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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2)] 고려 중흥을 위한 최후의 노력 

백성의 고달픔을 알지 못하는 왕은 망하리 

공양왕, 고려 말 왕조 교체 징후인 천재지변에 맞서 새 법률 제정
정몽주 주도로 밑바닥 계층 민심 얻으려 시도…明과의 외교 관계도 복구


▎백성을 위한 제단인 사직단. 고대 중국 주나라의 예법에 따라 건축됐다. / 사진:연합뉴스
1392년, 고려가 475년 만에 종말을 고하고 조선이 건국됐다. [고려사] 기록은 7월 14일(양력 8월 2일)로 끝난다. 조선 건국에 반대했던 유혜손, 강회중 등에 대한 유배 기사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유혜손은 이성계의 즉위교서에서 본향에 안치되는 처벌을 받았고, 조선에 출사하지 않았다. 절개를 지킨 것이다. 그의 본향은 진주이고, 딸이 이색의 아들 이종덕과 혼인했다. 동생 유혜방의 아들인 유구는 이성계를 따라 원종공신이 됐고, 정2품 참찬문하 부사까지 올랐다. 가족끼리도 운명이 갈린 것이다. 강회중의 후처는 최영의 딸이고, 동생 강회계는 공양왕의 사위다. 그 역시 본향인 진주에 안치됐으나, 조선에 출사해 세종 3년(1421)에 세상을 떠났다.

1392년의 기후는 매우 불순했다.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다가 4월 19일에야 비가 내렸다. 양력으로 5월 11일이니, 곡식의 씨 뿌릴 때를 놓친 것이다. 6월 20일(양력 7월 10일)에는 큰 비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 개성 시내의 사람과 가축에게도 벼락이 떨어졌다. 6월 어느 날인가는 찬바람이 밤새 세차게 불고, 날씨가 마치 가을처럼 추웠다. 날짐승의 동태도 이상했다. 6월 29일에는 까마귀 떼가 연복사와 화원, 백록산에 모여들어 하늘 가득 날아다녔다.

왕조 조상의 신주를 모신 태묘에는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5~6년간 근처 소나무만 갉아먹던 벌레들이 태묘의 소나무도 갉아먹었다. 송악의 소나무는 고려왕조를 낳고 지켜온 신수(神樹)다. [고려사] 첫 부분에 실린 ‘세계’는 왕건 가문의 신비로운 역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라의 감간(監干) 팔원(八元)은 풍수사였다. 그는 왕건의 외가 5대조 강충에게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어 바위가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강충은 그 말에 따라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고 송악산으로 개명했다. 그 송악산 아래에서 왕건이 태어났다. 그러니 태묘의 소나무가 벌레 먹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시그널이었다.

‘이성계의 동지’ 정지 장군의 비극


▎1392년 6월 까마귀 떼가 연복사에 모여들었다. 연복사는 고려 왕조의 종교행사가 거행된 곳이었다. / 사진:미국 프로그레스위클리
6월 19일에는 진성(鎭星, 토성)이 태미원(太微垣)을 범하였고, 또 동번(東蕃)의 상상성(上相星)을 범하였다. 천자의 조정을 뜻하는 별자리 태미원, 그리고 시중(侍中)을 뜻하는 상상성을 뭇별이 범한 것이다. 하늘과 땅, 자연 세계에 나타난 왕조가 망할 징조들이었다.

1392년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1391년 7월부터 시작된 정몽주의 반격에 힘입어 이성계파 중 혁명파는 대부분 제거됐다. 1월 27일은 동지밀직사사 장사길(張思吉)이 병으로 사직했다. 장사길은 의주의 토호로서 이성계의 휘하 무장이었다. 위화도회군에 참여해 회군공신이 됐고, 동생 장사정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 16인 중 1인으로 봉해졌다. 장사길조차 물러나자 고려왕조를 위협하던 혁명파는 완전히 세력을 잃었다. 그 전까진 문신들만 제거됐다. 이제 무신까지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그것은 위험이 이성계까지 미칠 수 있다는 의미였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래 이성계는 어떤 경우에도 군권을 포기하지 않고,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해 왔다. 반대로 잠재적 경쟁자로 간주하는 무장 세력은 착실히 제거했다. 충실한 조력자였던 장군 정지와 심덕부도 제거 대상이었다.

