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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22)] 복(福), 인간의 영원한 갈망 

신이 내려주는 것이자 술과 동행하는 것 

자신을 지켜 달라고 비는 제의(祭儀)에서 출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게 진짜 행복 아닐까


▎서울에 부동산 붐이 일기 전 복덕방 거리의 모습. 복덕방 주인과 손님이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 복덕방, 그 속에 담긴 품격

복덕방(福德房), 아파트나 주택 등 부동산을 소개하고 대리 사무를 해주는 곳. 이제는 공인중개사나 아예 ‘부동산’이라고 이름을 고쳤지만, ‘복과 덕을 주는 방’이라는 이 이름이 너무나 격조 있고 아름다워 감탄한 적이 있다. 주택 관련 소비자를 서로 연결해 주고 그 중개료를 받는, 자본주의 첨단에 서 있는 서비스 산업의 대표, 이 이름엔 그 어디에서도 ‘자본’이나 ‘이윤’이나 ‘이익’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사실 복덕방이라는 이름 속에는 집이 단순히 물질적 가치의 척도가 아니라 나무와 꽃, 공기와 흙과 돌 등은 물론 우리가 머무는 집 안팎의 모든 기운과도 소통하는 공간이며, 우리와 잘 맞는 그런 공간을 찾아주고 복된 인연을 찾아주는 곳이라는 의미가 더 많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서로에게 복(福)을 안겨다 주고, 서로가 필요한 부분을 찾아주는 그런 일이 바로 덕(德)의 베풂이라는 것, 나아가 덕(德)의 원래 의미가 보여주듯 그런 중개나 소개는 ‘정직한’ 상도(商道)가 전제돼야 함을 천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이름은 적어도 1912년의 근대 시기에 새로이 만들어진 어휘 자료에서 처음 찾을 수 있지만([개화기 국어 어휘자료집(2)]), 그 전에 이 말이 언제쯤 어디서 어떻게 탄생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정착됐는지 아직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조선 후기 이후에 거간(居間)을 복덕방이라 했고, 그것은 생기복덕(生氣福德) 즉 가정에 복과 덕을 불러 준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이름으로, 이때의 ‘복덕(福德)’은 ‘생기복덕(生起福德)’에서 나왔다고 하는 설명이 있다. 혹은 당제(堂祭)나 동제(洞祭)를 지낸 뒤 마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눠 먹던 방(房)을 복덕방이라 했다는 정도가 일반적인 해설이다.

물론 중국에서도 복덕(福德)이라는 말이 일찍부터 등장해 당나라 때 편찬된 [북사(北史)]에 보이지만, 당시에는 “복과 덕행”을 뜻해 지금처럼 복합명사가 아니었다. 이후 송나라 때의 만담집인 [경본통속소설(京本通俗小說)] 정도에 이르러서는 ‘복’을 뜻하는 하나의 단어가 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우리말에 존재하는 ‘부동산 중개’라는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복덕방은 품위 갖춘 우아한 어휘

여하튼 이익만 되면 뭐든 한다는, 썩어 문드러진 상한 먹잇감조차도 혈안이 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떼가 득실거리는 오늘날 이 천박한 우리 사회에서 복덕방은 그나마 자본주의의 적나라한 속성보다는 집이나 땅에 대해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랜 관념과 품위를 갖춘 우아한 어휘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부동산 붐이 일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생겨난 ‘복덕방’의 투기 조장, 가격 조작, 과당경쟁을 비롯한 각종 불건전한 거래 유발 등을 정비하고자 ‘부동산 중개업법’이 만들어졌고, 그에 따라 ‘공인중개사’라는 새로운 이름이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복덕방에 비하면 공인중개사는 너무나 사무적이고 딱딱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공인(公認)은 국가가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중개(仲介)는 가운데 끼여 서로를 매개해 준다는 뜻이고, 사(士)는 전문적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 이름이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일상의 보통명사에서조차도 점차 인간적이고 도덕적이고 품격을 갖춘 이름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2. 복(福)의 출발, 제의와 인간의 절실한 기원


▎신라 선덕여왕 7년(638년)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대구 팔공산 갓바위. 매일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 치성을 드리고 있다.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이나 거기서 얻는 행복”을 뜻하는 복(福), 그래서 복(福)은 인간이면 누구나 희구하는 바람이요, 인간의 절실한 기원이자, 영원한 바람이다.

