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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정세] 중국 공산당이 보는 홍콩의 미래 

“홍콩 같은 도시는 중국에 널렸다” 

중국 관계자, 현지 시위 격화될 경우 10월 이후 무력진압 가능성 언급
대만도 독립을 추구하면 아예 ‘일국일제(一國一制)’ 통일 공언하기도


▎8월 18일 경찰의 강경 진압을 규탄하는 대규모 도심 집회에 참가한 홍콩 시민들이 폭우 속에서 홍콩 도심인 센트럴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9월 8일 일요일에 홍콩에서 또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홍콩의 시위는 이미 홍콩의 일요일을 상징하는 풍경이 됐지만 이날 시위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나흘 전인 9월 4일 홍콩 행정부 수장인 캐리 람 행정장관이 중요한 카드를 꺼내 들었기 때문이다. 시위의 발단인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을 완전히 철회하겠다고 미디어를 통해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도 시위는 수습되지 않았다. ‘오대소구 결일불가’(五大訴求 缺一不可, 5가지 요구 중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가 최근 홍콩 젊은이들의 화두로 떠올랐다.

‘5가지 요구’란 ① 송환법 공식 철회 ②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한 결정 철회 ③ 경찰의 폭력에 대한 독립조사위원회 설치 ④ 구속 중인 모든 시위 참가자의 석방 ⑤ 보통선거(완전한 민주 선거)의 실현이다. 이제 시위대는 이 중 ①만 해결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9월 8일에 열린 시위에서는 미국 의회를 향해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안(Hong Kong Human Rights and Democracy Act)’의 통과도 촉구했다. 올 6월 미국 마르코 루비오 의원과 크리스 스미스 의원(이상 공화)이 제출한 법안인데, 여기에 낸시 펠로시 하원 의장(민주당)도 힘을 보태고 있다. 홍콩의 자치와 자유, 인권을 매년 감시하고, 그것들을 해치는 당국자를 미국이 제재하는 법안이다. 이날 시위에 참가한 젊은이들은 성조기를 흔들며 “USA” “펠로시”를 연호했다. 그리고 홍콩 주재 미국총영사관에 법안의 조기 통과 청원서도 전달했다.

최근의 시위는 5년 전 ‘우산 혁명’이 기록했던 79일을 넘기며 장기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2014년 11월 베이징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직전에 홍콩에서 ‘우산 혁명’이 일어났다. 그해 8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2017년에 있을 제4대 홍콩 행정장관 선거를 당초 예정된 직접 선거가 아닌 중국 정부가 추천한 후보자들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르겠다고 한 게 발단이 되었다. 이에 반발한 홍콩 시민들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저항의 우산’을 손에 들고 시위를 일으켰다. 2014년 ‘우산혁명‘은 시진핑 정권의 명령을 받은 홍콩 당국에 의해 강경 진압됐다. 주모자들은 체포됐고 활동가 중 일부는 중국 정부에 매수되기도 했다.

그 결과 2015년 11월 치러진 홍콩구의회 의원선거에서는 건제파(친중파)가 298석을 얻어 106석의 민주파, 8석의 ‘우산혁명파’를 압도했다. 이를 전후해 중국 금서를 판매한 서점 경영자 5명이 중국 당국에 의해 구속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홍콩 시민들은 이번에 다시 일어선 것이다. ‘송환법’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4월 17일 입법회(홍콩 의회)에 설치된 조례 개정 위원회가 홍콩 반환 22주년(2019년 7월 1일) 송환법 통과를 공언했다. 원래 홍콩 시민들의 중국 정부에 대한 불신은 뿌리가 깊다. 자신들이 언제 중국으로 연행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 홍콩 시민들이 그동안 억눌러 온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4대 ‘홍콩 불필요론


▎8월 31일 송환법 반대 시위에 나온 시위 참가자들이 대형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그 뒤가 중국 인민해방군 홍콩 주둔군 건물. / 사진:연합뉴스
필자는 올 6월 초 홍콩을 찾았다. 거기서 본 것은 미증유의 불경기와 그 불경기에서 오는 홍콩 시민의 스트레스였다. 일례로 홍콩에서 택시를 탔다. 기본요금에 가까운 거리를 달리는 동안 붙임성이 좋은 청년 운전기사와 잠시 잡담을 했는데, 뜻밖에도 내가 그날의 첫 손님이라고 했다.

