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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젊은 작가 列傳’(8)] SF·판타지·리얼리즘 아우르는 다채로운 작가 윤이형 

“차갑고 나쁘고 무섭고… 위험한 소설 써보고 싶다” 

결혼제도 비판한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로 이상문학상
“사랑하는 사람 어떻게 대하는가가 가장 정치적이고 거대한 담론”


▎1976년생 작가 윤이형. 1990년대 대중문화 세례를 듬뿍 받으며 성장해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사태를 통과하며 페미니스트로 눈 떴다. / 사진:백다흠
해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 출간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작품집을 찾아 읽는 일이 마치 고상한 취향이나 교양, 아니면 뭔가 각성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은근히 혹은 표나게 부산을 떨곤 했다. 90년대 윤대녕의 ‘천지간’을 그렇게 읽었고, 2000년대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를 그렇게 접했다.

올해는 1976년생 작가 윤이형이 주인공이었다. 그는 김승옥·이청준으로 시작해 이문열·김훈을 거쳐 김애란·편혜영·김숨에 이르는 이 상의 계보도 가장 최신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시효 지난 결혼제도에 사망선고라도 내리는 듯한 중편소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를 들고서다. 무려 43회 수상작이다. 그런데 수상작을 압축해 앞서와 같이 표현하고 나니 어딘가 밋밋해 보인다. 그러니까 고발소설인가? 드러내놓고는 아니지만 은연중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 따라서 새로울 것도 없는, 권태로운(혹은 끔찍한) 결혼생활이라는 주제를 건드린?

나란히 작품집에 실린 자선(自選) 대표작 ‘대니’와 함께 수상작을 놓고 보면 비로소 윤이형이라는 작가가 또렷이 보인다. ‘대니’는 SF다. 시대는 현재 아니면 근미래. 같은 친목 모임에 속해 있던 세 명의 유치원 보육교사가 시차를 두고 각각 유치원에 불을 질러 50명의 4세 이하 아이들과 동료 교사들이 숨진 충격적인 사건을 계기로, 24세로 설정된 안드로이드 베이비시터가 전국 50개 가정에 시험 배치된다. 이 아기 보는 로봇의 이름이 대니. 그런데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수많은 SF 영화에서 익히 봤던 장면처럼 인간과의 사이에서 교감이 싹튼다. 이 소설의 포인트는 할머니가 로봇의 파트너라는 점. 대니가 자신의 손자를 돌보던 할머니에게 다가와 “아름답다”라는, 현실에서라면 씨알도 안 먹힐 돌출발언을 하며 할머니가 흔들린다(소설에서 명시적으로 흔들렸다는 문장은 없지만 흔들린 게 확실하다. 베드신으로 봐도 좋을 장면이 나오니까). 할머니, ‘나’로 나오는 60대 후반의 소설 화자는 맞벌이하는 딸을 대신해 14개월 손주 민우를 돌보는 생활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 만큼 힘겨워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윤이형의 소설은, ①안드로이드가 과연 인간의 사전 프로그래밍을 벗어나 연애 감정 개발이라는 일탈을 저지를 수 있느냐는, SF의 오래된 주제인 AI(인공지능)의 가능성과 한계, ②손자 부양의 책임까지 떠맡아야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 노년의 삶과 사랑, 이렇게 두 가지 이슈를 동시에 건드린다.

‘대니’로 넘어오며 건너뛰었지만 ‘~고양이’도 평범한 고발소설은 아니다. 몇 작품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지는 몰라도 윤이형은 무척 잘 쓰는 작가다. 두 고양이의 죽음을 이야기의 중간 매듭 삼아, 제도로서의 결혼에 염증을 느껴 하던 희은-정민 커플이 어떤 오해와 착각 속에 결혼 실험에 뛰어들었다가 사회적 인정과 경제적 안정이라는 현실의 철벽에 부딪혀 어떻게 패퇴하고 마는지, 이들이 최종적으로 받아든 이혼과 결별이라는 명세서의 대변과 차변에는 각각 어떤 항목들이 기입되는지를 누구보다 처절하게 그린다. 그런데 윤이형은 이런 가족극 혹은 사회극의 말미에, 지금 당장 결혼과 출산 계획이 없는 사람도 참가자로 끌어들이는 공상과학 수준의 파격적인 공동육아실험 장면을 슬며시 끼워 넣는다. 흔한 리얼리즘 소설은 그가 추구하는 바가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단순히 윤이형이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런 문장 대신에, 1977년 상을 개시한 이래 처음으로, 본격과 장르(그러니까 SF)를 ‘본격적으로’ 오가며 작품활동을 해온 윤이형이라는 개성적인 작가를 이상문학상이 수상자로 갖게 됐다고.

