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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출가’를 대체하다이런 와중에 갑자기 척불논쟁이 제기됐다. 논쟁의 서막을 연 것은 성균관 대사성 김지수였다. 구언교서에 대한 답으로 그는 먼저 왕의 모친에 대한 효성, 그리고 세자 책봉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세 번째로 공양왕이 불교 신앙에 빠져 국가 재정을 고갈시키고 백성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전하께서는 즉위 초에 연복사의 탑을 수리하고 확장하면서 민가 30~40호를 파괴하셨는데, 이제 또다시 불교를 크게 일으켜 토목공사를 번거롭게 시작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농사일이 바야흐로 바쁠 때인데, 교주도 전체가 나무를 베고 목재를 운반하느라 사람과 가축이 모두 초췌해졌으나 일찍이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 사후의 복을 바라면서 현재의 생령들에게 실질적 화를 끼치고 계시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렇게 하셔서야 되겠습니까.”([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5월)척불론은 고려 초기부터 존재했다. 성리학이 유입되기 전에 유교의 관점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불교를 검토한 것은 최승로였다. 그의 요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제왕과 백성의 불교 신앙은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왕은 백성의 힘과 재물을 쓰기 때문이다. 둘째, 불법은 내세를 위한 것이고 금생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요, 유교는 치국의 근원이다.([시무28조]) 그러나 역대 고려의 국왕들은 불교 의례에 재정을 과도하게 낭비했으며, 정치적 노력보다 불공에 더 힘을 기울였다. 불교가 국가에 도움이 되기보다 짐이 된 것이다.최승로의 이원론은 이론적 수준이 높지 않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현명한 것이다. 형이상학 차원에서 불교 비판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성리학의 유입 이후였다. 성리학은 유학이 불교에 대항해 1000년간 숙고를 거듭한 결과였다. 불교는 기원전 2세기 전한시대에 중국에 들어왔다. 중국인들은 불교의 심오한 형이상학에 매혹됐다. 그러나 곤란했던 것은 진리가 가족과 국가 밖에 존재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이었다. ‘출가’란 개념이 그것이다. 가족과 국가는 중국인들이 알았던 유일한 세계였다. 어떻게 가족과 국가 밖에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질문이 1000년간 계속됐다.그러나 중국 고유의 사상적 역량으로는 그 질문에 근본적으로 답할 수 없었다. 무력감이 중국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주자는 그런 상황에 분노를 느꼈다.“진·한 이래로 성인들이 전한 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 끊어져 버리고, 유학자들은 글을 짓고 시를 암송하는 것에만 공력을 기울여, 그들이 남긴 것은 일상의 비루하고 깊이 없는 내용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풍조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노자나 불교의 가르침에서 도리를 구해보고자 했던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참된 도리와 그들의 거짓 가르침이 서로 보는 바가 다르고, 본질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의 결과가 다름으로 해서, 진리의 가르침은 숨겨지고 어두워져, 그렇게 장장 1000년을 흘러왔습니다.”([주희집])중국 유학이 불교에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은 천리(天理)의 개념에 의해 코스몰로지를 완성했기 때문이었다. 천리 단 하나로 인간, 가족, 국가, 그리고 우주 전체를 설명할 수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하나의 사슬처럼 연결돼있다. 이제 가족과 국가를 떠나지 않고도 자기완성부터 평천하까지 가능하다. 유학은 비로소 불교의 출가를 당당히 비판할 수 있게 됐다.“불교, 도교의 이론은 깊이 따지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가르침이 삼강오륜을 폐지하려고 한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최고의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니 그 이외의 일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주자어류])