“아침 일찍부터 몇 시간 동안 시내를 달려도 손님이 없다. 이제 운전사를 그만두고 싶지만, 그만둬도 다른 직업이 없어서….”

그는 광둥어 사투리가 섞인 중국어로 푸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홍콩 거리를 달리거나 어딘가에 정차해 있는 택시는 거의 모두 빈 차였다.

왜 홍콩은 이처럼 극심한 불경기에 빠져든 것일까?

우선 단기적으로는, 격화되고 있는 미·중 무역 전쟁의 여파 때문이다. 주로 해운·금융·부동산으로 경제를 움직이고 있는 홍콩은 미·중 갈등의 직격탄을 맞고 있었다.

홍콩 특별행정구 통계처가 7월 31일 발표한 올해 2/4분기(4~6월) 홍콩의 실질 GDP 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0.6% 증가에 그쳤다. 리먼 브러더스 쇼크 직후인 2009년 3/4분기 1.7% 이래 가장 낮은 성장률을 보였던 지난 분기(1~3월)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상품 수출은 5.4% 감소했다. 수입도 7.0% 줄었다. 홍콩 경제는 악화일로라고 할 수 있다. 불만은 많고 할 일은 없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말이다.

현지에선 불경기의 한 요인으로 중국 대륙에서 거론되는 ‘홍콩 불필요론’을 들기도 한다.

‘홍콩 불필요론’에는 주로 3가지 배경이 작용한다. 첫째, 중국인 관광객에 의한 ‘홍콩 불필요론’이다. 지난해 홍콩을 방문한 역외 관광객은 전년 대비 11.4% 늘어난 6510만 명. 그중 전체의 78%를 차지한 것이 중국 대륙 관광객들이다. 전년 대비 14.8% 늘어난 5100만 명 수준이다. 이 숫자만으론 구매력이 높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홍콩 경제가 윤택해지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공식이 있다. 많은 중국인 관광객은 일단 홍콩으로 나와 란타오섬에 있는 홍콩 국제공항을 통해 온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많은 중국인은 이제 홍콩에는 관심이 없다. 즉 홍콩은 단지 해외여행을 위한 경유지일 뿐이다. 중국인들은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올 때 입경 수속을 한다. 입경 사유로 ‘관광’을 체크하기 때문에, 단지 경유할 뿐인 중국인들도 ‘홍콩을 방문한 중국인 관광객’으로 카운트되는 것이다.

‘홍콩 불필요론’의 둘째 배경은 인접한 경제특구인 선전의 비대화와 연결된다. 지난해 선전시의 GDP(국내 총생산)는 전년 대비 7.6% 늘어난 2조4221억9800만 위안이었다. 홍콩은 전년 대비 3% 늘어난 2조4000억9800만 위안이다.

선전시의 GDP가 홍콩을 넘어선 것이다. 베이징과 상하이에 이어 중국 본토 도시 중 셋째로 홍콩을 앞지른 셈이다. 홍콩인들은 선전을 오랫동안 한 수 아래로 여겼기에 홍콩 시민들 사이에 ‘선전 쇼크’가 퍼졌다.

홍콩은 선전 등 중국 도시보다 후졌다


▎홍콩 카오룽반도 몽콕경찰서 인근 거리에서 시위대를 쫓는 진압 경찰들. / 사진:연합뉴스
원래 선전은 1980년에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였던 덩샤오핑이 “여기에 또 하나의 홍콩을 만들겠다”며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 지정한 데서 출발했다. 당시 인구 3만 명의 어촌에 불과했기에 홍콩인은 물론 중국 공산당 간부들조차 이 약속을 ‘덩샤오핑의 몽상’쯤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인구는 홍콩의 2배 가까이 늘었고 GDP도 추월한 것이다.

필자는 6월 상순에 선전을 방문했을 때 ‘홍콩 불필요론’을 접했다. 선전의 중국 기업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불편한 점은 선전에서 해외출장을 갈 때, 일부러 홍콩을 경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회사에서 홍콩 국제공항까지 차로 3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사이에 세관 검사를 두 번 거쳐야 한다. 그래서 1200만 선전 시민은 지척에 있는 바오안 공항(선전 국제공항)이 국제노선을 더 유치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베이징 정부가 찬성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정말로 홍콩이 쇠퇴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 많은 중국인이 홍콩에서 겪는 불편의 하나가 스마트폰 결제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홍콩은 아직 현금 주류 사회이며, 홍콩 달러의 동전은 구 영국식으로 무겁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어떻게 저리 무거운 걸 가지고 다닐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앞서 선전의 중국 기업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이전에는 홍콩을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았고, 홍콩 출장이 있으면 가족이나 회사 동료들에게 대량의 쇼핑 주문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 홍콩은 진부하고 뒤처졌다는 느낌이 앞선다.”

