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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9)] 트로이 원정 나선 아가멤논의 ‘읍참마속’ 

가장 가까운 ‘피’를 하늘에 바칠 것인가 

아르테미스의 저주에 딸 이피게네이아를 인간 제물로 희생시켜
불합리 요구하는 상대, 명분만으로 못 이겨… 자기성찰에서 답 찾아야


▎터키 아나톨리아반도 안탈리아(Antalya) 시에서 동쪽으로 15㎞가량 떨어진 고대도시 페르게(Perge) 모습. 이곳에 세워졌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여러 고문헌에서 등장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 사진:getty images bank
의병·죽창가·이순신. 7월 중순부터 한국 전역을 달구고 있는, 흑백 아니 무성 영화시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셰리프’들이다. 2019년 여름, 한국인 머리에 갑자기 새겨진 열혈 유행어라고나 할까?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된 이상,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는 판세다.

같은 시기 한국 밖에서는 어떤 얘기가 대세였을까? 하나로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렵지만, ‘과거’에 맞춰진 스토리라면 당장 떠오르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 ‘우주(Space)’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달 착륙 50주년에 즈음한 기억이나 기념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졌다. 해외토픽 수준의 이벤트가 아니다. 미국은 물론 인류 모두의 추억이자 역사로서의 기념이다. 당시 상황에 관한 증언, 우주인들의 어제와 오늘, 나아가 현재 추진되고 있는 우주 프로젝트를 포함한 폭넓은 얘기들이 신문 방송을 통해 퍼졌다. 우주는 어제만이 아닌 오늘과 내일, 아니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할 인류의 숙제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아닌, 내일을 이어갈 어린이에 맞추는 행사와 기념 스토리도 곳곳에서 치러졌다.

이제 50대 말의 나이로 접어드는 필자는 50년 전 달 착륙 역사에 관한 선명한 기억을 갖고 있다. 당시 이미 미국 아폴로가 달에 도착한다는 뉴스가 한국 전체에 알려져 있었다. 위성을 통한 텔레비전 중계가 예고됐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이 드문 시대였다. 유일하게 일제 중고 흑백텔레비전이 있던 여관집 안방에 동네 주민 모두가 몰려들었다. 때마침 뜨거운 여름이었기에 활짝 열린 창문을 통해 전부 지켜볼 수 있었다.

일곱 살 필자도 그중 한 명이다. 스프링 신발을 신은 듯, 껑충껑충 걷는 우주인을 보면서 모두가 환호했다. 멀리 뜬 달과 비교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멀리 갔을지, 지구로 돌아오는 아폴로 우주선을 누가 먼저 발견할지, 달나라 토끼는 어디로 숨었는지…. 누구를 탓하는 식의 왜곡된 눈과 무관한, 단순하고도 소박한 머리로 살아가던 시대였다.

역사는 머리, 신화는 가슴


▎제물로 끌려가는 이피게네이아(가운데)를 아킬레스(이피게네이아 뒤)와 오디세이가 들고 있다. 오른쪽 첫째가 그녀의 아버지 아가멤논, 왼쪽 첫째는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다. 벽화 상단 오른쪽에 사냥의 신 아르테미스가 보인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필자의 지론이지만, 우주를 대하는 자세는 선진국 여부를 가늠하는 요소라 확신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 달러라고 해도 지도자나 지식인의 관심사 속에 우주가 빠졌다면 진짜 선진국이 아니다. 스케일이 크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자국의 역사·문화·세계관을 넘어선, 전혀 다른 세계와의 교류와 공감이 투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달만이 아닌, 지구를 포함한 미지의 세계 전부를 포함한다. 국가 수준만이 아닌 태평양, 아니 은하계에서 살아갈 경우 거기에 맞는 넓고도 깊은 세계관이 생기게 된다. 나만 옳다고 우기면서 살아갈 수가 없다. 세상을 대하는 여유는 물론, ‘입체적 눈’을 갖게 하는 동인(動因)으로서의 ‘우주=지구’다.