정지는 원래 공민왕을 경호하는 쉬구치(速古赤) 출신이었다. 그가 왜구토벌 대책을 건의하자 공민왕이 즉시 그를 전라도안무사로 임명해 왜구를 토벌하게 했다. 바다에서 정지의 활약은 놀라웠다. 육전에 최영과 이성계가 있다면 해전에는 정지가 있었다. 그는 연전연승했다. 고려말 왜구와의 전쟁에서 떠오른 영웅 중 한 명이었다.

주나라 주공을 흠모한 공양왕


▎정지 장군의 영정. 고려 말 영웅이었지만 그의 잠재력을 꺼린 이성계파에 의해 제거됐다. / 사진:한국전쟁기념관
위화도회군 때 이성계 휘하에 있다가 회군파에 가담했다. 회군에서 돌아온 정지는 3도도지휘사에 임명됐다. 왜구가 함양에서 운봉을 넘어 남원에 이르자, 정지는 연합군을 이끌고 공격해 적을 대파했다. 이성계에 뒤이은 제2차 황산대첩이라 할 만했다. 한때 정지는 이성계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회군 후 이성계가 집권의 미래상을 놓고 고민할 때, 정지는 이윤과 곽광의 고사를 제시했다. 강력한 섭정을 권고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가능할 정도로 측근이었던 셈이다. 그는 혁명파의 주축인 조준과도 절친한 벗이었다. 회군 후 윤소종이 이성계를 만난 것도 정지의 소개 덕분이었다.

그런데 정지는 1389년 11월 우왕 복위를 기도한 김저사건에 연루됐다. 주범 중 하나인 변안렬이 고문에 못 이겨 정지의 이름을 댄 것이다. 그 후 정지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됐다. 1390년 4월 뜻밖에도 회군공신 2등에 봉해졌으나, 곧이어 윤이·이초사건에도 연루됐다. 그는 청주옥에 갇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정지는 “이시중(이성계)이 대의를 바탕으로 회군할 때, 내가 이곽(伊霍)의 고사를 들어 시중에게 풍간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니, 그런 내가 어찌 윤이, 이초 같은 자들과 일당이 되겠는가? 하늘에 맹세하고 하는 말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의 말이 감개(感慨)했으므로 옥관들도 감동해 더 고문하지 못했다. 대성과 형조에서도 억울한 모함을 받은 것이라고 간언해 1390년 11월 마침내 누명을 벗게 됐다. 그는 고향인 전라도 광주 별장에 은거했다. 그리고 1391년 9월 판개성부사로 임명됐으나, 한 달 뒤인 10월 15일 부임하지 못한 채 생을 마쳤다. “풍모가 장대했으며 성품이 관후했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가져 독서를 즐겼는데, 책에 나오는 대의에 통달해 남들이 그 설명을 들으면 모든 의문이 시원히 풀렸다. 또 드나들 때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정지는 문무를 겸비한 인걸이었다. 그가 제거된 것은 이처럼 재능이 걸출하고 공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성계와 경쟁할 요소를 갖추었던 것이다.

