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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2부)] 중세 중국화와 유교 수용의 주역들(2) 안향, 성리학을 들여오다 

국가와 가정 살릴 구세주로서의 유학 

당 태종 통치철학에 매료된 김춘추, 당과 정신·문화적 동맹 추구
불교 부정부패 수렁에서 헤매자 유교에서 희망 찾는 지식인 늘어


▎성균관대 대성전에서 열린 춘기 석전대제. 석전대제는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춘추는 당 태종과 648년(진덕여왕 2) 장안에서 두 차례 회담했다. 첫 번째는 상견례 겸 예비회담 성격이었고, 두 번째가 본회담이었다. 신라와 당의 군사동맹,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분할 등은 본회담인 두 번째 회담에서 논의, 결정됐다.

첫 번째 만남이 예비회담이었다고 해도 그 또한 역사적 회담이었다. 김춘추가 당 태종과 처음 대면하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 태종은 김춘추의 ‘의표(儀表)가 영위(英偉)’함을 보고 후하게 대접했다고 한다. 의표가 영위란 ‘몸가짐이 영특하고 늠름하다’란 뜻이다.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나기 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을 기록한 [일본서기]에서는 김춘추를 ”얼굴이 잘생기고 말을 잘했다”고 평가했다.

똑똑한 김춘추는 당 태종을 만나기 전 어떻게 하면 그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깊이 고민했을 것이다. 반드시 나당 동맹과 군사원조를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당 태종을 만난 김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에 참관하기를 요청하자 당 태종이 허락했다. 아울러 당 태종은 자신이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 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김춘추와 당 태종의 첫 만남에서 둘 사이에 깊은 신뢰가 형성됐음을 암시한다.

먼저 김춘추가 참관하기를 요청한 ‘국학’은 당나라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이었다. 당나라 국학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당 태종이 천하의 명유(名儒)들을 학관(學官)으로 삼고 자주 국자감에 행차해 학관들을 시켜 학문을 강론(講論)하게 하고, 또 학생으로서 능히 하나의 경전 이상에 밝게 통달한 사람은 모두 관리에 등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학교 건물 1200칸을 증축해 학생 3260명을 채우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 기록에 나타난 그대로 당 태종은 국자감에 큰 정성을 들이고 있었다. 당 태종은 국자감에서 충성스런 관료들을 양성해낼 뿐만 아니라 중국 문화의 정수인 유교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즉 당시 국자감은 당 태종의 통치철학과 통치비법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김춘추는 깊은 고민 끝에 당 태종과의 첫 만남에서 국자감의 ‘석전과 강론에 참관하겠다’고 요청했을 것이다. 그 ‘석전’은 유교의 교주(敎主) 공자에게 올리는 제사이고, ‘강론’은 유교 경전을 해설하는 교육이다. 이 같은 석전과 강론에 바로 당 태종이 지향하는 통치철학과 통치비법이 압축돼 있었다.

그런 석전과 강론을 김춘추가 참관하겠다고 요청한 것은 김춘추 자신이 솔선해 당 태종의 통치철학과 통치비법을 배우겠다는 암시였다. 이 암시는 김춘추를 위시한 신라 전체가 당나라의 유교 문화를 열심히 배우겠다는 다짐과 같았다. 바로 이 다짐 때문에 당 태종이 김춘추를 크게 신뢰하게 됐을 것으로 보인다.

세 아들을 당에 보낸 태종무열왕


▎우리나라 최초의 유학자인 안향의 초상.
김춘추는 자신과 신라가 유교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당나라와 단순한 ‘군사동맹’을 넘어 문화적·정신적 동맹으로까지 즉 ‘가치동맹’으로까지 발전시키겠다는 뜻을 알렸고, 당 태종은 그 뜻을 알아챘다. 그래서 당 태종은 자신이 직접 지은 온탕비·진사비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를 줬을 것이다. 온탕비는 당 태종이 지은 기산(驥山)의 온천 비문(碑文)이고, 진사비는 당 태종이 지은 진(晉) 나라 시조(始祖) 비문이며, [진서]는 서진(西晉)과 동진(東晉)의 역사책으로 중요한 열전과 사론을 당 태종이 직접 지었다.

