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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3)] 신하들의 경멸에 내몰린 공양왕의 레임덕 

왕이 내린 관모(官帽) 부수고도 무사한 신하 

당 태종 꿈꿨으나 현실은 권위 없는 울보 왕, 믿었던 측근의 술주정도 단죄 못 해
이성계가 난동 사태에 개입해 왕의 분노마저 눌러버려… 칼이 붓을 누른 상징적 단면


▎불교문화엑스포 팔관회가 2009년 부산 벡스코에서 열렸다. 1391년 공양왕은 팔관회 행사에서 신하에게 봉변을 당했다.
운(fortuna)이 좋아서 왕이 된 사람은 어떻게 왕위를 보전해야 하는가? 날아오른 것처럼 군주의 지위에 올라갔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모든 시련은 그가 군주가 된 이후에 닥쳐온다. 이런 군주의 지위는 그를 군주로 만든 자들의 의지와 호의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 두 요소야말로 지극히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그렇게 왕이 된 인물은 명령하고 통치하는 법을 모르며, 권력을 유지하는 법도 모르고 유지할 능력도 없다. 마키아벨리의 지적이다. 안타깝게도 공양왕도 비슷한 사례다.

공양왕도 알고 있었다. 1391년 6월, 이색과 우현보의 처벌을 둘러싸고 공양왕과 이성계가 대립했을 때, 이성계가 강하게 반발하자 겁에 질린 공양왕은 울면서 호소했다. “내가 능력도 없이 왕위에 있는 것은 시중이 추대한 힘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중을 아버지처럼 우러러보고 있는데 시중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는가? 만약 시중이 사직한다면, 나도 어찌 감히 이 왕위에 있겠는가?”

1389년 11월 15일,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밤이 되면 잠을 자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좌우 신하들에게 “내가 평생에 입을 것, 먹을 것, 일할 사람들이 모두 풍족한데, 이제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운이 나빠서 왕이 된 것이다. 11월 20일 태묘에 제사를 지내고 즉위를 고한 뒤 궁궐에 돌아왔지만, 공양왕은 옥좌에 앉지 않았다. 이색이 강권하자 옥좌에 앉은 뒤, 이성계와 심덕부에게 “내가 원래 덕이 없어 여러 번 사양했는데도 허락을 얻지 못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니, 경들이 잘 도모해주시오”라고 말하고, 줄줄 눈물을 흘렸다.([고려사])

이첨에 따르면, 공양왕은 “말할 때마다 반드시 먼저 ‘내가 불민하며 더구나 글을 읽지 않고 일을 겪지 않았으니 어찌 이를 알겠는가’라고 한 뒤에야 다른 말을 언급하였다”고 한다. 국가를 통치할 능력이 부족하고, 그런 상황을 타개할 과단성도 없다는 점을 자인한 것이다. 그런데도 집무실에 사시(巳時: 오전 9~11시)나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가 되어서야 나오고, 어떤 때는 밤중까지 연회를 했다. ([고려사] 공양왕 2년 6월 21일) 불공을 올리는 데 몰두하고, 연복사 중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연복사 탑전(塔殿)을 짓기 위해 경기도, 양광도 백성을 시켜 나무 5000그루를 실어오게 하니, 소가 모두 죽어 백성이 원망하였다.([정도전전])

공양왕이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뜻밖에도 좋은 왕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이성계에게도 집요하게 저항했다. 이첨에 따르면, 공양왕은 “정관(貞觀)의 정치에 뜻이 있어 [정관정요]를 읽은 지도 2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당 태종 같은 영걸이 되는 것이 공양왕의 꿈이었다. 또한 즉위 초 스스로 안일에 빠지지 않겠다고 기약하며, 성석용에게 명해 [서경] 무일(無逸) 편(篇)을 써서 바치게 했다. 공양왕의 국정철학이자 주공이 그린 성군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륜도 기대를 걸고 무일 편을 족자로, 주희의 인설을 병풍으로 만들어 보냈다. 정치적으로도 1391년 5월 이후 정몽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치적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다.

