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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 이재용 삼성그룹 부회장 재판과 재계의 시선 

정권 반화점 앞둔 재벌 구조개혁 신호탄? 

이 부회장 징역형 확정되면 그룹 경영 차질
정부발 소유와 경영 분리 정책 드라이브 가능성에 촉각

현직 대통령 탄핵을 야기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이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2년 반 동안 법정 공방을 벌여온 이 사건에 대해 대법원이 8월 29일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하급심에서 엇갈렸던 주요 쟁점들이 대법원의 교통정리로 일단락됐다. 이에 따라 이재용(51) 삼성전자 부회장은 2심(파기환송심) 재판을 다시 받게 됐다. 이재용 부회장의 혐의는 무엇이고 정확히 어떤 부분에 대해서 유지를 선고받았을까. 또 국내 최대 대규모기업집단인 삼성그룹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 이에 따른 국내 경제의 파장과 재계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국정농단 판결을 재구성했다.


▎8월 29일 대법원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에서 유죄 취지로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 사진:연합뉴스
일단 이번 국정농단 사건에서 삼성그룹과 관련이 있는 대법원의 판결 내용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8월 29일 국정농단 사건 상고심에서 이재용 부회장과 박근혜(67) 전 대통령, 최순실(63, 본명 최서원)씨의 원심을 모두 파기하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은 대법원이 하급심에서 이뤄진 판결을 다시 다루라며 원심으로 돌려보내는 법률적 판단이다. 파기환송이 되면 ‘대법원이 한 법률상·사실상의 판단’에 구속되기 때문에 이를 받은 재판부는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대법원 취지대로 판단한다.

이 부회장에 대해 대법원이 유죄로 판단한 내용은 세 가지다. 이 중 2심이 무죄라고 봤지만 대법원이 유죄라고 뒤집은 것은 두 가지다. 이재용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에게 공여한 뇌물로 인정하지 않았던 정유라씨의 말 3필(34억1797만원 상당)과 최씨가 운영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금(16억2800만원)이 모두 부정한 청탁에 따른 뇌물이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지난해 2월 열렸던 2심에서 뇌물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대법원은 ‘삼성전자와 최순실씨는 말 3필의 실질적 사용·처분 권한이 최순실씨에게 있다는 사실을 합의했다’고 판단했다. ‘양측이 말을 반환할 필요가 없고, 실질적인 사용 권한을 이전한다고 서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한 근거는 2015년 11월 15일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와 최순실씨의 만남과 이날 오간 대화에서 비롯했다. 이날 최씨는 삼성전자가 제공한 말을 넘겨받았다. 그런데 ‘마주’를 명기하는 공간에 ‘삼성전자’라고 표기되어 있자 역정을 내며 “이재용 부회장이 VIP(박근혜 당시 대통령)를 만났을 때 말을 빌려 주는 게 아니라 사 준다고 했다”며 역정을 냈다. 그러자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결정하시는 대로 지원해드리겠다”라는 말을 전했다.

대법원이 말 3필과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후원금 등 50억4597억원 상당의 현물과 돈을 뇌물이라고 인정하면서 이 부회장의 뇌물 공여액은 86억8081억원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대법원은 1·2심에서 뇌물로 인정했던 코어스포츠 용역대금(36억3484만원)을 원심 그대로 유죄로 판단했다.

이재용 부회장, 뇌물 공여죄 3가지


▎대법원 전원합의체 참여 대법관들이 8월 29일 국정농단 사건에 관한 상고심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뇌물 공여 금액 자체가 중요한 이유는 금액에 따라 이재용 부회장이 실형을 받을지 집행유예를 받을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86억8081억원을 최순실씨에게 뇌물로 공여했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해당 금액만큼 삼성전자의 돈을 횡령한 셈이다. 개인 돈이 아닌 회삿돈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상 양형 규정상 횡령 액수가 50억원을 넘으면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등에 따라 선고 가능한 형량이 5년 이상에서 무기징역까지 늘어난다. 이 부회장 입장에서는 2심까지 이 기준 금액(50억원) 미만이었다가 대법원 판결로 기준선을 초과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뇌물액 89억2227만원을 인정한 1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반면 뇌물 액을 36억3484만원으로 낮춰서 인정한 2심 재판부는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기준 금액인 50억원 초과 여부에 따라 구속 여부가 갈린 셈이다.

