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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24)] 사마천을 넘고자 했던 시바 료타로의 웅지(雄志) 

“늠름한 발걸음으로 대지를 힘껏 밟아 나가라” 

자신만의 해석 통해 역사를 소설로… ‘시바 사관’ 정립 평가도
일본 역사 속에서 밝은 이야기 발굴해 전쟁 후유증 치유하려 노력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과 우익단체 회원들이 당시 군복을 입고 전범들의 위패가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 앞을 행진하고 있다.
출판 부수 1억 권 이상의 초(超) 베스트셀러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1923~1996)는 한국에도 일정 독자층이 있다. 그의 대표작 [료마가 간다] [언덕 위의 구름]은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소설가이지만 역사가의 반열에 오를 정도로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일본의 역사소설가였다. 그가 묘사한 역사적 장면은 거의 역사적 진실이라고 믿어질 만큼 독자들을 현혹했다.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몫인데, 그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역사소설을 썼다. 사람들은 그의 그러한 서술 태도를 ‘시바 사관(司馬史觀)이라고 부른다.

그가 본명인 후쿠다 테이이치(福田定一)를 뒤로하고 시바 료타로라는 필명을 사용한 의도부터 심상치 않다. 그는 [사기(史記)]를 지은 한나라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7)을 평생 존경했다. 그의 필명은 사마천에 이르려면 먼(遼) 사람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작품은 ‘스승’ 사마천에 비하면 조촐하다고 겸손해했다. 그러나 혹자는 사마천을 훨씬 능가(遼)하는 작가가 되고자 하는 시바의 바람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역사에 대해 어떤 소명의식을 가지고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는 데 있다. 사마천은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報任安書)’에서 밝혔듯이 “천하에 잊힌 옛일을 망라해 그것을 비교·검토, 성공·실패·흥기·파괴의 이치를 고증하고 싶었다”고 했다. 시바 료타로 글쓰기의 사명은 ‘일본이란 무엇인가’를 밝혀 일본인들에게 희망을 주려고 했던 데 있다.

시바 료타로는 철저한 고증과 자료 조사를 통해 진실에 가까운 서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바의 소설은 일본 역사에서 좋았던 시절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소설 작법에서도 철저한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의 역사 소설 출발점은 태평양전쟁에서 처절히 패배한 시절로 돌아간다. 시바는 줄곧 22세의 자신에게 쓰는 편지가 자신의 소설이라고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 선언을 했을 때 시바는 22세의 전차부대 소대장이었다.

68세이던 1992년 문화공로상 수상 기자회견에서 그는 자신이 역사소설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해 말했다. 한 국가가 전쟁의 광풍에 휩쓸려 철저하게 무너진 상황에 대한 반성이 출발점이었다. 그의 주요 작품의 주제는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였다.

“‘왜 일본은 이렇게 바보가 된 걸까’라는 것이 22세 때의 감상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달랐을 터라고 생각했지만, 지식이 없어서 35~66세 때부터 문헌이나 자료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작품은 22세 때 나에게 쓴 편지였습니다.”

역사가라기보다는 소설가가 본인의 이름을 딴 사관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작가가 있을까? ‘시바 사관’이란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역사관을 함축한 말이다. 그의 작품은 합리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것은 태평양전쟁 당시 전차 장교로서 무모했던 전쟁의 비합리성을 관찰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메이지와 쇼와’ 시대를 대체하고, 봉건제국가를 하루아침에 합리적인 근대국가로 탈바꿈한 메이지유신을 높이 평가하는 한편 패전에 이른 쇼와 시대를 일본의 암흑기로 부정한다. 그리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메이지라는 시대를 밝은 활력 있던 시절로 묘사했다.

일본의 역사학자 이시다 미치후미(磯田道史) 교수는 [시바 료타로에 배우는 일본사]에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강한 침투력을 가진 문장과 내용으로 쓰이며 독자를 움직여 다음 시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이시다 교수는 전후의 급격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반한 대중사회의 작가로서 시바의 영향력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간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은 영화나 TV 방송으로 제작되면서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일본인 대다수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일본의 역사에 접하고, 역사관을 만들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모범답안은 메이지 이전의 건강한 일본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
시바 료타로는 전쟁으로 무너진 일본이란 나라와 일본인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야 하는지 물었다. 질문에 대해 찾아낸 모범답안이 희망 가득하던 메이지 이전의 건강한 일본이었다. 그는 주인공으로 발견한 영웅의 캐릭터를 새로운 스타일로 창조하고 각색한다. 영웅은 기존의 비장하고 구도자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아니고,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보통사람의 이미지를 띠고 있다.

