려사])

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다. 공양왕은 즐거이 이를 수락했다. 고려왕조를 부지하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권근의 평가를 보자.

“연복사는 실로 도성 안 시가 곁에 자리 잡고 있다. … 집이 가장 커 1000여 칸이나 되는데, 안에 못 세 곳, 우물 아홉 곳을 팠다. 그 남쪽에 또한 5층탑을 세워 풍수설에 맞추었다. … 왕씨가 나라를 누린 500년 동안에 누차 전란을 겪었으니, 이 절의 흥폐가 한 차례만이 아니므로, 이 탑이 정확히 어느 때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공민왕 때 다시 영조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광승(狂僧) 장원심(長遠心)이 권귀에게 연줄을 대어 백성들을 징발하여 재목을 모았으나 결국에는 성사하지 못했다. 공양군이 장상(將相)들의 힘을 입어 조종의 왕업을 회복하고자 하여, 즉위 뒤부터 부처 섬기기를 더욱 힘써 이에 중 천규 등에게 명하여 공장을 모아 역사를 일으키도록 했다.”([양촌집] 연복사탑중창기)

연복사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듬해 919년 국가를 수호하고자 만든 10대 사찰의 하나였다. 도선이 비정한 비보사찰이다. 개경 궁궐 옆에 위치했으며, 나한전은 궁실보다 웅장했다. 정전 서쪽의 5층탑은 높이가 200척(60m)이 넘었다.([고려도경] 광통보제사)

연복사의 못과 우물, 탑이 중시된 것은 호국신앙 때문이다. 9정은 9룡이 사는 곳이다. 9룡은 부처와 정법을 수호하고 인간계를 진호하며, 제때 비를 내려 오곡을 풍성하게 한다. 또한 전쟁을 없애고, 모든 재앙을 소멸시킨다. 조선 태조 2년(1393) 완성된 거대한 탑은 신라의 황룡사 9층탑처럼 호국신앙의 상징이었다. 공민왕 때는 거창한 문수회와 담선법회가 자주 개최됐다. “임금과 신하가 마음이 정대해서 태평 세상을 이룩한다”는 것은 공양왕이 진실로 바랐던 바였다. 연복사는 고려 건국과 연관이 깊은 데다 고려왕조를 수호하는 대표적 선종 사찰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이 풍부했다.

고려말 불교의 사회·경제적 폐단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정치적으로 쟁점으로 부상된 적은 없었다. 이성계파의 입장에서도 고려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불교계와 제2전선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이성계는 오히려 불교계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보우와 나옹의 후원자였고, 나옹의 수제자 무학대사 자초와 천태종 대선사 신조(神照)를 적극적 지지자로 확보하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젊은 시절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설화가 남아 있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의 거목인 원의 지공에게 배웠으며, 지공의 또 다른 제자이자 고려 선종계의 지도자였던 나옹화상의 수제자가 됐다.

1392년 10월 11일, 이성계는 자신의 생일날 무학대사를 개경에 불러 왕사로 임명했다. 아울러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전불심인변지부무애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묘엄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扶無礙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라는 거창한 관직과 명호를 하사해, 불교계를 총괄하는 전권을 부여했다. 그 자리에는 “양종(兩宗)과 천태종·교종과 선종 오교(五敎)의 여러 절의 승려들이 다 있었다.”([동문선])

태조 왕건 둘러싼 신불과 척불 사이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김자수의 묘. 김자수는 1391년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공양왕에 대항해 척불 상소를 올렸다. / 사진:문화재청
불교 교단을 새로운 왕조의 정치적 틀 속에 편입하기 위한 집회였고, 그 역할을 무학대사에게 맡겼던 것이다. 신조는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고, 일찍부터 이성계의 휘하에 종사했다. 위화도회군 때는 장상들과 함께 회군을 모책해, 그 공으로 1390년 공신에 책봉됐다.

이 엄혹한 시기에 왜 갑자기 불교가 국가적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일까? 그것은 정몽주의 입장 변화와도 유관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면적인 개혁을 지지해 우왕, 창왕의 처형에도 동의했던 그가 이제 공양왕과 제휴해 혁명파를 제거하고자 했다. 그런데 정몽주가 공양왕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고려의 정신세계를 바꿀 수 있을까?