생각해 보면 중국 주변 국가와 지역이 중국의 대도시에 견줘 낡아 보인다고 처음 느낀 것은 10년 전 대만을 찾았을 때였다. 이전까지 대만은 중국 대륙보다 모던하고 선진화된 지역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다음은 5년쯤 전의 서울이다. 그리고 요즘은 도쿄. 6월에는 홍콩에서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일본 기업 가운데서도 ‘홍콩 이탈’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홍콩 국제공항에서 선전행 리무진택시에 타자, 승차한 6명의 고객 중 5명이 일본인이었다. 나 이외는 선전의 일본계 기업 주재원이다.

그중 일본의 대기업 간부 주재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는 홍콩 사무소를 이미 접고, 선전 사무소를 50명 규모로 늘리고 있다. 지금까지는 홍콩이 광둥성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지금부터는 광둥성이 홍콩을 지탱해 가는 시대가 되는 것 같다. 홍콩 증권시장에 상장하고 있는 기업의 과반수가 중국 기업이다.”

1997년 반환 당시 중국과 홍콩의 GDP 비율은 5.4대1이었다. 즉 홍콩은 중국 전체의 20% 가까운 경제력을 자랑했다. 그것이 작년에 37대1로 벌어졌다. 홍콩의 경제력이 중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7%에 불과하기에 ‘홍콩 불필요론’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홍콩 불필요론’의 셋째 배경은 홍콩의 과거 모국이었던 영국의 쇠퇴와 긴밀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 홍콩의 근현대사는 1840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중국 정부가 홍콩섬을 영국에 할양한 데서 시작한다. 1997년 7월 1일 홍콩은 드디어 중국에 반환됐다.

해상대교와 고속철도를 통한 중국의 지배력 강화


▎홍콩, 광둥성 및 마카오를 잇는 강주아오 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사진:AP/연합
많은 홍콩인은 1997년 반환 당시나 지금이나 영국의 식민지 시절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자신들은 중국 대륙과 달리 자유와 민주, 그리고 선진국의 일부라는 것이다.

홍콩이 ‘아시아의 선진지역’으로 각광을 받는 가장 큰 동력의 하나가 ‘아시아 금융 허브’로서의 위상이다. EU의 금융 허브 격인 런던과 비견됐다. 당초 베이징 정부도 이를 중시해, 베이징→상하이→홍콩→런던 흐름을 타고 위안화의 국제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2016년 영국이 국민투표를 통해 EU 탈퇴를 결정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런던과 연결된 홍콩의 금융 허브 지위가 급강하한 것이다. 이제 아시아 금융허브센터로 싱가포르가 부상하고 있다.

중국 내에서 ‘홍콩 불필요론’이 확산되면서 ‘빨리 홍콩을 광둥성과 합쳐 버리자’는 흐름도 강화되고 있다.

지난해 두 가지 인상적인 사건이 이런 기류를 더 부추긴다. 약 9년에 걸친 공사 끝에 지난해 10월 강주아오대교(港珠澳大橋)가 개통된 것이다. 광둥성의 주하이와 홍콩의 란타우섬, 마카오의 3곳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55㎞)의 해상대교가 완공된 것이다. 지난해 10월 주하이에서 열린 대교 개통식에 참석한 시진핑 주석은 “광둥성, 홍콩, 마카오를 하나로 묶는 발전에 속도를 내겠다”고 말했다. 요점은 “앞으로는 홍콩을 광둥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또 하나는 지난해 9월 중국의 고속철도가 홍콩까지 연장된 것이다. 이른바 광심향 고속철도의 개통으로 베이징과 홍콩이 직접 이어져 8시간 56분이면 오가게 됐다.

언뜻 보면 교통이 편리해져서 홍콩 시민에게 좋은 일로 생각되지만, 개통에 즈음해 홍콩 시민들은 격렬한 항의에 나섰다. 베이징 정부가 중국과 홍콩 간 세관을 종착역인 홍콩 측의 서구룡역으로 정했기 때문이었다.