그러한 복(福)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사람들은 신이 내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갑골문에서 福(복 복)은 바로 조상의 신주(示) 앞에서 두 손으로 술독(酉)을 들고 바치거나 따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조상신에게 술(酉)을 올려 복(福)을 기원하는 제사(示)에서 복(福)이라는 의미가 생긴 것일 것이다. 이후 두 손을 나타내는 부분은 생략되고 술독(酉)의 모습이 畐(가득할 복)으로 변해 지금의 자형이 됐다.

‘복’을 영어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억지로 대응시키자면 행복(幸福)과 축복(祝福) 정도가 될 것이다. 영어에서 행복을 뜻하는 ‘happiness’의 원형인 ‘happy’는 ‘행운’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 이도 하늘이 내려준 뜻밖의 기회나 재부(財富)를 뜻한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어에서 행복을 뜻하는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는 eu(좋은)+daimon(정령·신·운명)의 합성어로 “좋은 정령이 찾아오다”는 뜻이다.

또 축복(祝福)하다는 뜻의 ‘bless’는 ‘피’를 뜻하는 ‘blood’와 어원을 같이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옛날 서구에서는 혈제(血祭) 즉 희생의 ‘피’를 바쳐 신에게 보우해 주길 ‘빌었던’ 데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또 히브리어에서는 축복을 ‘바라크’라 하는데, 이는 “무릎을 꿇다, 꿇어 엎드리다”는 뜻을 담았다. 하늘이나 신에게 행복해질 수 있도록 꿇어앉아 도와 달라고 빌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라틴어에서는 ‘benedicere’가 축복을 뜻하는데, ‘bene(좋은)’+‘dicere(말)’이라는 의미를 담아 신이 내려주는 축복의 말씀이 축복임을 표상했다.

이렇게 본다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물을 바쳐서 행복을 비는 행사가 제단에서 이뤄졌고, 거기서 이뤄지는 제의(祭儀)가 ‘복’의 출발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서구에서는 ‘피’를 바쳐 신에게 행운을 내리길, 행복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길 빌었다면, 한자에서는 ‘술’이 제단에 바쳐진 주요한 물품이었음을 보여준다.

불교에서도 기도 통해 복 빌어

기도를 통해 복을 비는 것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절에 가면 복전함(福田函)이라는 게 있다. 부처님께 소원을 빌면서, 복을 내려 달라고 빌면서 바치는 돈을 넣는 통이다. 물론 그 돈은 신도들이 복전(福田), 즉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 공경·공양하거나 보시해야 할 대상을 위해 쓰도록 바치는 돈이라는 의미다.

불교에서는 그 대상을 팔복전(八福田)이라 해 구체적으로 명시해 두기도 했는데, 천태종에서는 이를 불전(佛田), 성인전(聖人田), 승전(僧田), 화상전(和尙田), 아사리전(阿闍梨田), 부전(父田), 모전(母田), 병전(病田)이라 규정했다. 공경하며 공양해야 할 불(佛)과 성인(聖人)과 승(僧), 은혜에 보답해야 할 화상(和尚)과 아사리(阿闍梨)와 부모(父母),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야 할 병자(病者)들이 그 대상이다. 그들을 잘 보살필 수 있다면, 끝없는 복이 내려질 것이기에 복전(福田)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복전함은 우리가 행해야 할 보시와 선행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오히려 보시품인 돈과 함께 기도를 통해 내가 받을 ‘복의 밭’, ‘복의 바다’를 상상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남에게 감사하고, 남을 배려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나 자신의 가르침에서 내가 받아야 할 내가 누릴 수 있게 될 ‘복’으로 변해 기복성이 강화하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팔복전, 즉 복전을 펼칠 수 있는 여덟 가지가 나온다. 먼 길에 우물을 파는 일, 물가에 다리를 놓는 일, 험한 길을 잘 닦는 일,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 승려에게 공양하는 일, 병든 사람을 간호하는 일, 재난을 당한 이를 구제하는 일, 무차(無遮) 대회를 열어 모든 외로운 넋을 제도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러한 풀이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실천을 가능하게 하며 오해도 없앨 수 있는 해석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일부 절에서는 복전함을 불전함(佛田函)으로 바꾼 곳도 보인다. 내가 바치는 이 돈의 용처가 바로 부처로 대표되는 팔복전이지, 내가 누리게 될 ‘복전’이 아님을 천명한 것, 그리하여 자칫 오해될 수도 있는 불교의 기복적 성격을 본래의 정신으로 되돌려 놓았다고 보인다.