유교와 불교는 공존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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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백성을 구하기 위한 전쟁‘정의의 전쟁’(just war)은 불도라는 것이다. 그런데 불살생은 불교의 절대정신이다. 그렇다면 불도와 왕도는 공존할 수 없는가? 이엄은 ‘홍제’라는 사상으로 이 갈등을 넘어선다. 정치적 영역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것이다. 원광법사의 살생 유택과 같다. 그런데 어떤 살생은 더 큰 구원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불교는 위태로운 경계선 위에 놓인다.고려의 유교 지식인들도 정신적 갈등을 느꼈다. 무신집권 시대 불교정화운동을 이끈 진정국사 천책(天頙, 1206~?)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속명이 신극정인 그는 20세에 급제했다. 천책은 천재적 문인이었다. “만약 문단의 저울대를 잡은 자에게 신라와 고려에서 3인을 고르게 한다면 최치원, 천책, 이규보가 그 머리가 될 것”이다. 정약용의 후대 평가이다.([여유당전서] 1집 14권)그러나 천책은 유학의 가르침에 회의했다. “예로부터 유업(儒業)을 닦는 선비의 마음은 몸 밖으로 나와 억지로 장구를 지어내니, 기껏해야 사륙병려(四六騈儷)의 글장난일 뿐이었다. 문집을 저술하여 세상에 요란하게 내보인다 해도 이미 마음은 유탕하고 말은 번지르르하여 그 죄가 작지 않으니,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호산록])1228년 23세의 천책은 만덕산 요세에게 출가했다. 요세는 불교 정화와 민중불교 운동인 백련결사의 개조다. 천책이 1266년부터 시작한 시사(詩社)인 이른바 연사(蓮社)에는 저명한 관인과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이장용, 유경(柳璥), 정가신 등이 그들이다. 유경의 시를 보자.“밤마다 백련을 꿈꾸지 않은 날 없었건만 / 재상 되어 공명을 떨치고자 반생을 그르쳤네.”([동문선])문무 최고위직을 한 몸에 누린 유경.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백련을 꿈꾸었다. 이런 정신적 분열은 진지한 고려의 지식인들에게 전형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성리학은 불교의 정신세계가 분열적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유교는 하나요, 불교는 둘이며, 우리 유교는 연속돼있고, 불교는 단절돼있다.”(정도전, [불씨잡변])
고려 불교의 상징 연복사를 둘러싼 이념투쟁성리학이 고려에서 하나의 정신운동으로 꽃핀 것은 1367년 성균관이 설립되면서부터였다. 이색과 함께 문인 정몽주·정도전·이숭인·권근 등이 이곳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척불론의 선봉도 그들이었다.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이단이 날로 성하고 우리의 도는 날로 쇠잔해져서 백성들을 금수와 같은 지경에 몰아넣고 또 도탄에 빠뜨렸습니다. 온 천하가 그 풍조에 휘말려 끝이 없으니, 아아 통탄할 일입니다. 그 누가 이를 바르게 하겠습니까?”(<삼봉집>)이들은 척불을 시대적 소명으로 생각했다. 불교적 세계관을 바꾸지 않곤 정치적 변혁이 불가능할 뿐더러 무의미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건국에는 사상운동이 동반됐다. 한국사에서 정치 변동이 사상과 직접 연계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색은 불교에 유화적이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불경도 간행했다. 권근의 이색 행장에 따르면, “부처에게 아첨한다는 비방이 있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정몽주가 척불의 소명을 대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1391년 척불논쟁의 직접적 원인은 공양왕의 불교 신앙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연복사 중창 문제였다. 공양왕은 이 일에 집착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공양왕 2년(1390) 1월, 연복사 승려 법예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절 안에서 5층 탑전과 못 3개, 우물 9개소가 오랫동안 허물어져 있으니, 지금 탑전을 다시 짓고 못과 우물을 파면 나라와 백성이 편안할 것(國泰民安)입니다.”([고려사])도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른 것이다. 공양왕은 즐거이 이를 수락했다. 고려왕조를 부지하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권근의 평가를 보자.“연복사는 실로 도성 안 시가 곁에 자리 잡고 있다. … 집이 가장 커 1000여 칸이나 되는데, 안에 못 세 곳, 우물 아홉 곳을 팠다. 그 남쪽에 또한 5층탑을 세워 풍수설에 맞추었다. … 왕씨가 나라를 누린 500년 동안에 누차 전란을 겪었으니, 이 절의 흥폐가 한 차례만이 아니므로, 이 탑이 정확히 어느 때 파괴되었는지 알 수 없다. 공민왕 때 다시 영조하려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 광승(狂僧) 장원심(長遠心)이 권귀에게 연줄을 대어 백성들을 징발하여 재목을 모았으나 결국에는 성사하지 못했다. 공양군이 장상(將相)들의 힘을 입어 조종의 왕업을 회복하고자 하여, 즉위 뒤부터 부처 섬기기를 더욱 힘써 이에 중 천규 등에게 명하여 공장을 모아 역사를 일으키도록 했다.”([양촌집] 연복사탑중창기)연복사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이듬해 919년 국가를 수호하고자 만든 10대 사찰의 하나였다. 도선이 비정한 비보사찰이다. 개경 궁궐 옆에 위치했으며, 나한전은 궁실보다 웅장했다. 정전 서쪽의 5층탑은 높이가 200척(60m)이 넘었다.([고려도경] 광통보제사)연복사의 못과 우물, 탑이 중시된 것은 호국신앙 때문이다. 9정은 9룡이 사는 곳이다. 9룡은 부처와 정법을 수호하고 인간계를 진호하며, 제때 비를 내려 오곡을 풍성하게 한다. 또한 전쟁을 없애고, 모든 재앙을 소멸시킨다. 조선 태조 2년(1393) 완성된 거대한 탑은 신라의 황룡사 9층탑처럼 호국신앙의 상징이었다. 공민왕 때는 거창한 문수회와 담선법회가 자주 개최됐다. “임금과 신하가 마음이 정대해서 태평 세상을 이룩한다”는 것은 공양왕이 진실로 바랐던 바였다. 연복사는 고려 건국과 연관이 깊은 데다 고려왕조를 수호하는 대표적 선종 사찰이라는 정치적 상징성이 풍부했다.고려말 불교의 사회·경제적 폐단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정치적으로 쟁점으로 부상된 적은 없었다. 