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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45)] 조선판 고문치사 사건 희생자 귀암(歸巖) 이원정 

죽으면서도 끝내 역모를 인정하지 않다 

3대째 문과 급제 뒤 명·청 교체기 두 차례 사은사로 '연행록' 남겨
형조·호조·공조·이조 4판서 지내며 처절한 당쟁시대 거친 南人의 중심인물


▎이필주 종손이 귀암고택의 편액 아래에 섰다.
"내가 ‘명(明)나라는 천하에서 인재를 선발했는데 지금은 남방 선비들이 북경(北京) 과거에 나아가지 못하니, 이것으로도 쉽고 어려움이 현격한데 어찌 큰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운남(雲南)과 귀주(貴州)를 제외하고 모두 일통(一統)에 들어갔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렇다면 운남·귀주를 제외한 11성(省)에 포정사(布政司)가 모두 설치돼 있습니까?’ 물으니 ‘네’라고 대답했다. 내가 ‘포정은 청인(淸人)을 등용합니까. 한인(漢人)을 등용합니까’ 다시 물으니 ‘번갈아 임명합니다’라고 대답했다….”

1660년(현종 1) 조선의 사은사(謝恩使)가 중국 북경을 오가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글이다. 북경은 연경(燕京)으로도 불렸다. 그래서 책 이름이 [연행록(燕行錄)]이다. 당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淸)나라가 들어선 지 30년이 채안 돼 정국은 불안정하기만 했다. 명·청 교체기다.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은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다. 1644년엔 청이 북경을 함락한다. 그래도 남명(南明) 정권은 운남과 귀주를 거점으로 저항을 계속해 조선은 판단이 혼란스러웠다. 조선은 청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동향을 살핀다. 김영진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연행록] 설명에 “사은사는 현지에서 한때 교제했던 남방 출신 한림 셋을 만나 술을 마시며 탐문한다”고 적었다.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한 정보 수집이다.

미군 부대 캠프 캐럴 옆에 자리한 종가와 재실


명·청 교체기 사은사의 기록은 중요하다. 조선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당시 서장관(書狀官)은 성균관 전적(典籍) 등을 지낸 신진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 1622∼80)이 맡는다. 그는 자신의 [연행록]에 조선이 알아야 할 현지 민심을 그대로 적었다. 임진왜란 직후 조선을 대하는 한인(漢人)의 감정은 격하다. “갑신년(1644) 이후 한인이 조선인을 만나면 ‘우리가 머리 깎고 감색 옷을 입게 된 건 오로지 너희 나라 때문이니 원통함이 뼛속까지 사무친다’고 했다. 우연히 명나라 효유문(曉諭文, 백성을 타이르는 글)을 보았는데 청인의 수급(首級)을 바치면 은 50냥을 주고 조선인 머리를 바치면 은 150냥을 상으로 준다고 했다.” 명인(明人)은 자국 패망 원인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참전으로 본 것이다. 당시 그들이 조선에 품은 원망이 어느 정도인지 생생히 알 수 있다.

귀암은 1670년(현종 11) 다시 연경으로 떠난다. 10년 만의 사은사 2차 여정이다. 이번에는 사은 부사 자격이다. 중국통이 된 것이다. 그는 다시 [연행후록(燕行後錄)]을 쓴다. 이번에는 1차 연행 때와 달리 청의 대륙 지배를 현실로 받아들인다. 본질을 벗어난 현지 스케치인 원숭이 마술 이야기도 있다. 원숭이가 10여 가지 가면을 번갈아 쓰며 지팡이를 짚은 노인, 화장하는 소녀,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 등을 흉내 내는 걸 기록했다. 현장을 직접 보는 듯하다. 문장가(文章家)의 재주가 번득인다.

10월 25일 귀암 이원정의 흔적을 따라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귀암고택을 찾았다. 오세창이 쓴 그림 같은 ‘귀암 고택’ 전서 편액이 사랑채에 걸려 눈길을 끌었다.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이필주(76) 종손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귀암의 13대손이다. 사랑방에서 맞절한 뒤 이야기를 들었다.

귀암고택은 100만 평 규모인 미군 부대 캠프 캐럴 옆에 있었다. 이야기 도중 [연행록]의 목판은 남아 있는지 물었다. 목판은 종가에 수백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쯤에서 고택을 둘러보았다. 사랑채 뒤로 사당인 숭문묘(崇文廟)가 있었다. 알묘 뒤 신주를 살폈다. 관직을 적은 신주의 글자만 98자. 깨알 같은 글씨를 한 줄에 썼다. 사은사를 지낸 귀암은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 남인의 대표 정치인이었다.

