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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희 대기자의 ‘지성담론’] 데카메론 ‘정의란 무엇인가’(8) 

태초의 정의가 무너지면 신은 세상을 리셋한다 

하느님이 처음 만든 세상은 상호의존하며 조화 이루는 평등 사회
신을 닮은 인간의 책무는 ‘하느님의 義’를 비폭력으로 구현하는 것


▎사진:이정권 기자
"옳음에 대한 확신이 정의(正義)에 이르는 과정을 어렵게 한다.”

앞서 불교의 화쟁(和諍)사상을 통해서 나의 옳음과 배치되는 타자의 옳음도 수용하는 대화의 불교적 태도에 관해 이야기 했습니다. 나의 옳음과 타자의 옳음이 충돌할 때 모순을 제거함으로써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 상황을 수용함으로써 갈등을 ‘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 모순된 ‘옳음’을 수용하고 변증법적으로 극복하는 것이 정의에 대한 태도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보통 종교라고 하면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단호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또한 악하고 그른 행동을 했을 때 받게 될 벌 혹은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득한다는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쟁에서 말하는 정의는 옳고 그름에 집착하지 말고 ‘조화와 공존’의 길을 발견하라고 주문합니다. 그 방법은 대화였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정의의 문제도 결국은 ‘조화와 공존’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태도로서의 화쟁은 대단히 이상적이고, 모두가 이런 태도로 대화할 수 있다면 평화적 공존이 가능할 거라는 희망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단순한 견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도 있지만, 사리(私利)와 사욕(私慾)에 지배당하는 인간들끼리 부딪치며, 이익과 욕망의 충돌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진실과 사실을 비틀고, 국면을 왜곡하며 거짓끼리의 충돌로 번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게 ‘종교적 인간’과 ‘현실적 인간’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런 현실적 인간들이 종교적 인간으로, 실질적 조화와 공존의 정의로 나가려면 우린 또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가 종교를 논할 때, 힌두교는 이 세상의 궁극성을 표현하고 이해하는 데는 최고이고, 불교는 아(我)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세상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데 최고이며, 기독교는 세계의 부정성·역사성·우발성, 특히 악의 문제를 다루는 데는 최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신 대목이 생각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구원이 단순히 자애로운 포용과 인내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실질적으로 악이 존재하는 인간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그러한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문제를 이정배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시겠습니다.

창세기는 ‘원죄’ 아닌 ‘원복’의 시대


▎이정배 목사, 신학자 현장아카데미 원장
우선 예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습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눈먼 장님과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함께 살았습니다. 이들은 앉은뱅이의 눈을 통해 보았고, 장님의 다리를 통해 함께 걸었으며 일했습니다. 다소 불편했지만 일상은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볼 수 있는 눈을 지닌 앉은뱅이 마음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함께 일해 벌었으나 자기 몫을 더 챙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반복, 지속된 탓에 걷지 못하는 이는 더욱 비대해졌고 보지 못하는 자는 한없이 여위어 갔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극한 상태로 야윈 장님이 비대한 앉은뱅이를 업고 가다가 빙판에 넘어져 두 사람 모두 일어서질 못했고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은 너무 살쪄서, 다른 이는 너무 힘이 없어서였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함께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첫 장의 설화를 상기시킵니다. 신이 만든 처음 세상은 모든 것이 상호의 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보기에도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참 좋다’고 환호했습니다. 자기가 지은 만물이 저마다 자기 역할을 하며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신의 창조행위는 사실 자기 능력을 세상과 나눈 것이었습니다. 땅·바다와 하늘을 갈라 곳곳에서 생명을 자라게 한 것 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에게 자기 일을 맡기기도 했습니다. 같은 땅일지라도 먹는 것을 달리했기에 인간과 짐승은 동일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저마다 씨를 뿌려 먹거나 절로 나는 것을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성서적 용어로서의 ‘지배와 정복’이란 말은 본래 이런 뜻이었습니다. 성서는 인간을 하느님 형상(Imago Dei) 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래 이 말은 신이 세상을 지속적으로 창조, 유지시키듯 인간 역시 그 역할을 본분으로 삼으라는 취지였습니다. 인간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면 악당이라 불렸고(시편 104편) 삶의 공간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의 환호를 지속시키라는 책임의 다른 표현입니다.