시바 료타로는 삶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들을 하나하나 소설 속으로 불러들인 뒤 자신의 생각을 불어넣었다. 일본의 역사 속에서 밝은 이야기와 긍정적 주인공을 발굴해 전쟁의 후유증을 앓던 일본인의 자존심을 치유해 준 작가가 시바 료타로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문제로 늘 대립각을 세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의 이야기가 달가울 리가 없다. 그가 밝게 묘사한 메이지 시대 조선은 그의 작품 속에서도 한심한 나라로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시바 료타로는 [언덕 위의 구름]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세계적 대국에 승리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들의 전쟁터는 조선이었으며 전쟁 결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패전을 직접 목도했으면서도 시바 료타로는 주로 승리한 전쟁에 관해서만 썼다. 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회피하고 군국주의의 기치를 내걸었던 시절에만 착안하려 했던 건 이기적 역사 이해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어린 시절 주로 자랐던 외가의 주변에는 고분(古墳)이 많았다. 시바 료타로는 토기나 돌화살촉을 접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학교 공부는 싫어했다. 중학교 시절 온갖 종류의 책을 독파했다. 시바 료타로는 집 근처 아베노(阿倍野)에 있는 백화점의 도서 코너에서 당시 인기 역사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미야모토 무사시 전집](宮本武蔵全集)을 선 채로 독파했다고 한다.

책을 사지 않고 선 채로 읽고 가기만 하는 시바 료타로에게 매장 주인은 “우리 매장이 무슨 도서관인 줄 아느냐”고 불평했다. 그러자 시바 료타로는 “여기 있는 책을 다 사드릴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문과생’이었다. 취약 과목은 체조와 수학이었다. 300명 중 290등 정도에 그치는 수준이었지만 마음먹고 공부를 하면 시험 성적이 급상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바 료타로는 상급학교 진학에 실패했다. 그는 훗날 스스로에 대해 “공상을 사랑한 불량소년”이라고 회고했다.

“나는 둔하고 무능한 인간으로 공부를 해도 야구를 해도 이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시절 나를 아는 사람은 어쩌면 ‘거칠고 난폭한 소년’이라는 이외의 인상을 갖지 않을까?” _[시바 료타로 전집] 제32권 연보에서

‘일본은 왜 이런 나라가 됐는가’ 하염없는 눈물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속화하는 일본의 가족 해체를 그린 영화 [도쿄 이야기]의 한 장면.
시바 료타로가 학교생활에서 전기를 맞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1학기의 영어 독해 시간이었다. 뉴욕의 지명이 나왔다. “이 지명에 무슨 의미가 있나요?” 선생님에게 물었는데 시큰둥한 반응이 돌아왔다. “지명에 의미가 있을까?” 시바 료타로는 도서관에 들러 뉴욕의 어원과 유래를 찾았다. 영국 국왕의 동생 요크 공의 이름에 관련 있는 것이었다. 이후 도서관은 시바 료타로의 학교가 됐다.

시바 료타로는 오사카대 몽골어과에 입학한다. 어학에는 재능이 없었기에 중국 문학으로 전향을 고려하기도 했다. 대학 때도 여전히 독서를 좋아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읽거나 사마천의 [사기]를 읽었다. 시바 료타로의 어렸을 적 꿈은 대륙의 마적이 되는 것이었다. 중국 출신의 유학생에게 호감을 느끼고 몽골어를 선택한 이유다. 그러나 그에게 세상은 편안한 길을 인도하지 않았다. 시바 료타로는 전쟁의 한가운데로 나간다.

시바 료타로는 1943년 학도병으로 징집돼 매일 아무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하며 ‘나라를 위해’라는 말을 들었다. 그렇게 군 생활을 하면서 시바 료타로는 회의를 품는다.