즉 온탕비·진사비·[진서]는 당 태종의 통치철학과 통치 비법을 자기 자신이 직접 드러낸 저술이라 할 수 있다. 당 태종은 국자감의 석전이나 강론만으로는 김춘추에게 자신의 통치철학과 통치비법을 충분히 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자신이 직접 지은 온탕비 등을 추가로 줬던 것이 분명하다.

당 태종의 통치철학과 통치비법을 배우고자 하던 김춘추의 노력과 의지는 그의 아들들을 통해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김춘추는 당나라에 갈 때 셋째 아들 김문왕을 데리고 갔는데, 귀국하는 시점에서 “신에게는 7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원하건대 고명하신 폐하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宿衛)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짐으로써 김문왕은 당나라 궁중에 남아 내부 정보를 파악하고 선진문화를 배울 수 있었다. 아울러 김춘추는 귀국 직후인 650년(진덕여왕 4)에 둘째 아들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냈다. 역시 당나라의 내부 정보를 파악하고 아울러 선진문화를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어서 651년(진덕여왕 5)에는 첫째 아들 김법민을 당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김춘추 본인을 위시해 그의 아들들인 김법민·김인문·김문왕이 당나라의 내부 정보와 선진문화에 대해 당대 최고의 식견을 자랑하게 됐다. 김춘추는 훗날 태종무열왕이 됐고 김법민은 문무왕이 됐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바로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에 의해 주도됐다. 나아가 신라의 유교화 및 중국화 역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에 의해 주도됐다.

김춘추가 귀국한 후 신라의 정치제도와 전통문화는 대대적으로 유교화·중국화됐다. 당나라의 장복(章服) 제도를 수용한 것은 물론 연호와 조회의례도 수용했다. 정부조직 역시 당나라의 제도를 본떠 대대적으로 정비됐고 국학도 설치됐다. 654년(태종 무열왕 1) 김춘추가 왕위에 즉위하면서 신라의 유교화·중국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거시적으로 볼 때 한국과 중국은 기원전 4세기 이전에는 별다른 외교 관계도 없었고 군사적 충돌도 별로 없었다. 한국은 만주와 한반도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명을 발전시켰으며 중국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명을 진전시켰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께부터 한국의 고조선과 중국의 연나라가 군사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양국은 요동지역을 놓고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양국 간 무력충돌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1000년 가까이 지속됐다.

하지만 양국 간 무력대결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거의 사라졌다. 비록 신라는 당나라의 영토 야욕에는 결연히 맞서 싸웠지만 그것이 없을 때는 당나라 패권질서에 순응했다. 668년(문무왕 8)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고구려 고토를 지배하기 위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2만 병력을 주둔시켰다.

역사적으로 보면 안동도호부는 고조선 고토에 설치됐던 낙랑군(樂浪郡)을 계승하는 통치기관이라 할 수 있었다. 안동도호부는 나당전쟁이 종결된 직후인 677년(문무왕 17) 요동지역으로 퇴각했다. 그 시점에서 신라 문무왕은 마음만 먹으면 대동강을 넘어 평양을 무력 점령할 수도 있었다.

동아시아 2인자 추구한 신라의 야망


▎성리학의 창시자로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친 주희(주자)의 초상.
그러나 문무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 태종과의 영토분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평양을 점령할 수도 있었는데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통일 이후에도 신라가 당나라 패권질서에 순응했다는 뜻이나 같았다. 김춘추가 국가 노선으로 확정한 친중국(親中國) 노선을 통일신라 이후에도 계승한 것이었다. 그 대가로 통일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영토만 보유하는 작은 국가로 존속했지만 생존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통일신라 이전 한국의 문화는 북방 유목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무력을 숭상했다. 그때 중국은 배우고 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경쟁과 타도의 대상으로 간주됐다. 이런 배경에서 고조선 그리고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과의 연대를 통해 중국과 무력대결을 벌였다.

