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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23)] ‘기업윤리의 아버지’ 이시다 바이간의 신념 

인간은 자연의 일부, 장사도 자연 섭리에 맞아야 

상행위나 거래에서 자신 아닌 상대를 중심에 세워
정직·근면·검약 강조… 책과 독서대만 남기고 떠난 진정한 비즈니스맨


▎정도(正道)의 상술과 처세술로 유명한 오사카 상인의 성실한 삶을 그린 일본의 풍속화(1875년작).
이코노믹 애니멀이라는 말이 일본인을 지칭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상업적 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찬이기도 하고 일과 돈밖에 모른다는 비아냥이기도 했다.

일본인은 금융 감각도 뛰어났다. 세계 최초로 선물거래를 시행했다. 1730년 쌀의 가격 변동성을 회피하기 위해 1년에 세 차례 오사카의 도지마(堂島)에 쌀 시장을 열고 선물거래를 했다.

당시 오사카는 ‘천하의 부엌’으로 전국의 연공미(年貢米)가 모이는 곳으로 도지마고메가이쇼(堂島米会所)에서는 쌀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쌀 수표가 매매됐다. 여기에서는 정미(精米) 거래와 정부미 거래가 이뤄졌다.

전자는 현물거래, 후자는 선물거래다. 보증금이라고 하는 증거금을 쌓는 것만으로 차금(借金) 결제에 의한 선물거래가 가능했다. 현대의 기본적인 선물시장의 구조를 갖춘 세계 최초의 정비된 선물거래 시장이었다. 일본인들은 그만큼 금융과 상업에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었다.

에도시대부터 발전된 시장금융경제의 이론적 뒷받침을 한 사상가가 나타난다. 사농공상의 철저한 신분 고정제 사회에서 상업의 발전을 이끈 사상이었다. 석문심학(石門心学)이라는 학문을 개창한 그는 근면·검약·정직을 기반으로 부를 쌓을 것을 주창했다.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 1685~1744)은 에도시대에 활약했던 상인이다. 이시다 바이간은 ‘도비문답(都鄙問答)’이라는 상담자와의 의견 교환을 통해서 업무 방법을 가르쳤다. 그 가르침을 ‘석문심학’이라고 부른다. 바이간 문하의 제자들에게 전하는 마음의 학문이다.

석문심학에서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본인의 서비스 정신을 알기 쉽게 전한다. 그리고 바이간의 직업관은 100년이 넘는 노포(老鋪) 기업이 많은 일본 상인의 직업관과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

이시다 바이간은 교토 인근 가메오카 시에서 태어났다. 1695년 열한 살에 포목점에 도제 살이 일을 시작한다. 갖은 고생 끝에 4년 후 귀향한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스물세 살에 다시 교토의 구로야나기(黑柳)라는 일류 포목점에 재취업한다. 17년간의 수행 같은 도제식 견습 생활을 하면서도 이시다 바이간은 독학으로 신도·불교·유교 사상을 공부한다. 어려서부터 따지기를 좋아해서 사람들에게 미움을 많이 샀다고 한다.

그는 독학에 한계를 느끼고 스승을 찾아 배움을 청한다. 정식으로 배움의 과정을 밟지 않은 재야 학자로서 문자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시다 바이간은 문자가 없던 시절에도 성인은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배움만 있고 깨달음이 없음을 통탄했으며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을 단지 ‘문자 기술자’라고 불렀다.

독학으로 신도·불교·유교의 도 깨우쳐


▎일본 ‘기업윤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시다 바이간에 관한 서적.
서른다섯 살 때 오구리료운(小栗了雲)이란 스승과 만나 학문을 가다듬는다. 은퇴 후 마흔다섯에 구루마야쵸(車屋町)의 자택에서 무료 강좌를 열고 ‘청강 자유, 수업료 무료’라는 간판을 걸고 심학을 강의했다.

그의 사상은 상인과 노동자들에게 퍼져나갔다. 교토 유수의 상가 주인과 점장(반토, 番頭)들이 그의 제자가 됐다. 이시다 바이간은 세미나식 상호 문답을 통해 상인의 사회적 역할과 상업의 의의를 논했다.