그는 1944년 목단강 전차부대 제19연대에 부임한다. 마적은 못 됐지만, 전차부대원으로 대륙에 진출한다. 당시 전차부대는 전장에서 100% 죽는, 기피 대상 1호 보직이었다. 오로지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 일본의 고유한 민족정신)라는 정신력에만 매달리는 부대였다. 그의 회상을 들어보자.

“이 전차의 최대 결함은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것이다. 적의 전차에 대한 방어력도 공격력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나에게 전차라고 하는 기계는 쇼와 10년대(1940년대) 일본국 그 자체였다. 중요한 것은 그것은 단지 기계가 아니고 일본국이라고 하는 사상의 덩어리였다. 나는 지금도 때로는 어두운 전차의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꿈에서 본다.” _[역사와 시점]

1945년 5월 시바의 전차부대는 미국의 일본 본토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급히 도치기현 사노시로 이동한다. 미군이 들이닥칠 경우 도쿄를 방어하는 임무였다. 작전 중 시민들이 혼란에 빠졌을 때 본영에서 온 영관급 참모의 발언에 시바 료타로는 큰 충격을 받는다. 군 작전이 먼저인 만큼 그리고 국가를 위한 것이기에 “깔아 뭉개버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시바 료타로에게 전쟁에 참전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국민, 특히 어린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와 개인에 대해 고민하고 군과 군인에 절망하고 있을 때 종전을 맞았다. 당시 그는 ‘일본은 왜 이런 나라가 됐는가’라고 생각하며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

시바 료타로는 1946년부터 1961년까지 기자 생활을 한다. 첫 직장은 재일 한국인이 운영하던 소규모 지방지였다. 곧이어 [신일본신문] 교토 본사에 입사한다. 그가 주로 다루던 분야는 대학과 종교였으나 2년 후 신문사가 도산한다.

이후 시바 료타로는 [산케이신문]으로 전직하며 본격적인 기자 생활을 시작한다. 1949년 일본 최초 노벨상을 받은 이론물리학자인 교토대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 등을 취재한다. 시바 료타로는 1950년 금각사 전소 사건에 관한 기사를 썼고, 교토의 니시혼간지에 있는 종교 기자 클럽에 출입하면서 기이한 스님들의 행적을 취재하기도 한다. 대학에 출입할 때는 도쿄학파 등 교수들과 접촉하면서 훗날 소설가로서 씨앗을 뿌리게 된다.

당시는 좌와 우로 나뉘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싸우던 시대였다. 시바 료타로는 그 같은 싸움에는 초연했다. 대신 그는 과학의 최첨단과 역사·종교 등을 섭렵하고 아우르며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동료들은 시바 료타로를 박학다식하고 온화한 얼굴 모습을 한, 전혀 신문기자답지 않은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는 1953년에는 오사카 본사 문화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면밀한 조사·고증 거쳐 작품 집필


▎일본 근대화의 주역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사카모토 료마.
그는 1955년 [명언수필, 샐러리맨]을 발표했다. 1956년 [페르시아 마술사]를 시바 료타로란 이름으로 제8회 고단샤 클럽상에 응모해 수상한다. 초기의 출세작은 한국에도 수입된 영화 [올빼미의 성]의 동명 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닌자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나오키상을 받으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시바 료타로는 자료를 읽고 철저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다 읽고 난 후에 한 방울 한 방울씩 짜내듯 원고지에 글자를 떨어뜨린다. 그의 지성은 학교나 사람에게 온 것이 아니고 독서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바 료타로는 다독자이며 속독가였다.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한담(閑談)을 나누는 중에도 문고본 책 1권을 읽어낼 정도였다고 한다.

부인 후쿠다 미도리는 남편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보통의 인간은 나이를 먹으면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생각할 기력이 없어진다. 시바 료타로는 반대였다. 혼이 점점 젊어진 듯했다.”

시바 료타로는 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의 에너지 원천은 호기심이었으며, 그 호기심을 독서와 여행으로 충전해 글쓰기로 발산했다. 생애의 3분의 1을 일본 각지를 다니는 취재를 위한 여행으로 보냈다.