2월 12일에는 궁궐 안에 해온정(解慍亭)이란 정자를 지었다. 해온은 염천과 더위에 지친 백성의 원망하는 마음을 서늘한 남풍이 풀어준다는 뜻이다. 순임금이 오현금을 연주하며 불렀다는 남풍가(南風歌)에 나온다.([십팔사략])

향긋하게 부는 남풍이여, 백성의 시름 녹여 주리.(南風之薰兮 可以解吾民之愠兮)

때맞춰 부는 남풍이여, 백성의 생활 풍요롭게 하리.(南風之時兮 可以阜吾民之財兮)

백성을 위로하고 기르는 노래다. 한 시름 놓은 공양왕은 순임금처럼 좋은 왕이 되고 싶었던 듯하다. 공양왕의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전라도관찰사 하륜이 [서경]의 무일(無逸)과 입정(立政) 편을 써서 만든 족자를 신년 하례 선물로 보내왔다. 하륜은 2월에도 주희의 ‘인자설(仁字說)’을 병풍으로 만들어 바쳤다. 감격한 공양왕은 하륜을 포상하면서 훌륭한 왕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강호에 있으면서 임금을 걱정하는 뜻을 말하여 잠규(箴規)를 만들어 성현들의 귀감이 될만한 말을 모아 옥백(玉帛)을 대신하여 보냈다. 전에 이미 족자에 썼고, 이제 또 병풍으로 만들어 보내니 항상 좌우에 두고 보면서, 마음을 닦고 성찰하겠다. 이로 인하여 허물을 고치니, 어찌 꼭 드러낸 간쟁만 필요하겠는가? 밖으로는 풍속의 성쇠를 보고, 안으로는 임금의 마음의 선악을 걱정하는구나. 내 생일을 축하한 자가 비록 많으나, 경처럼 직임에 걸맞은 자는 많지 않았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감탄스러우며 기쁘기가 그지없다.”([고려사] 공양왕 4년 2월 5일)

사실 공양왕은 즉위 초에 ‘무일’ 편을 기본 국정철학으로 천명한 바 있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안일에 빠지지 않으시겠다고(無逸) 스스로 기약하시며, 대언 성석용에게 명하시어 ‘무일’ 편을 써서 바치게 하여 온 나라의 신민들이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고려사] 공양왕 2년 6월 21일)

‘무일’ 편은 주공이 조카 성왕에게 남긴 정치적 훈계이다. 주공은 주나라의 실질적 건국자인 무왕의 동생이다. 무왕의 사후 그 아들이 갓난아기였으므로 주공이 섭정을 했다. 성왕이 크자 주공은 정권을 이양하며 ‘무일’로써 훈계했다. 주공은 공자와 더불어 유가의 전통에서 가장 존경받는 전설적인 정치가이자 성인이다. 공자는 자신이 따라야 할 모범을 주공에게서 찾았다. 나이가 들자 공자는 “나도 이제 늙었구나.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했다(吾不復夢見周公)”고 탄식했다. 너무 존경한 나머지 꿈에서 자주 봤던 것이다.

‘무일’의 내용은 왕으로서의 기본 태도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왕은 편안함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백성의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리에 있는 임금은 편안한 것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먼저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고 난 후 편안함을 누리신다면, 모든 백성의 고달픔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생활을 보면, 그 부모들은 부지런히 일하면서 씨 뿌리고 거두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자식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즐거움만 일삼으면, 그 집은 망하고 맙니다.”

주공이 무일의 예로 든 은나라 고종과 조갑(祖甲)은 오랫동안 백성과 더불어 살며 고생을 겪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주나라 문왕도 “허름한 옷을 입으시고 황량한 들판이나 혹은 밭에서 일했다.” 그래서 백성의 고통을 잘 알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농민으로서 황제가 된 주원장도 농민의 고충을 잘 알았다. “농민은 수고롭게 육체노동을 하고, 오곡 생산에 힘쓴다. 몸은 전토를 떠나지 않고, 손에서는 쟁기를 놓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노동만 하며, 조금의 휴식도 얻지 못한다. 거주하는 곳은 초가집이며, 입는 옷은 거친 갈포 치마와 무명옷이다. 먹는 음식은 나물국과 거친 밥에 불과하다.”(서연달 외, [중국통사])

仁을 정치의 본질로 삼다


▎김홍도의 ‘외겨리’.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그렸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농민의 삶이란 이렇듯 비참한 것이다. 소나 말처럼 일하고, 먹는 것이나 사는 것도 소나 말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왕의 아들로 태어나 궁궐에서 자라고 왕위를 이은 후세의 왕들이 어떻게 농민의 고초를 알겠는가? 자신이 먹는 고량진미가 백성의 기름이며, 자신이 마시는 향기로운 술은 백성의 피라는 것을 어떻게 알까? 그런 것을 잊고 안일에 빠지게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다.