복전함도 복덕방처럼 한자문화권의 다른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우리의 고유한 어휘다. 게다가 새로 바뀐 불전함도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고유 어휘다. 어휘 사용에서 우리의 지혜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3. 복(福)을 구성하는 ‘술(畐)’, 그 의미 지향


▎중국 ‘명주의 고향’인 청두에서 인부들이 모래처럼 발효된 술을 찌고 있다. 찜통의 술을 증류하면 수정방 원액을 얻을 수 있다.
복(福)은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비는 ‘제의’에서 출발했고, 진귀한 ‘술’이 그 성의의 표시였다. 복(福)자에 들어가 독음 겸 의미를 나타내주는 복(畐=酉)은 바로 술독을 그린 글자이다.

‘술’은 중국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 먼저 복(福)자에서처럼 ‘제사’와 관련돼 신에게 바치는 진귀한 제수(祭需)임을 상징하는데, 그것이 신과 교접할 수 있는 신성한 매개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예(醴)는 제사에 쓰는 단술을 뜻하지만, ‘예도’를 뜻하는 예(禮)나 ‘몸체’나 ‘본체’를 뜻하는 체(體)와 같은 어원을 가짐을 생각하면 ‘술’이 제사에 사용되는 물품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또 전(奠)은 ‘제사를 지내다’는 뜻인데, 오래된 술이 담긴 술독(酋)을 제단에 바치는 모습을 그려, 그것이 제사 행위임을 직접 표현했다.

나아가 정(鄭)은 의미부인 읍(邑=)과 소리부인 전(奠)으로 구성됐는데, 읍(邑)은 어떤 지역을 말하고, 전(奠)은 오래된 술이 담긴 술독을 바치는 모습이다. 정(鄭)은 성씨로도 쓰이고, 지역이나 나라 이름으로도 쓰였는데, 원래는 나라의 제사에 쓸 술을 빚어 부족이나 왕실에 제공하던 곳을 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술 빚는 일은 대단히 전문적인 일이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재료도 중요하지만 특히 물이 맛을 좌우하므로 아무 데서나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중국 명주 생산지도 모두 곡식이 여유롭게 생산되고 질 좋은 샘을 가진 지역에 분포해 있음도 이를 반증해 준다.

고대사회에서 권력의 상징이었던 술

그래서 정(鄭)은 그런 술을 빚는 전문적인 장인 집단을 지칭했고 그 기술은 대를 이어 전수됐을 것인 바, 그들을 지칭하는 성씨가 됐을 것이다. 마치 활을 잘 만드는 장인 집단이 궁(弓)씨가 되고, 문서 관리를 전문적으로 하던 기록관 집단이 윤(尹)씨가 되고, 말 사육과 관리에 전문적이던 집단이 사마(司馬)씨가 됐던 것처럼. 그리고 그런 술이 생산되던 곳, 술 빚는 장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을 정(鄭)이라 지칭했고, 이후 나라 이름으로까지 발전했다.

고대사회에서 ‘술’이 갖는 귀함과 상징 때문에 ‘술’은 단순히 제의에 동원되는 ‘술’이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예컨대, 酋(두목 추)는 ‘우두머리’를 뜻한다. 이는 술독을 뜻하는 유(酉)에 팔(八)이 더해진 모습인데, 팔(八)은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상징한다. 즉 술독에 오래 저장된 술이 잘록한 목을 넘어서 강한 향기를 내뿜어 발산하는 모습을 그린 글자다.

오래 저장된 술이라면 필시 귀한 술이었을 것이고, 귀한 술은 중요한 제사를 모실 때 신을 즐겁게 해주는 중요한 물품이었다. 더구나 정치를 신에게 의지했던 고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오래된 술을 소유한 자, 관리하는 자, 통제할 수 있는 자, 그가 바로 그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지도자였다. 이렇듯 추장(酋長)은 ‘술’이 바로 ‘권력’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가 하면 ‘지위가 높다’는 뜻의 존(尊)도 오래된 술이 담긴 술독(酋)을 두 손으로 받든 모습을 그렸고, 이로부터 높이다, 존귀(尊貴)하다는 뜻을 그려냈다.

