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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대한노인회중앙회 공동기획 同行2 | 존경받는 시니어, 골드보이가 간다] ‘만인의 연인’ 문주란의 외길 인생 

“가장 좋아하는 세 곡으로 음반 내는 게 마지막 소원” 

1966년 ‘동숙의 노래’로 데뷔… 가수 인생 54년 차
1년 전 사업 접고 거쳐 옮긴 뒤 가수 활동에만 전념


▎문주란은 “남에게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큰 기쁨”이라고 힘줘 말했다. 문주란의 품에 안겨 있는 건 그가 자식처럼 아끼는 애완견 ‘준’.
문주란(68)에게 하남시는 낯선 곳이다. 근처에 친척이나 친한 지인이 없다. 그런데도 문주란은 1년 전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뒤로 문주란은 마음이 편해졌다고 한다.

“1999년부터 20년 정도 경기도 청평에서 라이브카페를 운영했어요. 돈은 벌었지만 사람들에게 치이면서 상처를 받았고 스트레스도 많이 쌓였던 것 같습니다. 정말 아주 힘들었어요. 사업을 접고 1년 전 이곳으로 왔는데 마음이 굉장히 편해졌어요.”

문주란에게 아파트는 낯선 곳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과 1년 전까지 단독주택에서만 살아왔다.

“청평에서 라이브카페를 운영할 때만 해도 애완견을 진짜 많이 키웠어요. 열 마리 넘게 기른 적도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둘 세상을 떠나더니 이제는 얘 하나만 남았네요.” 현재 문주란은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 반려견 ‘준’과 함께 산다.

월간중앙이 ‘만인의 여인’ 문주란과 만났다. 문주란은 “예전부터 그렇게 살아왔지만, 일흔 가까운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는 돈도 사람도 큰 욕심이 없다”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3곡을 다시 불러 음반을 내는 게 마지막 소원이자 목표”라며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요즘에는 마음 수양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 몸도 마음도 아주 건강해졌어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 보니 혼자 사는 게 익숙하긴 한데, 그래도 몸이 아플 때는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걸 겪곤 했던 게 사실입니다. 청평에서 사업할 때는 (우울증) 약을 먹어야 했는데 하남으로 이사 온 뒤로는 모든 게 아주 편안해졌어요.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다가 조용히 떠나고 싶어요(웃음). 요즘에도 가끔 방송에 나가거나 행사에 출연하고 있어요. 얼마 전 KBS에서 출연 제의가 왔는데 오랜 고민 끝에 수락했어요. 아마 11월쯤 전파를 타지 않을까 싶습니다. 방송을 통해 어릴 적 제 매니저였던 분을 찾으려 합니다.”

문주란은 현재 40평형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식구는 애완견 ‘준’뿐이다. 문주란은 “아파트에 처음 살다 보니 평수에 대한 감이 없었는데 혼자 살기에는 40평도 너무 넓다”며 “기회를 봐서 근처에 좀 더 작은 아파트로 집을 옮길까 한다”고 말했다. 이어 “나이 들어 너무 큰 집, 큰 차는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문주란은 경차를 직접 운전하고 다닌다.

어린 나이에 데뷔했잖아요? 계기가 궁금합니다.

“1966년에 ‘동숙의 노래’로 공식 데뷔했는데 그때 제 나이가 만 15세였어요. 당시만 해도 ‘미성년자는 방송에 나갈 수 없다, (대중가요를 부르는) 무대에 설 수 없다’는 식의 논란이 많았던 때죠.”

원래 가수가 꿈이었나요?

“원래는 공부를 많이 해서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부산 서면에서 큰 운수사업을 해서 유복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때 엄마를 여의고 아버지 사업마저 힘들어지면서 가세가 기울었어요. 그러다 보니 공부를 많이 하기 어렵게 되더라고요. 가수가 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안에 끼는 있었던 것 같아요. 학급에서 장기자랑 같은 걸 할 때 늘 제가 사회를 봤거든요.”

스스로 가수의 길을 택한 건가요?

“중학교 2학년(1965년) 어느 날 친구들이 부산 MBC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노래 경연대회에 저를 대신해서 응모한 겁니다. 그 프로그램 제목이 [추천 노래 올림픽]이었는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저는 영문도 모르고 (방송국에) 갔는데 사회자가 제 본명인 ‘문필연’을 호명하더라고요. 아무 생각 없이 토니 달라라의 ‘라노비아’를 불렀는데 피아노 반주를 하던 분이 깜짝 놀라더군요. 당시 그 프로그램에서 7주 연속 1등을 한 사람에게는 서울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 전신)에서 열리는 본선 출전 자격이 주어졌지요. 하지만 저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6주 연속 1등에 만족해야 했죠. 어차피 7주 연속 1등을 한들 미성년자라 본선 무대에 서기 어려웠거든요. 아쉽게도 7주 연속 1등은 놓쳤지만, 그 프로그램 출연을 계기로 부산 지역에서는 ‘문필연’이라는 이름이 제법 알려지게 됐어요. 극장 쇼 같은 걸 주관하는 분들이 난데없이 학교로 찾아와서 ‘게스트로 무대에 서달라’고 요청하기도 했고요. 아마 당시 출연료로 3000원을 받지 않았나 싶네요.”

