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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22)] 시대와 격투한 ‘쇼와시대 대표 작사가’ 아쿠유 

“울보도, 주정뱅이도, 나그네도 울 만큼 울면 가을이 되겠지” 

시대 관통하는 메시지 담은 가사 5000개 창작
인간에게 변하는 것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


▎일본 메이지대 아쿠유 기념관에 설치된 아쿠유의 사진과 시구(詩句). / 사진:최치현
노랫말로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대가 됐다. 2016년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여러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가수가 작사로 문학상을 받다니 시대가 어떻게 바뀌고 있나?” 스웨덴의 한림원은 “그의 노래는 귀를 위한 시”라고 시상 이유를 밝혔다.

밥 딜런이 수상자로 결정되자 중국 네티즌들은 중화권의 대표적인 작사가인 좡누(莊奴)가 받았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좡누가 평생 작사한 3000여 곡은 대부분 ‘중화의 연인’ 덩리쥔(鄧麗君)의 노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반야월(1917~2012)이 평생 동안 5000여 곡의 가사를 쓴 전설이다. 반야월은 ‘불효자는 웁니다’ 등 힘들었던 시절, 대중의 심금을 울린 노랫말을 썼다.

그렇다면 일본의 대표적인 작사가는 누구일까? 이런 질문을 일본인에게 던진다면 단연코 아쿠유(阿久悠, 1937~2007)라고 답할 것이다. 그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노랫말에 담았다. 시대가 우울할 때면 응원의 노래를, 시대가 버블과 붕괴로 신음할 때는 경원(敬遠)의 노래를 만들었다.

아쿠유는 일본 효고 현 아와지 섬 출신의 작사가이자 작가다. 본명은 후카다 히로유키(深田公之)이며, 아쿠유는 필명이다. 그는 메이지대 문학부 졸업 후 광고 대리점에 취직했으나, 이내 사직하고 프리랜서의 길을 걸었다. 이후 TV와 라디오 프로그램 기획 및 구성, 작사·소설·에세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아쿠유가 졸업한 메이지대는 그의 위업을 기려 기념관을 만들었다. JR 오차노미즈 역에 내려 메이지대로 가는 길 양옆에는 악기점이 즐비하다. 간다가와(神田川)는 대학촌으로 유명한데 이곳에 유독 악기점이 많은 까닭이 ‘엔카의 아버지’ 고사 마사오와 아쿠유가 나온 학교 근처이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 대학의 ‘아카데미 커먼’이란 빌딩에는 메이지대 박물관과 함께 아쿠유 기념관이 있다. 메이지대 박물관에는 메이지대를 대표하는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66대 내각총리와 더불어 4대 인물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고가 마사오는 그가 기증한 바이올린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 선생의 흔적도 보인다. 금메달 획득 기념으로 받은 그리스 투구 복제품과 함께 설명이 곁들여 있다.

메이지대는 법학과로 유명한 대학이다. 초대 대한민국 대법원장을 역임한 김병로 선생,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도 이 대학 동문이다. 하지만 주요 전시 항목에서 이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옆 별도의 공간에 아쿠유의 기념관이 설치돼 있다. 평생에 걸쳐 그가 만들어낸 언어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가 작사한 작품은 컴퓨터에서 테마별·어순별로 검색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유족이 자필 원고를 비롯한 아쿠유 관련 자료 약 1만 점을 기증하면서 그의 업적을 기리고 그 유산을 차세대에 계승하기 위한 아쿠유 기념관이 2011년 10월 28일 개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작업하던 서재도 복원돼 있다. 학교 측이 밝힌 개관 사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을 대표하는 작사가·작가 아쿠유는 누구나 아는 다수의 가요 작사를 다뤘습니다. 그 수는 5000곡 이상에 달합니다. 미야코 하루미의 ‘북녘의 숙소로부터’, 사와다 겐지의 ‘맘대로 해’, 핑크레이디의 ‘UFO’ 등 히트곡부터 애니메이션송이나 CM송까지 폭넓은 장르의 인기곡을 세상에 내보냈습니다. 일본레코드대상 수상은 사상 최다인 5회이며 싱글 음반 매출은 6800만 장을 넘고 있습니다. 아쿠유의 활약은 작사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오키상 후보작인 [세토내해 소년야구단]을 비롯한 소설 작품이나 아포리즘(경구)의 수법을 구사한 에세이·시가 등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도 막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방송작가에서 작사가의 길로