필명인 한자 이름부터가 ‘다른 모양’이라는 뜻


▎(왼쪽부터) 2007년 첫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 2011년 두 번째 소설집 [큰 늑대 파랑] / 2015년 중편 소설 [개인적 기억] / 2016년 세 번째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 / 2017년 로맨스 소설 [설랑] / 2019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 2019년 네 번째 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
윤이형의 개성은 어쩌면 등단 시점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필명인 그의 한자 이름부터가 ‘다른 모양(異形)’이라는 뜻. 어물쩍 비슷하게는 안 쓰겠다는 뜻이었을까.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 등단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눈의 동공이 검은색 불가사리 형상, 쉽게 말해 검은 별 모양으로 변해 고통받는 인물이 나오는 ‘검은 불가사리’가 당선작이었다. 2007년 첫 번째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에 실린 단편 ‘피의일요일’은 온라인 게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 인물들의 종족과 직업, 각종 설정을 가져왔다. 보수적인 한국 문단이 용인할 수 있는 최대치의 탈주가 아니었을까. 정작 윤이형은 지난봄 격월간 [악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게임 서사를 차용한 소설을 처음 썼을 때 사람들이 너무 놀라 오히려 자신이 더 놀랐었노라고 밝힌 바 있다.

판타지와 SF라는 폐쇄회로에 갇혀 내면의 균열 혹은 심연과 씨름하던 윤이형이 고개 들어 바깥세상을 바라본 기점을 2016년 세 번째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로 잡을 수 있을까. 이 소설집 안의 아름다운 동성애 소설, 그러니까 소수자를 돌아본 단편 ‘루카’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지난여름 출간된 네 번째 소설집 [작은마음동호회]는 윤이형 문학의 중간 결산서 같은 느낌이다. 2016년 문단 내 미투 운동을 목격하며 본격적으로 공부했다고 악스트 인터뷰에서 밝혔던 페미니즘 계열 작품(‘작은마음동호회’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 ‘피클’, 특히 ‘이것이 우리의 사랑이란다’는 마초 남성 문화에 대한 전면전 선언처럼 도발적이다), 동성애 소설(‘승혜와 미오’ ‘마흔셋’), 판타지(‘의심하는 용-하줄라프1’ ‘용기사의 자격-하줄라프2’), SF(‘수아’)에 어쩐지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이웃의 선한 사람’까지, 한 작가의 소설책이라고 믿기 어려운 다채로운 경향의 단편들이 각자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작가의 연대기가 그의 평소 생각이나 문학이 지향하는 진실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 걸까. 이른바 약전(略傳)으로 작가의 삶을 압축하는 일은 온당한가.

범주화가 빠질 수 있는 오류를 경계하며 전하면, 윤이형은 흔히 말하는 X세대다.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 태어나 90년대 대학을 다니며 문화세례를 받은 세대, 졸업과 동시에 IMF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닥뜨려 아버지 세대보다 형편이 어려운 첫 세대로 간주되는 저주받은 그 세대 말이다.

개인 윤이형이 그런 시대 흐름에서 벗어나는 길은 없었을 테다. 연세대 영문과 재학 시절 윤이형은 PC 통신 하이텔의 하루키 소모임에서 활동한다. 96년 연세대 한총련 사태 때는 유럽 배낭여행 중이었다. 영화·게임·음악 등 대중문화에 푹 절어, 단순히 그것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이 되어버릴 정도였다고 회고하는 시절이다. 2000년대 초반 판타지·SF의 매력에 눈 떠 2008년 SF 창작 수업 수강생들과 함께 결성한 합평 모임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글쓰기 모임”이라고 자부한다. 지금까지 윤이형 소설에 담겨온 게임·판타지·SF 등 각종 대중문화 코드 혹은 약호들은 이런 이력의 산물인 것이다.

그리고 앞서 잠깐 언급했던 2016년 페미니즘 각성의 시기. [이상문학상 작품집] 안에 실린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 윤이형은 당시 심경을 이렇게 밝힌다. 다소 길지만 윤이형 퍼즐의 핵심 요소다.