한국 영화 가운데 지구 밖 적을 상대로 한 작품이 얼마나 될까? 아마추어 작품을 제외하면 거의 없을 듯하다. 시야를 조금 좁혀서, 지구 아니 아시아 전체를 상대로 한 드라마나 문학 같은 것은 얼마나 될까? 중국만이 아니라 몽골·인도·페르시아로 이어지는 대하소설 같은 것이다.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도 좋다. 극히 일부분이다. 글로벌 차원의 인문사회학적 필드 조사는커녕, 이집트 피라미드 발굴 같은 고고학 연구도 극히 드물다.

‘이피게네이아(Iphigeneia)’. 2019년 여름, 한반도에 들이닥친 혼돈과 혼란 속에서 떠오르는 인물이다. 역사적 인물이 아닌, 신화 속에 등장하는 여인이다. 그리스 신화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기원전 5세기 극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와 아이스킬로스(Aeschylos)가 비극의 소재로 삼았다.

이피게네이아는 기원전 13세기 발발한 것으로 알려진 트로이 공격에 앞서 등장한다. 그녀는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Agamemnon)의 딸로,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로 향하기 직전 신에게 바쳐진다. 무려 10년을 바쳐 얻어낸 트로이 점령이 이피게네이아의 뜨거운 피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상황을 ‘황당한’ 신화 속 소녀에서 유추해 비교한다는 것에 의아할지 모르겠다. 신화를 ‘뻥’이라 여기고, 실제로 행해진 역사만 신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신화가 검증되지 않은 역사, ‘카더라’에 기초한 민간 전승 스토리라는 점은 맞다. 구체적인 스토리 자체도 지역 시대마다 다르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았기에 역사가 아니고,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검증되지 않은 픽션으로서의 신화라지만, 글로 표기할 수 없었던 시대의 역사가 구전돼 신화로 정착됐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단적으로 기원전 8세기에 탄생한 [일리아드]는 신화와 역사를 오가는 증거로 해석된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역사가 머리라면 신화는 가슴에 해당한다. 역사에 비해, 신화는 구전될 당시의 ‘인간·세상·신’을 대하는 솔직한 심정이 투영돼 있다. 국가·사회적 차원의 거창한 얘기가 아닌, 보통 인간들이 가진 평범한 세계관이 신화를 통해 가감 없이 전해질 수 있다. 비주얼 미디어로 표현한다면, 다큐멘터리로서의 역사, 리얼리티 쇼(Reality Show)로서의 신화다.

21세기 리얼리티 쇼와 다른 점은, ‘교육·교훈·모델·선악·죽음’에 주목하는 스토리란 부분이다. 남이 아닌, 나 자신의 오늘과 내일을 가늠하고 결정하는 모델이자 교훈으로서의 신화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 막장 드라마로서의 비극이 아니다. 당시 인간들이라면 누구나 체험했을 듯한, 살기등등한 가족관계에 대한 윤리·도덕 교과서로서의 드라마다. 바로 신화가 갖는 매력이자, 장점이다.

트로이 원정을 가로막은 아르테미스


▎아브라함은 신에 대한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친다. 정치성이 없는 종교적 차원에서의 희생이란 점이 이피게네이아와 다른 점이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읍참마속(泣斬馬謖)’. 삼국지에 등장하는 고사성어다. 제갈량이 부하이자 친구의 동생인 마속을 참형시킬 때 탄생한 말이다. 비록 아끼는 인물이지만, 공(公)의 입장에서 눈물을 머금고 처단했다는 얘기다. 공정한 법을 위해 사(私)의 정(情)을 버린다는 의미와, 대의를 위해 자기가 아끼는 사람조차도 가차 없이 버린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대학 입시에는 자주 나오기 때문에 모두 기억할 듯하지만, 사실 한국은 읍참마속 무관한 나라다. 정(情)에 울고 웃는 기질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난리를 쳐도 대충 넘어간다.