크게는 나라나 기업, 작게는 일개 가문에서도 이런 일이 항상 일어난다. 그래서 태조 왕건도 죽기 전 훈요십조를 남겼다. 거기에도 ‘무일’ 편이 들어있다. “국가를 보존하는 자는 근심이 없을 때 경계하고,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해야 한다. 주공 같은 대성인도 ‘무일’한 편을 성왕에게 바쳐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걸어두고 출입할 적에 보고 살펴라.”

‘무일’ 편은 훈요십조에 등장하는 유일한 책이다. 그러나 후대의 왕들은 ‘무일’ 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숙종 대에는 궁궐의 중심 전각인 회경전(會慶殿)에 병풍으로 써놨다. 그 후 중국 사신을 접견하거나 연회, 불교 행사를 베풀던 대관전(大觀殿)에는 ‘무일’ 편을, 선경전(宣慶殿)에는 [서경]의 ‘홍범’ 편을 쓴 병풍을 둘러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왕 중 ‘무일’ 편에 대한 강의를 들은 왕은 예종, 인종, 공민왕, 공양왕 네 명뿐이다. 예종에게는 윤관과 호종단(胡宗旦)이, 인종에게는 김부철(金富轍)과 정지상이 강의했다.

공민왕은 ‘무일’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무일’ 편을 써서 근신과 재상들에게 자주 나눠줬고, 윤택과 이제현의 강의를 들었다. 1370년 11월 공민왕은 ‘무일’ 편을 써서 왕의 집무실인 보평청(報平廳)에 걸었다. 이때는 신돈의 섭정을 거둬들일 생각을 하던 때였다. 그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서경] ‘입정(立政)’은 주공이 성왕에게 인재 임용의 도를 훈계한 것이다. 주자의 ‘인자설’은 인(仁)에 관한 주자의 저술이다. [주자문집] 67권에 실려 있으며, 전문은 총 824자이다. 이를 그림으로 만든 인설도는 [주자어류] 105권에 실려 있다. ‘인설’은 짧지만, 매우 중요하다. 우주와 인간의 본질을 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첫 문장에 간결하게 요약돼 있다. “인(仁)이란 만물을 낳는 천지의 마음이며, 또한 사람이 이것을 얻어 사람의 마음으로 삼는 것이다.(仁者天地生物之心, 而人之所得以爲心)”

조물주는 왜 우주를 창조했을까? ‘인’이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이라는 마음으로부터 우주의 온갖 생명이 탄생했다. 사람도 그 본질의 일부를 얻어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에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한 모든 것이 통합적으로 함축되어 있다. “아직 발하기 전에 마음에 사덕(四德)이 갖추어져 있지만, 오직 인만이 사덕을 포괄한다. 그러므로 인은 함양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이며 포괄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4덕이란 인의예지이다. 인은 4덕의 하나이자 전부를 포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은 모든 생명의 본성(生之性)이며, 사랑의 본질(愛之理)이다. 그러므로 인을 체득해 보존할 수 있다면, 모든 선의 원천과 백행의 근본이 모두 여기에 있다.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이 ‘인을 구하는 일’(求仁)에 목숨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정치의 본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은 천지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을 낳는 마음이고, 사람의 관점에서는 “온연히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임금된 사람은 인에 머문다”(爲人君止於仁)고 한다. 하륜이 공양왕에게 ‘인설’을 병풍으로 만들어 바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살리는 정치를 권한 것이다. 이황이 선조에게 바친 성학십도 중 제7도도 주자의 ‘인설도’이다. 이황의 결론은 이렇다. “이제 옛 제왕의 마음을 전하고 인을 체득한 묘리를 구하려 한다면, 어찌 여기에 뜻을 남김없이 쏟지 않겠는가?”

