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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28)] 사막의 독거생활 체험기 

원초의 꿈은 문명 재출발의 원점 

문명 탈출 꿈꾸며 사막에 왔지만 되레 생활의 이기와 욕망 추구
원시에서 고등으로의 진보가 아닌 창조에 대한 갈망의 분출


▎탄자니아 잔지바르 해변의 풍경.
따무딕 문자로 쓰인 초기의 암각 텍스트는 따무드 종족이라 불리는 아라비아반도 북방에 위치한 사람들이 남긴 것인데, 이들은 아라비아만에서 동남쪽에 위치한 마다인 살레(Mada’in Saleh) 부근의 아틀랍 산(Mount Athlab) 기슭에 정착한 그룹이다. 이들도 원래는 아라비아 남부에 기원을 두기는 하지만 북상하여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이 문자 텍스트들은 대략 2000~3000년 전 것으로 고증되고 있다. 따무드족에 관한 고대의 확실한 언급은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SargonⅡ)가 BC 715년에 남긴 것이다. 앗시리아에 정복된 동부·중부 아라비아의 종족들 가운데 그 이름이 명료하게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일상생활에서 쓴 언어인 아람어(Aram)도 결국은 이 따무딕 언어와 같은 계열의 언어임이 밝혀지고 있다.

내가 본 현장의 명문 중에는 이 따무딕 언어 외에도, 나바테아 왕국의 독자적인 언어가 있었는가 하면, 중세와 근세의 아라빅 명문도 있었다. 그리고 짓궂은 로컬 베두인 아이들, 우리처럼 이 고대 암각문자·문양들의 소중한 가치를 인식할 수 없는 아이들은 그 명문들 곁에 자기들의 낙서를 제멋대로 첨가해놓았다. 한 경우는 최소한 2000년 이상 된 것으로 보이는 낙타들의 그림 옆에다가 낙타들을 나르기도 하는 큰 트럭을 그려놓았다. 지금 보면 그것은 분명 문명 훼손의 만행으로 보이지만, 수천 년 후에는 학자들이 보고 그것에서 특별한 의미를 고증해낼지도 모르겠다.

그날, 모하메드는 나에게 암각문자들을 보여준 후에 군말 없이 빨리 되돌아갔다. 그러나 다음날, 모하메드는 코카콜라 몇 개와 사탕과자 몇 봉지를 싸서 다시 왔다. 그는 텐트 하나에서 담요를 취했다. 그리고 자기 차로 나를 초대하는 것이다. 다른 한 군데 볼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서 조촐한 피크닉을 하자는 것이다. 그곳은 내 장소에서 멀지 않은 또 하나의 바위언덕이었다.

모하메드는 그늘진 평평한 곳에 담요를 펼쳐놓았다. 그리고 드링크와 스낵을 정렬시켰다. 나는 도대체 왜 내 장소와 하등의 다를 바가 없는 곳에 또 하나의 평평한 암반을 찾아온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하메드가 갑자기 어색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모든 정황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당신 책상을 바위 꼭대기에 올려놓기 위해 내 등 허리와 어깨가 심하게 고통을 당했지. 아무래도 몸을 다친 것 같아. 마사지 좀 해주겠어?”

낯선 여인과 일탈을 꿈꾸는 사막의 플레이보이


▎바위에 새겨진 따무딕 문자.
순간 나는 그 소리를 듣자,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하, 요놈이 날 한적한 이곳으로 데려온 은밀한 목적이 있었구나!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이유가 있었군.’ 그러나 일단 그가 내 무거운 목제책상을 등에 올려놓은 채 한 번 쉬지도 않고 바위언덕을 올라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등과 어깨가 쑤신다는 말이 생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쌀쌀맞지 않게 정당한 대가는 보여주는 것이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하메드에게 말했다. “오케이! 내가 등 마사지를 좀 해주마! 그러나 그것뿐이야. 더는 아무것도 없다고.”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담요 위에 배를 깔고 일자로 누웠다. 나는 모하메드 등 위에 걸터앉지 않고 옆으로 앉아 그의 어깻죽지 혈들을 잽싸게 눌러주었다. 그리고 곧 다 되었으니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내가 누르는 방식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침술 방식이야! 아주 효과만점일 거야!”