“욕심 많고 인의 없는 왕”이라고 직격


▎공양왕이 닮고자 했던 [정관정요]의 주인공인 당 태종. / 사진 : 중국 바이두
그러나 공양왕은 신하들의 경멸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도전은 공양왕에게 올린 상소에서, 지식과 경험 부족으로 국정을 운영할 경륜이 없다는 점을 공개적이고 직접 지적했다. “전하께서 평소에 일찍이 글을 읽어서 성현이 이룩한 법을 상고한 적이 없으며, 일을 처리하여 당세의 통무(通務)를 안 적이 없으니, 어찌 감히 덕이 반드시 닦아지고 정사가 잘못된 것이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남은은 공양왕이 위선적이라고 통박했다. “신은 아마 주상께서 마음속으로 욕심이 많으면서도 밖으로는 인의를 베풀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우왕조차도 공개적으로 이런 모멸을 당하지는 않았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행동으로 목격된 일도 있었다. 1391년 정월 초하루, 공양왕은 군신과 함께 신년을 하례하고, 명나라 사신을 위해 수창궁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1974년 이후 20여 년 만에 고려와 명이 화합을 나누는 자리였다. 또한 명이 공양왕의 정통성을 공식 승인한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내외 신료들에게 과시하는 자리였다. 1391년 후반기 정몽주의 조력을 받아 정도전 등 혁명파를 대거 축출하고 고려수호파를 복권함으로써, 공양왕의 집권 2기를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도 있었다. 국가적으로나 공양왕 개인으로서나 극히 중요한 의미가 담긴 행사였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밀직사 이염이 왕의 권위를 뿌리째 흔드는 난동을 부렸다.

사건의 발단은 1391년 말 팔관회 때 시작됐다. 개경의 팔관회는 중동(仲冬)인 11월 15일 개최된다. 이때 중방(重房)에서 밀직사에 예를 취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밀직사는 왕의 비서실로서 종2품 관청이다. 중방은 중앙군 2군 6위의 최고 지휘관들인 상장군(정3품)과 대장군(종3품) 16명의 합좌 기구이다. 기관의 격으로 보면, 밀직사가 한 품계 높다. 더구나 밀직사는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 군기 등을 관장하는 왕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기관이다. 그러나 문신 합좌 기구가 도당이라면, 무신은 중방이다. 무신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인 셈이다. 고려왕조가 문신 체제이긴 하나 밀직사와 중방의 우열을 가리긴 쉽지 않다.

중방은 목종 대(997~1009년)에 시작됐다. 1170년 무신난이 일어나 무신들이 집권하자 중방은 국정 최고의결기관이 됐다. 충선왕 대에 잠깐 폐지됐다가 부활했다. 조선건국 뒤 이성계가 중방을 폐지하고 의흥삼군부를 뒀다.

몽골 지배기에 무신이 권력을 잃은 뒤 중방의 지위도 하락했다. 그런 사례가 있다. 1342년(충혜왕 복위3), 반주(班主) 인안(印安)이 마침 교외에 나갔다가 종들이 법으로 금지된 소나무를 베는 것을 보고 저지했다. 그러자 종들이 떼 지어 그의 다리를 가격해 상처를 입혔다. 반주는 무관 최고위직인 응양군 상호군이자 병부상서를 겸한 무관 전체의 대표자였다. 종들은 감시(監試)의 주사(主司)인 민사평(閔思平)의 사노들이었다. 민사평은 찬성사 민적의 아들로서 명문가 출신이었다. 당시 민사평은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본 시험에 앞선 1차 시험인 국자감시를 주관하고 있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문명을 떨치던 최해, 이제현의 절친한 벗이었다. 이제현에 따르면, “(민사평은) 성품이 솔직하고 겉치레를 하지 않았으며, 매번 술이 얼큰해질 때면 시를 지었는데 속세의 말이 없었다”고 한다. 탈속의 청아한 기품을 지닌 신선풍의 인물이었다. 민사평은 1359년(공민왕 8) 세상을 떴다. 민사평의 유고집 [급암시집]을 발간할 때 이제현은 서문을 썼다. 그는 서문을 쓰기 위해 민사평의 시를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아아,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누가 이상하게 여기겠는가.” 그만큼 절친한 벗이었다.

이런 민사평이 안하무인으로 무신을 업신여겼을 리 없다. 그 종들도 인안이 반주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충혜왕은 대로하여, 중방에게 민사평의 집을 부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친어군호군(親禦軍護軍)이자 문신인 윤해(尹侅)가 반대했다. “종들은 참으로 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마는, 주인이야 그 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많은 선비가 눈을 비비고서 방방(放榜: 합격자 발표)을 기다리고 있는데, 만약 주사의 집을 부순다면 주사가 무슨 마음으로 답안지를 채점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얼마 뒤 충혜왕의 노여움이 풀려 일은 잠잠해졌다.([목은집]) 무관의 우두머리이자 주무 장관이 봉변을 당했다. 그런데 아무리 실수라지만, 가벼운 문책도 없이 어물쩍 넘어갔다. 무관의 당시 정치 사회적 지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문신의 시대에서 무신의 시대로