교복 치마 입고 선 시민회관 무대


▎1960년대 후반 카메라 앞에 함께 선 최희준과 문주란.
정식 데뷔는 언제였죠?

“중학교 3학년이던 1966년에 서울로 전학을 가서 하숙하게 됐어요. 그런데 [아리랑]이라는 잡지를 제작하는 전우 선생님이 어느 날 하숙집으로 불쑥 찾아오더니 ‘며칠 뒤 서울시민회관에서 [아리랑] 주최 큰 시상식이 있는데 네가 출연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며칠 뒤 이분이 진짜 학교로 와서 저를 시민회관으로 데려가는 겁니다. 교복 치마는 그대로 입은 채 윗도리만 전우 선생님이 급히 사온 티셔츠로 갈아입었죠. 근데 시민회관에 가보니 눈이 휘둥그레지더라고요. 당대 톱스타인 최희준·이미자·박재란 같은 분들이 대기실에 있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전우 선생님이 그 행사의 사회자인 송해 선생님에게 다가가더니 ‘이 아이를 반드시 무대에 서게 해달라. 노래해야 한다’고 잘라 말하더군요. 송해 선생님은 예정에 없는 순서를 끼워 넣을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전 선생님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저는 당시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성재희 선배님의 ‘보슬비 오는 거리’를 원음보다 한키 낮춰서 부르게 됐습니다. 무대 뒤에 앉아 있을 때는 너무 떨려서 앞이 하나도 안 보일 지경이었는데 마이크 앞에 서니 거짓말처럼 긴장감이 가시더군요.”

그렇게 해서 곧바로 앨범을 낸 건가요?

“성재희 선배님보다 낮은 톤으로 불렀는데 객석에서 난리가 난 겁니다. ‘앙코르’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는데, 더 부를 레퍼토리가 있었겠어요? 황급히 인사하고 무대 뒤로 내려와서 대기실로 들어갔는데 레코드 회사 사장님들, 작곡가 선생님들, 방송사 PD님들이 저를 삥 둘러싸더라고요. 언제부터 노래했냐, 누구한테 노래 배웠냐, 집은 어디냐, 몇 살이냐…. 마치 즉석 청문회라도 하는 것 같았어요.

그중에서도 전우 선생님 옆에 있던,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백영호 선생님 그리고 임종수 지구레코드 회장님이 가장 적극적이더군요. 그때 전우 선생님이 ‘필연아, 앞으로 네 이름을 문주란이라고 하자. 문주란이라는 난초가 있는데 참 예쁘거든. 앞으로 넌 문주란이야’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 예명이 문주란이 된 겁니다. 얼마 뒤 지구레코드에서 받은 계약금으로 백영호 선생님 댁 근처에 전셋집을 얻어 살게 됐고, 선생님의 기타 반주에 맞춰 ‘동숙의 노래’를 열심히 배웠어요. 아버지는 엄청나게 반대했지만, 그게 운명이었던지 저는 마침내 가수의 길에 접어들게 됐어요. 인터넷 포털사이트 같은 데 제 이름을 치면 1949년생으로 나오기도 하던데, 당시에 미성년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위해 애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실제로 저는 1951년생, 올해 만 68세입니다.”

어려서 엄마 잃은 슬픔 노래에 묻어나


▎문주란(앞쪽)과 정훈희가 한 의류업체의 CF를 촬영하고 있다. 1970년쯤으로 추정된다.
여성 가수치고는 굉장히 저음이잖아요? 가수 데뷔에 걸림돌이 되진 않았나요?

“아뇨,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만일 제가 또래들처럼 어린 목소리였다면 가수로 데뷔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당시만 해도 미성년자라는 점 때문에 제약이 많았잖아요? 목소리가 어른스러운 데다 노래도 어른스러웠던 게 가수로 데뷔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외국 가수 중 자신과 음색이 비슷한 가수는 누구일까요?

“저와 비슷한 음색을 가진 가수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대신 저는 팻 분이나 냇 킹 콜 같은 부드러운 음색을 가진 가수들을 좋아했고, 그들의 음악을 자주 들었어요. 제가 트로트 가수이긴 하지만 정통 트로트라기보다는 칸초네나 팝 스타일의 노래를 좋아했던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아요.”