모하메드의 얼굴에 실망기가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한마디도 불평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나에게 친절함을 잃지 않았고, 어영부영하다가 나를 캠프에 데려다주고는 사라져버렸다.

내가 와디 럼에서 더 많은 나날을 보내면서 알게 된 사실은, 마사지를 주거나 받거나 하는 일은 베두인 남자가 외국인 여자와의 찬스를 모색하는 매우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서양의 여성 관광객들이 무심하게 혹은 심각하게 베두인 남성들과 성적 관계를 맺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베두인 여성과의 혼전 정사는 매우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베두인 남성들은 외국 여성들을 대상으로 기회를 모색하는 것이다. 사막의 싱싱한 마초를 갈망하는 서양 여자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와디 럼에 사는 베두인들은 그들의 윤리적 계율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로 외국 여성에 대해 공격적이거나 폭력적이지는 않다. 또한, 그들의 윤리적 명성은 관광사업에 매우 중요한 함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모하메드의 경우는 특별히 여성에 대해 폭력적이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는 이미 베두인 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리고 제2의 부인을 맞아들이기 위해 교섭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미 많은 유럽의 여성들과 교제를 맺었다는 사실도 내 귀에 들어왔다. 그는 어찌 보면 디즈니영화에 나오는 알라딘처럼 보인다. 아주 하얗게 빛나는 이가 매우 완벽한 정렬을 이루고 있었다. 어떻게 그가 그런 이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베두인들은 거의 치아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외관이 그를 전형적인 베두인 플레이보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헛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신상에 좋을 듯싶다.

사막의 고요는 인류 정신사의 원천


▎버터와 밀가루를 이용해 직접 빵을 만들었다. 사막 본연의 생활을 체험해보고자 했던 처음의 목표와 다르게 날이 갈수록 사막은 문명의 이기와 욕구들로 채워진다.
2013년 5월 말 내가 와디 럼을 떠날 때까지 나는 이미 호젓한 사막 독거생활의 일상적 루틴을 확립했다. 고인돌 책상에서 아침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독서를 하고, 부엌을 청소하는 등 캠프를 정돈한다. 이어 주변 경관을 둘러보며 트레킹이나 하이킹을 한다. 그리고는 내가 전화나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낸다. 오후에는 서재로 올라가서 편한 책상에 앉아 읽거나 글을 쓴다. 그리고 해가 지면 살라의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고 모여드는 사람들과 교제를 한다. 그리고 나의 캠프로 돌아와 꿈나라로 간다.

그곳에서 8일간 생활해 보고 나서 나는 이러한 생활리듬을 확보했다. 이 체험은 앞으로 내가 이곳에서 계획하는 장기 체류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큰 문제가 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와디 럼에 계속 머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단 6월 한 달 동안은 인도의 미진한 체험을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인도 동북부 사막 이외의 지역을 탐색하기로 했다. 남서쪽의 환상적 고아 지역, 팔로렘 비치(Palolem Beach in South Goa), 라자스탄의 호반 도시 우다이푸르(Udaipur)의 꿈결 같은 호수, 최북단 히마찰 프라데시(Himachal Pradesh) 서히말라야의 장엄한 광경들을 보기 위해 나는 사막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아름답고 기이한, 푸르디푸른 자연의 경이에 눈이 끌리면서도 마음은 항상 와디 럼의 사막 계곡에 남아있었다. 홀로 광야를 떠도는 다윗처럼 사막은 이미 내 집이 되었고, 그곳에서 너무 오래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 어쩔 줄 몰랐다. 엄청난 정글과 장엄한 산맥은 매우 흥미로웠지만, 사막이 제공하는 정적과 침묵은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막의 산맥이 형성하는 광활하고도 탁 트인 성스럽고 숭고한 광경의 아름다움은 제공하지 않는다.