“2016년(41세)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그날 태어난 많은 ‘여성’ 중에 나도 있었다. 공부를 시작했다. 즐거우면서 기가 막혔고, 거의 항상 화가 나 있는 상태가 이어졌다. 멋진 여성들을 알게 되고 놀라움과 짜릿함을 느끼면서 나의 많은 부분이 바뀌어갔다. 신전들이 무너지고 우상들이 깨져 실려 나간 빈자리에 가치관의 재건작업이 시작되었다. 10월 20일, 밖에 나갔다가 택시를 타고 집에 오면서 트위터를 보았고 울었다. 말로 할 수 없는 길고 무참한 시간의 시작이었다. 내가 몸담았던 세계의 끔찍하고 적나라한 민낯이 거기 있었다. 열심히 쓰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글쓰기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다짐만을 겨우 할 수 있었다”

이런 문장들을 만나면, 지금까지에 대한 단순 반성만으로는 남성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자괴감이 든다. 물론 윤이형은 글쓰기에 관한 인용문의 모호함을 이후 충분히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윤이형에게는 이런 요소도 있다. 고양이의 죽음. ‘유명한’ 소설가인 아버지의 그림자. 3년간 글을 못 쓸 정도로 심각했던 심리적 압박감.

윤이형은 대면 인터뷰를 사양했다. 키우던 두 마리 중 첫 번째 고양이가 지난해 초 세상을 뜬 데 이어 이번에는 두 번째 고양이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질문지 작성에 며칠, 보낸 지 이틀 만에 돌아온 답신에서 그는 두 번째 고양이마저 죽었다고 했다. 서면 인터뷰를 전한다.

“작가도 평범한 생활인… 특별하다고 보는 데서 문제 시작”


▎윤이형은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을 거리낌 없이 오가며 작품활동을 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꼽힌다. / 사진:백다흠
필명이 의미심장한 것 같다. 작가가 평범한 생활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또 당신의 작업은 다른 작가들과는 좀 다르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가 지었나. 만족스럽나?

“본명이 있는데 그것을 쓰지 않고 필명을 따로 마련하는 사람들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사자에게는 중요한 정체성의 문제다. 한국에서는 개인이 밝히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공개하는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다. 필명을 지어 준 분은 있는데 사적인 부분이라 밝히고 싶지 않다. 필명의 한자는 내가 정했고 당시엔 뭔가 다르고 싶다는 치기어린 마음에서였던 것 같지만 마음에는 든다. 하지만 작가가 평범한 생활인이 아니라는 말에는 공감이 되지 않는다. 문단 내 성폭력을 비롯한 많은 문제가 작가는 평범한 생활인이 아니고 그 위에 있다는 인식에서 시작됐다.”

고양이가 아파서 e메일 인터뷰를 하게 됐다. 두 마리 중 레일라는 죽은 걸로 알고 있고, 그렇다면 몽식이가 아픈 건가?

“두 번째 고양이도 아팠고 지난주 토요일에 세상을 떠났다(※9월 7일인 듯). 신부전이었다.”

올해 당신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에 잘 나와 있지만, 키우던 고양이가 아프거나 죽었을 때 주인이 느끼는 고통과 상실감은 키우지 않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다. 더구나 당신에게 고양이는 단순한 반려동물 이상인 것 같다. 작품과 글쓰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는 것 같으니 말이다.

“가족이고, 내가 부끄러움 없이 한없이 자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상이었다. 나는 내 고양이들을 내가 성심껏 돌보고 모자람 없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고 보니 나 역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태도로 고양이들을 대했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람 아이 때문에 밀어낸 적도 있고 아픈 것도 제때 몰랐다. 모든 타자와의 관계가 내겐 그렇다. 동등하게 대한다고 믿지만 지나고 보면 동등하지 않았고 언제나 내가 우선이고 중심이었기에 반성하게 된다.”

“고양이는 가족이자 한없이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

SF나 판타지 얘기 안 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장르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인가. 악스트 인터뷰에서, SF나 판타지에 수백 번, 수천 번 반복 등장하는 클리셰를 가져다 소설에 활용한다고 했는데.

“판타지를 처음 읽었던 건 동화를 통해서였다.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의 ‘짐 크노프’ 시리즈라든지 [끝없는 이야기] 같은. 용·마법·검·인간 이외의 종족 등이 나오는 모험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워낙 좋아했다. 어른이 된 뒤에 다시 만났을 땐 잃어버린 유년을 다시 발견한 기분이었다. SF는 성인이 되어 읽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과학적 사고를 중심으로 한 전개와 세계를 뒤집어 한순간에 낯선 것으로 만드는 경이감(sense of wonder)에 큰 충격과 매혹을 느꼈다. 빌려와 써먹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그렇게 하면 표절이 되지 않나) 아주 많이 사용돼서 클리셰라고 해도 될 만한 것은 아마추어이자 팬으로서 존경의 의미를 담아 나도 한번 사용해 보되 좀 다르게 사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의심하는 용’에서 용의 알이 인간을 선택하듯(인간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숙명처럼 주어진다) 주어지고 그것을 받은 사람이 용기사가 된다는 설정 같은 것이 판타지에서 아주 많이 나오는 클리셰다.”