팻 분은 타고난 미성(美聲)으로 젊어서부터 큰 인기를 누렸다. 팻 분은 데비 분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냇 킹 콜은 감미로운 사랑 노래로 미국인들이 사랑을 받았다. 그는 여성 싱어송라이터 나탈리 콜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유난히 슬픈 노래를 많이 불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형제가 5녀 1남인데 딸 중에서는 제가 막내입니다. 언니들도 하나같이 노래를 잘했어요. (가수가 되는 데) 그런 영향을 받기도 한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저는 참 슬픈 노래를 많이 불렀던 것 같습니다. 가수는 자신이 부른 노래대로 운명도 흘러간다던데…. 아마도 엄마를 일찍 잃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해요. 박춘석 선생님도 ‘주란아, 너는 가을을 연상케 하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지금까지 발표한 음반과 곡은 얼마나 될까요?

“발표한 음반이 어느 정도 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곡은 아마도 1700~1800곡쯤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곳은 수십 곡 정도라고 할까요?”

이른바 ‘박춘석 사단’의 일원이었던 문주란은 1966년 제1집 [동숙의 노래/낙엽 지는 밤]을 시작으로 [당신이 있으니까/젊은 초원](1973년), [아마다 미야/남의 속도 모르고](1989년), [97 春 내 가슴 벌집 됐네](1997년), [시절인연](2011년) 등 수많은 음반을 발표했다.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문주란은 1990년대 초반에는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해’라는 곡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문주란은 “음반을 만들 때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곡인데, 문주란도 이렇게 빠른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게 화제가 되면서 큰 인기를 모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름값을 고려하면 상복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맞습니다. 저는 가수 활동을 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상을 받은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예요. 거의 받은 적이 없어요.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1982년 제11회 도쿄음악페스티벌에서 최우수 가창상 수상입니다. 도쿄음악페스티벌에서 최우수 가창상을 받은 한국 가수는 아직도 저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1700~1800곡 중에서 ‘인생 노래’를 꼽는다면요.

“가수라면 누구나 자신의 데뷔곡은 잊을 수 없겠죠. 저 역시 ‘동숙의 노래’를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돌아가신 박춘석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파란 이별의 글씨’라는 노래를 가장 아낍니다. 또 ‘백치 아다다’도 참 많이 좋아해요. ‘백치 아다다’는 원래 나애심 선배님이 부르신 곡인데 1985년에 제가 리메이크했죠. 원곡은 왈츠에 가까웠는데 저는 슬로록(Slow Rock)으로 편곡해서 불렀어요. 곡 발표 얼마 후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병상에서 제 노래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는 소식에 위안을 삼았어요.”

가수로서 보람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나이를 먹으면서 인생무상을 참 많이 느껴요.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요. (젊었을 때는) 바깥세상에 잘 나가지 않았지만, 요즘에는 시장 같은 데 자주 갑니다. ‘예전만큼 활동을 많이 하지 않으니까 나를 잘 몰라보겠지’라고 생각했는데 금세 저를 알아보고 사인해 달라는 분들이 많아요. 제가 원래 무대에서는 활발하지만, 사적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진 않는 편이에요. 그런데도 저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팬들을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가수를 만든 백영호, 스타를 만든 박춘석


▎1994년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문주란.
어린 나이에 스타 반열에 올라서 절정의 시절을 누렸습니다. 반면에 우여곡절도 많았는데요,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무엇인지요?

“1972년 연말에 서울시민회관 화재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에서 10대 가수 가요제 시상식이 열리고 있었는데 난리가 난 거죠. 그때 저는 척추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됐어요.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때였는데 한동안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해서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서울시민회관이 불에 타 없어지고 난 뒤, 그 자리에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서게 됐죠.”

1961년 서울 세종로에 복합 문화관인 서울시민회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1972년 12월 불의의 화재로 소실됐고, 1978년 4월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다.


▎1974년 쇼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한 박춘석과 당대 톱스타들. 왼쪽부터 김상진·황금심 ·남진·박춘석·이미자 ·하춘화·문주란·임희숙.
문주란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박춘석이죠?

“백영호 선생님 덕분에 가수가 됐지만, 이후로는 박춘석 선생님이 주신 곡 덕분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한마디로 박춘석 선생님은 제 아버지였죠. 당시에 패티김(81)·이미자(78)·남진(74)·문주란 4명을 ‘박춘석 사단’이라고 불렀는데 그중 막내가 저였어요. 박춘석 선생님은 늘 저더러 ‘배포가 있다, 의리 있다, 손이 크다’고 하셨어요. 솔직히 저는 내숭 떠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냥 있는 그대로, 거짓말하지 않고 살아요. 돈 욕심도 별로 없어요. 솔직히 돈 욕심을 냈다면 정말 큰돈 벌었을 겁니다. 예전에 서울 서초동 280평짜리 주택에서 살았던 적도 있어요. 그 동네에서 땅도 제법 많이 샀고요. 지금도 그쪽을 지나다 보면 ‘아 저거 잘 지킬걸’하는 아쉬움이 남아요(웃음). 제가 악착같이 그걸 지키려 하지 않았던 건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기’ 때문이에요.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후회하진 않아요.”