안식일 역시 이런 책임, 바꾸어 말하면 ‘하느님의 정의’를 축하하는 날이어야 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이런 세상을 믿었고 따랐습니다. 창조는 축복의 행위였으며, 만물은 축복을 누리는 주체였습니다. 그래 이를 ‘원복(Original Blessing)’이라 하였고, 안식일은 원복의 상태를 축하한 것입니다. 이는 원죄를 앞세웠던 종래의 신학(어거스틴)과는 크게 변별됩니다.

하느님 정의를 파괴한 인간 벌하는 ‘신적 폭력


▎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
우리는 이런 창세기의 설화가 만들어지고 고백된 특별한 정황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와 유대민족의 출발점은 바빌론 포로기(BC 597~BC 538년) 시절로 봅니다. 당시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게 멸망한 유다 왕국은 왕과 상부층을 이루는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70여 년간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함께 잡혀갔던 제사장들이 그 지역의 창조설화(길가메시 서사시)를 보고 만든 것입니다. 유대인의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신앙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조설화를 기술하는 방식은 보고 배웠지만 크게 다른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들의 창조설화에는 하느님의 권능을 강조했고 왕뿐만이 아니라 남녀 존재 각각이 신적 형상을 부여받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종살이하던 민족, 미래를 빼앗긴 민족에게서 나왔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고된 노예의 삶 탓에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들은 세상을 정의롭게 지은 하느님을 믿은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종살이를 나태·무책임·교만, 즉 자신들 죄의 탓으로 여겼습니다.


▎아담의 짝으로 하와를 창조한 하느님.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빠지며 창조 당시의 ‘원복’이 ‘원죄’로 바뀐다.
다소 늦게 형성된 아담과 하와(뱀)의 이야기는 하느님 정의를 파괴한 인간의 실상을 적시한 것입니다. 신과 사람의 관계가 깨어지면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역시 해체됨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보기 좋은 세상, 곧 하느님의 정의가 끝나버린 현실을 적시한 것입니다.

이를 요즘 말로 하자면 ‘세상이 기울어진 운동장 모습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세상으로 변한 것을 보고 후회했고, 이를 홍수로 벌했습니다. 만물이 상호의존하며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창조했던 ‘하느님의 정의’를 파괴한 세상을 파멸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를 흔히 ‘신적 폭력’이라고 합니다.

이후에도 성서 곳곳에서 신적 폭력이 등장합니다. 이 폭력의 목적은 오로지 하느님 정의의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신화적 언어들이 뒤섞여 있으나 방점은 하느님 정의에 찍혀 있습니다.

기독교 창조신앙의 본질을 대홍수에서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간 잘못으로 언제든 창조가 혼돈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적 폭력은 ‘사랑’의 다른 말로도 이해됩니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서 사람(노아)과 각각의 종자(씨앗)를 남겨두었던 까닭입니다. 실망으로 인해 완전히 파멸시킨 것이 아니라 맹아를 남겨서 다시 모두에게 조화로운 세상을 선사하려고 한 사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노아와 함께 시작된 새 세상, 그 유지 존속을 위해 신은 인간에게 두 가지를 지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눈에서 억울한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 것’과 ‘동물을 피째로 먹지 말라’(창9:1-7)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는 사람들 간의 형평성, 곧 정의의 감각일 것입니다. 후자는 자연과의 형평성, 생태적 차원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두 조건이 하느님 환호가 지속될 수 있는 이유였습니다. 이를 위해 인간은 존재해야 합니다. 하느님 정의가 유지될 때에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 두 조건은 자동차의 두 바퀴처럼 함께 작동합니다. 함께 지켜지거나 함께 깨지거나 할 것입니다.

이후 성서는 이 두 조건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의 현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흔히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원(原)역사(태고사)적 의미로 수용합니다. 인류 모두에게 뜻을 제공하는 보편적 신화처럼 독해하라는 뜻입니다.

