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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9)] 내륙국가 피렌체, 금융과 산업 양 날개로 날다 

메디치 가문이 낳은 르네상스의 밀알 

초기 금융자본주의의 승자로 자리매김, 섬유산업도 일으켜
번영에 힘입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산실로… 진취적 정신 상실하며 몰락


▎피렌체의 랜드마크인 두오모 성당.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 나오는 로맨틱한 공간으로 각인된다. / 사진:위키피디아
베네치아는 바다에서 솟아오른 세력을 상징한다. 제노바는 배산임수의 항구국가다. 그리고 피렌체는 이탈리아 반도의 심장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내륙 도시국가다. 중세 중·북부 이탈리아에서 발전한 도시국가의 자본주의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꼽는 사례가 베네치아와 제노바다. 두 도시국가의 상인들은 지중해를 따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유럽을 연결하는 교역의 그물을 치며 해양 자본주의를 대표했다.

반면,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륙에서 꽃피운 자본주의를 상징한다. 사실 이탈리아 중·북부에는 수많은 도시국가가 존재했다. 이들은 베네치아나 제노바, 또는 피사를 통해 들어온 바다의 물건들을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 샹파뉴 시장을 비롯해 유럽 대륙으로 운반, 판매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2세기 말 중부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성인의 이름은 ‘프랑스인’이라는 의미다. 아버지가 프랑스와 실크 무역을 하는 상인이어서 붙게 된 이름이다. 프랑스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로마까지 가는 길은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 즉 프랑스 길이라 불렸고 이 지역에서 밀라노·피렌체·시에나 등의 내륙 도시 상인들이 활발하게 교역 활동을 했다. 내륙 무역이 처음에는 프란체스코의 아버지처럼 상인들이 이동하는 패턴이었지만 점차 정주(定住) 상인 형태로 발전하면서 다수의 지점을 열어 회사를 구성했다.

금융 자본주의와 메디치가의 부상

내륙 자본주의는 해양 교역에 비해 두 가지 특징을 갖는다.

우선 정주 상인의 네트워크에 의존하면서 신뢰에 기초한 회사의 네트워크를 발전시켜 금융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실제 강이나 육지에서 이동하려면 통과하는 지역의 군주나 강도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바다를 항해하는 것보다 더 위험했다. 자연히 금·은의 화폐를 직접 나르기보다 신뢰에 기초한 거래를 터는 것이 필요해졌다.

또 다른 특징은 무역에 주로 의존했던 해양 자본주의와 달리 내륙에서는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베네치아, 제노바 그리고 피사는 바다를 제패한 뒤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어도 무역만으로 충분히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반면 수많은 도시가 경쟁하는 내륙에서는 상업만으로 생존하기가 어려웠기에 직물 산업이나 무기 생산 등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드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됐다.

피렌체는 위의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결합해 이탈리아 금융 및 산업 자본주의의 대표주자 역할을 했다. 피렌체보다 일찍 내륙에서 금융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도시국가로는 피아첸차나 시에나를 들 수 있다. 피아첸차와 시에나는 각각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서 주요 교역로의 교차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또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북부의 밀라노도 빼놓을 수 없다.

반면, 피렌체는 금융과 산업을 절묘하게 결합했다. 게다가 피렌체는 금융업을 통해 막대한 재력을 쌓은 뒤 이를 바탕으로 최고의 영향력을 행세했던 메디치 가문과 운명을 함께하면서 자본주의의 핵심 요소를 발전시켜 나간 대표적인 도시국가가 됐다.

유럽 최고의 천을 생산하는 산업 자본주의


▎르네상스의 걸작 [신곡]을 쓴 단테의 조각상. / 사진:키 피 디 아
이탈리아 금융 자본주의의 시대를 연 것은 11~12세기 피아첸차의 상인들이었다. 피아첸차는 이탈리아 북부를 관통하는 포 강과 유럽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비아 프란치제나의 교차지점이라 이 도시의 상인들은 일찍이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이들은 특히 제노바가 동방에서 가져온 상품을 유통시켰다. 동시에 어음이나 교환증서 등을 활용해 금융업을 발전시키는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 보리니·카포니·스코티 등 피아첸차 금융업자들은 파리에 정주하면서 프랑스 왕실과 거래를 튼 후 귀화까지 해 프랑스 자본의 모태가 되었다. 실제 13세기 말 프랑스 최고의 부자는 피아첸차 출신의 간돌포 델리 아르첼리였다.