하지만 김춘추와 그 아들 문무왕의 주도로 삼국이 통일된 후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중국은 더 이상 경쟁과 타도의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배우고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통일신라 때 수많은 유학생과 유학승들이 당나라로 건너가 유교와 불교를 배웠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당나라에 가장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을 보낸 나라는 바로 통일신라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당나라에 가장 많은 사절을 보낸 나라 역시 통일신라였다. 통일신라는 열성적으로 당나라의 유교문화를 배움으로써 동아시아에서 2인자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유교화·중국화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었다. 유교와 불교 그리고 자국 전통문화가 공존·공영했다는 특징이 그것이었다. 불교가 주류사상이었기에 나타난 특징이었다. 게다가 통일신라 때는 관료 등용이 골품제를 통해 이뤄졌기에 유교 교육도 형식적이 됐고, 그 결과 왕실에서 유교를 장려하기는 했지만 주류사상이 되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통일신라의 유학자들은 유교에 대한 숭상 못지않게 자국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아주 강했다. 그것은 최치원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주지하듯이 최치원은 통일신라의 도당 유학생으로서 당나라에서까지 문명을 떨친 대유학자였다. 그 최치원이 자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강렬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신라 화랑제도를 설명하면서 최치원의 ‘난랑비문’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풍류도(風流道)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한데 실로 유교·도교·불교의 가르침을 포괄한다. 풍류도는 백성을 접촉해 교화하는 데 들어가 가정에 효도하며 나아가 국가에 충성함은 공자의 취지이고, 무위의 일에 처하며 무언의 가르침을 행함은 노자의 종지이며, 여러 악업을 짓지 않고 여러 선업을 행함은 부처님의 교화다”는 난랑비문은 신라의 전통문화인 풍류도에 대한 자부심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즉 최치원은 풍류도가 유교·불교·도교의 핵심을 포괄한다고 함으로써 신라의 전통문화인 풍류도가 유교·불교·도교에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것이다. 최치원은 비록 당나라에서 유교를 공부했지만, 그 유교에 함몰되지 않고 자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유지했던 것이다.

이처럼 김춘추 이후 비록 친중국 노선으로 인한 중국화와 유교화가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됐지만, 그것은 자국의 전통문화 그리고 불교와의 공존·공영에서 이뤄졌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런 특징은 고려시대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유교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된 상황에서도 비슷했다.

무당 셋을 때려잡은 상주 판관의 기개


▎중국 베이징 안정문 근처에 있는 국자감. 공자를 모신 사당이 있다.
예컨대 고려의 최승로는 불교를 수신지도(修身之道), 유교를 치국지도(治國之道)라고 해 불교와 유교의 공존·공영을 강조했다. 이처럼 유교와 더불어 불교 그리고 전통문화와의 공존·공영을 강조하던 특징은 고려 말에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크게 변했다.

성리학은 고려 말 안향에 의해 수용됐다. 안향은 최씨 무신정권과 몽고 사이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243년(고종 30) 경북 풍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안부(安孚)가 한의사이자 향리였기에 안향은 어려서부터 과거 준비에 몰두할 수 있었다. 고향 풍기에 있던 숙수사(宿水寺)에서 과거 공부에 매진했는데, 당시에는 절에서 과거 준비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안향이 17세 되던 1259년(고종 46)에 고려는 몽고에 항복했고, 다음 해 안향은 과거에 합격했다. 29세부터 벼슬길에 오른 안향은 33세에는 상주 판관을 역임했다. 관료로서 안향은 비타협적인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이와 관련해 안향이 상주 판관 재직 중 있었던 일화가 [고려사] 열전에 전한다.

당시 상주에 여자 무당 3명이 있었는데, 영험한 신통력이 있는 것처럼 해 사람들의 재산을 갈취했다. 그들은 일종의 복화술(腹話術)을 이용해 마치 귀신과 대화하는 것 같은 상황을 연출했다. 이에 사방에서 신도들이 생겨나 재물을 바치고 굿판을 벌였다. 하지만 무당 3명을 사기꾼이라 생각한 안향은 그들을 체포해 매질을 가했다.

처음에 무당들은 신의 말씀이라며 복화술로 안향을 위협했지만, 안향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자 그 무당들은 잘못했다고 애걸했고, 안향은 그제야 석방했다. 영험하다고 소문났던 무당들이 실제는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신도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이 열전은 젊은 시절부터 안향이 유학을 신봉하면서 무속 등의 전통문화를 미신으로 배척했음을 알려준다.