▎고려의 문신 민사평의 유고집인 [급암시집].
인안의 사례는 무지의 탓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공공연히 무시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공민왕 13년(1364) 11월 규정(糾正) 송강(宋綱)과 대호군 한중보(韓仲寶)가 길을 다툰 연유로 중방과 감찰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규정은 감찰사의 일원으로서 백관의 규찰과 제사·조회 및 전곡의 출납 등을 감찰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그러나 규정은 문관 종6품관이고, 대호군은 무관 중 최고위직인 종3품관이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는 도중 부딪혔다. 품계로 보면 당연히 송강이 길을 비켜 예를 표해야 했다. 더욱이 한중보는 제2차 홍건적의 난 때 세운 전공으로 공민왕 12년(1363) 11월에 책봉된 공신이었다. 그런데 송강은 길을 비키지 않았다. 그래서 다툼이 일었고, 기관 간 분쟁으로까지 번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도 유야무야되었다. 중방으로서는 거듭 분노가 쌓였을 것이다.

1365년(공민왕 14) 무렵 환관 윤상(尹祥)이 상호군이 되었다. 윤상은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한 1등 공신이었고 환관 윤충좌, 김사행과 함께 공민왕이 가장 신임하는 환관이었다. 중방은 송강에게 받은 모욕을 잊지 않고, 윤상을 부추겨 왕에게 참소하게 했다. 공민왕은 대로해 감찰대부 전녹생을 하옥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시중 경천흥이 반대해 중지시켰다. 중방이 또다시 패배한 것이다. 종6품의 문신조차 최고위 무신과 중방을 무시할 수 있었다.

중방은 무신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고관을 예우해 주는 기관의 기능을 했다. 고려 말에는 최고 군사 지휘관에 무신이 아닌 문신들이 명예직으로 임명됐던 것이다. 위화도회군 뒤 1389년 조준이 올린 제2차 시무상소를 보면 진짜 무장들은 중방에 참여하지도 못했다. “근세에 간신이 정사를 어지럽혀서, 장수의 재목이 못 되는 자가 중방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수많은 싸움을 치르며 수고한 자는 겨우 첨설 직에 제수됩니다.”([송당집]) 이래저래 중방은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어, 무신들의 이익과 명예를 지킬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성계의 집권은 제2의 무신 난이다. 무신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1170년 제1차 무신난 때처럼 중방을 권력기관화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문신시대의 정치체제를 유지했다.

때는 무신의 시대였다.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이색은 그런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우왕 9년(1383) 5월, 중방은 청사를 짓는 공사를 시작해 9월 그믐에 완성했다. 대청 3칸, 서편 마루 3칸, 다락의 곳간 3칸, 남쪽 행랑 9칸, 문이 1칸이고, 단청으로 채색하고 밖에는 담을 둘러쌓는 큰 공사였다. 도통사 최영도 지원했다. 공사가 끝나자 10월 1일, 공사를 줄곧 감독한 응양군 호군 배구가 이색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부탁했다.

팔관회에서 터진 하극상


▎권근의 [목은집] 서문. / 사진 : 한국고전종합DB
이색은 공사의 내력과 경과를 적고, 문무의 관계 및 당시의 시대상을 이렇게 적었다. “내가 생각건대, 문과 무는 국가의 쓰임이 됨에 있어서 인체의 두 팔과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니,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무시해서는 물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치란에 따라 쓰이는 면에서도 경중이 있는 법이니, 지금 이처럼 어려운 일이 많은 때를 당해서는 나와 같은 문관들은 높은 다락 위에다 묶어 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무관들이 간성(干城)이 되고 조아(爪牙, 손톱과 어금니)가 되어 나라의 운명을 제대로 떠맡게 되리라는 것을 또한 알 수가 있다.”([목은집]) 역사의 무대는 문신이 아니라 무신의 것이었다. 그 무대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대표적 인물이 최영과 이성계였다. 그리고 이성계가 최후의 승자가 됐다.