이성계파의 입장에서도 고려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불교계와 제2전선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이성계는 독실한 불교도였다. 이성계는 오히려 불교계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보우와 나옹의 후원자였고, 나옹의 수제자 무학대사 자초와 천태종 대선사 신조(神照)를 적극적 지지자로 확보하고 있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젊은 시절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설화가 남아 있다. 그는 당시 동아시아 불교계의 거목인 원의 지공에게 배웠으며, 지공의 또 다른 제자이자 고려 선종계의 지도자였던 나옹화상의 수제자가 됐다.1392년 10월 11일, 이성계는 자신의 생일날 무학대사를 개경에 불러 왕사로 임명했다. 아울러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전불심인변지부무애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묘엄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扶無礙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라는 거창한 관직과 명호를 하사해, 불교계를 총괄하는 전권을 부여했다. 그 자리에는 “양종(兩宗)과 천태종·교종과 선종 오교(五敎)의 여러 절의 승려들이 다 있었다.”([동문선])
태조 왕건 둘러싼 신불과 척불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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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불론자 구원한 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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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투쟁에서 패배한 정도전그러나 공양왕의 불교신앙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또한 불교에 대한 유교의 비판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척불론자들을 하잘 것 없는 미친 유생으로 격하했다. 그것은 척불론자를 구하기 위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이다.동시에 이는 그가 처한 상황의 이중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정치적으로는 공양왕과 제휴하면서도 사상적으로는 성리학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논쟁은 정몽주를 분열시키고 혁명파와 싸울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정몽주가 신속히 이 논쟁을 종식시키려 한 것은 그 때문이다.정몽주에게는 더 시급한 일이 있었다. 김저사건, 윤이·이초사건 등이 초래한 옥사를 하루 빨리 정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척불논쟁이 정국의 프레임을 장악하면서 그의 계획은 계속 지체되고 있었다. 그것은 정도전이 노린 또 하나의 노림수로 볼 수 있다.유백순과 왕담의 의구심이 표출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7월 12일, 이들은 제2의 무신 난을 걱정하며, “지금 유자 정도전 등이 국가의 권력을 농단하고자 모의하고 있다. 만약 과거와 같은 난이 일어난다면 저희들이 그 화를 입을까 두렵다”라고 말했다.5월 이후 혁명파의 강한 공세와 척불논쟁의 배후에는 정도전의 무서운 음모가 있다고 본 것이다. 실제로 박초 등의 척불상소는 정도전을 유교문명의 사도로 찬양하고 있다. “정도전은 하늘과 사람의 성명(性命)의 근원을 드러내어,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학을 앞장서 부르짖었으며, 불교가 오랜 세월 전해온 거짓말을 물리치고 우리나라에 길이 전해온 미혹을 깨뜨렸습니다. 이단을 배척하고 거짓된 말을 종식시켰으며,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참된 유학자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이는 하늘이 전하께 고요·이윤·부열 같이 보좌할 인물을 줌으로써, 국가 중흥의 때에 요·순 및 삼대와 같은 융성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고려사> 김자수전) 유학의 종장이 이색이나 정몽주가 아니라 정도전이며, 국시를 제시할 수 있는 자도 정도전뿐이라는 것이다. 정도전은 젊은 성리학자들로부터 상당한 추종자를 확보한 듯하다.성균관 학생들이 정쟁에 개입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조선에서는 그것이 자연스런 정치문화였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사실 정도전은 위화도회군 후의 거친 정쟁에서 공개적으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1391년 5~7월에 걸친 정치투쟁에서는 전면에 직접 나섰고, 과격한 언사를 꺼리지 않았으며, 스승을 죽이라는 요구도 서슴지 않았다. 사력을 다한 것이다.그러나 그 공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몽주가 예봉을 봉쇄하고 재빨리 사태를 수습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성계가 혁명파의 공세를 받쳐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칼날을 예리하게 세웠던 척불론은 방향과 에너지를 상실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