나아가 안향은 불교에 대해서도 아주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안향은 36세에 국자감의 국자 사업(司業)에 제수됐는데, 그때 ‘제학궁(題學宮)’이라는 시를 지었다. 그 시에서 안향은 불교와 무속이 횡횡하는 현실을 이렇게 개탄했다. “곳곳에 향불 밝혀 부처에게 기도하고(香燈處處皆祈佛), 집집마다 피리 소리 귀신을 섬기네(簫管家家盡祀神). 외로운 두어 칸 공자 사당에는(獨有數間夫子廟), 봄풀만 뜰에 가득할 뿐 찾아오는 이 없구나(滿庭春草寂無人).”

‘곳곳에 향불 밝혀 부처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곳곳의 절에서 불공을 드린다는 뜻이고, ‘집집마다 피리 소리 귀신을 섬기네’라는 것은 집집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한다는 뜻이다. 즉 당시 고려 사람들은 불교와 무속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반면 국자감에 설치된 공자 사당에는 찾는 사람이 없어 뜨락에 풀이 가득할 지경이었다.

불교·무속 타파 위해 성리론 받아들여


▎부산 충렬사 안락서원 교육회관에서 열린 ‘초등학생 전통문화 체험교실’에 참가한 어린이들이 삼강오륜을 배우고 있다.
당시 원나라 부마국 고려는 국가적으로 독립을 잃었고 사회적으로는 가정파탄이 심각한 문제였다. 젊은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가정과 국가를 살리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를 놓고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고민은 국가와 가정 파탄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안향은 국가와 가정파탄의 근본 원인을 불교와 무속에서 찾았던 것이다. 불교의 출가사상, 그리고 무속의 무분별한 굿이 가정을 파탄 내고 국가도 파탄 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안향은 불교와 무속에 적대적이었지만, 불교의 심오한 형이상학을 어떻게 이론적으로 타파할지 잘 몰랐다. 그 고민은 1289년(충렬왕 15) 10월, 안향이 47세 때 충렬왕을 호종(扈從)해 원나라 북경에 가면서 해결됐다.

[회헌선생실기(晦軒先生實記)]에 의하면 북경에 도착한 안향은 처음으로 주자 저서를 보고 마음으로 몹시 좋아했다고 한다. 안향이 주자 저서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이유는 평소의 고민 즉 불교를 어떻게 이론적으로 타파할까에 대한 해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나라 출신인 주자는 조국 송나라가 북방 유목민족들에게 압박당하는 상황에서 이를 역전시키려면 가정을 살리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불교를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자는 그 같은 생각을 화이론(華夷論)과 성리론(性理論)으로 요약·정리해 냈다.

화이론은 중국 민족은 문명민족, 다른 민족은 야만민족이라는 논리인데, 중국 민족이 문명민족인 이유는 유교의 삼강오륜을 실천하기 때문이라는 논리였다. 이런 논리에서는 유교 이외의 모든 철학과 종교가 야만으로 평가절하될 수밖에 없었다. 성리론은 삼강오륜 같은 윤리론 위주였던 공자의 유교를 성리(性理)라고 하는 형이상학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이었다. 이 성리론으로써 주자는 심오한 형이상학적 불교이론에 대항했던 것이다.

이런 화이론과 성리론을 본 안향은 고려에서 불교와 무속을 타파하는 데도 아주 유효한 이론임을 직감해 마음으로 몹시 좋아했던 것이다. 그래서 안향은 주자의 저서를 직접 베끼고 또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본떠 그려 고려로 돌아와 연구했다. 그때가 1290년(충렬왕 16) 3월이었고, 안향의 나이 48세였다. 이 1290년 3월이 바로 성리학이 고려에 수용된 시점이었다.

안향은 주자 성리학을 고려에 수용한 때로부터 8년 후인 1298년(충렬왕 24) 다시 원나라 북경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에 문묘(文廟)를 방문하고 학관들과 주자 성리학을 토론했다. 그때 안향이 주자 성리학을 완벽하게 설명해 학관들이 안향을 ‘동방의 주자’라 불렀다고 한다.

이로 본다면 지난 8년간 안향은 주자 성리학에 관련된 저서들을 두루 학습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안향은 1303년(충렬왕 29) 원나라의 강남에 사람을 보내 [주자신서(朱子新書)] 등 많은 자료들을 구입해 왔다.

당시 안향은 “고려에 경적(經籍)이 구비되지 못한 것을 근심하던 차 강남에는 아직도 송나라 왕실의 예물이 남아 있고, 또한 [주자신서]가 많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박사 김문정 등을 강남에 보내 널리 구입해 오게 했다”고 말했다.