13세기가 되면 서서히 시에나의 상인과 금융업자들이 부상한다. 시에나는 비아 프란체지나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가톨릭 교회의 중심인 로마와 가장 가까웠다. 시에나 상인들은 북유럽 플랜더스의 직물을 수입해 이탈리아에 유통시켰다. 동시에 로마 가톨릭교회 재정을 담당함으로써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시에나는 피아첸차보다 금융 자본주의의 시작은 늦었지만 톨로메이나 부온시뇨리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금융회사를 일궜다.

피렌체는 13세기부터 서서히 피아첸차나 시에나와 경쟁하면서 금융산업을 발전시켰다. 피렌체의 금융회사들은 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유럽 전역에서 활동을 벌였다. 무역을 동반하는 금융가들은 당시 전쟁 벌이기를 좋아했던 군주들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챙겼다.

14세기 피렌체의 페루치 회사는 10만 플로린의 자본금을 자랑하는 금융 공룡이었다. 이 회사는 페루치 가문이 중심을 이루기는 했지만 다른 동업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이들은 투자한 자금의 규모에 따라 이익 분배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연 8% 정도의 고정 이자를 받을 수 있었다. 페루치는 베네치아·제노바·나폴리 등 이탈리아 전역에 지점을 두고 있었다. 해외에는 아비뇽·브뤼헤·런던·튀니스·마요르카·키프로스 등에도 지점을 열었다.

초기 금융 자본주의의 맹점은 한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전체 회사가 파산을 피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페루치 회사는 런던 지점과 나폴리 지점이 각각 영국과 나폴리 왕에게 빌려준 자금을 회수하지 못하자 파산하고 말았다. 같은 피렌체 회사인 바르디·보나코르시·아치아올리 등도 비슷한 이유로 14세기에 파산했다.

메디치 가문과 회사가 부상하게 된 데에는 피렌체 경쟁 회사들의 파산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메디치 은행은 1397년부터 17세기까지 유럽을 대표하는 금융 회사로 운영됐다. 특히 시에나 금융회사에 이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정까지 담당하면서 메디치의 영향력은 하늘을 찌르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메디치 은행은 피렌체를 중심으로 로마·밀라노·베네치아·브뤼헤·아비뇽 등에 지점을 두고 활동했다.

또 메디치 은행은 자본주의 발전에 오래 기여할 혁신들을 도입했다. 주요 지점 사이에 정기 우편 시스템을 도입해 정보의 유통이 자본주의의 신경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피렌체에서 완성된 복식기장법(double entry bookkeeping)은 메디치 은행을 통해 베네치아와 제노바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확대됐다.

메디치 은행은 또 교환 증서의 보편화에도 기여했다. 특히 메디치 회사는 유럽 경제사에서도 드물게 꼼꼼한 자료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당장 돈을 버는 일뿐 아니라 기록을 통해 미래를 구상하고 준비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길을 밟았다는 의미다.

메디치 가문, 나아가 피렌체가 성공한 비결은 금융업과 산업 투자를 동시에 추진했다는 점이다. 피아첸차나 시에나는 상업과 금융에서 유럽을 지배할 만한 능력을 축적했지만 사업의 다변화에는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부 금융회사가 파산을 선고하면 회복하거나 만회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반면 피렌체는 금융 자본주의와 동시에 산업을 키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메디치 가문은 은행뿐 아니라 직물 산업을 동시에 벌였다.

중세에 가장 중요한 산업은 다양한 직물을 생산하는 섬유산업이었다. 유럽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역의 축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동방에서 가져온 사치품과 북유럽 플랜더스에서 생산한 최고의 모직물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양모로 짠 모직은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상품이었다. 따뜻한 이불과 옷을 만드는데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시아의 향신료나 아프리카의 금과 상아를 팔아 북유럽 모직을 수입하는 일이 이탈리아 상업 자본주의의 먹거리였다.

하지만 중개 무역만으로 생존하기에 내륙 도시국가는 한계가 있었다. 피렌체에서는 자체적인 직물 산업을 육성하면서 자본주의를 산업차원으로 한 단계 높였다. 피렌체 상인들은 당시 최고 품질인 프랑스와 플랜더스의 모직을 수입해 아시아에서 들여온 재료로 붉고 푸르고 노란색의 화려한 천을 만들어냈다. 제노바 상인들이 즐겨 거래하던 명반은 이처럼 다양한 색상으로 염색이 잘되게 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 피렌체에서 화려하게 염색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모직은 유럽 최고의 천이 됐던 것이다.

중세 시대에 의류 유행이 바뀐 것도 피렌체로서는 행운이었다. 전통적으로 귀족이나 부자들은 가죽과 털옷을 즐겨 입었는데, 이 산업은 피렌체에서 가까운 피사가 전문이었다. 그런데 중세 후기부터는 사회 지도층이 가죽이나 털보다는 천으로 만든 옷을 선호하기 시작했고 피렌체의 섬유산업은 그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최초의 노동 혁명?