▎메이지대 박물관이 자랑하는 메이지대 출신 유명인들, 왼쪽부터 아쿠유, 미키 다케오, 후세 다쓰지, 오사 다케다케키. / 사진:최치현
아쿠유라는 필명은 같은 발음의 아쿠유(惡友)로부터 나왔다. 광고 대리점 본업 이외에 부업으로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본명을 감추기 위해 쓴 필명이다. 그는 이 이름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아쿠유는 효고 현 경찰관이었던 부친을 따라 유소년기에 수 년 간격으로 이사를 반복한다. 그는 현립(縣立) 스모토 고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해 메이지대 문학부에서 일본문학을 전공한다. 고교 시절에는 여러 분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고, 학업보다는 독서와 영화 감상에 몰두한다. 고교 시절 3년 동안 수업을 빼먹고 무려 1000편에 가까운 영화를 보며 넓은 세계를 동경한다. 이 같은 호기심은 작사가 아쿠유에게 풍부한 감성과 함께 작가로서 창작 모티브를 제공한다.

아쿠유는 1959년 광고대행사 센고샤에 입사한다. 그는 원래 각본가 지망생이었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며 시나리오를 쓰고 TV에 이름이 나오는 등 일선에서 활약하는 것을 ‘이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때마침 TV 시리즈 [달빛가면(月光假面)]으로 잘나가던 센고샤에서는 각본가를 모집하고 있었다. ‘긴자에 있는 회사에 가고 싶다’는 평소 바람에도 부합했기 때문에 아쿠유는 즉시 지원했고, 입사 시험을 통해 합격한다.

아쿠유는 같은 대학 출신의 선배이자 각본가인 이가미 마사루가 과장을 맡고 있던 기획부에 배속됐지만, 입사하자마자 CM 대본 제작 업무를 맡게 된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아쿠유가 [달빛가면]의 후속 프로인 [표범의 눈]이나 [괴걸 하리마오] 등의 각본을 쓸 수 있는 밑거름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회사의 옆자리에는 평생의 친구가 되는, 극화 [동거시대] 등의 작품으로 이름을 날린 ‘쇼와의 화가’ 가미무라 가즈오(上村一夫)가 있었다. 아쿠유와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가미무라는 센고샤 재직 시절부터 교우가 깊어진 것이다.

아쿠유는 가미무라가 너무 잘 그린 그림을 보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고, 이후로는 그림을 잘 그리지 않게 됐다고 한다. 가미무라와 아쿠유는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를 만드는 등 취미를 공유했다. 당시의 경험이 훗날 아쿠유가 작사가로서 대성하는 초석이 됐다.

아쿠유는 카피라이터로서 CM 제작에 참여했다. 또 1964년부터는 부업 삼아 방송 작가로도 활동한다. 그러다 1966년에 센고샤를 퇴직한다. “지금까지 아무도 쓰지 않은 가사를 써서 가요의 전통관념을 바꾸고 싶다. 나밖에 쓰지 못하는 유행가 가사를 만들고 싶다.” 아쿠유는 방송작가·작사가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한다.

음악 프로그램 대본을 쓰고 있을 때 아쿠유는 노래 가사를 필사하며 작사 공부를 시작했다. 작사가로서 처녀작은 ‘더 스파이더스’의 그룹사운드 데뷔 앨범 [흔들흔들]의 B면에 있는 ‘몽키댄스(1965년 5월 10일 발매)’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 활약


▎아쿠유가 제작에 관여한 주요 가수들의 앨범 표지. 일본 메이지대 내 아쿠유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 사진:최치현
아쿠유는 그 후 작사가로서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다. 평생 그가 작사한 곡은 5000곡 이상이다. 장르는 가요·엔카·아이돌·포크송·코믹송·애니메이션송·CM송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1971년에는 니혼TV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탄생]의 프로그램 기획과 심사위원으로 참여한다.

[스타탄생]의 시작은 아쿠유의 운명이 바뀌게 되는, 전설의 시작이었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아이디어 맨 아쿠유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맹활약하게 된다. [스타탄생]은 출전 희망자가 보내온 엽서를 통해 예선을 치르고, 실연(實演)으로 결선 진출자를 가리며, 최종적으로 연예기획사가 합격 여부를 가리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기획 단계부터 신인 가수를 찾아내는 일까지, 아쿠유는 진심전력을 다한다.