‘내로남불’이 대세인 2019년만의 상황이 아니다. 한국 역사를 통틀어 지도자나 조직의 장 입장에서 사를 버리고 공의 입장에서 읍참마속에 나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공이 아닌, 사의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화려한 수사는 넘치지만, 곁가지나 반대자를 마속으로 둔갑시켜 보여줄 뿐이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한, 조직이 엉망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아무리 잘못해도 ‘완전히’ 자르는 일은 없다. 외유·순환 근무를 통해 반드시 돌아온다. 자신의 혈육이나 왼팔·오른팔은 읍참마속의 예외다. 한국, 특히 현재의 한국을 보면서 이피게네이아가 떠오른 이유다.

이피게네이아는 그리스 총사령관이 가장 아끼던, 아름다운 딸이다. 마속처럼 작전에 실패하지도, 특별히 죄를 범한 못된 딸이 아니다. 그러나 재단의 이슬로 사라진다. 읍참마속보다도 한층 더 어렵고도, 고통스런 상황이 트로이 공격 직전 벌어졌다. 인간 제물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 아가멤논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건에 비롯된다.

배를 타고 트로이로 건너가기 위해 그리스 연합군이 아우리스(Aulis)에 주둔한다. 식량을 얻기 위해 산에 올라가 사냥을 하던 중 커다란 사슴 한 마리를 죽인다. 승리감에 도취한 아가멤논은 부하들에게 큰소리로 외친다. “아르테미스라 해도 나보다 더 (사슴사냥에) 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르테미스는 사냥의 신, 처녀의 신이다. 그러나 사슴을 죽이지는 않는다. 사슴은 아르테미스의 분신이자 상징이다. 아가멤논은 두 가지 중요한 죄를 범하게 된다. 자신을 신과 비교한 죄, 그리고 아르테미스의 분신이자 상징을 죽인 죄다. 신의 노여움을 살만한 일은 하나라도 피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시 사람들의 윤리 도덕관이다.

후회하지만, 때는 늦었다. 곧바로 아르테미스의 분노가 나타났다. 배를 트로이로 옮겨줄 바람이 완전히 정지한다. 사람의 팔에 의존하는 전함이 아닌, 바람에 의존하는 운송선이 아우리스에 모인 배의 전부다. 바람이 없으면 떠날 수가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병사들의 불만이 점증한다.

“그리스 영광 위해 목숨 바치겠다”


▎마리아의 피에타는 인간제물로 사라진 이피게네이아에 접한 그녀의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의 통곡을 떠올리게 한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그리스는 개인에 기초한 민주주의 발상지다. 아가멤논 당시의 그리스 폴리스들이 민주주의 체제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어떤 나라나 지역보다도 개인의 주장과 생각이 존중되는 사회다. 결국 병사들의 화가 아가멤논을 비롯한 지휘부까지 미친다. 예언의 신 아폴로에 신탁(神託)을 구한다. 아폴로는 아르테미스의 오빠에 해당한다. 아폴로는 답을 준다. “아가멤논의 가장 사랑하는 딸을 아르테미스에 바치지 않을 경우 배가 영원히 출발할 수 없을 것이다.”

불면과 고통의 시간이 아가멤논을 엄습한다. 그러나 그리스인 모두의 목숨이 걸린 것은 물론, 자신도 위험해 지면서 결국 이피게네이아에게 편지를 보낸다. 아킬레스와의 결혼을 위해 즉시 아우리스에 오라는 서신이다. 원래 이피게네이아만 오라고 했지만, 아가멤논 부인 클리템네스트라(Clytemnestra)도 함께 온다. 딸의 결혼식에 어머니가 안 간다는 게 이상하다면서 기쁜 마음으로 달려온다.

아가멤논의 반인륜적 생각은 도착 즉시 발각된다. 그리스를 대표하는 최고의 전사(戰士)이자 미남인 아킬레스는 자신의 이름을 판 가짜 결혼식에 대해 분노한다. 사정을 이해한 아킬레스는 인간 제물로 가는 것을 막고자 이피게네이아와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결의도 내보인다. 그러나 아가멤논의 참모 역을 하던 오디세이가 신탁 내용을 병사들에게 알리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아킬레스 부하들조차 결혼에 반대하면서 살기를 숨기지 않는다. 아폴로의 신탁을 당장 시행하라는 목소리가 사령관 막사를 에워싼다.