당시 세상은 상업의 발전과 함께 급속한 화폐경제로 진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부유한 상인인 쵸닌(町人)들이 등장한다. 거품 경기가 꺼진 겐로쿠(元禄, 1688~1704) 연간 이래사농공상의 봉건체제에도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농민은 물론 무사 계층의 생활 궁핍도 진행돼 도시에 무직의 무사와 농촌으로부터 농민의 유입으로 이어진다. 그런 한편 부유함을 자랑하는 상인들의 행동이나 그 ‘상인 도덕’에 대한 엄격한 비판이 분출되던 시대였다.

석문심학이 탄생한 배경은 무엇일까. 에도시대 중기인 제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1684~1751)의 시대는 겐로쿠의 경제 발달에 따라 농촌에도 화폐경제가 침투했다. 그 때문에 농상공의 분업이 진행돼 쵸닌이 생겨난다.

이렇게 농업과 상공업이 분리돼 도시가 형성됐다. 쵸닌은 높은 기술력과 풍부한 자금력으로 독특한 쵸닌문화를 만들게 된다. 무사를 능가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쵸닌도 등장한다. 이렇게 형성된 부를 자랑하는 쵸닌 계층에게 상인으로서 도덕을 몸에 익히는 일이 시급했다.

이시다 바이간은 당시 포목점에서 일하면서 졸부들의 사치를 목도한다. 재화가 과도한 소비로 이어지면서 거품이 꺼지는 상황도 본다. 1707년에는 후지산의 분화까지 겹치면서 경제는 극도로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시다 바이간은 독학을 통해 신도·불교·유교의 도를 깨닫는다. 그는 상업적 체험으로부터 얻은 신념을 사회에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우주의 근원이 되는 도(道)는 만인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천부적인 것을 성(性)이라고 칭하고, 순수한 마음 즉 본심을 따르는 것이 ‘상인의 도’, ‘인간의 도’라고 역설했다.

이시다 바이간은 대중에게 일상생활 속의 친근한 예를 들어가며 성을 알아가는 방법을 설파했다. 그 주요 내용이 정직·검약·근면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었다. 한편 사회에 대해서는 “상인의 이익은 무사의 봉록과 같다.” “도에 따라 장사해 부가 산처럼 이르러도 그것을 욕심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

이시다 바이간의 사후에는 그의 제자들이 활동을 펼쳤다. 오미야겐 우에몬(近江屋源右衛門), 데지마 도안(手島堵庵), 나카자와 도니(中澤道二)가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을 전파하는 문인(門人)들도 속속 등장한다. 그들은 교육방법으로 강의, 문답 모임, 좌선 등 세 가지를 병행했다. 심학강사(心學講舍)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전성기에는 전국에 34개 번(藩) 180곳에 이르렀다. 사립학교로서 일본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다. 무사계층에서도 간세이 개혁(寬政改革)을 주도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등이 심학의 추종자가 된다.

이시다 바이간의 장사 철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업의 역할, 상인의 사회적 역할, 장사에 필요한 윤리관, 장사에서 마음가짐이나 지혜 등 모두 현재의 비즈니스에도 충분히 통용되는 것이다.

이시다 바이간 사상의 근간에 있는 것은 장사와 도덕의 융합이다. 이시다 바이간은 도덕이 없는 비즈니스는 탐욕주의에 빠져 버리고 만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도 필요하지만, 그 근저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게 자리했다.

돈 버는 게 목적되는 순간 욕망의 노예로 전락


▎일본 하네다 공항에는 에도시대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전통 상점가가 조성돼 있다.
에도시대에 돈을 버는 상인은 천한 존재라고 불리던 가운데, 이시다 바이간은 장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돈은 제대로 벌면 돼. 다만, 장사는 정직과 검약의 마음을 가지고 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얻은 이익은 결국 세상을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시다 바이간은 당시 무사 중심의 세상에서 상인의 지위나 돈을 버는 것에 관한 잘못된 인식을 고쳐 일하는 방법이나 삶의 방법을 전했다. 이시다 바이간의 설법은 대화를 통해 전해 주는 문답 형식으로 도비문답이라 불렸다.