이를 보면 하륜은 공양왕에게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공양왕도 이에 화답했다. 정몽주는 더 큰 선물을 바쳤다. 1392년 2월 수시중 정몽주는 신정률(新定律)을 편찬하여 바쳤다. 이것은 명나라 법전인 대명률(大明律), 원나라 법전인 지정조격(至正條格), 그리고 고려의 법령을 참작하고 취사선택해 만든 새로운 법률이었다.([정몽주전])

고려의 독자적인 법률인 고려율(高麗律)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다. 조선 이전의 율령집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김호동, [고려 율령에 관한 연구]) 그러나 [고려사] 형법지 서문에는 당의 형법인 당률(唐律)을 채택하고, 고려의 풍습을 참작해 사용했다고 한다. 총 71조의 명목 중 당률에 없는 옥관령 2조를 빼면 총 69조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밖에도 송나라 법률인 송형통(宋刑統)의 군율, 금나라의 자(金尺)를 채택했다. 당률이 본래 502조에 달한 것에 비해 고려율 69조는 간략하다. 또한 무신 집권과 원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고려 말에는 법적 혼란이 심했다. “고려 말기의 법상황은 효율적이고 권위 있는 사법 기구의 부재에 따른 형벌권의 무력화, 법규범의 흠결, 법적 안정성의 위기, 법적용의 불평등성 등 총체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정긍식, [중국 율령의 수용과 한국 전통사회]) “그 폐단으로 금망(禁網)이 펴지지 않으며, 형을 완화하여 자주 사면을 내려,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가 금망을 새어나가 제멋대로 행동하여 금제(禁制)할 수 없게 되니, 말기에 이르러서는 폐단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고려사] 형법지)

그래서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원나라의 [의형이람(議刑易覽)]과 [대명률]을 섞어 쓸 것을 건의한 자도 있었으며, [지정조격]과 [언행사의(言行事宜)]를 겸용·채용하여 책으로 만들어 왕에게 드린 자도 있었다.” 우왕 7년(1377)에는 원의 마지막 법전인 [지정조격]으로 형사법원을 통일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 뒤 친명파가 집권하자 당률을 토대로 당시 가장 선진적인 [대명률]을 모방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정몽주의 [신정률]은 그런 노력이 종합돼 최종 결실로 나온 것이다.

법 개혁 통해 민심 수습 노렸지만…

새로운 법전이 편찬되는 것은 대체로 새 왕조가 들어섰을 때이다. 그런데 고려는 역성혁명 없이 중흥으로 새로워졌다. 역성혁명 없이도 고려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신정률]은 중흥노선을 주장해 온 정몽주의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였다.

공양왕이 크게 감격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지신사 이첨으로부터 무려 6일간이나 [신정률] 강의를 들었다. 지대한 관심을 몸으로 직접 표현한 것이다. 공양왕은 “여러 번 그것이 잘 지어졌다고 감탄하면서 시신(侍臣)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율은 모름지기 깊이 연구하고 산정한 연후에 세상에 시행할 만하다. 깊이 살피지 않는다면, 전체 판부(判付) 중에 삭제해야 할 조항이 있을까 두렵다. 법률이란 한번 정하면 변경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공양왕은 중흥 군주의 모습을 연출했다.

2월에는 인물추변도감(人物推辨都監)에서 소송을 판결하는 법규(決訟法)를 정했다. 이 기관은 노비를 양민으로 돌리거나(放良) 그와 관련된 소송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기관이다. 공양왕 3년(1391) 10월 14일 설치됐고, 책임자인 제조관은 이성계, 정몽주, 그리고 김사형이었다. 이른바 중흥파의 노선을 실천하기 위한 기관임을 알 수 있다. 인물추변도감의 이름은 원래 회문사(會問司)로서 충렬왕 7년(1281) 인물추고도감으로 개명했다가 공민왕 3년(1364) 다시 인물추변도감으로 바꿨다. 1년 뒤 폐지하고 도관(都官)에 업무를 위임했다.([고려사]) 도관은 본래 노비 문서와 결송을 관장했던 정규 기관이다.