무신의 시대에 중방이 위신을 회복한 것은 당연하다. 팔관회라면 왕도 참여하는 행사였고, 만조백관과 수많은 백성이 보고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중방은 심지어 밀직사에게도 예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밀직사의 우두머리는 이염이었다. 두 기관은 서로 왕에게 글을 올려 다퉜다. 공양왕은 “그 글을 모두 궁중에 두고 내려보내지 않으니, 이염이 깊이 원한(心嗛)을 품었다”고 했다. 공양왕으로서는 요령부득의 사태였을 것이다. 당연히 왕의 분신인 밀직사를 옹호해야 했고, 그게 전통적인 관습에도 적합했다. 그러나 이성계가 배후에 버티고 있는 중방을 감히 어떻게 처벌할 수 있겠는가? 그로서는 양측의 탄원문을 깔고 앉아 모른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염은 위신을 잃었다. 기관이 모욕을 당했는데도 그 우두머리가 명예를 회복할 수 없다면, 직을 내려놓고 집에 가야 한다.

밀직사 이염은 분개했다. 1392년 1월 1일, 그는 수창궁에서 열린 신년 하례식과 명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에 참석했다. 그날의 술자리는 다소 질펀했던 듯하다. 점잖은 이색조차 취해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가까이서 왕을 모시고 있던 대호군 김정경(金鼎卿)이 제지하자 이색은 머쓱해져서 재빨리 나가버렸다. 당시의 정국상황을 고려할 때, 이색의 처신은 다소 경솔한 것이었다. 이색은 긴 유배 생활에서 막 풀려난 직후였다. 1389년 11월 15일 공양왕 즉위 이후 이색의 삶은 그야말로 신산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은 물론이고 세 아들의 목숨조차 위태로웠다. 1391년 5월 이후 정몽주의 반격 덕분에 가까스로 호랑이 굴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경외에 편리한 대로 거주하라는 조처가 내려지자 이색은 공양왕에게 감사하는 글을 올렸다. 11월 17일, 이색의 글을 읽은 공양왕은 즉시 역마에 명하여 이색과 이숭인, 이종학을 불렀다. 둘째 아들과 사랑하는 제자 이숭인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엄중했다. 이를 생각하면 이색의 취중 너털웃음은 너무 빨랐다. 아직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방을 경계해도 부족한 살얼음판이었다.

만취한 신하에게 모욕당한 공양왕


▎조선 개국 1등 공신 명단. 배극렴의 이름이 가장 앞에 있다. / 사진 : 증평문화원
1392년 정월 초하루의 연회는 밤이 이슥해져 끝났다. 왕은 내전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술에 잔뜩 취한 이염은 왕 앞에 꿇어앉아 옷자락을 끌어당기며 항의했다. “전하께서는 정창군(定昌君)으로 있을 때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랏일이 장차 날로 그릇되어 가는데, 어찌하여 아이들의 말만 믿고 대신의 글을 경시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언제부터 왕이었느냐,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하느냐, 나랏일은 엉망이 돼가고 있는데도 왕이란 작자가 무신 같은 아이들 말이나 듣고 자기 말은 무시하느냐는 비난이었다. 아이들(竪兒)이란 중방의 무신을 업신여기는 말이다. 왕을 왕으로 보지 않는 불충하고 무례 막심한 언행이었다.

정창군 시절 공양왕은 이염과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이염은 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교유하여 주운(朱雲)과 자릉(子陵)에 스스로 견준다”고 말했다. 주운은 후한 성제 때의 직신(直臣)으로 권세가를 거침없이 탄핵했다. 엄자릉은 후한 광무제 유수(劉秀)의 소시 때 친구다. 광무제가 황제가 된 후 그를 불러 관직을 하사했으나, 사양하고 전원으로 돌아갔다. 예전엔 공양왕과 이염의 사이도 주운과 자릉처럼 고결한 관계였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이염은 이제 신하였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신하로서 용인될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그런데 이염은 한술 더 떴다. 갑자기 관모를 벗어 땅에 던지면서, “왕에게 이 모자를 돌려 드립니다”라고 소리쳤다. 그리곤 손으로 모자를 움켜쥐고 부쉈다. 분신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당신 같은 왕 밑에서는 더는 못해 먹겠다는 항의였다. 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왕 옆에는 왕을 지키고 보호하는 대호군 홍서(洪恕)와 홍원성(洪原誠)이 있었지만, 미처 이염을 제지하지 못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공양왕도 관모를 발로 차서 부수었다. 두 사람의 화풀이 대상이 된 관모만 애꿎게 두 차례나 수난을 겪었다. 공양왕은 노기에 찬 목소리로 “이염이 주정을 부리기를 이럴 수 있느냐”고 고함 지르고, 이염을 순군옥에 가두게 했다. 신하와 왕이 번갈아가며 관모를 손으로 부수고 발로 차며 고함을 치는 한바탕 희극이었다. 이로써 장중하고 화려하게 연출된 연회는 엉망이 됐다. 가까스로 세운 왕권의 위엄도 관모처럼 부서지고 땅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왕이 보다 단호하고 위엄 있게 처신했다면 상황은 반전됐을 것이다. 그러나 화를 못 이긴 공양왕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순군만호 유만수가 이염을 심문했다. 그러자 이염은 “네가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으면서 효도하지 않고, 우애하지 않았다는 평판을 받았으므로 대성에서 두 번이나 너를 논핵하였는데, 어찌 나를 죄줄 수 있겠느냐”고 비난했다. 유만수는 무장으로서 대왜구전에서 활약했고, 위화도회군 때 이성계를 좇아 회군 공신에 봉해졌으며 이성계의 휘하로 활동했다. 그러나 어머니께 불효가 심했으며, 동생들과도 토지문제로 다투었다. 이 때문에 간관의 탄핵을 두 차례나 받았다. 이염이 그 점을 지적한 것이다. 순군부에 갇혀서도 이염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했다. 유만수가 오히려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염은 자신의 행동을 간언으로 정당화하기까지 했다. “내가 거리낌 없이 간한 것은 죄가 아니며, 또한 주정을 부린 것도 아니다” 자신이 진정한 충신이라는 것이다.