정도전은 아마도 이 점을 정몽주에게 제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몽주로서도 공양왕의 불교 신앙을 옹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척불논쟁은 정몽주의 정신적 정체성에 대한 냉정한 질문이기도 하였다. 왕의 정치적 정통성, 그리고 성리학의 문명적 정통성, 그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이 때문에 1391년의 다소 갑작스런 척불논쟁은 혁명파의 정치적 책략으로도 읽힌다. 당시 척불 상소의 핵심 주장 중 하나는 연복사의 중창이 태조 왕건의 유훈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김자수 성균관 대사성은 공양왕이 “신라와 같이 많이 불사를 일으켜 나라를 하게 하지 말라”고 한 [훈요십조]를 어겼다고 주장했다.

성균생원 박초는 왕건의 불교입국론을 부정하고, 왕건이 불교를 전란기의 임시방편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생각하건대 우리 태조께서 삼한을 통일하신 초기에 그 적폐를 크게 징계하여, 후대의 군신들이 사사로이 원찰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이에 태사 최응이 불법(佛法)을 제거할 것을 청하니, 태조께서 말씀하시기를, ‘신라 말기에 불교의 설이 골수에 들어갔으므로 사람들마다 생사와 화복이 모두 부처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삼한이 겨우 통일되어 인심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는데, 만약 갑자기 불교를 혁파한다면 반드시 놀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6월)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공양왕이 태조의 유훈을 앞장서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하께서는 영명한 자질을 가지고서도 불교와 참위의 설에 미혹되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며, 나라의 임금이라는 존귀한 몸으로써 친히 회암사에 행차하여 부모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교설을 주창하고, 불충하고 불효하는 풍속을 이루어, 우리 삼강오상의 법을 무너뜨리셨습니다. … 사람들의 힘을 다하게 하고 사람들의 원망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연복사 탑묘의 공사를 하는 것에 대해,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며 사대부와 백성이 실망하였습니다.” 반(反)불교론자들은 왕건의 유훈을 척불의 논리로 변용하고 있다.

이는 곧 반론을 야기했다. 전 전의부정 김전(金琠)은 불교 존숭이 왕건의 유훈이라고 주장했다.

“태조께서 왕업을 개창하시면서 산수의 역행과 순행을 보시고 지맥이 이어진 것과 끊어진 것을 살피시어, 사찰을 창건하고 불상을 지으신 뒤, 백성과 전지를 지급하여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셨으니, 이것이 삼한의 토대가 되는 사업의 근본입니다. 근래에는 식견이 없는 승려의 무리들이 창업의 뜻을 돌아보지 않고, 백성의 땅에서 나는 산물을 거두어 스스로 그 사업을 경영하면서, 위로는 부처를 공양하지도 않고 아래로는 승려들을 기르지도 않습니다. 아아. 그 무리가 스스로 그 법을 멸망시키는 것이 심합니다. 오늘날에는 광망한 유자(儒者)로서 식견이 얕고 천박한 자들이 삼한의 대체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사찰을 부수고 승려를 배척하는 것을 뜻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 성조께서 창업하신 깊은 지혜가 도리어 천박한 유자의 계책만 못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성조의 넓은 바람을 받들어 사찰을 다시 지으시고 전정을 더하시어, 이로써 석가의 가르침을 일으키시기 바랍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6월)

분노한 왕은 급진 척불론자인 김초 등을 죽이고자 했다. 그러나 죄목이 불분명했다. 좌대언 이첨이 조언을 했다.

“우리 태조 이래 대대로 불법을 숭상했는데 지금 김초가 이를 배척하니, 이는 선왕의 성전(成典)을 깨뜨리고 허무는 일입니다. 이로써 죄를 주면, 이유가 없음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척불론자 구원한 정몽주


▎개성에 위치한 연복사의 종. 연복사는 고려 10대 사찰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병조좌랑 정탁이 처벌에 반대했다. 또한 ‘선왕의 성전’이 뜻하는 의미를 바꾸어, 오히려 공양왕을 공격했다.