따라서 이번에도 양형 기준만 보면 이 부회장은 재수감될 가능성이 크다. 재판부가 작심하고 형을 깎아 주지 않는 이상 통상의 기준으로는 집행유예가 어려울 전망이다. 집행유예는 3년 이하 징역 또는 금고형에 대해서 가능하다.

다만 한 가지 기대할 여지가 있긴 하다. 50억원을 넘는다고 무조건 실형을 받는 건 아니란 점이다. 파기환송심은 다양한 정황을 고려해 이 부회장의 실형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 부회장이 최순실씨에게 삼성그룹 승계 작업에 도움을 받기 위해 부정한 청탁을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실형은 불가피하다. 반대로 이 부회장이 최순실씨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했을 뿐이고, 횡령액도 모두 변제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집행유예 가능성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번 판결에서 또 하나의 쟁점은 부정 청탁 여부다. 최순실씨의 조카 장시호씨가 운영하던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를 지원한 돈이 뇌물이라면,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사이에 부정한 청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승계 작업을 두고 청탁했다면 부정 청탁이지만, 원심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부정청탁 대상·내용은 구체적일 필요가 없다’며 ‘공무원과 제삼자에게 제공하는 이익과 대가성이 특정되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대통령의 포괄적인 권한을 고려하면, 영재센터 지원금은 대통령 직무와 대가 관계가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일단 대법원의 판단이 이 부회장의 형을 확정 지은 것은 아니다. 기존 판결을 파기한 취지를 설명하고 재판을 되돌려 보냈다. 파기환송심에 이어 재상고심까지 아직 재판을 두 번 더 거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회장도 당장 일신상의 변화는 없다.

삼성은 일단 현행대로 사업 분야별 임시 태스크포스(TF)를 통한 비상경영 체제를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그룹 내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미래전략실을 2017년 2월 해체한 이후 삼성은 계열별로 비상경영을 시작했다. 전자분야는 사업지원 TF가, 금융 분야는 금융경쟁력 제고 TF가, 건설분야는 EPC 강화 TF가 임시로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전무·사장급인 TF장에게 주요 현안만 보고받는 현재 시스템을 유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삼성전자는 이번 판결 결과와 상관없이 예정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계속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다시 실형을 받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최소한 이 부회장이 지금처럼 활발하게 경영 현장을 방문하는 행보를 지속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실형을 면하려면 파기환송심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장 중심’ 경영 체질 변화 급제동


▎이재용 부회장이 8월 26일 충남 아산의 삼성디스플레이 사업장에서 제품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 부회장은 지난해 2월 석방된 이후 현장 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8월 6일에는 충남 천안·온양 사업장에서 반도체패키징 사업을 점검했고, 8월 9일에는 경기도 평택, 8월 20일에는 광주 가전사업장, 8월 26일에는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사업장을 방문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현장 행보를 강화하는 동시에 대규모 투자 계획도 잇따라 발표했다. 지난해 8월에는 3년간 180조원 투자 계획을 직접 공개했다. 5세대이동통신과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과 반도체산업이 투자 대상이다. 또 지난 4월에는 비메모리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스템반도체 한 분야에만 무려 133조원을 투자한다는 내용이 골자다.

1·2심 선고 때는 입장을 내지 않았던 삼성전자는 이날 대법원 판결 직후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기업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장기간 국정농단 사건 수사·재판이 있었지만, 삼성그룹이 공식적으로 입장을 발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같은 입장을 표명한 것은 대법원 선고를 계기로 과거의 관행을 반성한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 ‘위기를 돌파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경영 체제를 유지한다’는 공식 입장과 달리, 속내는 이렇게 호소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입장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이 부회장의 변호인단은 “마필 자체를 뇌물로 인정한 것은 사안의 본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은 아니다”라면서도 “피고인이 이번 일로 많은 사람에게 실망과 심려를 끼친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송구하게 생각한다”고 자세를 낮췄다.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른 정보기술(IT) 산업 특성상 글로벌 트렌드에 발맞춰 빠르게 대응하지 못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한다. 일본 수출 규제와 미·중 무역갈등으로 위기감이 커지는 상황에 나온 판결이라서다.

실제로 지난해까지 메모리 초호황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냈던 삼성전자는 상반기 매출액(108조원)이 지난해보다 9% 감소했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12조8300억원)도 지난해 상반기(30조5100억원) 대비 반 토막(-58%) 났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주력 사업의 실적 둔화로 신음하고 있다.