순군만호 배극렴 등이 다시 심문했다. 배극렴은 뒤에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한 인물이다. 이염은 그에게 “유만수가 거의 나를 죽일 뻔하였는데, 지금 공들을 보니 내가 살게 되었다”라고 했다. 유만수도 이성계파였지만, 그를 전적으로 믿지 못했다. 이염은 다시 “왕에게 간하는 예는 마땅히 이처럼 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배극렴 등은 공양왕에게 “이염이 실상 주정을 부렸던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염을 옹호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한 실수로써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난 공양왕은 순군천호 김귀련과 순군제강 정지탁을 구속했다. 또한 유만수와 배극렴의 만호 직을 파면했다. 그러나 상급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하급자에게만 분을 푼 것이다.

이성계의 이염 구하기


▎조선 개국 공신 배극렴의 묘소. / 사진 : 증평문화원
공양왕은 다시 찬성사 조준, 판개성부사 안익, 예문관대제학 유구, 지문하 김사형을 심문관에 임명하고, 사헌부가 함께 국문하도록 명했다. 유구는 조선의 개국 원종공신이다. 안익 또한 조선건국 과정에서 이성계를 도운 공로로 포상의 은전을 받았다. 조준을 비롯한 심문관 전원이 이성계파였던 셈이다.

산기상시 김진양과 집의 정희 등 간관만이 공양왕 편에 서서 이염의 불경한 죄를 논핵하고, 극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양인은 대표적인 정몽주 사람들이었다. 그러자 이성계가 즉각 개입했다. “이염이 실상 죄가 있지마는 그러나 그 말이 광망하고 곧은 데서 나왔으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계의 변호는 배극렴보다 더 나갔다. 단순한 술주정도 아니고, 아예 이염이야말로 과격하지만 곧은 말을 하는 충신으로 옹호한 것이다. 공양왕이 전혀 원하는 바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이성계가 왜 이염의 난동 사태에 끼어든 것일까? 이성계의 위치로 볼 때, 몸소 개입할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충직한 간언이라고 해도, 왕 앞에서 무례 막심한 난동을 부린 게 사실이었다. 사실 이성계의 변호는 억지에 가까웠다. 이염과 이성계는 절친한 사이였다. 아버지 이수산과도 각별했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는 이염을 원종공신에 추록하면서, 그와의 오랜 인연을 회고했다. “정당문학 이염은 정밀하고 상세하고 면밀하여 앞일을 내다보는 밝은 지혜가 있었다. 그 아버지 판삼사 공(公)이 나를 특수한 예절로서 대우하고, 이염도 또한 처음 만나 보고서 그전의 친한 벗과 같이하였다. 그러나 오래되어도 예의에 벗어나지 않았으며, 나에게 과실이 적게 하고자 하여 바르게 경계하기를 미리부터 하여 공이 작지 않았다.”([태조실록] 태조 1년 윤12월 16일)