원죄 이후 인간 세상은 창조된 본성들 즉 궁극성, 관계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타락한 것입니다. 이로부터 기독교(성서)는 우발성의 세상, 인간이 만든 역사적 현실과 투쟁하고 갈등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관계성이 깨진 세상. 극도로 부유해진 집단과 자포자기에 이른 가난한 다수가 갈등하는 세상에서 하느님 정의를 선포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적 폭력도 종종 행해졌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신적 폭력은 궁극적으로 신적 사랑이기도 합니다. 신·구약성서 몇 곳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호수와 시대에 떠돌이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얻었고 그곳에 정주하게 되었습니다. 여리고성의 함락은 일종의 약탈행위로 볼 수 있지만 유랑자 유대인의 시각에서 쓰였기에 축복이라고 합니다. 여하튼 그곳에서 12지파 사람들에게 골고루 땅이 분배되었고 평등한 관계하에서 새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소유권이 바뀌고, 가난한 자들이 속출했습니다. 심지어 동족끼리 종으로 사고 팔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이자를 내지 못한 탓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깨질 것을 염려한 신은 재차 신적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일방적으로 ‘희년’(禧年)을 선포한 것입니다.

땅을 분배받고 경작한 지 7년씩 7번이 되는 다음 해, 즉 50년째에 이르러 땅을 처음 상태로 되돌리라는 명령입니다. 땅도 쉬고 사람의 멍에 일체를 해결하라는 하느님의 법이었습니다. 이것을 이후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의(義)’라고 불렀습니다. 일종의 ‘토지공개념’의 뜻을 지녔다 할 것입니다.

무수한 반발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성서에 희년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서술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힘겨웠다는 방증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언자들은 거듭 이런 원칙을 갖고 왕권에 도전했고, 그 곁에 머문 제사장 그룹을 압박했습니다. 가난한 자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자 하느님의 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 빈부 격차 키우는 체제 뒤흔들라고 주문


▎하느님은 탐욕으로 타락한 세상을 홍수로 처벌하는 신적폭력을 행했지만 노아의 방주엔 모든 생명체의 맹아를 피신시켰다.
‘하느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오로지 의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희년 법은 현실적으로 지켜질 수 없는 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 의였고 창조세계가 지속될 수 있는 원리였기에 성서는 이런 신적 폭력을 거듭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법으로는 ‘참 좋다’라는 하느님의 환호를 지속시킬 수 없었습니다.

같은 선상에서 예수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주지하듯 예수 탄생에는 초자연적 의미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예수 선재설(요한)과 성령 수태설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이를 달리 해석합니다.

‘체제 밖 사유’로서 예수의 정체성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가 자신을 하느님과 같이 보는 자의식 그리고 그의 하늘나라 사상은 자기 가르침이 ‘체제 밖 사유’인 것을 적시한 것입니다.

기존의 체제는 강자와 약자, 기득권층과 소외층, 부자와 빈자로 나누어져 힘과 부를 가진 자들이 체제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존 체제 안에서 체제를 바꾸는 것은 한없이 힘겹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는 평등하게 이 땅을 지으신 본래의 하늘 뜻이 이 땅에서 이뤄지기를 기도했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곧 체제 밖의 사유로 무장하고 체제를 뒤흔들라고 한 것입니다. 체제가 만든 굽은 길을 곧게 하고, 움푹한 곳을 메우는 일을 자신의 첫 과제라고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은총’의 핵심의미입니다. 체제 밖 사유가 체제 속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때 체제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가난을 부추기며 부자를 더욱 배 불리는 사회를 일컫는 것입니다. 제국에게 군사·경제적으로 주권을 빼앗긴 현실, 대기업(?)처럼 되어버린 성전에 종교세를 바쳐야 공동체 생활(구원)을 보장받는 현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정치·종교적으로 인간을 다시 주체로 내세웠습니다.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제국과 종교로부터 인간을 다시 구출키 위함입니다. ‘구하라 얻을 것’이란 기도 역시 빼앗긴 이들에게 전한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는 “죄인을 구원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때의 죄인은 보편적 의미의 죄인, 즉 정신적 영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종교세를 내야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고, 구원도 받는다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점령국인 로마에도 세금을 내고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 공동체에도 ‘성전세’라는 세금을 내야 하는 이중과세에 시달렸습니다. 기근이 들어 가난한 유대인 중에는 무력을 앞세운 로마에는 세금을 냈지만 종교지도자에게는 세금을 바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기득권자들이었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들을 공동체에서 쫓아냅니다. 유대교에서 세금을 내지 못한 이들을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공동체의 삶으로 복귀시키는 것을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내세의 구원이 아니라 현세의 구원이었습니다.