인물추변도감보다 포괄적인 기관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다. 이는 점탈된 토지와 노비 소송 문제를 함께 다룬다. 원 지배기인 원종 10년(1269) 설치됐다. 충렬왕 때 두 번, 공민왕과 우왕대에 각각 설치됐다. 기본적으로 강제로 빼앗긴 토지나 억울하게 천민으로 떨어진 노비 문제를 개혁하려는 기관이다. 신돈이 집권하자 공민왕 15년(1366)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강력한 포고령을 발했다. “명령이 발표되자 권세가와 부호들 가운데 점탈했던 전민을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자가 많았으므로 온 나라가 기뻐했다”고 한다. 또한 “천예(賤隸)로서 양민이라고 호소하는 자는 모두 양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되자 주인을 배반한 노예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성인이 나왔다’고 떠들었다”고 한다.([신돈전]) 집권기 초반 신돈이 불러일으킨 개혁에 대한 기대가 열화 같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돌이키기 어렵게 망가진 국가 행정력


▎이황의 [성학십도] 중 ‘인설도’.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고려 말에는 홍건적의 난 등 대규모 전쟁 중 호구 관련 서류가 없어진 것을 기화로 멀쩡한 양민을 노비로 만드는 일이 빈번했다. 그래서 1391년 7월 이후 정국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몽주가 인물추변도감을 설치한 것이다. 5개월여의 작업을 거쳐 제시된 결송법은 이렇다. “최근 몇 년 이래 호구법(戶口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호구가 있는 자가 호구를 전쟁 통에 잃어버렸는데, 권력이 있고 간사한 무리가 그 사연을 미루어 알아채고는 양민들을 잡아서 점유하며 거짓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노비라고 칭하고 있다. 노비로 잡힌 사람들이 양인이라고 소송(訴良)을 제기해도 근거할 바가 없고, 관사도 또한 판별하지 못하니, 세월만 지체되어 원망함과 억울함이 이에 극심해져 화기(和氣)마저 해치고 있다. 지금부터 양인이라고 소송을 제기하는 자가 비록 양민의 호적(良籍)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노비 호적(賤籍)이 명확하지 않은 자는 양인으로 한다. 본래 주인에게 비록 천적이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 대에 걸쳐 부린 것이 명백한 자는 주인이 이긴 것으로 판결해서 지급한다. 지난해까지 아직 관련 문서(帳籍)를 판별하지 못한 자도 마땅히 양인으로 한다. 무릇 공노비나 사노비에 대해 판결한 문건은 2본으로 나누어 작성하여 1본은 그 주인에게 지급하고 1본은 관청에 보관하여 고험(考險)에 증거자료로 삼게 하는 것을 영구히 항상 지켜야 할 법식(恒式)으로 삼는다.”

기본적으로 노비에게 유리한 규정이었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국역을 지는 양인이 많은 게 좋다. 또한 노비의 소유권을 둘러싼 고려 말의 국가적 혼란을 종식하고자 한 것이다. 고려 말의 토지와 노비 소유권의 혼란은 국가의 행정력과 사법권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증표였다. 혁명파는 물론이고 중흥파도 어떻게든 그 물길을 되돌리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렇게 정몽주는 정력적으로 개혁사업을 추진해나갔으며 구체적인 성과를 착착 거두고 있었다. 공양왕의 지위도 상당한 안정을 찾았다. 중국과의 사대관계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1392년 1월 1일에는 왕이 여러 신하와 함께 수창궁에서 명나라의 신년을 하례했다.