나는 이러한 강렬함을 통해 왜 굳이 사막에서 종교적인 천재들이 태어나는지, 왜 사막에서 일어난 종교들이 인류의 정신사를 그토록 강력하게 지배했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와디 럼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곳이야말로 나의 도시생활에서 생긴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소꿉친구와 함께한 아프리카 여행


▎읍내 시장에서 구한 고풍스러운 원목 의자.
6월말 요르단에 돌아왔을 때, 내가 반가이 여기는 손님 한 명이 동시에 도착했다. 그 손님이란 내가 한국에서 자라날 때 신촌 봉원사 부근에서 내내 같이 생활한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혜원이라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호리호리하고 유행에 따라 멋있는 옷을 입은 도시형 숙녀였다. 그러나 혜원이는 여전히 어릴 적과 똑같이 사내같이 왈가닥 기질이 있는 여자였다. 혜원이는 단식원을 운영하는, 자연주의자인 아버지 밑에서 컸기 때문에 자연의 생태에 관해 정보가 많았다. 봉원동 안산을 돌아다닐 때면 나는 항상 혜원이에게 배웠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우리는 떨어질 수가 없었다. 딴 아이들은 시내로 나가기를 좋아했지만 우리는 뒷산에 가서 놀기를 선호했다.

그녀가 요르단에 머문 한 달 동안 우리가 같이 한 일은 꼬맹이 시절 같이 놀았던 것들의 좀 어른스러운 버전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그런 소소한 재미였다. 봉원동 뒷산 대신 우리는 와디 럼 광야의 바위산을 올라갔고, 사해의 진흙 속에 파묻혀 일광욕을 즐겼고, 탄자니아(아프리카 동해안의 국가. 킬리만자로 산이 있다)로 날아가 사파리의 동물들을 보았다. 그리고 잔지바르(Zanzibar, 탄자니아의 일부지만 반독립적 위상을 가진 섬들로 구성된 나라)의 흰 모래 비치를 즐겼다. 우리는 암만에서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탄자니아의 수도)으로 가는 매우 싼 비행기 티켓 덕분에 아프리카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혜원이가 나와 함께 일주일간 와디 럼에 머무르고 있을 때는 내가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생활이 몹시 쾌적했다. 그녀가 나의 일상적 삶을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또 타야의 캠프 주변 삶의 공간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모든 지혜를 잊을 수 없다. 혜원이는 매우 꼼꼼했고 유능했다. 걔는 내 부엌을 철저하게 깨끗이 청소했다. 나의 엄마나 그렇게 청소할 수 있을까? 부엌의 벽타일과 조리대 위에 붙은 때를 말끔히 벗겨내었고, 모든 접시와 은그릇을 새것처럼 닦아놓았다.


▎베두인 가족들이 사막 한복판에 화장실을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혜원이는 싱크대 밑 파이프에서 물이 새는 것까지도 고쳐놓았다. 오랜만에 휴가를 와서 뭔 노동을 그렇게 하냐고 말려도 완고하게 일을 고집했다. “나는 깨끗하게 하는 게 좋아. 어차피 너한테 필요한 일 아냐? 친구 뒀다 뭐 하니.” 그토록 긴 여행을 하고 와서 친구를 위해 청소만 하고 있는 혜원이의 모습은 요즈음 나의 감각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한국에서 그의 친구들이 사막에 간다고 하니까 다 말렸다고 한다. “너 미쳤니? 사막엔 왜 가? 중동? 얼마나 위험한 곳인데, 사막은 지루한 곳이야. 돈 주고 가라고 해도 우린 못가!” 운운하며 말이다.

나는 이미 미국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한 사람이지만, 미국에서의 인간관계라는 것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있다. 3명의 미국 친구가 3번에 걸쳐 따로 나를 방문했다. 그때마다 나는 방문객이 나를 안다는 것을 기화로 나를 활용해 자기들의 쾌락이나 휴가를 즐긴다고만 느꼈지, 그들이 친구인 나에 대해 하등의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서양의 친구라고 하는 것은 혜원이나 1년 후에 나를 방문한 나의 언니가 나를 도와주는 그러한 이해의 깊이에 도달하는 적이 없다. 친구의 실존 영역에 개입해 정을 주고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사전에 없다. 영화에 가끔 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서구사회에서 우정이라는 것은 멀리 사라져버린 단어일 것이다.

