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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12)] 로베스피에르의 프랑스와 2019년 한국 

공포정치 낳은 ‘결벽증’ ... 리더까지 집어삼키다 

혁명의 총사령부격인 국민공회 의원들이 ‘로베스피에르 탄핵’ 주도
강경책이 부추긴 집단적 불안감이 정권 몰락 불러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조세개혁안에 반대하는 ‘노란 조끼’ 시위대가 지난해 12월 8일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 운집했다. 시위대가 프랑스대혁명의 상징물인 ‘마리안’ 상(像) 위에서 불을 피우고 있다. / 사진 : REUTERS/연합뉴스
"프랑스에는 정치혁명이 있었고, 한국에서는 촛불혁명이 있었다.”

2017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이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과 만났을 때 전한 말이다. 프랑스는 한국 정치인들이 동경하는 혁명의 나라다. 4·19, 5·16, 5·18, 촛불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혁명 경력을 가진 한국이지만, 그래도 원조는 프랑스다. 당연하지만, 수도 파리는 혁명의 나라를 대표하는 혁명의 도시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정작 파리에는 ‘혁명의 광장(Place de la Révolution)’이 없다. 한국에 있는 ‘민주 광장’과 같은 공간도, 프랑스 혁명 당시 정치가의 이름을 딴 광장도 없다. 18세기 말부터 100여 년간 파리 곳곳에 넘쳤지만, 지금은 없다. 신기하지 않은가? 혁명은 광장이고, 광장은 혁명이다. 전체주·공산주의도 광장을 이용하지만, 근대 프랑스가 창조해낸 ‘혁명+광장’이야말로 민주주의 공화국에 어울리는 최적의 천생연분 조합이다.

유럽에서의 광장은 수용인원 100여 명 선에서 출발한다. 러시아 크렘린 광장, 중국 천안문 광장처럼 수십만 초대형이 아니더라도 광장이란 타이틀이 가능하다. 파리의 경우 반경 200m 내 어딘가에 ‘반드시’ 크고 작은 광장이 들어서 있다. 1789년 이래, 크고 작은 혁명으로 날과 밤을 새운 나라가 프랑스다. 1789년 바스티유 공격에서 시작된 혁명만이 아니라, 1830년 7월 혁명, 1848년 2월 혁명도 있다. 하도 많다 보니, 1789년 혁명은 ‘대혁명’이라 부르는 판이다. 광장도 많고 혁명역사도 많은 나라의 수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대혁명 광장, 소혁명 광장, 제1혁명 광장, 제2혁명 광장’식의 공간이 넘칠 듯하다. 전혀 다르다. 파리 밖으로 나가면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많지도 않다. 크고 작은 도시를 통틀어, 열 군데도 안 된다.

파리엔 로베스피에르의 흔적이 없다


▎지난해 12월 3일 프랑스의 앰뷸런스 운전 노동자들이 파리 콩코르드 광장 진입로를 막은 채 시위하고 있다. 이곳에 설치됐던 단두대에서 루이 16세를 비롯한 ‘반혁명 세력’이 처형당했다. / 사진:REUTERS/연합뉴스
‘프랑스 혁명’이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일까?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도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가 대표적 인물일 듯하다. 공포정치(la Terre ur)의 대명사로, 그 자신도 단두대에 사라진 인물이다. 혁명 열혈 신자에게는 영웅이겠지만, 혁명과 무관한 보통 사람들이 본다면 무섭게 느껴지는 부정적인 인물이다.

로베스피에르에게는 혁명 당시는 물론, 21세기 지금까지 따라붙는 별명이 하나 있다. ‘The Incorruptible’, 즉 청렴결백에다 부정부패와 무관한 인물이란 별명이다. ‘로베스피에르=청렴결백’이란 것이 혁명 당시는 물론, 2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진 역사적 평가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면서 혁명이념 구현에 앞장선, 공화국 수호신으로서의 청렴결백 전사가 바로 로베스피에르다.

그에겐 한국 정치의 일상사인 ‘내로남불’도 없다. 구미 문명 대국이자 선진국의 특징이지만, 역사를 ‘결코’ 흑백으로 나누지 않는다. 아무리 좋게 보여도 긍정 51, 부정 49 정도로 남겨둔다. 각자의 세계관·상식·윤리관에 맞춰 존경할지 비난할지 알아서 판단하면 된다. 아직도 해방자·정복자 논쟁이 끊이지 않는 나폴레옹에서 보듯, 공포정치의 대명사이자 청렴결백의 상징인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는 ‘그레이 존(Gray Zone)’ 어딘가에 머물러 있다.

양시론 사관(史觀)이 프랑스 지식인의 상식이기는 하지만, 올해 초 파리에 들렀을 때 로베스피에르와 관련해 고개를 갸웃거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로베스피에르 기념상이 파리에 ‘단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파리 전역을 훑었지만, 없다. 개인적으로 집에 보관할 수는 있겠지만, 광장·공원·공공건물 같은 야외 공공 권역에 들어선 로베스피에르 조각물은 제로다. 파리 시정부가 공공 권역 내 설치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베스피에르를 만나고 싶어 하는 혁명 신자는 개인용 박물관에 가서 초상화나 작은 조각물 정도에 만족해야 한다.

굳이 야외에 들어선 기념물을 보고 싶다면, 노트르담 교회에서 북쪽으로 10㎞ 떨어진 파리 위성도시 ‘생 드니(Saint Denis)’까지 가야만 한다. 찾아 나서 들러 봤지만, 말이나 지휘봉을 갖춘 혁명지도자 이미지와 무관한, 작은 공원 한구석에 들어선 높이 1m 정도 두상이다. 워낙 조잡한 두상이어서, 로베스피에르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몰라볼 정도다.