새로운 소재나 형식을 선보이는 것이 당신 소설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나?

“‘낯선 것을 써야지’ ‘새로운 형식을 써야지’ 같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항상 쓰고 싶은 이야기가 먼저 있고 이야기에 맞는 옷을 나중에 입히는데 리얼리즘이 아닌 옷을 입고 있어도 나는 항상 동시대의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남들처럼 리얼리즘 소설을 써보려고 했는데 뭔가 어색하고 불편했고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좀 더 내 맘대로 써보았더니 내게는 그게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또 다르게 리얼리즘 식으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쓴다.”

리얼리즘이나 판타지·SF 어느 한쪽 경향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써왔다고 할 수 있는데, 너무 멀리 나가면 안 되지 않나. 고삐 풀린 탈주의 욕망 같은 게 있다면 그걸 어떻게 통제하나?

“별로 탈주해보지 못했다. 내 소설은 아직까지 대체로 따뜻하고 착하고 바르다. 차갑고 나쁘고 무섭고 위험한 방식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소설을 써보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읽는 이의 마음에 너무 심한 데미지를 입혀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그리고 폭력을 다루더라도 폭력적인 소설은 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다.”

문화의 시대로 얘기되는 90년대에 학교를 다닌 X 세대다. 세 번째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의 표제 단편 ‘러브 레플리카’는 일본의 록밴드 ‘X JAPAN’의 91년 앨범 ‘Jealousy’의 삽입곡 제목이기도 한데.

“그때는 젊었고 개인성과 취향을 소설에 드러내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취향을 위해 아무도 모르는 문화적 기호들을 소설에 써넣기보다는 내가 소통하고 싶은 사람들이 잘 이해할 이야기,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쓰는 것이 중요해졌다.”

여성의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여성 독자가 기준

페미니즘 얘기를 해보자. 여성주의 주장을 껄끄러워하는 남성이 여전히 많다. 가사나 육아 등 여성들의 어려움을 남성들이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무 페미니즘 주장을 강하게 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소설 쓸 때 준거집단이 이제는 여성이라는 얘기도 했는데.

“여성의 어려움이 짐작이 안 간다면 직접 경험해보는 방법이 있다. 아이는 없더라도 밥하기·설거지·빨래·청소 같은 가사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생존을 위해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하는 인간 삶의 기본 아닌가? 실상을 납득하는가 아닌가는 내가 염려할 문제가 아니고, 여성의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기준이 여성 독자들이다. 그리고 소수이긴 하나 공감하는 남성 독자들도 있다. 남성 전체로 일반화하는 것은 그들에게 기분 좋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고양이’에서 남편 정민의 폭력적인 발언은 문제지만, 부부 이혼의 책임이 어느 한쪽에 더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소설은 마치 결혼 제도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판 강도가 높은데.

“어느 한쪽의 책임이라고 쓰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서로를 배려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각자 고통받고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가 없는 경우엔 좀 다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경우엔 육아라는 일의 특성 때문에 보통 한 사람은 가족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느라 허덕이고 한 사람은 가사와 육아에 갇혀 사회에서 차단된다. 맞벌이이고 육아를 외주 맡겨야 하는 경우엔 양쪽이 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허덕인다. 정민과 희은의 경우엔 가정 내에서 성별 분담이 일반적인 경우와 반대지만 그래도 똑같이 고통받는다. 나는 결혼제도 속에서 사회에서 단절되는 역할과 상대방을 사회에서 단절시키는 역할을 둘 다 해봤는데 둘 다 싫고 고통스러웠다. 사랑해서 함께하기로 한 사람의 삶과 꿈을 찌그러뜨리면서까지 결혼이라는 제도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모두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 서로에게 훨씬 나은 선택일 것이다.”

글쓰기와 관련,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사랑이 세상과 싸우는 가장 정치적인 방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의미인가?

“두 영역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누구를 사랑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함께 일하는 타인들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태도의 문제가 실은 한 인간에게 가장 거대하고 정치적이고 중요한 담론이자 성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기자와 작가의 e메일 문답 중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대목들이다. 윤이형의 문학 궤적을 이렇게 요약하면 어떨까. 90년대 문화 키드에서 21세기 페미니즘 맹원(盟員)으로. 기자에게는 이 문구가 퍼뜩 떠오른다.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1910호 (2019.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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