통상 세관은 경계선에 두는 게 상식이다. 그렇게 되면 출경과 입경 시에 일일이 시속 190㎞의 고속철도를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이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중국 측은 종착역에 세관을 두고자 한 것이다. 승객의 편의를 앞세운 선택이었다.

반면 홍콩 측에서 보면 중국과 홍콩의 경계선이 홍콩의 중심가까지 뻗어 와 ‘중국 지배’가 심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건설비용을 부담한 중국이 자신들의 의중을 관철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어쨌거나 이번 홍콩의 대규모 시위는 ‘홍콩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혼돈스러운 상황을 중국 정부(공산당 정권)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수습하려 들까?

9월 중순, 필자는 급하게 중국 관계자를 취재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9월 4일 캐리 람 장관이 송환법 완전 철회를 밝혔다. 중국 정부와 면밀히 협의한 결과인가?

“물론이다. 홍콩은 ‘일국양제’의 지역이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다. 람 장관이 내리는 중요한 결정 사항이나 발언 등은 모두 중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서 나온다.”

9월 4일이라는 날짜도 중국 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인가?

“구체적인 날짜는 람 장관이 간부들과 협의해 결정한 것이다. 다만 10월에 베이징에서 건국 7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있고, 홍콩에서도 9월 11일과 12일 ‘일대일로’ 회의가 열린다. 그래서 그 전에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럼에도 9월 8일 일요일에는 다시 ‘5대 요구’를 내건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야말로 전문 시위꾼이 돼 버린 젊은이들이 자신을 정당화하고자 남에게 해를 끼치고 있는 격이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도둑이 ‘여기 도둑이 있다’고 외치는 것과 같다. 홍콩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서도 폭력 시위는 종결돼야 한다.”

중국 정부는 나머지 4개 항목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보통선거의 실현이다. 이를 용인하는 것은 홍콩의 독립을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구속 중인 시위자는 적어도 10월 1일 건국 70주년 기념식을 무사히 마칠 때까지는 석방하지 않는다. 시위 참가자에게(구속된 후 석방되지 않는다고 하는) 공포심을 주면 참가자를 줄이는 효과를 본다.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시시비비의 문제다.”

보통선거의 실현, 특히 행정장관의 민주적인 선출 문제는 1997년 홍콩 반환 당시 약속한 바 아니었던가.

“홍콩 시민이 행정장관을 완전한 보통선거로 뽑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해다. 홍콩특별행정구기본법 제5조에는 ‘자본주의 제도와 생활 방식을 50년 바꾸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장관을 보통 선거로 선출한다’고 쓰여 있지 않다. 또 제23조는 국가의 모반, 분열, 반란 선동, 전복 행위 등을 금지하고 있다. 홍콩은 이미 중국에 반환되었으므로 중국의 룰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다만 중국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자본주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9월 8일 열린 시위에서는 미국 의회에 ‘홍콩인권민주주의법안’ 통과를 요구했는데, 이를 어떻게 보는가.

“시위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즉 6월부터 벌어진 일련의 시위는 미국이 배후에서 홍콩 시민을 선동하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우리는 6월 이후의 시위를 단순한 홍콩 시민의 요구로 보지 않는다. 중국과 미국의 ‘제1 열도선’(중국에서 말하는 일본 열도, 대만, 필리핀 등을 잇는 선)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공방의 한 단면으로 파악하고 있다. 미국이 스스로 음모를 꾸미고 중국 내정에 간섭할 이상한 법안까지 만들려고 하니 기가 막힌다.”

미국이 배후에서 시위 선동

이 중국 관계자는 홍콩 시위 배후에 미국이 존재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특히 미·중 무역 전쟁이 격화되는 시점인지라 중국 측은 경계심을 곧추세우는 상황이다. 이 관계자는 중국이 보는 미·중 갈등의 단계를 4단계로 분류했다. 첫 단계가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된 무역 전쟁이다. 중국 관계자는 이대로 가면 중·미 양측이 상대국의 모든 수입품에 30%의 관세를 부과하는 최악의 사태가 불가피하다고 우려했다. 둘째 단계는 중국의 화웨이 제재와 같은 하이테크 전쟁이다. 셋째 단계가 금융전쟁으로,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8월 5일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한 예를 들었다. 마지막 단계는 무력 충돌이다. 내년 1월 대만 총통 선거 이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중국은 보고 있다. 이미 미국은 F16 전투기 66대를 80억 달러에 대만에 매각토록 승인한 상태다. 중국 관계자도 제1 열도선 부근에서의 국지적인 무력 충돌을 각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연장선상에서 미국이 홍콩의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는 게 이 중국 관계자의 시각이다.