사당을 나와 왼쪽에 위치한 농암정사(聾巖精舍)를 살피다가 종손은 일행을 건물 뒤로 안내했다. 그는 정사의 뒷벽을 가리켰다. “바로 여깁니다. 80년대 초반 어머니 혼자 고택을 지킬 때 이곳에 있던 서책 수천 권을 도둑이 벽을 뚫고 훔쳐갔어요.”

이후 처리가 극적이다. 도난당한 서책은 대부분 경상북도 지정문화재였다. 사건은 TV 등을 통해 크게 알려졌다. 그중 [용비어천가] [두시언해] 등은 임금 하사품이었다. 그래서 이들 책에는 임금이 귀암에게 내린다는 책 주인 이름이 명기돼 있었다. 사건 발생 20여 일 뒤 자수자가 나타났다. 지역 모 대학이 장물 서책을 인수한 것이다. 서울에 머물던 종손은 책을 돌려받은 뒤 사랑방에 두고 지키느라 한동안 고택에서 잠을 잤다. 문중은 이후 이들 서책 등 자료 2500여 점을 대학에 기증한다. 당시 기증 고서가 넘쳐나던 대학을 피해 효성여대(지금의 대구가톨릭대)로 정해졌다. 장물을 잡았던 대학은 제외됐다. 대구가톨릭대에 ‘석전문고’가 꾸며진 배경이다.

귀암은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갑과 2등으로 급제했다. 5년 뒤 성균관 전적과 병조좌랑, 사헌부 지평 등 요직을 거쳐 사은사 서장관으로 발탁됐다. 사은사 임무를 마친 1661년에는 동래부사로 고위 관직인 당상관이 된다. 그의 벼슬길은 초반 순탄해 보였다. 하지만 귀암은 그때부터 남인의 중진으로 경쟁 관계에 있던 서인의 견제를 받는다. 이후 전주부윤·광주부윤 등 지방관을 지내고 중앙에선 한직으로 배치된다. 1670년 귀암의 아들 이담명이 대를 이어 문과에 급제한다. 귀암이 2차 사은사로 파견되던 해다. 그는 공교롭게도 아들 과거시험의 시험관으로 참여했다. 시험 직후 이담명이 답안 잘못 쓴 것을 이원정이 지적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서인이 문제를 삼았지만, 임금이 혐의 없다고 결론을 내려 논란은 중단된다.

1673년 귀암은 궁중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에 지명된다. 서인이 다시 이를 문제 삼는다. 그가 도승지가 되기엔 경력이 부족하다며 물러나게 할 것을 요청한다. 당쟁이 격화되면서 귀암에 대한 견제는 이렇듯 날로 더해졌다. 특히 귀암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의 상례와 관련해 이른바 예송 논쟁에 말려든다. 당쟁의 연속이다.

그러나 현종이 급서하고 어린 숙종이 즉위하는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지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영의정 허적이 정국을 이끌면서 서인 대부분이 물러나고 남인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귀양 간다. 반면 귀암은 1677년 형조판서를 시작으로 이듬해 한성판윤·호조판서, 1679년에는 공조판서를 거쳐 마침내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조판서에 오른다. 그럴수록 서인은 귀암을 주시했다.

정치는 요동친다. 임금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숙종은 1680년 어느 날 밤 병권을 서인에게 넘긴다. 또 이조판서가 편중 인사를 해 왔다며 귀암의 관직을 삭탈했다. 이른바 경신출척(庚申黜陟)이다. 남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들어서는 여야 교체다.

때맞춰 놀라운 유언비어가 접수된다. 허적의 서자 허견이 복선군 남(柟)을 왕으로 삼으려는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다. 국청(鞫廳)이 설치되고 임금이 심문에 나선다. 피바람이 분다. 칼끝은 허적과 윤휴, 귀암을 향했다. 귀암은 첫 심문에서 유배형이 떨어졌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귀암이 복선군과 친하게 지냈고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 체찰사부(비상시 군대 지휘부)를 다시 설치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증거는 없었지만, 고문을 피할 길도 없었다.

‘이원정 종가’를 연구한 금오공대 박인호 교수는 “귀암은 국청에서 7차례 장신(杖訊)을 받고 한 차례 압슬(壓膝)을 당했다”고 정리한다. 귀암은 그래도 끝내 역모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모진 고문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둔다. 조선판 고문치사 사건이다. 1680년(숙종 6) 이원정은 58세로 생을 마쳤다.