이런 구원의 길은 비폭력적이어야 옳습니다. 예수가 체제 밖 사유로서 선포한 하늘나라의 비유들, 예를 들어 포도원과 잔치의 비유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첫 비유에서 예수는 포도원에 늦게 일하러 온 자에게도 동일 품삯을 주었고 하늘나라를 이와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체제 안에서는 생각할 수 없겠으나 일용할 양식을 염려하는 하느님 정의의 시각에서는 마땅한 일입니다.

둘째 비유에서 예수는 자신의 잔치에 ‘되갚을 능력이 없는 자’를 초대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고자 하는 현실과는 아주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하나 예수의 종교는 이런 인과성을 벗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세상이 기울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바로 은총, 체제 밖 사유로서 하느님의 의가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체제 밖 사유’로 부당한 현실에 맞선 바울


▎지구의 종말을 다룬 영화 [딥 임팩트]의 포스터.
다메섹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Christophany) 체험 이후 사도 바울에게는 전혀 다른 삶이 찾아왔습니다. 예수와 같은 일종의 체제 밖 사유였습니다. 지금껏 그는 가부장제 하의 남성으로서, 로마 시민권자로, 유대의 율법학자로, 헬라 철학의 대가로서의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전혀 다른 삶이 주어졌고, 그 경험 하에서 로마서를 집필할 수 있었습니다.

예컨대 로마서에 여성 동역자들 9명 이름이 기록된 것만 보아도 가부장적 체제에서는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왔던 세상을 전면 부정했습니다. 긴 세월 동안 헬라의 지혜가 작동했었고, 그를 사상적으로 잇는 로마법이 세상을 지배했으며 자신을 선민(選民)이라 여길 만큼 유대인의 율법이 존재했으나 이들 모두가 결국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 저마다 물욕에 빠져 욕심꾸러기 된 현실, 도착적인 성적 현실을 열거하면서 말입니다. 탐진치(貪瞋癡, 욕심·성냄·어리석음)의 현실을 확대 재생산시킨 앞선 지혜·이성·법 등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은 당시로써는 세상 전체의 총체적 부정이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점에서 ‘하느님의 의(義)’가 새롭게 나타났음을 선포했습니다. 그것만이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말을 바꾸면 지금껏 세상에 정의는 없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무용한 법과 철학 그리고 윤리를 내치라는 것입니다. 물론 헬라의 지혜, 유대 율법, 로마의 체제가 부분적으로 유효할 것이나 그것으로 세상을 구할 수 없다면 총체적으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하느님의 의는 법을 능가한다는 고백입니다. 이것 역시 신적 폭력의 다른 표현이겠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신학자 칼 바르트가 로마서를 갖고 새 세계를 열고자 했던 것도 이해할만합니다.

“그렇다면 새롭게 나타난 ‘하느님의 의’란 무엇인가?”

“어떻게 그것이 부정의한 세상을 구원할 은총이 된다는 것인가?”

“실제로 공의라는 것은 실현될 수 있는 것인가?”

저 자신도 많은 질문이 꼬리를 이어 떠오릅니다. 종교적 답이 현실에서도 답이 될 것인지 많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지금껏 하느님 의가 세상에서 실현된 바는 없습니다. 어느 특정한 시점, 종말에서나 가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데리다 같은 철학자는 차연(差延, 디페랑스) 개념을 사용하여 ‘답의 미뤄짐’을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행위는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형상을 한 인간의 책무라면 말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정의의 완성은 사랑으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정의와 사랑의 관계를 다음처럼 설명하였습니다. 컵의 물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는 컵 밖으로 물을 흘러 넘치게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가득찬 물은 정의일 것이고, 흘러 넘치는 물은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사랑만이 정의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보았듯이 하느님 의는 은총이자 사랑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폭력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법과 맞서는 일도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읽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요즘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형태의 저항들, 예를 들어 난민을 내치고 이주 노동자 인권유린을 묵인하며 약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실정법에 대해 저항하는 것, 이를 흔히 무법적 정의라고 하는데 이 역시도 하느님의 의(義)이자 사랑이라고 풀이할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폭력을 금합니다. 하느님 폭력의 본질이 사랑인 때문입니다. 비폭력적 방식으로 체제 밖 사유, 은총을 실현시키라 명합니다. 이런 삶을 일컬어 그리스도 안의 존재(Sein in Christo)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시 바울을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삶과 사상이 지금 이 시대의 좌파 철학자들 사이에서 세상을 구할 이치로서 부각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차이를 가로지르는 보편성 보여준 바울의 삶