▎아르테 델라 라나의 문장. 피렌체 모직 길드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피렌체에서는 다양한 직능을 조직한 길드를 ‘아르테’라고 불렀는데 1206년에는 환전상들의 모임인 ‘아르테메르카티’가, 그리고 모직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는 1212년에 구성됐다. 또 금융과 모직산업 말고도 다른 다양한 직종의 길드가 존재해 의사·수예품·식품점·모피 등의 길드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이탈리아의 다양한 도시국가를 비교하다 보면 피렌체와 유사한 사례로 밀라노를 꼽을 수 있다. 밀라노는 포 강 유역의 평야와 알프스 산맥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 지리적으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중간에 있다. 밀라노는 내륙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면서 피렌체 못지않은 섬유산업을 키웠다. 밀라노의 모직물과 마직물, 의류와 실크산업은 중세에 크게 성장했고 철로 만든 무기 또한 유럽에서 유명세를 떨쳤다. 그러나 밀라노는 피렌체와는 달리 금융업은 부수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정치 체제는 일반적으로 상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하지만 다양성도 존재했다. 베네치아의 경우 귀족과 상인의 계급이 서로 융합해 강력한 집단 지도체제를 수 세기 동안 운영했다. 반면 제노바는 주요 가문이 서로 견제하고 권력 투쟁을 벌이느라 정치 체제가 무척 취약했다. 내륙국가 밀라노의 경우 전쟁 귀족인 비스콘티 가문이 왕국과 유사한 세습 체제를 만들어 지배했다.

13세기 피렌체가 이탈리아 무대에서 성장하기 시작할 무렵의 정치체제는 특수했다. 피렌체에서는 말을 타고 무기를 다루는 귀족들을 도시의 정치에서 배제하면서 부유한 상인 중심의 체제를 만들었다. 위에서 살펴본 직능 조직인 길드가 대표를 뽑아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베네치아의 체제와 상당히 유사했다. 주요 메이저 아르테라고 할 수 있는 금융이나 산업자본의 대표들이 번갈아 가면서 도시국가의 정치를 주도했다.

문제는 시민사회의 다수를 형성하는 소규모나 중하층 아르테에서는 불만이 누적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주요 아르테와 달리 국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어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378년 7월에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기록할 만한 노동혁명이 일어난다. 일명 치옴피의 난인데, 치옴피(Ciompi)란 모직공장에서 양의 털을 빗질하는 단순 노동자들을 지칭하는 단어다. 노동자들은 도시 국가의 정부 청사를 점령한 뒤 민중 정부를 세웠다. 물론 이 혁명이 성공한 것은 치옴피뿐 아니라 도시의 서민층을 형성하는 시민들이 대거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푸줏간, 구둣가게, 철물점, 벽돌공, 목수 등 정부에서 제외된 중소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다수 참여했다.

하지만 민중 정부는 오래 가지 못했다. 일단 정권을 잡았지만 내부적으로 자영업의 마이너 아르테를 구성하는 시민 계층과 노동자들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大) 자본가들은 도시를 떠나고 공장 문을 닫아 노동자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다. 결국 같은 해 9월에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거리에서 충돌했고 결국 강경 노동자 세력은 패배한 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주요 노동자 지도자들은 처형을 당했고 점진적으로 피렌체 정치는 대자본 중심으로 운영되는 과두제의 성향을 강화했다.

15세기 전반에는 알비치 가문이 강력한 정권을 형성했고, 그 뒤에는 메디치 가문이 서서히 등장하면서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메디치가는 치옴피의 난에서 노동자와 소시민의 편에 섰던 ‘민주적 정통성’을 내세워 인기가 많았고 1434년에는 코시모 데 메디치가 권력을 잡음으로써 피렌체의 정치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초기의 메디치 가문은 결코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공화국과 시민의 자유를 존중한다며 정부의 공식 직함을 갖는 것도 피했다. 하지만 피렌체를 지배하는 것이 메디치 가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우여곡절은 존재했지만 메디치가는 16세기 토스카나 공작으로 인정받아 피렌체의 세습 군주가 됐고 1723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했다. 메디치는 또 가문에서 여러 명의 교황을 배출한 것은 물론 프랑스 왕실로 두 명의 딸을 시집보내는 등 유럽 정치의 핵심적인 가문으로 부상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바다로 나가 대륙을 뛰어 넘는 해양제국을 건설했다. 내륙에 위치한 도시국가들에게는 이런 해양제국보다는 주변의 도시국가들을 흡수하는 경향이 더 일반적이었다. 특히 북부의 밀라노와 중부의 피렌체는 점차 주변 도시국가들을 지배하면서 도시국가에서 지역국가(Regional State)로 발전하는 양상을 띠었다.