피묻은 적삼 10년 입고 절치부심한 아들


▎하늘에서 내려다본 귀암고택의 전경. 맨 뒤가 사당인 숭문묘다.
종손은 다시 동산재(東山齋)로 안내했다. 귀암의 아버지와 귀암, 그 아들 등 3대(代)의 재실을 배치한 공간이다. 귀암고택을 나와 오른쪽으로 100m쯤 떨어진 위치다. 철제 홍살문을 들어서자 동산재 앞에 비각을 한 귀암의 신도비(神道碑)가 있었다. 채제공은 비문에 귀암의 죽음을 두고 “끝내 당화(黨禍)가 몸에 미쳤으나 그 시운에 어찌하리오”라고 애절함을 함축했다. 숙종은 이후 일기(一紀, 12년)가 못 돼 후회하며 영의정 벼슬을 증직한다.

동산재로 들어서면 왼쪽에 소암재(紹巖齋)가 있다. 귀암의 아들 이담명을 기리는 재실이다. 이담명은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불려와 국청에서 참화를 당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지켜본 자식이다. 그는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자 아버지의 피 묻은 적삼을 10년 동안 입고 지낸다. 그리고는 참화를 주도한 당인(黨人)들의 죄상을 밝혀내 사약을 받도록 만든다. 절치부심(切齒腐心)이다.

동산재 오른쪽 끝은 경계를 따라 한 키가 넘는 높은 담장에 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그 너머는 미군 부대다. 1950년 캠프 캐럴이 들어설 때 귀암고택 주변 50여 호 집성촌은 사실상 해체됐다. 동산재도 처음에는 부대 영역에 포함됐다. 후손들은 그래도 동산재는 지켜야 한다며 길에 드러누웠다. 그게 통했다. 3000평 동산재는 다행히 보존됐다. 마을 입구 신도비는 미군이 헬기를 동원해 현 위치로 옮겼다. 귀암의 묘소는 경북 영천에 있다.

귀암 이원정 가문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벌인 광주(廣州) 이씨다. 칠곡파는 이른바 ‘팔극(八克)’ 중 한 명인 이극견이 성주목사를 할 때 차남 이지가 지역 유지 최하의 딸과 혼인하고 그 뒤 남쪽으로 내려오며 시작된다. 이원정은 1622년(광해군 14) 칠곡 사양촌(泗陽村)에서 이도장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글은 한강 정구의 문인인 할아버지 이윤우에게 배운다. 신도비엔 “(귀암이) 어렸을 때부터 하루 수만 글귀를 외우더니 자라서는 글을 8행씩 한꺼번에 내리읽었다”고 새겨져 있다. 이원정은 26세에 생원시에 입격한 뒤 4년 만인 30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종손에게 물었다. 귀암이 어떤 인물이냐고. 종손은 대표 업적을 소개했다. 영남지역 대동법 시행이다. 세금 부담을 줄이도록 공물을 미곡으로 통일하는 대동법은 경상도의 경우 조운 문제 등으로 시행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는 임금에게 실시가 시급하다고 상주한다. 귀암은 당시 형조판서로 있었지만 대동미를 수세하는 선혜청 업무까지 맡아 실시 시기를 앞당긴다.

교지·간찰은 서울역사박물관 기증


▎최근 새로 조성한 귀암고택의 솟을대문.
종손은 오늘날 이어진 뜻밖의 공덕도 하나 소개했다. 이번에는 서울시가 은혜를 입었다. 귀암의 한성판윤 경력이 인연이다. 고건 서울시장 당시다.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었는데 연구하고 전시할 유물이 없었답니다.” 담당자들이 고민하자고 시장은 조선 시대 역대 한성판윤 후손을 수소문해 보라는 아이디어를 낸다. 2002년 담당자가 귀암고택을 찾는다. 효성여대에 서책을 기증한 뒤였다. 그런 사정을 이야기하자 담당자는 그래도 남은 게 있으면 보여 달라고 통사정한다. 하는 수없이 창고를 열어 간찰 뭉치 등을 보여 주자 그는 깜짝 놀란다. 연구할 게 무궁무진하다며 가져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그래서 종가는 남아 있던 귀암을 전후한 3대의 교지 300여장과 간찰 등 2500여 점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후 논문과 도록 등이 나왔다.

귀암을 둘러싼 기록 중에는 좋지 않은 이야기도 전한다. “이원정이 성주에 있을 적에 사람됨이 거칠고 음험하며 권모술수가 많았다. 벼슬이 있으면서 탐욕을 마음껏 부려 한 번 동래부사가 되자 그 집이 드디어 큰 부자가 되었다.” [숙종실록] 권1의 내용이다. 이와 관련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숙종실록]에는 이원정 가의 방대한 경제력이 관직을 매개로 축적된 부정한 재산으로 묘사돼 있지만 이 집안의 재부(財富)는 성주 입향 초기부터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재기 등 각종 고문서에서 확인된다”고 정리했다. 귀암의 아들 이담명은 낙동강의 수운을 활용해 김해와 안동을 왕래하며 염상(鹽商)으로 막대한 부를 일구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종손은 “귀암 부자 불천위 양대를 모시기 어려워 오랜 기간 국수 제사를 올려야 했다”며 “실록의 기록도 당쟁의 분위기가 반영된 것 아니겠냐”고 반박했다.