이시다 바이간은 ‘사람의 사람다운 길’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도비문답]이란 ‘교토(都)에 있는 바이간과 시골 사람(鄙)’의 질문에 대답하는 내용으로 석문심학을 전하는 책을 말한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참가자로 토의하고 결론을 이끈다고 하는 세미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도비문답]의 첫 머리에서 이시다 바이간은 “학문은 마음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인생관과 직업의 가치관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다.

마음에 대해 아는 것만이 아니고, 알았다면 실행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바이간이 말하는 실행이란 눈앞의 일에 성의를 가지고 진력하는 것이다. 농부라면 아침에는 어둠 속에서 밭에 나가 열심히 일하며 논밭에서 비록 한 톨이라도 더 수확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다. 소작료를 착실히 내고 남은 돈으로 아름답고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이다.

매사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성실히 노력한다면 물론 고생은 많겠지만, 마음은 안정되고 깨끗할 수 있다. 자연히 예의 바르게 돼 불안이나 걱정이 생기는 일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도비문답]은 단순한 장사나 인생을 위한 실용적인 책이 아니다. 이시다 바이간은 장사하면서 자연의 법칙이나 우주론 등의 사물의 원리원칙을 추구했다. 그리고 자연의 섭리에 맞는 장사 원칙을 전하고 있다. 돈을 버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목적이 돼버리면 끝없는 욕망을 추구하게 된다.

이시다 바이간은 장사 대신 우주론·존재론·생명론에 이르기까지 심원한 진리를 추구해 갔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나 이나모리 가즈오 등 현대의 경영자는 모두 우주관이나 자연관에 근거한 경영이념이나 경영기법을 만들고 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인 이상 장사도 자연의 일부다. 자연의 섭리에 맞는 장사 형태로 하는 것으로 사업은 발전·번영해 간다. 고객에게 좋은 상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대신에 기분 좋게 돈을 받는다. 이 돈을 써서 더욱 세상에 필요한 상품을 전달해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안심을 가져다 주도록 한다. 이처럼 모든 장면에서 “그 방법은, 천지자연의 원리에 따르는 것인가?”를 계속 추구함으로써 사업이나 일이 번영·발전해 나간다.

당신이 있음으로써 내가 존재한다. 인과론적인 불교식 이야기다. 바이간은 ‘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수행을 통해 경지에 이르렀을 때 천하의 존재나 일들이 하나로 어우러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인은 천하의 모든 존재를 위해 노력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얻는데 그것이 바로 이익이다. 모든 존재가 그물처럼 얽혀 같은 시공간 속에 상호 평등하게 서로의 존립을 보장한다.

따라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위는 바이간식으로 보면 반칙이다. 내가 존재하는 조건은 당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상인의 도를 고객에 대한 충분한 배려와 서비스를 강조한다. 인간의 길을 가는 사람이 똑바로 서야 하듯 상인도 바로 서서 정직하게 상업을 영위해 함을 강조했다.

“진정한 상인은 상대를 세우고 우리도 서는 것을 생각한다.”

장사나 거래에 있어서 중점을 자신이 아닌, 우선 상대를 앞세운다. 고객 우선의 자세야말로 장사 번창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다. 화장품의 무료 시험 캠페인이나 스마트폰의 무료 앱 등에도 있듯이 고객으로부터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우선은 고객에게 가치를 계속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객의 신뢰를 받고 나서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도록 한다.

상인의 도는 고객에 대한 배려와 서비스


▎에도시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거리 히가시차야가이.
“병풍과 상인은 곧다면 꼭 선다.”

에도시대에 세상에서는 병풍과 상인은 똑바로 서지 않는다고 했다. 마음이 곧지 않다는 뜻이다. 그때 이시다 바이간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병풍은 조금이라도 뒤틀린 것이 있으면 접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마루가 평평하지 않으면 세우기 어려워진다. 상인도 마찬가지로 항상 본심부터 정직하기 때문에 신용을 얻고, 함께 일을 해나갈 수 있다.