사막의 캠프를 가정집처럼 꾸미기


▎소꿉친구가 남기고 간 장갑과 모자는 사막 생활에서 요긴하게 활용됐다.
어찌 되었든 나를 방문한 사람들은 다 여성이었다. 물론 남성친구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곳을 찾은 이들은 다 여성이었다. 팀북투의 뚜아렉 추장인 말리가 한 말이 생각난다. “팀북투에 홀로 여행하는 관광객들은 거의 다 여성이야. 남성들은 꼭 그룹을 지어 와. 세계 어느 곳에나 여성이 남성보다 더 용감한 것 같아.”

8월 중순 암만에서 나는 혜원에게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눈 뒤 와디 럼에서 쓸 적합한 나무의자를 찾느라 도시 전체를 쑤시고 다녔다. 다행스럽게도, 등받이가 아름답게 수직의 곡선을 지닌, 완벽하게 편리한 골동품 나무의자를 발견했다. 암만 다운타운의 길거리 시장에서 발견했는데 누가 봐도 품격이 있는 걸작품이었다. 새 가구 집에서 엉터리 나무의자가 보통 100불을 호가하는데, 이 의자를 판 사람은 15불의 양심적 가격을 제시했다.

나의 기호에서 벗어난 유일한 조건은 시트 색깔이었다. 그래서 나는 의자를 들고 천갈이 집으로 갔다. 바닥에 새로운 스폰지를 두툼하게 넣고 연한 갈색의 두꺼운 천으로 천갈이를 했다. 천이 얼마나 단단한지, 비닐 계열의 천박한 느낌이 없어 좋고, 또 외부에서도 잘 견디어낼 그런 고품격이었다. 나는 의자를 상점에서 버리는 스폰지를 얻어 테이프로 잘 감쌌다. 버스의 트렁크 속에서 딴 화물과 부딪혀 상처가 날 것을 단단히 예방하는 조처였다.

나는 2013년 8월 21일 아카바에 도착했다. 아우데가 나를 그의 트럭에 태워 와디 럼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우선 그의 엄마 캠프에 들렀다. 놀랍게도 아우데의 형 아흐마드와 아우데의 배다른 동생인 칼리드는 엄마의 텐트 밖에, 염소를 기르는 우리 가까운 곳에다가 변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은 맞배지붕의 조그만 상자 같은 집을 메탈 프레임으로 짓고 있었다. 문까지 만들어 모랫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구덩이를 파고 신발같이 생긴 도자기를 놓고 또 그 주변으로 시멘트를 부었다. 모랫바닥 밑으로 아무리 팠다고 해봐야 대소변을 저장할 탱크가 따로 마련되었을 리 만무하다. 그들은 곧 메탈 프레임을 천으로 덮어 변소를 가릴 셈이었다. 나는 이 광경을 쳐다보면서 인간세 문명의 의미를 심각하게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데의 엄마는 사막의 베두인으로서 평생을 잘 살아왔다. 그들에게 변소라는 것은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개방된 사막 모래 위 아무 곳에나 대소변을 누면 나머지는 자연이 다 처리한다. 강렬한 태양이 말려주고 분해시키고 남김없이 소독까지 다 해준다. 냄새 안 나고, 깨끗하고 오히려 위생적이다. 그런데 인제 와서 문명의 이기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변소를 만든다? 폐쇄된 공간에 온갖 냄새와 병균이 들끓게 하면서 진보와 근대화를 논한다? 이거 도대체 말이 되는가! 왜 평생을 자연 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온 아우데의 엄마에게 인위적 공간인 더러운 암흑의 변소가 필요하단 말인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무지스러운 행위에 통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은 선진 문명이었다.

내가 타야의 캠프로 돌아왔을 때, 내 집에는 이미 많은 생활용품과 다양한 식품이 쌓여 있었다. 지난번에 혜원이가 올 때 큰 여행 가방에 많은 것을 가지고 왔고, 또 요번에 내가 한 짐 더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집안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우선 작은 플라스틱 테이블 하나를 텐트 안에 들여놓았다. 그리고 작은 거울도 하나 걸어놓았고 모자나 옷을 거는 갈고리도 벽에 박아놓았다. 그리고 내가 자지 않는 옆 침대 위로 빨랫줄 같은 것을 설치해 많은 옷을 걸쳐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가방 속에 묵고 있던 것을 꺼내어 걸어놓으니, 나의 텐트는 이제 한 가정의 작은 안온한 방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친구가 남겨준 문명의 이기(利器)