1971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출전한 모리 마사코(森昌子)가 등장하면서 실제 스타 탄생으로 이어진다. 가수의 분위기와 음색에는 엔카가 가장 적합한 장르였으나, 아쿠유는 어린아이에게 그런 장르의 노래를 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고민 끝에 아쿠유는 학교 선생님을 존경하는지 짝사랑하는지 모를 모호한 감정을 표현한 ‘센세이(先生)’이란 노래를 줬고, 모리 마사코는 1972년 제3회 일본가요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어 제24회 NHK홍백가합전에서는 최연소 출전 기록을 세우게 된다. 아이돌 가수를 거쳐 이제는 중견 엔카 가수가 된 모리 마사코의 대표곡은 여전히 데뷔곡인 ‘센세이’다.

이 프로그램 출신으로는 전설의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恵), 모리 마사코, 사쿠라다 준코(桜田淳子), 이와자키히로미(岩崎宏美)와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킨 핑크 레이디 등이 있다. 이들은 일본 가요계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들로 평가된다.

1971년에 가수 오자키 기요히코(尾崎紀世彦)에게 준 ‘다시 만날 날까지’가 제13회 일본레코드대상과 제2회 일본가요대상을 받으면서 아쿠유는 연륜에 비해 ‘중진’ 대접을 받게 된다.

“노래에는 시대를 움직이는 힘이 있다”고 믿는 아쿠유는 남녀의 이별과 관련해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연다. 아쿠유의 노래에 나오는 여성은 약하지 않고 강하다. 아쿠유가 여성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평을 듣는 이유다.

아쿠유의 최전성기로 평가되는 1977년 6월 20일부터 12월 5일까지는 오리콘 차트에서 그의 곡이 1위를 독점했다. 그런가 하면 한때는 100위 안에 16곡이 오르기도 했다. 아쿠유는 일본레코드대상을 총 5회 수상했으며, 3년 연속 수상 기록도 보유하고 있다. 일본레코드대상 작사상 수상은 총 7회로, 역시 최다 수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15년 12월 8일 오리콘 차트 기준으로 작사가별 싱글 판매량 부문에서 아쿠유는 총 6834만 장을 기록, 역대 2위를 차지했다(1위는 아키모토 야스시).

아쿠유는 인간이 마음에 지녀야 할 감성을 중요시했다.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보면서 정화(카타르시스)의 과정을 거치듯, 이별의 쓰라림을 가사로 만들어 몸 안의 불순물을 걸러내려 했다. 그 과정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슬픔이 깊어지면 기쁨이 그만큼 커진다.

“노래나 영화나 감동의 밀도는 같다”


▎메이지대 박물관에 전시된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기념품(복제품). / 사진:최치현
이별이라는 상황에 무감각해진다면 감성의 살갗이 벗겨져 쓰라릴 일도, 감상에 젖어 그 아픔이 전신에 배어 나올 일도, 그것을 견뎌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어느 정도의 물기를 머금고 있어야 한다, 바짝 말라버린 인생은 너무나 무미건조하다. 분무기로 마음에 물기를 주듯 애달픔·슬픔·외로움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아쿠유는 가수를 보는 안목과 시대를 읽는 눈이 탁월했다. 또한 어린이 노래 제작에도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1977년 [뻐끔뻐끔 주머니]란 시리즈의 ‘안녕! 어린이 쇼’의 코너에서 노래가 나왔다.

아쿠유는 “감동적인 이야기는 길고, 짧은 게 중요하지 않다. 3분짜리 노래나 2시간짜리 영화나 감동의 밀도는 같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뉴 트렌드에 따른 새로운 아티스트들이 등장하면서 아쿠유가 엮어냈던 서정의 세계보다는 감성이나 실제 체험에서 비롯된 가사가 인기를 얻게 됐다. 후배 작사가인 마쓰모토 다카시(松本隆)와 아키모토 야스시(秋元康) 등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아쿠유는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이후로 아쿠유는 소설 집필이나 엔카 작사 등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된다. 그즈음 아쿠유가 60~70년대에 작사한 곡과 관련해 ‘추억의 명곡’ 작사가 자격으로 TV 출연 제의가 있었지만 아쿠유는 대부분 거절했다.