“상께서 선왕의 성전을 깨뜨리고 허물었다 하여 장차 극형에 처하려 하시니,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하여 이를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의 성헌을 귀감으로 삼아 영원히 허물이 없게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선왕의 성헌이란 삼강오륜에 지나지 않는데 불교에서 모두 이를 배척하니, 김초가 선왕의 성전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 스스로 그것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7월)

공양왕과 이첨은 선왕을 왕의 조상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정탁은 유교의 성인으로 인식했다. 이것은 왕조의 정치적 정당성이 혈연적 정통성에 있는지, 아니면 문명적 정통성에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조선은 양자를 공존시킨다. 전자는 종묘로서, 후자는 문묘로서 대표된다. 그런데 박초 등의 상소는 양자를 결합시키고자 한다. “태조의 성덕과 신공은 천심과 인심에 순응하여, 요·순과 같은 마음으로 탕왕과 무왕의 행동을 본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왕건을 요순, 탕무와 연결해 혈연과 문명을 결합한 것이다.

정몽주라면 어떤 입장을 택했을까? 그는 먼저 척불론의 입장에 서서, 척불론자에 대한 용서를 구했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정치의 믿음 때문이다. 처벌한다면 왕의 말은 믿음을 잃게 된다. “신의라는 것은 임금의 큰 보배입니다. 나라는 민(民)에게서 보전되고 민은 신의에서 보전되는 법입니다.”

둘째, 척불은 유학자의 소명이다. 셋째, 김초 등은 광망한 생원일 뿐이니 관대하게 용서해야 한다. 정몽주는 결과적으로 척불론자들을 구원했다.

정치투쟁에서 패배한 정도전

그러나 공양왕의 불교신앙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불교에 대한 유교의 비판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척불론자들을 하잘 것 없는 미친 유생으로 격하했다. 그것은 척불론자를 구하기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시에 이는 그가 처한 상황의 이중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는 공양왕과 제휴하면서도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논쟁은 정몽주를 분열시키고 혁명파와 싸울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정몽주가 신속히 이 논쟁을 종식시키려 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몽주에게는 더 시급한 일이 있었다. 김저사건, 윤이·이초사건 등이 초래한 옥사를 하루 빨리 정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척불논쟁이 정국의 프레임을 장악하면서 그의 계획은 계속 지체되고 있었다. 그것은 정도전이 노린 또 하나의 노림수로 볼 수 있다.

유백순과 왕담의 의구심이 표출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7월 12일, 이들은 제2의 무신 난을 걱정하며, “지금 유자 정도전 등이 국가의 권력을 농단하고자 모의하고 있다. 만약 과거와 같은 난이 일어난다면 저희들이 그 화를 입을까 두렵다”라고 말했다.

5월 이후 혁명파의 강한 공세와 척불논쟁의 배후에는 정도전의 무서운 음모가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박초 등의 척불상소는 정도전을 유교문명의 사도로 찬양하고 있다. “정도전은 하늘과 사람의 성명(性命)의 근원을 드러내어,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학을 앞장서 부르짖었으며, 불교가 오랜 세월 전해온 거짓말을 물리치고 우리나라에 길이 전해온 미혹을 깨뜨렸습니다. 이단을 배척하고 거짓된 말을 종식시켰으며,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참된 유학자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이는 하늘이 전하께 고요·이윤·부열 같이 보좌할 인물을 줌으로써, 국가 중흥의 때에 요·순 및 삼대와 같은 융성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고려사> 김자수전) 유학의 종장이 이색이나 정몽주가 아니라 정도전이며, 국시를 제시할 수 있는 자도 정도전뿐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은 젊은 성리학자들로부터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한 듯하다.

성균관 학생들이 정쟁에 개입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조선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런 정치문화였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사실 정도전은 위화도회군 후의 거친 정쟁에서 공개적으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1391년 5~7월에 걸친 정치투쟁에서는 전면에 직접 나섰고, 과격한 언사를 꺼리지 않았으며, 스승을 죽이라는 요구도 서슴지 않았다. 사력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공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몽주가 예봉을 봉쇄하고 재빨리 사태를 수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성계가 혁명파의 공세를 받쳐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칼날을 예리하게 세웠던 척불론은 방향과 에너지를 상실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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