▎기존의 나쁜 체제에 비폭력으로 저항한 촛불집회는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는 한 방법론을 보여준 사례다.
우리는 요즘 ‘새로운 보편성’에 대해 탐구합니다. 이는 정의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껏 서구적 보편(동일)성에 저항하는 개별 주체성이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차이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보편성’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철학자들은 다메섹 체험 이후의 바울에게서 그 단초, 에토스를 찾고 있습니다. 주지하듯 바울은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임을 포기했고, 현자였으나 지혜자인 것을 버렸으며 로마 시민권자였지만 로마법을 버렸습니다. ‘마치 ~이 아닌 듯’( As if not)이 살았던 존재였습니다.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모두’를 위해 스스로 종이 된 존재라 할 것입니다.(고전 9:19절 이하). ‘마치 ~가 아닌 듯’ 삶으로써 바울은 ‘누구에게나 그 누구처럼 되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하느님 의가 나타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법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종교적인 비폭력성의 방식입니다. 바울은 이런 의를 갖고서 로마와는 다른 제국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새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2050년에 이르면 불사·불멸·행복이 주성장 산업으로 가시화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위 포스트휴먼으로 불리는 기계인간, 호모 데우스의 출현으로 돈 없는 호모 사피엔스가 무력화될 것을 예상한 것입니다. 기계 인간과 그렇지 못한 자연인의 차이가 인간과 동물이라는 종의 차만큼이나 크다고 했습니다. 4차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란 바로 호모사피엔스가 무력화되고 부정의가 극대화되는 시점이란 것입니다. 하라리는 종교에 대해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제도의 역할을 마감하고 이런 흐름과 맞설 수 있는 힘(영성)을 키우라고 말입니다.


▎신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한 유다왕국의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바빌론 포로기 시절.
결국 21세기 후반도 부정의가 지배할 것입니다. 지금껏 말한 ‘하느님 의’는 이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될 것이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의 것이 실상은 모두의 것이란 뜻을 갖고 있듯이 하느님 의 또한 모두의 바람이자 소망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촛불 정신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하느님의 의는 기존의 나쁜 법과 윤리에 대항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하되 비폭력적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정신만큼은 하느님 의와 근접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기존 체제를 전복하고 난 뒤 새로운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이젠 하느님 의에 근거해서 또 민주당에게 요구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정치학자가 말했듯이 1인 1표제도란 한 표가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현 제도하에서는 50~60%가 사표로 처리됩니다. 그래서 민주 대의제란 말이 가당치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표의 가치를 살릴 수 있도록 민주당은 통 큰 정치를 해야 합니다. 각 정당이 받은 표만큼 힘을 가질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낼 때 세상은 달라질 여지가 생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평화 기운이 감도는 이 땅에서 분단체제가 만든 남남갈등이 평화체제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도 걱정입니다. 종교, 특히 기독교가 앞장서고 있으니 부끄러운 일입니다. 인간이 만든 벽을 부수는 것이 성령의 일이라 했으니 그 성령 또한 하느님의 폭력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에게 하나님의 폭력이 임할 것을 기대하며 하느님 형상의 삶을 살아내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기독교에 대해 반성을 해봅니다. 기독교는 애당초 교리로써 가진 부정성 때문에 세계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배타성 가지고 있어서 모든 걸 배타하고 갈등구조에 빠지게 하는 못된 구조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기독교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의 의이며, 바울의 종교체험과 같은 수행적 진리 차원에서 차이를 포용하는 보편성을 확립하고 그런 삶을 살아내는 것이 곧 정의가 아닐까 합니다. 또한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며, 이를 사적으로 취한 것이 있다면 공적으로 환원하는 삶이 곧 기독교가 실현해야 하는 정의일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 나에게 기도하는 것보다 낫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독교적 정의란 교회 내에 갇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 중앙일보 온라인편집국장과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사회적·경제적 소외와 불평등 문제를 직설화법으로 다루는 칼럼으로 유명하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이며, 해박한 중국 역사와 고전 지식을 바탕으로 [여류(余流)삼국지(메디치미디어)][적우(敵友):한비자와 진시황(나남)]등 중국 역사소설을 썼다. 서울대에서 경제교육학 전공으로 교육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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