▎캠프 내 침실의 안 쓰는 침대 위에 줄을 매달아 옷가지를 널어놓았다.
혜원이는 나에게 생활에 유용한 많은 물건들을 남겨놓고 갔다. 그녀가 인도에서 산 몇 개의 매우 가벼운 긴소매 면튜닉, 태양을 가릴 수 있는 몇 개의 마음대로 접어도 무방한 편리한 모자, 그리고 죽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릴 때 끼면 편리한 새틴장갑 등의 물건을 남겨놓고 갔다. 새틴장갑은 내 손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핸드로션을 바른 후에 그냥 끼고 자면 아주 손이 부드러워졌다.

사막생활은 도시인의 미관을 허락하지 않는다. 너무도 고마운 것은 혜원이가 놓고 간 전기모기채였다. 그것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중국산의 큰 라켓형의 채가 아니라 작고 성능 좋은 것이었다. 나는 이 모기채에 무한한 애착을 느끼며 잘 때 항상 곁에 두고 잤다.

이 모기채를 들어 수십 마리를 잡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막의 모기는 행동이 느리다. 한국의 모기는 마치 손흥민처럼 민첩하다. 캠프 안에는 모기가 많았다. 모기가 많다는 것은 분명 모기를 발생시키는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웅덩이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유일한 수조인 물탱크를 조사해보았다. 하지만 뚜껑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안을 들여다보아도 모기 유충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작은 흡혈귀와의 투쟁은 끝날 줄 몰랐다. 나는 심지어 대나무로 만든 시트로넬라 오일 토치까지 문 앞에 설치했는데, 그것은 내가 암만의 고급 미국 하드웨어 상점에서 산 것이다. 시트로넬라 오일을 심지로 태우면 모기가 접근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효과는 잘 모르겠다.

사막에서 즐기는 미식의 향연


▎캠프의 부엌을 읍내에서 사 온 커피와 각종 식재료로 채웠다.
아침 8~9시 사이에 이미 태양은 높게 떠 있는데, 텐트는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아침에 일찍 눈을 뜨자마자 동향의 문을 열고 마주 보는 서쪽의 창문을 열고 공기를 소통시킨다. 그러나 텐트의 대문은 동향이기 때문에 햇빛이 깊숙이 들어와 바닥을 데워 버린다. 그래서 나는 기발한 변통의 장치를 생각해냈다.

먼저 텐트 밖에 고리를 만들어 대문을 활짝 열어 고정했다. 그리고 맞은편 창문도 똑같이 묶어 고정했다. 그리고 돗자리 하나를 문의 상인방에 고정하고 그 돗자리의 늘어진 끝에다 플라스틱 테이블을 고정해 세워놓아 문지방 영역에 그림자가 드리우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돗자리가 문 전체의 비스듬한 차양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 기발한 고안품은 방안의 온도를 3, 4도는 낮추는 효과를 가져왔다.

부엌도 많이 개선됐다. 사막의 빌리지에서 구할 수 없는 많은 음식 재료들을 나는 캠프로 수송해왔다. 암만에서 아시아 식품, 특히 태국의 것들을 살 수 있었다. 쌀국수, 그린 커리 페이스트, 피시 소스, 깡통 코코넛 밀크, 참기름, 기코망 간장, 고추장을 대신할 수 있는 타이 핫소스 등등이었다. 그리고 다양한 허브, 스파이스, 파스타, 건조된 파르메시안 치즈, 일리 커피, 필터, 콘 등을 샀다. 냉장고 없이도 견딜 수 있는 음식 재료와 향신료, 양념은 내가 도시에 갔다 올 때마다 늘어났다.


▎사막에서 갖은 식재료를 넣어 만든 이탈리안 파스타.
이 새롭게 확보된 재료들과 빌리지의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것들을 결합하면, 많은 창조적인 레시피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매우 맛있는 국제적인 요리가 될 터였다. 마늘과 허브 토마토소스에다가 올리브 오일과 치즈를 섞어 볶은 이탈리안 파스타, 타이 가지 그린 커리와 코코넛 밀크와 밥을 섞어 만든 요리, 참기름에 중국식으로 볶은 야채를 덮은 자극적인 쌀국수 요리, 편두와 버섯으로 속을 만든 수제 만두, 이런 식의 창조적인 콤비네이션은 끝이 없었다.