나아가 안향은 62세이던 1304년(충렬왕 30) 국자감에 ‘섬학전’이라는 장학재단을 마련하고 대성전이라고 하는 공자 사당도 마련했다. 수많은 자료와 넉넉한 장학금이 마련되자 “경적을 옆에 끼고 수업하는 사람이 문득 수백 명에 달해 교실이 비좁아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모두 경서에 통하고 옛것을 배우는 것으로 일삼았다”고 할 정도로 국자감은 발전했다.

“불교도들은 오랑캐 무리다”


▎당 태종이 전쟁에서 사망한 장수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빈현 대불사.
당시 국자감에서는 주자 성리학이 학습됐다. 국자감을 발전시킨 안향은 학생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안향은 조회가 끝나면 곧바로 국자감으로 가서 학생들과 종일 토론했다고 하는데 대부분 주자의 저서를 이용한 성리학 토론이었다. 주자를 사모하던 안향은 55세이던 1297년(충렬왕 23)부터 집에다 주자의 초상화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참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호까지도 주자를 따라 회헌(晦軒)이라고 했다.

안향은 자신이 직접 공부해 터득한 주자 성리학을 열성적으로 학생들과 토론했다. 이처럼 불교를 타파하기 위해 성리학을 수용하고 공부한 안향에게 주자 성리학은 형이상학적이기보다는 일상생활과 직결된 생활예절 중심이었다. 예컨대 안향은 1304년(충렬왕 30)에 국자감 학생들에게 이런 훈시를 했다.

“성인의 도는 일상생활의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 아들이 돼서는 효도해야 하고 신하가 돼서는 충성해야 한다. 가정은 예로 다스리고 벗과는 신으로써 사귀며 자기 자신은 경으로 수양해야 한다. 또한 일을 실천하는 것은 반드시 성으로써 해야 한다. 그런데 저 불교도들은 부모를 버리고 출가해 윤리를 업신여기고 의리를 어그러뜨리니 곧 오랑캐의 무리다. 근래에 병화로 인해 학교가 피폐됨으로써 선비는 학문할 줄 모르고 배우는 이들은 불경을 탐독해 어둡고 허황된 교리를 신봉하니 나는 이를 매우 슬퍼한다. 내가 일찍이 중국에서 주자의 저술을 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선불(仙佛)을 배척해 그의 공이 공자와 짝할 만했다. 그러니 공자의 도를 배우려고 하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_[회헌선생실기]

안향의 이런 가르침은 당연히 그가 공부한 주자의 저작에 기초했다. 예컨대 안향이 언급한 “성인의 도는 일용 윤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소학]의 첫머리에 언급돼 있는 내용 즉 “옛날 소학에서는 마당 쓸고, 응대하고, 나가고 물러나는 절도를 가르쳤으며 부모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해하는 도리를 가르쳤으니, 이는 모두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본”이라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근사록(近思錄)]의 “대체에 관계되는 것과 일용에 절실한 것을 함께 뽑아서 이 책을 만들었다”는 주자의 언급이나 [주자가례]의 사당(祠堂)편에서 “이 편에 저술된 것은 모두 이른바 집에서 일용할 상례이니 하루라도 닦지 않을 수없다”고 한 내용과도 유사하다.

그런데 생활예절 중심으로 성리학을 수용한 안향에게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화이론이었다. 유교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철학과 종교를 오랑캐학문으로 치부하는 것이 바로 화이론이었다. 예컨대 안향은 불교에 대해 “저 불교도들은 부모를 버리고 출가해 윤리를 업신여기고 의리를 어그러뜨리니 곧 오랑캐의 무리”라고 비판했는데, 이는 화이론에 다름 아니었다. 불교를 오랑캐의 가르침이라고 평가절하는 안향에게 무속 등 전통문화 역시 오랑캐 문화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이런 화이론을 이용해 안향은 고려의 불교와 무속 등 전통문화를 타파하고 유교 성리학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것이 가정을 살리고 국가를 살리는 길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안향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 젊은 지식인들에게 확산됐다. 반면 과거 1000여년 간 주류 종교로 기득권을 누리던 불교는 부정부패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럴수록 안향이 수용한 화이론적 유교 성리학에서 미래 희망을 찾는 젊은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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