시바 료타로는 자료와 면밀한 조사·고증을 거쳐 작품을 썼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역사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와 비교하는 이야기가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는 서재에서 펜 1자루에 의지해 소설을 쓰고 시바 료타로는 트럭 1대분의 자료를 들고 와서 소설을 쓴다.”

시바 료타로의 자료 수집벽에 관해 전설로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언덕 위의 구름]을 집필할 당시 역시 러일전쟁을 소재로 쓰려던 작가가 있었는데 자료 수집을 위해 고서점에 가보니 시바 료타로가 다 쓸어 가버려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0년대 [료마가 간다]를 신문에 4년에 걸쳐 연재할 때는 자료 구매비로만 1000만 엔을 썼다.

시바 료타로 작품의 특색은 역사 속에서 패자 혹은 무명으로 남겨진 이들에 대해 재조명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결에서 진 이시다 미쓰나리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든지, 메이지유신 당시 인물 중 하나였던 사카모토 료마를 발굴해 일본의 영웅으로 만드는 것이다.

[언덕 위의 구름]에서 세 명의 주인공도 해군 장교로 러일전쟁에서 참모로 활약한 아키야마 사네유키, 기병대를 이끌고 세계 최강 러시아 기병대와 싸운 그의 형 아키야마 요시후루 그리고 메이지를 대표하는 가인 마쓰오카 시키다. 이들 주인공 3명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어떻게 얽히고설키며 한 시대를 살았는지, 시바 료타로는 자신만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해설했다.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시바 료타로의 작품은 침략 전쟁에 대한 미화로도 볼 수 있다.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망국의 전차부대 소대장으로 ‘도대체 누가 일본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일본인이란 무엇인가?’라며 통곡했던 작가가 그린 것은 결국 전쟁이었고 그것도 미화였다.

그럼에도 시바 료타로의 소설 자체만 보면 웅대한 스케일에 거세(巨細)한 묘사로 독자를 역사의 한복판으로 몰고 가는 흡인력을 준다.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독자는 약소국 일본이 강대국 러시아를 제압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잡는 그 시절이 좋았고 영광스러웠던 순간으로 인식하게 된다.

사실 러일전쟁을 비롯한 모든 전쟁은 인간성 말살이다. 파노라마처럼 장대한 소설의 이야기 이면을 파헤쳐 보면 처절한 살육의 과정이었다. 양국이 얻은 것은 상처였고 나눠 가진 것은 승리와 패배였다.

제국주의 군대에서 전쟁을 체험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바 료타로가 만든 소설은 일본 보수주의자들의 역사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병(鄕愁病)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가 일본의 전쟁에 대해 극구 반대하는 입장의 글을 썼지만 일본 보수층은 그의 글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승리의 유혹을 추동하는 향기를 맡는다.

손정의의 희망 ‘재탄생한’ 사카모토 료마


▎2차 세계대전 당시 미주리호 선상에서 진행된 일본의 항복 조인식.
시바 료타로는 기본적으로 등장인물이나 주인공에 대해 호의적이며, 글쓴이가 호의를 갖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린다. 작가가 주인공에 대해 갖는 공감대를 독자와 주인공의 관계까지 연장해 줄거리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일부 평론가들은 “일반적인 소설가는 나를 봐주라고 한다면 시바 료타로는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봐줘’ 하고 외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작가가 미학적 감각을 느끼는 주인공을 발견해 독자에게 소개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작품은 독자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에게 미친 영향은 크다. 소프트뱅크의 회장 손정의가 중학생 시절 난치병을 얻어 투병 생활을 할 때 그에게 희망을 준 인물이 바로 시바 료타로의 펜 끝에서 재탄생한 사카모토 료마였다.

시바 료타로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여담이지만…”이라는 말로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는 데 있다. 또 소설의 배경이나 창작하면서 취재한 뒷이야기 등으로 해설을 하기도 한다. 직접 상관없는 에피소드나 시바 료타로 자신의 경험담(등장인물들의 자손과의 인터뷰, 방문한 지역의 묘사) 등을 적당히 이야기 안으로 담아가는 수필 같은 수법도 사바 료타로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이며, 독자들은 거기에 매료된다.