또 ‘술’은 재산과 재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예컨대 부(富)는 술독(酉/畐)이 집안(宀)에 놓인 모습이다. 술은 제사에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었고, 매우 귀한 물품이었다. 커다란 술독에 충분한 술까지 갖췄으니 갖출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갖췄다는 뜻으로부터 부유(富裕)와 같이 ‘넉넉하다’는 뜻이 나왔다. 지금도 전통 있는 가문에서는 자기 가문만의 전통 술을 빚고, 자기 가문만의 특화된 술만을 사용한다. 이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다. 술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어 구성원을 한마음으로 모으는 신통한 존재였다. ‘마시다’는 뜻의 음(飮)이 지금은 마시는 모든 것을 지칭해 음료수까지 포함하지만, 옛날에는 ‘술’ 마시는 것만 지칭했다. 글자도 지금과 달리 음(㱃)으로 썼는데, 술독을 뜻하는 유(酉)가 들어 있다. 㱃(마실 음)은 글자에서 보듯, 술독(酉)과 독음 부호인 금(今)과 크게 벌린 입(欠)으로 구성돼 술독에 빨대를 꽂아 ‘술을 마시는 모습’을 그렸다.

때로는 사발의 술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지금도 중국의 소수민족 사회를 가면 커다란 술독을 두고 여럿이 모여 대나무로 된 빨대를 꽂아 함께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소위 ‘합심주(合心酒)’라는 것인데, 지금의 단합을 위한 술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술 마시기를 통해 구성원은 더욱 단합되고 한마음이 돼 갔을 것이다. “쌀 한 말로 밥을 지으면 그만큼의 일만 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술을 만들면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와 닿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공업용 알코올이 없던 옛날, ‘술’은 소독제로서도 훌륭한 역할을 했다. ‘치료하다’라는 뜻의 醫(의원 의)에 술을 뜻하는 유(酉)가 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의(醫)를 구성하는 예(殹)는 작은 갈고리로 뽑아낸 화살(矢, 시)이 통(匚)에 담긴 모습이고 여기에 소독제로서의 술(酉)이 더해진 글자가 바로 의(醫)다. 고대사회에서 술은 마취·소독·약효를 빠르게 하거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역할을 해, 상처의 수술이나 치료에 필수적인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4. 술과 인간


▎사찰을 찾은 한 신도가 불전함에 돈을 넣고 있다.
그러나 ‘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이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의 시름과 고독과 슬픔을 풀어준다는 데 있다.

술 마시며 노래하세,
우리네 인생 살면 얼마나 산다고.
아침 이슬 같은 우리네 인생,
흘러 버린 세월 너무나도 많구나.
가락은 절로 서러워 지고,
맺힌 시름 떨치지 못하네.
어이하면 이 시름 잊을까,
오직 ‘두강(杜康)’ 뿐이라네. _조조(曹操)의 ‘단가행(短歌行)’ 일부


‘두강’은 조조의 시름 달래 줬던 유일한 존재

천하의 호걸 조조가 자신의 시름을 읊은 시이다. 시름을 잊게 해 준 유일한 존재, ‘두강’은 ‘술’을 뜻한다. 술을 만든 신이 두강이라 전해지기 때문이다. 조조뿐 아니다. 완적도, 혜강도, 이백도, 두보도, 소동파도, 정판교도, ‘술’은 최고의 예술가를 만들어냈고 상상 너머의 상상력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술을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음식 중의 하나라고 평하는 이도, 인공지능 시대에도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할 요소도 ‘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때문에 술의 역사도 인류의 문명과 함께 시작됐다. 중국에서는 하남성 남부의 가호(賈湖) 유적지에서 기원전 7000년의 유적지에서 ‘술’ 찌꺼기가 발견됐다. 이 술은 기존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메르인들의 술을 넘어서 인류 최초의 곡주로 평가받아 술의 역사를 다시 쓰게 했다.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의 연구에 의하면 도수는 약 13도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 유적지는 황하 유역 최초의 신석기 유적지인데, 여기서는 신석기 시대의 다양한 유물 외에도 점복에 사용한 거북 딱지, 점을 치는데 사용했을 공깃돌이 함께 발견돼 거북점의 기원을 추정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던 것은 뼈로 만든 피리였는데, 6개로 된 세트로 된, 구멍이 7개 난 17.3~24.6㎝ 길이의 피리였다. 이 역시 세계 최초의 악기로 인정받았다.

고대사회에서의 술은 이처럼 대단히 중요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주신(酒神)이 등장하듯 술은 농경사회를 포함해서 고대사회의 풍요의 상징이었다. 술을 빚기 위해서는 우선으로 식량의 문제가 해결돼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福)에서처럼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는 언제나 술을 수반하게 됐고, 집안에 술독이 놓인 모습이 부(富)의 어원을 형성하게 됐던 것이다.