중국이 홍콩 시위 진압에 나선다면, 시기는 언제쯤이 될까?

“인민무장경찰의 진입 시기는 홍콩 행정청의 요청이 언제 있을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적어도 10월 1일의 건국 70주년 기념식이 끝난 이후일 것이다. 그때까지는 70주년 행사를 무사히 치르는 것에 집중할 것이다.”

1989년 톈안먼 광장 유혈 사태가 재현될 위험이 있다.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30년 전에는 1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톈안먼 광장이라고 하는 ‘공공장소’를 당시 학생들이 불법으로 점거했기 때문에 인민해방군이 강제 배제에 나선 것이다. 이번에는 장기적으로 불법 점거되는 장소는 없으며 홍콩의 거리나 공항 등에서의 파괴 행위를 단속할 뿐이다.”

대만, ‘동아시아의 크림반도’ 될 수도

만약 인민무장경찰이 홍콩에 진입하면 이후 홍콩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국양제’는 사실상 종언될 것이다. 특별 행정구의 이름은 남을지도 모르지만, 740만 홍콩 시민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의 신분증을 발행하고 광둥성의 일부에 편입시켜 갈 것이다. 1984년 덩샤오핑 동지와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중·영 공동성명을 냈다.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에 착수할 뿐, 아직 영국에 대항할 만한 국력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홍콩 반환을 실현하고 싶었다. 그런 약속을 한 탓에 이번 홍콩의 폭동을 용인하게 되었다. ‘일국양제’ 약속은 후회막급이다.”

1997년 당시는 중국도 홍콩 반환 후에 ‘일국양제’의 혜택을 충분히 받은 것 아닌가.

“그건 맞다. 하지만 홍콩도 중국 대륙에서 거액의 자본과 관광객이 유입되면서 경제가 크게 활성화되었다. 현재, 홍콩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어 있는 기업의 절반 이상이 이른바 ‘대륙 종목’이다. 주식 시가 총액으로 세계 8위(2019년 8월 현재)의 텐센트나, 스마트폰 세계 점유율 4위(2018년)의 샤오미도 미국 시장이 아닌 홍콩 증시에 상장하고 있다. 세계 7위의 알리바바도 현재 홍콩 상장을 검토 중이다.”

그렇게 서로 이용해 온 관계가 ‘일국양제’의 붕괴와 함께 무너질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질서 유지가 최우선이다. 8월 9일부터 13일까지 5일 연속으로 일어난 홍콩 국제공항에서 시위로 인해 우리도 분명히 방침을 바꿨다. 더는 홍콩에 대해 양보하지 않겠다. 8월 18일 국무원(중앙 관청)은 ‘선전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선행시범구 건설을 지지하는 것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내용은 2025년까지 선전을 세계 톱클래스의 국제 혁신도시로 만들고 2035년까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노베이션 첨단도시로 성장시킨다. 궁극적으로 금세기 중반까지 세계에서 우뚝 솟은 세계 최첨단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는 ‘선전으로 홍콩을 대체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올해 1월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대만 동포에게 고함. 40주년 기념식’에서 홍콩 방식의 ‘일국양제’에 의한 대만 통일을 강조했다. 만약 중국이 인민무장경찰을 홍콩에 투입할 경우, 대만은 더욱더 홍콩 방식의 ‘일국양제’에 거부감을 가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게다가 내년 1월 대만 총통 선거에서도 대만 독립을 지향하는 차이잉원 총통의 재선에 유리한 방향으로 판세가 조성될 수도 있다.

이런 위험성에 대해 중국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올여름 우리 당과 정부는 오랜 환상에서 깨어났다. 즉, 이제 ‘일국양제’에 의한 대만 통일은 포기하고 ‘일국일제’에 따라 통일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이잉원이 재선돼 ‘대만 독립’을 외친다면, 그 순간에 인민해방군이 대만에 진입할 것이다. 대만은 순식간에 ‘동아시아의 크림반도’가 된다.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2021년 7월)까지 대만을 통일하게 된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감정싸움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중국 측의 반응을 접하면서 한·일 두 나라가 과연 이렇게 감정싸움에 매달릴 때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홍콩의 대규모 시위 사태가 이런 미래를 보여 주는데도 말이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 현대] 특별편집위원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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