1997년에 간행된 단편 소설집 [연애편지], 장편 소설 [라디오]는 이후 라디오를 통해 드라마화됐다. 특히 [라디오](NHK-FM)는 제38회 갤럭시상 라디오 부문 우수상을 수상한다. 아쿠유는 1997년 30년간 작사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문학진흥회 주최 제45회 기쿠치간 상을 받는다. 2000년 10월에는 장편 소설집 [시소설]로 제7회 시마세 연애문학상을 수상한다.

만년에 아쿠유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2001년에 신장암을 앓았고, 그해 9월 12일 간 적출 수술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활동했지만 2007년 향년 70세로 눈을 감는다. 그해 3월에 열린 이시카와 사유리의 ‘데뷔 35주년 감사의 향연’에 참석한 것이 마지막 공식 행사였다.

가수는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닌 스토리의 주인공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리그 전통의 명문인 한신 타이거스. 최근(2014~15년)에는 오승환(현 삼성)이 한신 소속으로 활약한 바 있다.
아쿠유의 공적을 높이 평가한 일본 정부는 그가 사망한 2007년 8월 1일로 소급해 욱일소수장을 수여하기로 했다. 같은 해 제49회 일본레코드대상에서도 아쿠유는 특별 공로상 수상자로 결정된다.

2009년 메이지대 연합 학부모회는 아쿠유 작사상을 제정한다. 이어 2010년 메이지대 아카데미 커먼 빌딩 지하에 아쿠유 기념관을 개설한다. 생전에 발표되지 않은 노랫말을 바탕으로 한 노래가 다수 만들어졌고, 아쿠유는 2017년 제59회 일본레코드대상에서 특별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아쿠유는 자신의 작사 세계관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아쿠유 작사가 헌법 15개조’라는 일종의 작사 지침서까지 만들어 두고, 세계를 자신의 언어 속으로 받아들여 노래로 만들었다.

아쿠유는 도시에서 인간관계에 주목하고, 변화된 여성상 이미지도 고찰했다. 인간이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도 연구했다. 가수를 그저 이야기를 하는 역할이 아닌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만들려 애썼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뉴 시네마 파라다이스]였는데, 자신의 작품 [세토내해 소년야구단]과의 공통점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가사는 3~4분의 영화 시나리오다.”

아쿠유는 만화 원작자로 [악마 같은 그놈](가미무라 가즈오)을 다뤘다. 연재 중에 사와다 겐지(沢田研二) 주연으로 TV 드라마화됐다. 드라마의 주제가는 사와다 겐지의 ‘시간이 지나가는 대로’였다.

아쿠유는 오랫동안 [산케이신문] ‘정론’ 멤버로도 활동했으며, 생활 면에 ‘아쿠유 쓰고 말한다’는 칼럼을 세상을 뜨기 약 2개월 전인 2007년 6월 9일까지 게재했다. 그의 칼럼은 사후에 [깨끗한 염세-말을 잃어버린 일본인]으로 출간됐다.

2010년 3월 아쿠유의 출신지인 효고 현 스모토시 고시키쵸 복합 공원 ‘웰니스 파크 고시키(다카다야가헤 공원)’에 아쿠유가 작사한 ‘그 종을 울리는 것은 당신’을 모티브로 한 표창비 ‘사랑과 희망의 종’이 세워졌다. 이 노래의 주인공인 가수 와다 아키코, 작곡가 모리타 고이치 등이 참석해 제막식이 거행됐다. 노래의 가사에는 ‘당신에게는 희망의 향기가 난다’는 구절이 있다.

아쿠유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태어났다. 그는 전쟁이라는 풍경을 목도했으며, 친형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가 1945년 7월 전사한다. 8월 15일 이른바 옥음방송(玉音放送)이란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는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아쿠유는 황국사관을 전면 부정하기 위해 먹칠한 교과서로 공부한다. 아버지가 경찰로 근무하는 자택 겸 주재소에서는 군국(軍國)을 자랑하는 그림을 미군 진주군이 오기 전에 태우는 의식을 보면서 제2의 인생을 꿈꿨다고 전해진다.

일본 패망 후 각자도생의 시대가 되면서 그는 아버지가 자결하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린 아쿠유가 학교에서 배운 공부는 소국민이 되는 것이었다. 모든 가치관이 전도되는 혼란한 세상에서 아쿠유의 일생을 지배한 것은 소국민적 ‘민주주의의 삼색기’다. 야구·영화·유행가가 바로 그것이다. 아쿠유는 패전 후 소국민의 원점인 이 ‘민주주의의 삼색기’에 충실한, 뛰어난 크리에이터가 돼 간다.