연예계에서 손이 크기로 유명하던데요.

“저는 천성적으로 베푸는 걸 좋아해요. 누군가에게 받는 것보다 누군가에게 주는 게 더 행복한 것 같아요. 오래전에 개그맨 남철·남성남 선배와 출연자 분장실에서 함께 있었던 적이 있어요. 뭘 좀 사려고 가방을 뒤적였는데 마침 저한테 지갑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형, 나중에 드릴 테니 3만원씩만 줘봐’라고 말했어요. 그분들이 어지간하면 지갑을 잘 안 여는데 저한테는 흔쾌히 주시더라고요(웃음). 그 돈 6만원으로 몽땅 음료수를 사서 연주자·출연자, 청소하는 아주머니들, 경비 아저씨들에게까지 전부 나눠 드렸어요. 남철·남성남 선배가 ‘한 수 배웠다’며 고개를 끄덕이시더군요. 훗날 팬들에게 ‘깨끗한 가수’였다는 이미지를 남길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연예계에서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분들이 있나요?

“저는 남자 선배들을 형이라고 불러요. 제가 좀 남성적인 면이 있거든요. ‘갈대의 순정’을 부르는 박일남 선배나 ‘빨간 구두 아가씨’의 남일해 선배랑 통화해서 이따금 안부를 묻곤 해요. 아무래도 제가 혼자이다 보니 형들이 저를 많이 걱정해 줍니다. 몇몇끼리 어울려 다니면서 수다 떨고 무리 짓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특별히 친한 사람은 없어요.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남들이 좀 실수하거나 서운하게 해도 넘어가야 하는데 저는 짚고 넘어가는 스타일이거든요. 사람은 둥글둥글하게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인생의 좌우명이나 신조 같은 게 있으신지.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중요한 건 역시 건강이죠. 저는 아침에 눈 뜨면 부처님 앞에 기도합니다.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살다 가게 해주시고, 치매 걸리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빌어요.”

건강관리 비결이 궁금합니다.

“육식을 줄이고 채식 위주로 합니다. 고기는 한 달에 두어 번 정도만 먹지요. 또 쌀도 자주 먹지 않아요. 그 대신 야채나 과일을 많이 먹어요. 밥을 먹더라도 백미가 아닌 잡곡 위주로 먹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집 근처에서 산책도 자주 합니다.”

“독신 고집 이유? 팔자라서 ”


▎문주란이 1973년 발표한 앨범 재킷 사진.
인생 100세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애걸복걸하지 말고, 안달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최고인 것 같아요. 나이 들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은데 마음을 편히 다스려야 할 것 같아요. 욕심을 버리면 불만이 줄고, 불만이 줄면 긍정적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독신을 고집한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1975년 애완견을 안은 채 카메라 앞에서 밝게 웃고 있는 문주란.
“첫사랑에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가 장가를 세 번 가셨는데, 어렸을 때지만 그게 머릿속에 강하게 박혔던 것 같아요. (독신으로 지내온 이유가) 성격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기도 하고요. 저는 남자가 하는 어지간한 일은 모두 잘할 수 있어요. 칠십 가까이 나이를 먹고 보니 외로울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도 ‘이게 내 운명인가 보다. 팔자인가 보다’ 생각하며 살아요.”

꼭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목표는 있나요?

“가곡 ‘동심초’와 ‘가고파’ 그리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본 옛날 노래 1곡 이렇게 3곡을 다시 불러서 음반을 내는 게 마지막 목표이자 소망입니다. ‘가고파’와 ‘동심초’는 지금도 즐겨 부르는 곡입니다. 요즘 한·일 관계가 얼어붙어 있기 때문에 선뜻 일본 노래를 가져와 음반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이런 냉각기가 지나고 다시 평온해지면 ‘동심초’, ‘가고파’와 묶어서 꼭 음반을 만들고 싶어요. 그게 제 마지막 소망이자 목표입니다.”

팬들에게 인사 말씀을 전해 주신다면.

“저를 기억하는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있는 분들이겠죠. 그분들에게는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게 남아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식들한테 손 내밀 때는 내밀고, 나눠 줄 때는 나눠 주면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지극히 평범한 말이지만 마음 편하게 그리고 건강하게 사는 게 최고입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선임기자 kgboy@joongang.co.kr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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