당쟁의 프레임에 갇힌 외교 공적


▎영의정 증직에 문익공 시호를 내린다는 교지. / 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귀암고택은 최근 솟을대문을 만들고 위에 ‘文翼公(문익공)贈領相行大冢宰(증영상행대총재)歸巖(귀암)李元禎(이원정)之門(지문)’이란 글자를 새겼다. 종손은 “그동안 이조판서를 지내고도 서인의 감시가 두려워 표식 없이 숨죽여 지냈던 선대의 아픔을 극복하는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339년 전 당쟁의 화(禍)가 후손들에게 여전히 잊을 수 없는 과제로 남은 것이다.

귀암은 발군의 외교관이자 섬세한 문장가였다. 그는 명·청이 교체되는 민감한 시기에 두 차례 사은사로 활약한 뒤 대륙의 정세를 낱낱이 [연행록]에 남겼다. 조정에서 청나라 관련 외교는 자주 그의 몫이 됐다. 신도비에는 1666년(현종 7) 승지 시절 청나라 사신이 조사를 목적으로 입국하자 조정의 신하는 대부분 화가 미칠까 봐 떨고 있었다. 귀암은 임금을 도와 사건을 무마시키며 양국 관계를 안정시킨다. 1678년(숙종 4) 호조판서 시절에는 청나라 사신의 무례를 언변으로 무마한 일화가 나온다. 임금이 병환으로 교외 영접을 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자 담당 업무가 아닌 귀암이 나서 설득하니 사신이 그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귀암은 당쟁의 시대란 프레임에 갇혀 그가 남긴 외교 공적은 간과되고 있다. 그의 [연행록]을 흥미롭게 읽으면서 떠나지 않은 생각이다.

[박스기사] 4代에 걸친 명예와 신망의 명문가 - 귀암의 아들 이담명은 백성 배고픔 구한 선정 펼쳐

귀암 이원정은 4대에 걸친 문과 급제 가문이다. 흔치 않은 일이다.

4대 문과의 길은 귀암의 할아버지 이윤우가 열었다. 이윤우는 1606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벼슬이 공조참의에 이른다. 그는 퇴계 이황의 제자인 한강 정구에게 학문을 배웠다. 조야의 신망을 얻은 배경이다. 둘째 아들이 이도장이다. 이도장은 이윤우의 사촌 이영우의 양자가 되면서 분파한다. 그가 이주한 곳이 석전(石田, 돌밭)이다.

이도장은 163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다. 이후 승정원 주서, 사헌부 지평, 이조좌랑, 홍문관 수찬 등 벼슬을 지낸다. 승정원 주서로 있을 때는 병자호란을 만나 인조 임금을 호종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후 청나라는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고 척화신 명단을 요구한다. 살생부다. 논란이 분분했다. 8인을 쓰자는 말이 나왔지만 이도장은 3인으로 줄였다. 삼학사다.

이도장의 아들이 귀암 이원정이다. 그는 1652년 문과에 합격했다. 아버지가 급제한 뒤 22년 만에 다시 맞은 경사였다. 귀암의 아들 이담명은 167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다. 이번에는 18년 만에 경사가 난다. 그는 승정원 주사를 거쳐 홍주목사에 이르렀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부른 경신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0년이 지나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다시 등용돼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다. 이담명은 그러나 5년 뒤 갑술환국을 맞아 다시 관직을 떠난다.

관찰사 시절 선정은 유명하다. 기사환국 이듬해 영남은 미증유의 가뭄이 들었다. 수확기가 돼도 곡식 한 톨 없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조정은 긴급 구호를 결정한 뒤 이담명을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한다. 구휼 책임을 맡긴 것이다. 이담명은 먼저 경기·충청·함경·황해도 등 양곡 수십만 석을 사들이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부임해보니 마침 세금으로 받은 쌀을 실은 세곡선(稅穀船)이 낙동강을 거슬러 서울 조정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여러 척이었다. 관찰사 이담명은 이 세곡선을 대구 서쪽 화원 나루터에 세우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쌀을 나눠 주었다. 임금의 결재를 받을 겨를도 없었다. 당장 굶어 죽는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담명은 이후 이 사건으로 탄핵을 받지만 혐의없음으로 풀려난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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