도시국가에서 지역국가로


▎피렌체 우피치미술관에 소장된 보티첼리의 명화 ‘비너스의 탄생’. / 사진:위키피디아
피렌체는 14세기에 토스카나 지방에 있는 주변 도시국가로 영향력을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피스토이아·프라토·산지미냐노·산미니아토·볼테라·아레초·코르토나 등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도시국가들이 하나 둘씩 피렌체의 지배 아래 편입됐다. 토스카나에서 피렌체로부터 독립을 유지한 것은 루카와 시에나였는데, 둘 다 비아 프란치제나에 위치한 상업도시들이었다. 시에나는 사실 이미 비스콘티 가문의 지배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피렌체로부터의 독립은 큰 의미가 없었다.

15세기 초가 되면 피렌체는 오랜 염원이었던 바다로 진출하게 된다. 1406년 피사를 점령함으로써 피사의 항구를 통해 티레니아 해로 나가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피사의 항구는 모래가 쌓이면서 점차 사용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피렌체는 이웃 제노바에게 10만 플로린을 주고 리보르노 항을 사야만 했다. 피사의 조선산업과 해양술을 이어 받은 피렌체는 이제 바다로 나가 베네치아나 제노바와 경쟁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피렌체는 베네치아나 제노바보다 후발주자였지만 해상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하면서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이베리아 반도의 세비야와 리스본에 거점을 두면서 북해까지 진출, 플랜더스 지역의 시장과 항로를 운영했다. 일례로 콜럼버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왕을 대표해 1520년대 플로리다부터 뉴욕까지 항해하면서 지금의 미국을 탐험한 항해사는 바로 피렌체 출신의 베라차노였다.

마침내 피렌체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만들어낸 금융과 산업 자본주의에 덧붙여 금상첨화로 해상 무역의 힘까지 갖추게 됐다. 프랑스와 플랜더스의 모직에 이어 영국 양털까지 직접 수입하면서 산업 능력은 더욱 강화됐다. 16세기에는 영국 대신 이베리아 반도에서 양털을 수입했다. 또 15세기에는 실크 산업을 발전시켜 견직 분야에서도 피렌체의 명성을 드날리기 시작했다.

피렌체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자유 무역항이라는 개념도 처음 도입했다. 1675년 피렌체는 리보르노 항에 관세 없이 상품을 수입하고 수출하는 획기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후발 주자가 제도 혁신을 통해 앞으로 치고 나간 셈이다. 리보르노가 무역 중개항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기기 시작하자 트리에스테·안코네·치비타베키아·메시나 등의 항구들이 앞다퉈 자유무역항으로 나섰다. 심지어 베네치아조차 이들과 경쟁하려고 관세를 낮추는 변화를 시도했다.

피렌체는 내륙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금융이 뛰어났지만 산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금융과 산업의 두 마리 말을 균형 있게 몰았으며 나중에는 베네치아나 제노바와 경쟁할 수 있도록 해양 무역으로도 진출했다. 정치 체제에 있어서도 피렌체는 공화제였지만 서서히 군주제에 가까운 권력 집중을 이뤄냈다. 베네치아처럼 결집력이 강한 공화국이라면 괜찮지만 만일 제노바처럼 내분이 잦았다면 피렌체는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세 이탈리아 부유한 도시국가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거목이 르네상스라는 문화 현상이었다. 그 가운데 제일 높이 솟은 가지를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의심할 나위 없이 피렌체다. 물론 교황의 도시 로마도 수많은 르네상스 건축과 예술품을 갖고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를 이끈 원동력은 로마가 아닌 피렌체였고, 피렌체의 정신과 문화가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된 결과 르네상스를 꽃피울 수 있었다.