이성계의 청년 시절부터 이염은 멘토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염의 아버지 이수산(李壽山)은 공민 왕대의 유력 정치가였다. 동북면 변방 출신의 이성계가 중앙정치에서 생존하자면, 이들처럼 개경 정치계에 정통한 이들의 조언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수산은 세속적 인물이었다. 그러나 활달하고 임기응변에 능했다. 공민왕 사후 왕위 계승문제로 이인임과 명덕태후, 경복흥이 대립했다. 대다수가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목숨이 오가는 순간이었다. 이때 이수산이 이인임에 반대해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종실을 왕위에 앉혀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과감하게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우왕이 등극하면서 그의 정치생명도 끝났고, 우왕 2년(1376)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위화도회군 뒤 이수산의 입장이 부활했다. 우왕이 신돈의 혈통이라는 비왕론은 혁명파가 우왕, 창왕을 제거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핵심 명분이었다. 이 때문에 윤소종이 상소를 올려 이수산의 포상과 현창을 요청했다. “현릉(공민왕)이 후사 없이 붕어하시고 이인임이 우왕을 세우고자 할 때, 대신들이 감히 다른 논의를 할 수 없었는데, 고(故) 판삼사사 이수산은 홀로 종실을 세울 것을 청하였습니다. 몸은 비록 이미 죽었으나 충의는 사람을 감동하게 하니 청컨대 포상과 시호를 더하고 그 묘소에 제사를 지낼 것이며, 후손을 녹용 하여 충혼을 위로하소서.”([이수산전]) 역사에서는 이처럼 가치의 전도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어제는 틀렸지만, 오늘은 맞다. 역사의 궁극적 의미를 생각하며 행동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교훈

이염과의 관계가 이처럼 특별했으므로 이성계가 직접 나선 것이다. 그러니 공양왕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이성계의 요청을 어떻게 거부한단 말인가? 이염에게 곤장 100대를 치게 하고, 합포로 귀양 보냈다. 얼마 뒤 이염은 경상도도절제사로 임명됐다. 이로써 왕의 권위만 더 땅에 떨어졌다. 이염의 난동 같은 행위를 처벌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왕의 권위가 서겠는가! 설사 이염을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왕의 권위를 존중하는 방식이 존재해야 했다. 최소한 이염을 충신으로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아야 했다. 배극렴처럼 이염이 술주정을 했다고 하면 왕은 최소한의 체면은 지킬 수 있다. 무지의 죄일 뿐이다. 죄는 죄지만, 왕의 권위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이성계의 입장에서도 이염의 생명만 살리면 되니, 술주정으로 치부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굳이 “이염이 실상 죄가 있지마는, 그러나 그 말이 광망하고 곧은 데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왕은 이미 이염이 충성스럽고 곧은 게 아니라, 완악하고 경솔하다고 본 것이다. 결과적으로 양자의 인식이 충돌했다. 만약 이성계가 옳다면 이염은 바른 정신을 가지고 한 행동이 된다. 왕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왕이 잘못한 것으로 된다.

먼저 밀직사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우유부단하게도 중방의 불례(不禮)를 바로잡지 않았다. 둘째, 이염의 곧은 간언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도량이 좁아 충언을 수용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 간언한 이염 그리고 심문관인 순군부 만호 유만수, 배극렴, 그리고 천호 김귀련과 제공(提控) 정지탁을 처벌했다. 이염이 난동을 부릴 때 왕을 보호하지 못한 대호군 홍서와 홍원성은 순군옥에 갇히고 상호군 권유(權維) 등 9명은 태형을 받았다. 모두 왕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무고한 신하들을 처벌한 것이다. 이런 왕이 왕다운 왕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이 이염의 난동에 대한 이성계의 변호가 의미하는 정치적 의미였다. 그러고 보니 이염을 취조한 심문관은 모두 이성계파였다. 이염은 옥에 갇혀서도 큰 소리를 쳤다. 시늉뿐인 처벌을 받고 곧 복직했다. 사건의 전체적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연출된 냄새가 물씬 난다. 이래서 1392년 새해 첫날부터 공양왕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가까스로 전열을 정비한 정몽주로서도 맥이 빠지는 사건이었다.

왕은 경멸 받는 일을 삼가야 한다. 왕이 경멸 받는 것은 변덕이 심하고 경박하고, 소심하며, 우유부단한 인물로 생각되는 경우다. 왕은 자신의 행동에서 위엄·용기·진지함·강건함을 과시해야 한다. 이런 평판을 유지함으로써, 누구도 왕을 기만하거나 술책을 꾸밀 엄두를 못 내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반대라면 누구도 왕에게 모반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충고다. 그리고 공양왕에게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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