근대 일본의 무사 조직 신센구미(新選組)가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된 것도 시바 료타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시바 료타로는 그들의 모습에서 미학을 느끼고 그것을 문장으로 써서 세상에 보여줌으로써 신센구미에 대한 평판이 바뀌게 했다.

사마천의 [사기]의 애독자였던 시바 료타로는 특유의 시대 고찰을 통해 장편소설 [항우와 유방]을 쓴다. [세키가하라]는 역사의 승자가 아닌 패자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썼다. 시바 료타로의 서술 방식을 따라가면 그가 묘사한 주인공은 모두 호감이 가득한 인물이 된다. 시바 료타로의 미학적 감각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순간 한 편의 소설이 탄생한다.

나카오카현의 가로(家老)를 주인공으로 하는 [고개]는 바쿠후 말기의 무사 이야기다. [나라를 훔친 이야기]는 전국시대를 꼼꼼하게 그렸다. 전편은 사이토 도산, 후편은 오다 노부나가가 주인공이며 두 사람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노부나가를 살해한 아케치 미쓰히데다.

[신센구미혈풍록]은 신센구미 조직원들을 그린 단편집이다. [세상을 사는 나날]은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 다카스키 신사쿠의 사제 간에 관한 이야기다. [타올라라검]은 신센구미의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를 주인공으로 한다. 아마추어나 다름없던 신센구미를 막부 말기 최고의 검호(劍豪) 집단으로 승화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한다.

시바 료타로가 독자로서 좋아했던 역사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는 주로 근대적 가치를 이야기했다. 요시카와는 충효·근면·성실·노력·순애 등 구도자적 모습을 지닌 주인공을 캐릭터로 삼았다.

반면 시바 료타로가 작가로 그린 대부분 주인공은 보통사람의 인간미가 넘치고 있다. 인간은 실수하게 마련이다. 완벽한 인간이란 없다. 소설 속에서 구도자적인 캐릭터의 주인공을 설정하게 되면 거짓의 세계를 그릴 수밖에 없다.

“일본은 망한다”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기자 조르주 비고가 파리로 돌아가 1899년 찍은 그림엽서. 청군의 변발을 잡은 일본군이 조선인을 밟고 지나는 장면 등 당대의 상황을 담았다.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는 시바 료타로가 소설에서 그린 인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다지 이상이나 도덕을 믿지 않는 인간들이다. 이런저런 세상의 신산(辛酸)을 맛보는 사이에 하나의 사명에 눈떠 그 시대가 요구하는 어려운 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하고 그다지 보답도 바라지 않고 죽어간다.” 시바 료타로 소설의 매력을 적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는 만년에는 주로 수필 집필이나 문명 비판 등을 했는데, 합리적 사고와 구체적 고증에 의한 역사 평론을 하기도 했다. 시바 료타로는 다이쇼 시대에 태어나 쇼와시대의 전쟁과 부흥 그리고 거품 경제의 한복판을 지나오는 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가 작품 속에서 지향한 지점은 자신이 살아 보지 못한 메이지 시대였다. 시바 료타로는 일본의 역사에서 메이지 시대를 최고로 여겼다. 쇼와 시대를 폄하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시바 료타로가 보기에 메이지 시대는 사람으로 치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배우던 어린아이 같은 시절은 아니었을까?

시바 료타로는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일본의 앞날을 크게 걱정했다. 그의 대표적인 말버릇이 “일본은 망한다”였다고 한다. ‘일본과 일본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천착했던 시바 료타로의 우려가 요즘 와서 상기되는 이유는 뭘까. 전쟁에서 패망했으나 급속한 경제성장 덕분에 반성의 시간을 갖지 못한 일본인에 대한 염려를 나타낸 말이 아닌가 싶다.

패전국 전차부대 장교는 통렬한 울음 끝에 광기의 전쟁에서 방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고자 했다. 그가 찾아낸 길은 좋았던 시절이었다.

‘21세기에 사는 그대들에게’라는 글에서 시바 료타로는 미래의 주역들에게 당부하는 글이 있다.

그대들은 항상
맑게 갠 하늘처럼
드높은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묵직하게
늠름한 발걸음으로
대지를 계속해서 힘껏 밟아
걸어나가지 않으면 안 돼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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