1391년 12월, 명 사신으로 환관 강완자독이 주원장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 그 내용이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삼한의 땅에서 군신이 어그러진 지가 이제 20여 년이나 되었다. 다행히도 성과 들판을 다투는 전쟁이 없어서 백성들이 도시와 시골에서 편안하였다. 작년에 와서 고하기를, ‘왕씨의 후손이 이 백성의 군주가 되었다.’고 하니, 이제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가서 노고를 위로하고 정사를 어떻게 하는지를 살펴보게 한다.”([고려사] 공양왕 3년 12월 12일) 공민왕의 사후 어그러진 대명 관계가 비로소 정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도 공양왕의 업적이라면 업적이었다. 세자 왕석을 중국에 보내면서까지 정성을 다한 것이다. 명나라도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2월 20일, 사은사로 영복군(永福君) 왕격, 찬성사 권중화를 중국에 파견했다. 황제에게 바치는 표문은 이렇다. “천자께서 지극한 관심을 먼 지방의 사람에게도 밝게 보여주시고 번병에 하사해주신 것이 전례를 뛰어넘으니, 진실로 분수에 넘쳐 깊이 황송합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외람되게 아주 부족한 자질을 가지고 임시로 조상이 이루어놓은 것을 계승하여, 외로운 충정이 혁혁하다는 점은 하늘의 태양만이 알고 있습니다. 4년 동안 털끝만큼의 도움도 못 되었으면서, 어찌 간곡히 조유(詔諭)하시고 많이 물건을 하사하실 것이라 기약할 수 있었겠습니까? 특별한 은혜는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갚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는 대개 인(仁)으로 만물을 돈독하게 기르시고 큰 도량으로 먼 지방까지를 포용하시는 것을 만난 덕분입니다. 신이 여러 어려움에서 벗어난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신에게 이미 무너진 왕통을 회복하라고 말씀해주시면서, 노둔한 저로 하여금 저렇듯 큰 은혜를 주셨으니, 신이 삼가 자나 깨나 천자의 큰 은혜에 감격하여, 만세가 되도록 만수무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무너진 왕통을 회복(紹復於已墜之緖)’하라는 주원장의 말은 공양왕에게 특히 의미 깊은 것이었다. 사은사 왕격은 현종의 14대손이다. 1391년 성균사예 유백순과 함께 위화도회군과 창왕 옹립을 비판하다 유배된 왕담(王聃)이 그의 동생이다. 아버지 왕방은 1389년 11월 26일, 공양왕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중국에 파견된 사신이기도 하다.

필사적으로 明과의 관계 개선

공양왕대 외교적 성과의 총결산은 1392년 3월 24일 세자 왕석이 중국에 갔다가 무사히 환국한 것이었다. 재상들은 금교(金郊)에서 맞이하고, 모든 신하가 선의문(宣義門) 밖에 도열해 환영했다. 금교는 개성에서 중국으로 가는 서북로가 시작되는 역이다. 선의문은 개성의 서쪽 성문이다. 세자에 대한 중국 측의 대우도 극진했다. “황제가 특별히 은총이 두꺼운 대우를 하여 세자를 공후(公侯)의 다음에 서열시키고,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이 모두 5번이나 되었다. 또 천관(千官)에게 명하여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게 하고, 황금 2정(錠), 백금 10정, 옷의 겉감과 안감 백 필을 내려 주고, 시종한 관원에게도 은과 비단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고려사절요])

공양왕도 정성을 다했다. 중국은 거듭되는 전란에 전마가 절대 필요했다. 1391년 4월, 명은 말 1만 필과 환관 200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주원장은 12월의 조서에서 환관은 면해주면서도 “약속한 마필이 또한 적다면 반드시 수말일 필요는 없고, 암말이나 거세마라도 그만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라며 말을 독촉했다. 품질이 떨어지는 말도 보내라는 것이다. 고려는 이에 적극적으로 부응해 1391년에만 5000필의 말을 보냈다. 그런데 다시 더 많은 말을 보내라고 재촉한 것이다. 공양왕은 백관이 말을 나눠 내게 했다. 그렇게 2월에 1000필, 5월에 2000필을 중국에 보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대명 관계를 개선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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