‘르네상스 사람’이라는 표현은 한 가지 전문직에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지식과 능력과 문화를 갖춘 사람을 말한다. 중세의 기사들은 전쟁은 잘할지 몰라도 문화적으로는 무지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정치인들은 상인을 무시했다. 하지만 중세 피렌체에서는 사업과 정치와 문화를 겸비한 인재들이 무수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은행업과 직물산업에 기반을 두고 정계에 진출한 메디치가야말로 이런 현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피렌체 출신


▎도시국가 피렌체의 전경을 담은 지도. 피렌체는 내륙에 위치해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엄청난 재산과 정치권력까지 독점한 메디치가는 메세나 즉 문화를 후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원래 고대 로마에서는 ‘빵과 서커스’라고 해서 부호들이 서민들에게 음식과 오락을 제공하는 전통이 존재했다. 중세 이탈리아와 르네상스에서는 이런 전통이 예술 분야에 집중적으로 계승됐다고 할 수 있다. 메디치가는 당대 최고의 문인과 예술가들을 초빙해 자유로이 활동하도록 지원하는데 열심이었다. 도시국가가 경쟁하는 이탈리아에서 다른 공화국과 군주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가 꽃피는 토양이 형성된 것이다.

문학 분야에서 단테나 보카치오는 모두 피렌체 사람이었다.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의 문화적 전환을 통해 잠재적 민족의식을 생성하는 데 기여했다. 미술과 건축에서 지오토 또한 피렌체 출신으로 르네상스의 대표 주자다. 그의 뒤를 이어 브루넬레스키·도나텔로·보티첼리 등은 피렌체 파를 형성했다. 미켈란젤로·라파엘로·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당대 최고의 천재 예술가들도 모두 피렌체의 아이들이다.

피렌체에서 이탈리아로 퍼져나간 르네상스와 메세나의 관습은 점차 유럽의 다른 왕국으로 확산됐다. 17세기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을 짓고 그곳에 유럽 전역의 예술가들을 끌어 모았다. 루이 14세의 음악을 담당했고,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대가로 통한 룰리도 피렌체에서 태어난 재원이다.

21세기에도 피렌체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두오모 성당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우피치 박물관에서 르네상스의 보물을 확인할 수 있다. 우피치란 영어로 오피스 즉 사무실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정부 청사가 그대로 박물관으로 탄생한 셈이다.

이처럼 풍요로운 경제와 화려한 예술을 자랑하던 피렌체는 왜 쇠락하게 된 것일까. 고대 바빌로니아부터 로마까지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었듯이 풍요로운 삶은 자칫 잘못하면 암암리에 무력을 키운 이웃에게 치명적 유혹이 되기도 한다. 이탈리아도 15세기 말부터 무력을 키운 프랑스·스페인·오스트리아 등 대륙의 강력한 군대의 각축장으로 돌변한다.

피렌체 자본주의의 쇠락

분열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외부의 힘을 빌려 경쟁에서 우세를 점하려 했다. 그때마다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오거나, 스페인 함대가 바다를 건너 침략해 들어왔다.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 이탈리아의 인구는 900만에서 1300만 명으로 늘어났지만 밀라노나 피렌체, 로마의 인구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17세기 피렌체를 지배했던 메디치가의 군주들은 정치보다는 문화에 더 관심이 많았다. 또 정치를 담당하는 군주가 은행업과 같은 비천한 일을 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며 수백 년을 이어 온 메디치 은행의 문을 닫았다. 게다가 메디치가의 마지막 군주 코시모 3세는 신부들의 영향 아래 유대인을 박해하거나 종교 재판을 즐겼다. 결국 1723년 코시모 3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프랑스·스페인·오스트리아·네덜란드 등 강대국은 피렌체를 스페인의 왕자 필립 5세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17~18세기가 되면 피렌체 뿐 아니라 이탈리아 중·북부의 경제는 유럽의 선두주자에서 후진 지역으로 돌변한다. 잦은 외세의 침입과 도시의 약탈, 그로 인한 인구의 감소 등은 경제의 쇠락을 심화시켰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회 내부에도 몰락의 원인은 많았다. 과거에 기술을 개발하고 교육하던 다양한 아르테 조직은 이제 특권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보수적 장치로 변질돼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은행 문을 닫은 것은 군주라 그랬다 치더라도 보통 상인이나 자본가들도 예전에 가졌던 도전 정신은 잃어버린 채 토지를 구매하며 귀족행세를 하려고 했다. 진취적으로 밖으로 나아가 개척하고 모험을 벌이기보다는 풍요로운 삶을 즐기는데 더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파가 잦은 사업보다는 도시국가의 고관이 되기를 선호했다.

게다가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사업가들이 이탈리아의 뒤를 이어 국제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고급 섬유제품을 활발하게 수출하던 이탈리아는 18세기가 되면 오히려 올리브나 포도주 등 농산품이나 견사와 같은 원자재를 수출하고 제조업 상품을 수입하는 후진 경제로 바뀌었다. 그 결과, 유럽, 더 나아가 세계 경제의 중심이 이탈리아 반도에서 서서히 이베리아를 거쳐 북해로 옮겨가는 거대한 이동이 진행되기에 이르렀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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