이시다 바이간의 사후 주목받는 제자로 데지마 도안이 있다. 데지마 도안은 석문심학을 설파하기 위한 장소로 심학강사를 교토에 열어 석문심학의 보급에 힘썼다. 석문심학은 제자 도암에 의해 최전성기를 연다. 일반 민중을 향해서 친숙하고 쉬운 예를 들어 수신 도덕을 설명하는 말을 도화(道話)라고 불렸다. 나중에는 강의에서 행해진 내용이 출판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심학도화’라는 말이 정착된다.

데지마 도안은 이시다 바이간의 심(心)을 본심(本心)이라는 말로 구체화한다. 우주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섭리에 따라 움직인다. 인간은 ‘하늘의 자식’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 또는 천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명에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하늘에 합치시켜야 한다. 거울처럼 한 점 티끌도 없이 정직하고 공평무사한 맑은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본심이다.

시바타규오(柴田鳩翁, 1783~1839)는 도안의 제자다. 에도시대 쵸닌이자 심학자다. 마흔셋에 양명학의 강사가 됐고 능란한 화술로 재미있는 도화(圖畵)를 들려줘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마흔다섯에 실명했지만, 도화 강연을 하며 전국을 유세한다. 그가 펴낸 [구옹도화(鳩翁道話)]는 메이지시대 베스트셀러가 됐고 오사카에서는 상점의 견습생의 필독서였다. 바쁜 상인들에게 평이한 화법과 친근한 이야기로 유머와 독설을 섞어서 심학을 설파함으로써 인기를 얻었다.

심학강사의 흐름을 이어받은 메이세이사(明誠舎)가 메이지시대 이후로도 오사카 시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교토에서는 슈세이사(修正舎)라고 하는 이름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에도 심학을 배우려는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심학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하는 도덕적 가르침이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일본 ‘경영의 신’으로 추앙 받고 있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나 불교의 수행자 같은 경영으로 유명한 이나모리 가즈오 같은 경영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시다 바이간은 “진짜 상인은 상대를 먼저 세우고 자신을 세울 방도를 세운다”는 말을 남겼다. 우선은 상대의 이익을 생각하고,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생각한다고 하는, 상인과 기업의 바람직한 모습을 가르쳤다. ‘검약’의 가르침은 현대의 에너지 절약이나 자원 절약 등 환경 문제와 연결된다.

자본의 윤리와 대척점에 있는 금욕의 윤리가 자본주의 형성의 에너지였다고 주장한 막스 베버(1864~1920)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시다 바이간의 ‘석문심학’의 독일판은 아닐까.

가격보다 가치에 무게를 뒀던 에도시대 사람들


▎일본의 한 관청 내부 모습.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실내에서도 두꺼운 옷차림을 하고 있다.
현대 일본의 성공을 다른 국가에 앞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의 체질을 개선한 결과물로 보는 시각은 단견이다. 그동안 켜켜이 쌓아 올린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의 토대 위에 새로운 것을 수용·확대 발전시킨 일본 사회의 저력으로 보는 편이 좋을 듯싶다.

에도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에 걸쳐 수많은 외국인이 일본을 방문했다. ‘쇄국 하의 일본 서민들은 압정에 시달리고 있을까’ 하고 외국인의 대부분은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을 본 뒤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말하고 웃으면서 그들은 간다. 콧노래를 부르며 일하고 있다.” “일본인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마음은 풍부하고 가득하다.” “더 이상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은 어디를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일하는 것의 의미는 주변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위를 편안하게 하는 행동이 작용한다는 뜻이지 반드시 돈을 얻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가격보다 가치에 무게를 두는 정신은 에도시대부터 일본 특유의 문화가 됐다.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은 에도시대에 규범으로 여겨진 상인도이며 일본인이 본래 가지고 있던 업무관이다. 이 사상을 떠올리면 자신의 회사를 번영, 발전하는 회사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1970년대쯤부터 환경 문제에 대한 의식 고조 및 기업의 비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구미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대두된다. 일본에서는 오미상인(近江商人)의 산포요시(三方よし, 판매자·구매자·사회에 모두 좋은 것) 사상과 함께 바이간의 심학사상이 일본 CSR의 원점으로 여겨진다. CSR이란 ‘성실한 기업’을 만들고자 하는 이념이다.