요리하고 싶지 않을 때는 살라의 캠프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러니까 식사만은 매우 풍족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했다. 나는 매우 열정적인 요리사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먹는 것을 사랑했다. 그리고 미식가였다. 그런 습관은 사막에서도 지속하였다.

혜원이 떠나고 난 후 3일째, 나의 집 부엌 근방에 예기치 못한 손님들이 찾아왔다. 나는 오후 내내 서재 영역에서 의자를 놓기 위한 완벽한 조건을 만드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내 책상 주변을 덮어주는 반동굴형의 암벽을 빗자루로 깨끗이 털어내고 있었다. 나의 논리인즉슨, 사암이 부서지기 쉬워서 바람이 불면 미세한 모래를 날려 내 컴퓨터로 떨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나의 노동은 불필요한 것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논리에 의한 노동은 문제 상황을 해결해나가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그 서재 공간을 변형시키는 나의 노동이 가미되면 그 공간에는 나만의 가치가 생겨난다. 서재가 더욱 나의 고향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원초의 삶을 향한 갈망이 창조로 분출되다


▎여러 향신료와 채소로 만든 태국 음식들.
아래 텐트 영역으로 내려왔을 때, 부엌 주변에 세 마리의 커다란 낙타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보싸(Bossa)와 깊은 정분을 나눈 이후로 나는 낙타들을 본능적으로 좋아했다. 그래서 부엌으로 가서 쿠부츠 빵 한 보따리를 손에 들고 거기서 빵 하나를 꺼내 한 조각씩 찢어 주었다. 녀석들은 하도 먹지 않아 굶어 죽어 간 보싸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은 잘 먹어 건강했다. 그러나 과도하게 게걸스러웠다. 빵 한 조각을 맛보더니 미친 듯이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다. 나는 순간 위협을 느껴 뒷걸음치다가 그만 빵보따리 전체를 놓치고 말았다. 그들은 나의 빵 식량 전체를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살라의 캠프에서 빵을 좀 얻어올 수도 있었고 아우데에게 사다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밀가루와 이스트를 써서 직접 빵을 만들어보리라고 작심했다. 처음 만든 빵은 너무 말랐고 질겼다. 가스스토브만 있는 부엌에서 큰 냄비를 활용해 오븐 흉내를 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버터를 썼는데, 두꺼운 팬케이크와 같은 느낌의 빵이 탄생했다. 첫 번째 빵보다는 훨씬 부드러웠다.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나는 사막에서 아주 훌륭한 빵을 만드는 기술을 터득하고야 말았다. 세 명의 게걸스러운 방문객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나의 노력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들이다. 내가 일상적 삶을 개선하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 나는 본래의 의도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을 진행하고 있었다. 내가 역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더 베두인의 원래 모습처럼, 더욱 미니멀리스틱하게, 더욱 ‘원초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본래의 지향점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나의 삶이 진행된 것을 의미한다. 베두인처럼 살아보겠다던 애초 의지와 달리, 나는 내 환경을 더욱더 ‘문명화 된’ 요구에 맞추어 개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리는 사막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만두도 직접 만드는 경지에 이르렀다.
‘원초적’과 ‘문명화’를 대비시킨 나의 어투 자체가 이미 직선적 진보사관의 가치판단을 깔고 있는 것이다. 원초와 문명의 대비는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도시의 소음과 세속의 집착에서 해방되어 야생의, 천연의 자연에 동화되고 싶었던 내가 나만의 새로운 코스모스를 창조하는 데 골몰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해탈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사막이라는 원점에서 재출발하고 있었다. 무엇을 향해? 인간이 수천 년간 진행해온 문명의 전개를 나는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개’라는 말만 쓰지 ‘진보’라는 말은 쓰지 않겠다. 하여튼 나의 실험이 이루어질 곳은 사막 외에 없었다. 와디 럼에서 나의 창조능력을 재발견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들은 삶에 대한 보다 폭넓은 비전을 안겨주었다. 특히 예술가로서의 나의 삶에! 그것은 창조하고 싶어 하는 끊임없는 갈망의 분출이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909호 (2019.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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