삼성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는 삼성물산 영업이익도 반토막(-45%) 수준이다. 삼성생명(-48%), 삼성화재(-36%) 등 금융계열사도 하나같이 수익성이 악화일로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인 그룹 총수 역할을 하는 이 부회장이 다시 감옥에 들어갈 경우 경영 상황이 심각하게 악화할 수 있다는 것이 삼성그룹 관계자들의 걱정이다.

KB증권도 ‘삼성 이재용 부회장 대법 선고 영향’ 보고서를 통해 삼성그룹의 전략적 의사결정 과정에 차질이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KB증권은 “이재용 부회장이 향후 진행될 파기환송심에 부담을 갖게 돼 최근의 적극적 경영 행보가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KB증권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그룹 계열사가 대형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지배구조를 포함한 경영 투명성을 강화하는 신뢰 회복 방안도 늦춰질 것으로 전망했다. 주요 사업뿐만 아니라 미래 먹거리를 위한 삼성그룹의 전략적인 의사결정도 위축될 수 있다. 이 부회장은 그룹 계열사와 유기적으로 관련이 있는 신규 핵심 사업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삼성그룹의 미래 투자 전략·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총수 역할을 하는 이 부회장의 역할은 상당하다.

국정농단-경영권 승계 연결고리 될까 노심초사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도 이 부회장은 결정적인 위치에 있다.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소재 수급지연 가능성이 불거지자 이 부회장은 신속히 일본으로 건너가 수급 문제를 일부 해결하고 돌아왔다.

반면 일부 시민단체는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에 미치는 영향이 과장됐다고 반박한다. 이 부회장이 구속되어 있던 2017년 삼성그룹 실적은 크게 악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근거다. 이들은 오히려 “불법행위를 엄격하게 단죄해야 기업이 건강하게 성장·발전할 수 있다”며 집행유예를 반대한다.

당장 삼성전자 이사회 구성도 문제다. 이 부회장은 삼성전자에서 등기이사직을 맡고 있다. 앞서 이 부회장은 2016년 10월 27일 서울 서초사옥에서 열린 임시주주총회에서 3년 임기 신규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25년 만에 ‘책임경영’을 이끄는 등기이사가 된 것이다.

하지만 등기이사로 선임된 지 불과 4개월 만인 2017년 2월 국정농단 사건으로 구속됐다. 창업자인 고(故) 이병철 명예회장을 비롯해 이건희 회장까지 삼성그룹 현직 총수가 구속된 사례는 이 부회장이 최초다. 이후 1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2018년 2월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아 석방됐다.

이 부회장의 등기이사직은 오는 10월 말 임기가 만료한다. 그런데 이번 유죄 판결로 삼성전자의 지분 9.01%를 들고 있는 국민연금이 이 부회장의 연임에 찬성할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서 지난 3월 열린 정기주총에서 국민연금은 박재완 사외이사의 재선임에 대해 ‘반대표’를 던진 적 있다.

엄밀히 말하면 파기환송심에서 최종적으로 형을 선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10월 26일 열리는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이 부회장의 등기이사직을 연임하는 것에 법적인 걸림돌은 없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외국인 투자자 비율은 57.4%다. 이는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특수관계인 지분을 모두 합친 지분율(21.2%, 6월 말 기준)보다 2.5배 이상 높은 비율이다.

삼성그룹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따로 있다. 이번 이재용 부회장의 유죄 판결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15년 7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콜옵션(call option, 주식매수권)이라는 일종의 부채를 숨기는 방식으로 분식회계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부채를 숨긴 덕분에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모기업 제일모직은 합병비율을 유리하게 가져갔고, 그 덕분에 제일모직 대주주인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검찰의 의심이다. 결국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는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다.

검찰은 삼성바이오로직스를 9개월 가까이 수사하며 관련자를 구속하기도 했지만, 수사가 교착 상태다. 실제로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 분식회계로 구속된 관계자는 아직 없다. 법원도 김태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를 대상으로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하지만 국정농단 사태로 이 부회장이 유죄 판결을 받으면서, 삼성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한 검찰 수사도 탄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분식회계·합병과 국정농단 사건의 ‘연결고리’를 검찰이 찾아내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국정농단 사건 이후 지금까지 삼성그룹은 27차례 압수수색을 받았고 임직원 31명이 기소됐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기업을 정상적으로 경영하기는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도 “이 부회장이 다시 자리를 비운다면 평소처럼 일상적인 업무는 돌아가겠지만 최근 발표한 수백조원 단위의 대규모 투자나 수조원 이상 인수합병(M&A)은 계속 추진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경영 불확실성에 일본과 무역 전쟁까지 재계의 이중고