일본인은 종교적이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인을 알아가면 알수록 그들은 다분히 종교적이란 생각이 든다. 서구처럼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은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 존재하는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찾아내어 예술을 하듯이 아니면 종교 활동을 하듯 받들어 모신다. 종교적이며 예술적이다.

일본인은 신을 무서워하기보다도 사람들의 시선을 더 무서워한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란 지정학적인 특징으로 인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일을 두려워했다. 남을 배려하는 일은 자신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시다 바이간이 말한 ‘마음’을 수양하는 일을 중요시했는지 모른다.

야마모토 시치헤이(山本七平)는 [일본 자본주의 정신(日本資本主義情神)]에서 바이간의 성, 본심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을 전제로 한 사회에 신학이 있듯 본심을 전제로 한 사회에 본심의 학, 즉 심학이 있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면 심학이란 무엇을 배우는 학문일까? 간단히 말하면 본심 그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일본인이지만 이렇게 나름의 신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

이시다 바이간이 설파한 사상은 다른 종교나 철학적 가르침보다 보통 사람이 도달하기 어려운 수준이 아니었다. 자신의 철저한 희생과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도저히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을 설정하고 위선을 강요하거나 보이지도 않는 세계를 그리고 현실의 행복을 희생하면서 내세의 천국을 갈구하지도 않았다.

부의 주인은 천하의 사람들이다


▎일본 도쿄 메이지 신사에서 신관(神官)들이 신년 행사 준비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신도(神道)는 일본의 토착 종교다.
그는 산문(山門)에 들어가 현세의 모든 욕망을 억누르며 깨달음을 얻고자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만의 ‘마음’을 얻어서 그 얻은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라고 했다. ‘자신만의 꽃을’이라는 심정으로 마음속에 꽃씨를 뿌리고 그 씨가 자라 개화하도록 열심히 물을 뿌리고 자양분을 공급하라고 했다. 그가 말한 것은 정직·근면·검약이 전부였다. 그가 열심히 마음공부를 하고 평생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얻은 결론이었다.

“세상을 떠난 후 저택에 남은 물건이라고는 책 세 상자, 그리고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평생 작성한 원고·독서대·책상·벼루·옷·일용잡화뿐이었다.” _[이시다선생사적]

사람이 아름다울 때는 아무리 허튼짓이라 할지라도 정열을 다 바칠 때다. 몸을 돌보지 않을 만큼 열중할 수 있는 일이 그가 말하는 근면이었다. 자신의 가슴속에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모습이야말로 아름답지 않은가?

제자들에게 마음의 공부를 숙제로 남기고 간 스승의 면모를 보자. 평생 독신으로 산 이시다 바이간이 죽어 남긴 것들을 보라. 그가 평생 주장하고 가르친 내용을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는가? 진정한 깨달음도 없이 남이 주장하는 판타지에 묻혀 ‘문자 기술자’로 사는 이 시대의 사업가나 지식인들이 진정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에 관한 책 [누구를 위한 부의 축적인가]을 쓴 히라다 마시히코 작가는 일본에서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 845~903)의 시를 소개한다.

“진실로 그 마음이 우주의 길에 닿으면 기도를 하지 않아도 신은 깃드나니.”

그의 시에서는 일본인의 종교와 도덕·인간관·우주관이 드러나 있다고 말하면서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을 설명한다. 진실한 마음(眞心, 赤心)이 일본인의 종교이고 도덕이라는 것이다.

이시다 바이간이 주장하는 심학은 ‘마음’ 공부와 깨달음 그리고 자신만의 꽃을 피우기 위한 철저한 실천이다. 300여 년 전에 시골에서 상경한 장사치가 사회적 배경도 없이 독학으로 배우고 깨달아 실천한 생각을 우리가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논리나 이성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감성이다.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그가 말한 대로 살아 낸 실천의 삶이다. 탈현대를 사는 우리 시대 사람들은 쉴 틈 없이 바뀌는 환경에 노출돼 있다.

우리는 미국과 중국의 양대 수퍼파워의 펀드 캐피털리즘과 천민자본주의이라는 괴물이 다투는 전 지구적 대결 구도를 목도하고 있다. ‘부의 주인은 천하의 사람들이다’는 바이간의 생각을 다시 음미해 본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11호 (201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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