5. 무엇이 복(福)인가? 복을 향한 염원


▎후한 말 유비·손권과 함께 천하를 다퉜던 조조의 초상.
모든 사람이 바라는 복(福)에 대한 바람도 다양하다.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 복’이라 불리는 오복(五福)은 장수(長壽)·부(富)·강녕(康寧)·호덕(好德)·선종(善終)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장수(長壽)가 최고였던지 수복(壽福)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부(富)에 대한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전통 그림 등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박쥐다. 박쥐(蝠, 복, fú)는 박쥐가 가진 이중성과 괴상하게 생긴 모습에도 그것의 발음이 복(福 fú)과 같다는 이유에서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래서 전통 기물이나 장식물의 문양에 박쥐가 자주 등장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박쥐만 그리지 않고 꽃사슴(鹿)도 함께 그려 놓는다. ‘사슴’을 뜻하는 녹(鹿 lú)은 ‘녹봉’을 뜻하는 녹(祿 lú)과 발음이 같다. 그래서 박쥐와 사슴을 함께 그린 그림은 ‘복록(福祿)’을 뜻한다. 은밀한 상징이 아닐 수 없다.

“근심 없앨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복이다”

부(富)와 수(壽)에 대한 추구가 누구나 가지는 복(福)의 내용이겠지만, 순자(荀子)의 말처럼 “근심을 없앨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복”일 것이요, 그처럼 걱정을 줄이며 담백하게 살 수 있으면 그만일 것이다. 지나친 욕심에서 모든 불행이 시작되는 법이다.

그래서 중장통(仲長統)이 쓴 후한 때의 정치서 [창언(昌言)]에서도 “정신을 잘 조절하고, 근심을 없애고, 풍습과 사악한 기운의 침입을 막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망을 적당히 통제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제45장)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얻기 힘든 물건일수록 사람의 탐욕을 불러일으키고 빗나간 행동을 하게 만들기 때문”([노자] 제34장)이다. 마음이 탐욕과 욕망으로 가득하면 행동은 어그러지고 몸을 치욕스럽게 되는 법이다.

특히 지금의 이 시대는 모두가 ‘부’를 향한 끝없는 욕망으로 치닫고 있다. 정의도, 염치도, 체면도 없이 그것이 파멸의 지름길인 줄로 모른 채 말이다. “인간은 선한 것을 좋아하고 미덕을 숭상하는 본성을 갖고도 있지만 명예와 재물을 탐내는 본성도 갖고 있다. 그러나 성인들은 인간이 숭상하는 것을 중히 여기고 인간이 탐내는 것을 억제했다. 인간이 숭상하는 것을 중히 여겼기에 예의를 갖추는 풍기가 흥성했고, 인간이 탐내는 것을 억제했기에 염치를 보존할 수 있었다.”([부자(傅子)])

그래서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림에 욕망을 절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고 모두를 공경하는 예(禮)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가 중요하다. 그래서 [상서(尚書)]의 말처럼 성인이라도 망념, 즉 개인적 욕망에 휩싸이게 되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라도 망념을 극복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

6. 소확행(小確幸), 이 시대 행복의 미학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소확행(小確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확행(小確幸),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최근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새로운 가치관이다. 일본에서 시작돼 대만을 거치더니, 우리 사회에 붐을 일으켰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대륙을 휩쓸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한 수필집 [랑겔 한스 섬의 오후]에서 행복을 두고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라고 정의하면서 세상에 찌든 이 시대 시민들의 공감을 불러냈다.

지금 이 시대는 정말이지 소시민의 사회다. 한 개인이 내가 속한 사회나 국가의 장래를 걱정할 수도 그럴 능력도 없어져 버렸다. 인류의 발전이나 미래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하여 인류나 국가나 사회의 발전과 정의 등과 같은 거대 담론이 상실된 시대, 그것이 한 개인의 힘으로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미래 시대에 등장할 ‘무용계급’이 어떤 존재일까를 상상하게 한다.

게다가 우리는 급속 성장 시대를 살면서 국가와 민족, 가족과 사회와 직장을 위해 살았지, 사실 나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을 하고 싶다는 것이 이 유행의 메시지일 것이다.

이제는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 워라벨을 넘어서 내 개인을 위해 살자. 내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자.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다.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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