판결이 나오자 재계도 걱정이 태산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입장문을 통해 “일본의 수출규제조치 등으로 대내외 어려움이 가중된 상황에서 기업이 앞장서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나설 수 있도록 지원과 격려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오늘 판결로 삼성그룹의 경영상 불확실성이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우려가 나오는 표면적인 이유는 한·일 양국 과거사를 두고 일본이 촉발한 수출규제 사태에서 삼성전자가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청와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지소미아)을 파기하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실제로 일본이 수출규제를 시행한 세 가지 품목은 모두 일본 업체들이 세계 수요의 70~90%가량을 공급한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는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 미·중 무역 전쟁 등 여러 가지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이번 판결로 경제계의 불확실성이 지속함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이 수입하는 투명 폴리이미드의 대부분은 일본산 제품이다. 금액을 기준으로 올해 수입 투명 폴리이미드(1296만4000달러) 중 93.7%(1214만2000달러)를 일본에서 공수했다(2019년 1~5월 기준). 포토레지스트 역시 일본산 비중이 압도적이다. 일본에서 대부분을 수입(1억352만 달러, 91.9%)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포토레지스트는 2010년 이후 대일본 수입 비중이 90% 밑으로 떨어진 적이 한 번도 없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일본에서 수입하는 소재 공급이 지연하면, 결국 이를 원료로 제품을 생산하는 한국 반도체 산업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 산업이 핵심 부품 및 소재, 첨단기술 등에 대한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산업경쟁력을 고도화하려면 삼성그룹이 비메모리·바이오 등 차세대 미래사업 육성을 주도해야 한다. 하지만 총수의 부재는 국가 경쟁력 제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재계의 우려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삼성그룹은 국제경쟁력 우위 확보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해주어야 한다”며 “대법원 판결이 삼성그룹 경영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정책적·행정적 배려를 부탁드린다”고 읍소한 이유가 바로 국내 재계에서 차지하는 삼성의 위상 때문이다.

배상근 전무도 “글로벌 무한경쟁 시대에 이번 판결로 인한 삼성의 경영 활동 위축은 개별기업을 넘어 한국 경제에 큰 악영향을 더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적극적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직면한 경제난을 극복해 나가는 데 매진하는 상황을 사법부가 종합적으로 고려해 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재계는 내심 이번 판결이 한국 재벌 구조 개혁의 신호탄 역할을 할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는 그간 투명한 기업경영 체제를 꾸준히 강조하며 재벌 지배구조 개편을 유도했다. 지주회사 전환과 순환출자 해소 등을 대기업에 요구하고, 일감 몰아주기 방지를 위해 계열사 개편과 관련 규제도 강화했다.

다음 타깃은 누구?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9월 8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로 출근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지난해 상반기에는 대기업 집단 간 기업결합 건수가 전년 대비 216.6% 급증했다. 롯데그룹이 6개 계열사(롯데상사·롯데아이티테크·대홍기획·한국후지필름·롯데로지스틱스·롯데지알에스)를 합병한 것이 대표적이다. 모두 정부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그런데 이번 대법원 판결로 정경유착이 일정 부분 확인된 만큼 대대적인 기업 사정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 재계의 우려다.

이번 판결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롯데그룹도 전전긍긍한다. 롯데그룹은 “예상보다 (판결 결과가) 심각하게 나왔다”며 “참 어려운 시기”라고 말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최순실씨가 주도한 K스포츠 재단에 뇌물 70억원을 공여한 혐의로 대법원 선고를 앞두고 있다. 신 회장 상고심 결과마저 이 부회장의 판결 취지를 좇아갈 경우 호텔롯데 상장 등 롯데 지배구조 개편 작업은 다시 한번 늦어질 전망이다. 한편 대법원 판결문에 언급된 SK는 최순실씨에게 뇌물 89억원을 요구받았지만, 이에 응하지 않아 뇌물공여와 관련해 임원이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기업에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국책사업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할 경우, 기업이 응한다면 묵시적 청탁이고, 응하지 않으면 정부에게 찍혀 불이익을 받을까 봐 걱정”이라며 “대통령이 요구하는데 기업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유죄가 된 상황에서 향후 기업 경영 상황이 불확실해진 것만큼은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공은 다시 고등법원으로 넘어갔다. 파기환송심 첫 재판은 이르면 추석 직후 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법조계에선 파기환송심 선고까지 최소 1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쥐고 있는 판사봉에 국내 최대 대규모 기업집단의 운명이 달린 셈이다.

- 문희철 중앙일보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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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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