실신 상태에 있던 이피게네이아는 아버지에게 다가선다. “그리스인 모두와 아버지·어머니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이피게네이아란 이름은 그리스어로 ‘출생 때부터 강한(born to strength)’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스스로 신전으로 걸어간 이피게네이아는, 더는 약한 소녀가 아닌 그리스인 모두의 딸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그녀의 붉은 피가 대지를 적시는 순간 트로이로 향하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리스 연합군은 함성을 지르며 전원 출동에 나선다. 이후 10년 동안 전쟁을 벌이다, 트로이의 목마를 통해 그리스의 완승으로 끝난다.

인간 제물에 관한 얘기는 신화는 물론 세계 역사 곳곳에 등장한다. 남미의 마야나 잉카 문명, 심지어 인도네시아 섬에서는 최근까지도 인간 제물이 횡행했다. 그러나 필자가 기억하는 한, 신만이 아닌 인간사에 관련돼 인간을, 그것도 자신의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얘기는 극히 드물 듯하다.

구약성경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자식 이삭에 대한 인간 제물은 극히 드문 본보기 중 하나다. 성경 속에서 신은 아브라함에게 명령한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장 2절)” 엄청난 고통이 가슴속 깊이 몰아치지만, 아브라함은 신의 명령에 응한다. 이삭의 목을 칼로 베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결행 직전 신이 말리면서 이삭은 살아남는다.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신이 내린 시험이었다.

시작도 전에 결정된 10년 전쟁의 승패


▎아르테미스 여신상. 이피게네이아가 아르테미스사원에서 처녀 사제로 일하게 된다는 신화도 있다. 인간 제물로 처형되기 직전, 아르테미스가 구해주면서 함께 지내게 된다는 것이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이피게네이아와 비교할 때, 구약성경 속의 이삭은 종교적 차원의 문제에 국한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피게네이아는 종교인 동시에 정치다. 아브라함의 이삭을 읍참마속이라 부르기는 어렵지만, 이피게네이아의 경우 제갈량의 고사성어에 비견해 볼 수 있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종교적 판단에 비해 정치적 결단이 한층 더 어렵다. 바로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세나 신념 차원이 아닌, 현실과 증거의 문제다. 파라다이스 구름 위의 종교가 아닌, 척박한 대지 위에서 벌어지는 지금 당장으로서의 정치다.

원래 아가멤논은 딸의 제물에 반대했다. 이피게네이아가 아니라, 자신의 목을 바치겠다고까지 말한다. 신탁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 전부 죽이고 아예 트로이 공격도 중단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최종 결정으로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 제단에 올린다.

트로이 전쟁은 트로이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리스가 이길 수밖에 없는 역사다. 이유는 자신의 딸을 베고 출정하는 총사령관에 대한 병사들의 신뢰와 충성심에 있다. 읍참마속처럼 친구의 동생이 아닌,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피를 하늘에 바쳤다. 주목할 부분은 신탁의 구체적인 내용이다. 아르테미스에게 이피게네이아를 바칠 경우 배가 떠날 수 있는 바람만을 약속했을 뿐이다. 결코 승리를 약속하진 않았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를 보면 그리스 병사 대부분은 ‘바람=승리’로 확신했을 듯하다. 살아있는 소녀의 피, 그것도 최고 사령관의 사랑하는 딸의 목숨은 그만큼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리스 로마를 제외할 경우 이피게네이아를 둘러싼 글이나 예술이 극히 제한적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크리스천 문화가 가장 큰 배경에 서 있을 듯하다.

크게 두 가지다. 먼저 예수에 관한 부분이다. 무례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와 닮았다고 느껴진다. 차원은 전혀 다르지만, 자신의 피를 통해 모두가 구원을 받는 식의 스토리다. 예수와 이피게네이아 둘 다 죽음으로 끝날 자신의 운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 대응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아가멤논과 신에 의한, 읍참마속으로서의 죽음이다. 예수를 부여안고 울부짖는 마리아의 모습은 결혼식이 열릴 줄 알고 동행한 클리템네스트라의 고통에 비견된다.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작품 [아가멤논]을 통해 클리템네스트라의 고통과 배신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정복 후 개선장군으로 돌아오지만, 바로 그날 저녁 목욕하던 중 살해된다. 범인은 부인 클리템네스트라다. 남편 부재 중에 애인과 벌인 치정극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피게네이아를 인간 제물로 바친 남편에 대한 증오심이 더 큰 원인이었으리라 판단된다. ‘어머니의 한(限)’이 트로이 승리의 최고 영웅을 한순간 묻어버리게 된 것이다.