유작의 메시지는 사랑


▎아쿠유의 고향인 효고 현에 있는 히메지 성, 일본 최초 세계문화유산 성곽건축물이다.
소설 [세토내해 소년야구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쿠유는 열성 야구팬이었다. 프로야구에서는 한신 타이거스의 팬으로 한신을 소재로 한 소설 [구신구라(球臣蔵)]를 집필할 정도였다. 그러나 세이부 라이온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구단 노래는 작사했으면서도 생전에 한신 응원가는 발표하지 않았다.

아쿠유 사후인 2010년 6월에야 그가 1992년 작사한 ‘야구광 삼가 아룁니다. 타이거스’라는 노래의 존재가 밝혀졌다. 또 그는 ‘뒈져버려라 자이언츠’란 곡을 작사하고 핑거 5라는 가수에게 제공했다.

1979년부터 2006년까지 여름 고교야구대회 기간 중 [스포츠 닛폰]에 ‘고시엔의 시(甲子園の詩)’라는 제목으로 출전 고교 및 선수 등을 소재로 한 서정시를 게재한다. ‘처음은 작은 돌이었다’, ‘웃는 얼굴에’, ‘패전 투수에게 주는 편지’, ‘전율의 투수전’, ‘끝나지 않는 투수전’, ‘최고시합’, ‘미래선언’ 등 승부에 울고 웃는 드라마를 시로 승화했다.

아쿠유의 마지막 작품은 제88회 전국고등학교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와세다실업고 대 고마자와대학 부속 토마코마이고)이 소재였다. 아쿠유 기념관에는 그가 수기(手記)한 관전평과 기록지가 전시돼 있다.

그의 가사를 음미해 보면 시대별로 확연히 구분된다. 처음에는 발랄하고 경쾌한 학원물이나 청춘물이 주를 이루다가 중년에 들어서면서는 사랑과 이별의 비련에 대해 쓰기 시작한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주로 울던 여성이 아쿠유 작품 속에서는 남성과 동등해지고 만년에 가서는 주도권을 잡는 것으로 변천한다. 그의 작사가 만년인 1986년 작품인 가와시마 에이고가 부른 ‘시대에 뒤떨어진’의 가사를 보자. 시대를 만들고 앞서갔던 기백은 이제 후진에게 양보하고 소소한 자존감만을 되찾겠다고 선언한다. 다시 소국민으로 돌아간다.

아내에게는 눈물을 보이지 않고

아이에게 푸념을 늘어놓지 않고

남자의 탄식은 거나하게 취해

술집의 구석에 두고 간다.

‘가요계의 거성’답게 아쿠유는 숱한 명언을 남겼다.

“당신은 완전히 지쳐 버려서 사는 일조차 싫다고 울었어.”

“굶주렸던 날을 잊지 않아. 야위어 눈만 번득였던 그런 시절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마음만이라도 채워주고 싶어.”

“고시엔은 천재도 기다리지만, 고시엔은 노력으로 갈고 닦은 평범한 이를 누구보다도 기다리고 있다.”

“울보도, 주정뱅이도, 고독한 나그네도 울 만큼 울면 가을이 되겠지.”

“사람은 무엇에 굶주리는 것일까? 사람은 무엇을 동경할까? 이를 의식하면 새로운 것이 생긴다.”

“상식은 싫다. 비상식은 싫다. 초상식이 좋다.”

“노래라는 한정된 틀 속에 영화 한 편 정도의 내용을 집어넣으려 했고 늘 세상을 배반하고자 생각하며 작사해 왔습니다.”

사후에 발견된 하쿠유 유작의 메시지는 ‘사랑’이었다. 그것도 매우 급하다고 했다. 그의 사후 4년 뒤, 동일본 대지진의 피해를 위로하는 노래 ‘사랑이여 서둘러요’가 발표된다.

시대가 변했다. 사람도 생활도 노래도 변해 간다. 그래도 일본의 어딘가에서는 아쿠유의 노래가 쉼 없이 흘러나온다. 일상의 불안과 고민을 희망으로 바꾸는 노래다. 시의 진정한 효용은 읽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노래는 각박한 세상을 위로하는 시가 돼 일본에서 가장 많이 불리고 있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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