둘째, 이유는 예수와 비슷하지만, 크리스천 문화 속의 성인·성녀들과의 비교에서 비롯됐다고 보인다. 예수를 위해, 신앙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성인·성녀가 이피게네이아와 겹쳐질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자체가 크리스천에 반하는 이단이기도 하지만, 특히 이피게네이아는 탄압과 고문 속에서 사라진 크리스천 성인·성녀와 너무도 닮았다. 크리스천이 강해지면서 이피게네이아 스토리도 사라지게 된다. 성인·성녀는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고, 소원을 들어주는 ‘해결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이후에도 이피게네이아에 대한 무관심이 이어졌을 듯하다.

‘토착왜구’ 딱지 앞세운 명분싸움


▎터키 고대 유적지 페르게에서 만난 이피게네이아 모자이크. 천사가 하늘나라로 데려가는 모습으로, 그리스 전사 모두가 도열해 축복해주고 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지난해 말 기억이지만, 우연히 새로운 모자이크를 하나 발견했다. 가로세로 6m 정도로, ‘트로이 전쟁’으로 불리는 벽화다. 터키 고대 유적지 페르게(Perge)가 현장이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안탈리아(Antalya)에서 동쪽으로 15㎞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고대도시다. 그리스 이래, 비잔틴시대까지 번성했다. 크기·넓이·깊이로 볼 때, 필자가 경험한 그리스 로마 흔적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다. 현장은 아직 발굴 도중이라 접근할 수 없다. 철창으로 막힌 좁은 입구라 제대로 보기도 어렵다.

페르게의 벽화는 대략 서기 2세기쯤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색상은 떨어지지만, 남은 흔적들을 통해 이피게네이아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가늠케 한다. 날개를 단 천사의 도움으로 이피게네이아가 하늘로 올라가는 식으로 그려져 있다. 바로 옆에는 다섯 명의 전사들이 도열해 천국행을 축복해주고 있다.

이름이 바로 밑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왼쪽 둘째가 아버지 아가멤논, 셋째가 오디세이다. 첫째는 누군지 모른다. 이피게네이아에 제일 가깝다는 점에서 올림포스 신일 가능성이 높다. 오른쪽 첫째가 아킬레스다. 이피게네이아를 마지막까지 보호하려 했던 영웅이다. 둘째는 전사 아작스(Ajax)다. 그리스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피게네이아의 비극적이면서도 영웅적인 분위기가 묻어나는 작품이다.

우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하나만으로도 한국의 혼돈을 풀어나갈 수 있을 듯하다. 비록 비극적 운명이지만, 그리스와 그리스인 모두를 살린 어린 영웅이다. 꽉 막힌 부분을 뚫기 위해서는 자기 피라도 마다치 않았던 곳이 그리스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심을 버리고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최선을 다할 경우 성공의 길로 이어질 수 있다. 2019년 한국은, 이런저런 이유와 명분으로 남 탓만이 넘치고 넘친다. 적폐에서 시작해 요즘은 ‘토착왜구’와 일본으로 이어지는, 국제전으로 치닫고 있다. 이미 시작됐지만, 결국은 ‘미국 탓’이 일반화될 듯하다. 경천동지할 사건들이 거의 매일 터져도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이, 남 탓으로 일관할 뿐이다.

읍참마속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마녀사냥 딱지를 총동원해 상대에 붙이기 전, 한 번이라도 자신을 되돌아보자. 정치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문제의 정답은 항상 나 자신에게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남 탓이 아닌, 항상 나 스스로가 문제이자 답이다. 이피게네이아 스토리를 한 번이라도 듣는다면, 가슴속에 영원히 간직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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