파리에 혁명의 광장이 없고 로베스피에르 조각물이 없다는 사실. 우스갯소리지만, ‘단팥 빠진 붕어빵’ 꼴이다. 파리 전체가 혁명 열기에 불타는 도시로 느껴질 듯하지만, 정작 혁명의 광장은 고사하고 혁명의 대명사 로베스피에르 기념상조차 없다. 왜일까? 왜 혁명의 도시는, 혁명의 광장과 혁명가의 모습을 금기시할까?

여러 이유나 분석이 있겠지만, 필자의 결론은 간단하다. ‘혁명’에 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혁명화신’이기 때문이다. 혁명이 무엇인지, 혁명이라 이름의 초대형 이벤트가 어떤 것인지, 혁명이란 광풍이 몰고 올 잔인하고도 비참한 현실이 어떤 것인지…. 그 모든 과정을 무려 100여 년간 피부로 체험한 도시가 바로 파리다. 파라다이스 이념이나 장밋빛 슬로건에 기초한 혁명이 아닌, 매일 맞이하는 길고 긴 생활 속에서의 혁명이다. 현실로서의 혁명을 전 세계 어떤 나라, 도시보다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록한 곳이 바로 프랑스 파리다. 혁명의 광장도, 로베스피에르 기념상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혁명 도시 파리가 내린 최종 결론이다.

“지금 당장 오늘 자로 테러를 시행하라(Place terror on the order of the day).”

프랑스 혁명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말이다. 정확히 1793년 9월 5일 오전 파리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 회의장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다. 국민공회는 왕정을 대신해 1792년 9월 탄생한, 입법·행정권을 가진 프랑스 혁명총사령부에 해당한다.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인물이다. “당장 테러를 시행하라”고 외친 인물은 회의장에 밀려든 수백여 시민들이다.

공포정치 배경된 ‘예방테러’ 주장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아닌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는 작품이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시민들의 국민공회 회의장 난입은 1789년 7월 혁명 이후 처음 벌어진 상황이다. 왕·귀족·성직자에 맞춘 난입은 빈번했지만, 혁명정부 총사령부에 대한 시민 데모는 난생처음이었다. 당황해하는 국민공회 의원들에게 요구했다. “지금 당장 테러를 시행하라. 공화정 프랑스를 구하라.” 시민들의 목소리는 유럽연합군의 파리 공격이 임박해진 상황에서 내려진 자구책이다. 테러란,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왕·귀족·교회가 파리를 점령하기 전, 미리 찾아내 처단하라는 의미다.

1793년 9월 5일은 왕정 폐지 후 프랑스 제1공화정이 들어선 지 349일째 되던 날이다. 혁명정부가 자리를 잡아가는 듯했지만, 반대로 주변국 간섭과 경제제재가 본격화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대(對) 프랑스 해상봉쇄로 인해 식량 위기가 밀어닥친다. 내부의 반(反) 혁명파가 봉기해 혁명 시민과 혁명정부를 말살시킬 것이란 소문이 파리 전체에 퍼져나갔다. ‘벼랑 끝에 몰린’ 심정이 테러 요구로 이어진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회의장 난입이 이뤄진 날 정오, 개기일식이 13분간 이뤄진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깊은 어둠이 프랑스 전역에 퍼져나간다. 프랑스 혁명은 기본적으로 반(反)종교다. 루소와 볼테르가 강조한, 인간 이성에 주목하는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의 기본정신이다. 종교는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무리 이성주의가 지배한다 해도, 한순간 신앙 자체를 버리기는 어렵다. 착취를 일삼던 교회 성직자에 대한 반감은 있지만, 신에 대한 마음을 전부 없애기는 어렵다. 개기일식은 프랑스를 저주하는, 신의 경고쯤으로 해석된다. 당장 테러를 시행해 프랑스를 지키자는 분위기가 일반화된다. 시민 난입과 개기일식이 발생한 2주 뒤, 국민공회는 공포정치를 법으로 명문화한다.

흔히들 프랑스 혁명이라고 하면 바스티유 감옥 공격을 연상한다. 진짜 혁명은 저지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반혁명 타도에 이어 혁명 정신을 유지하면서 한층 더 차원 높은 체제로 진화시켜나가는 것이 혁명의 진짜 의미이자 가치다. 바스티유 공격은 혁명이란 대하 드라마의 서론에 불과하다.

본론으로서의 프랑스 혁명은 테러를 당장 시행하라고 요구한 시민들의 아우성에서부터 시작된다. 바로 공포정치의 시작이다. 1789년 시작된 프랑스 혁명을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나눌 경우, 공포정치는 ‘전’에 걸쳐지는 부분이다. 바스티유에서 시작된 기, 왕정 폐지와 국민공회 헌법 제정으로 이어진 승, 이후 공포정치로 연결된 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극좌 혁명이 급추락하는 결까지의 4단계 중 3단계에 해당한다. 공포정치는, 왜 파리에 혁명광장과 로베스피에르 조각이 없는지를 이해하게 만드는 배경이자 증거에 해당한다.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광란의 역사로서의 공포정치다.

처형한 ‘반혁명분자’ 1만6594명


▎2016년 11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 현장에서 단두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포정치는 독재정치와 같은 의미로 풀이된다. 단두대가 공포정치의 상징이자 수단으로 활용됐다. 로베스피에르가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공포정치의 종말은 로베스피에르 실각의 결과이기도 하다. 혁명의 상징이기도 한 로베스피에르가 단두대에서 사라지면서 공포정치도 사라진다. 정확히 1794년 7월 28일이다. 국민공회 시민난입에서부터 로베스피에르 처형까지는 전부 10개월 남짓하다. 이 기간에 단두대에 처형된 반혁명분자는 전부 1만6594명에 달한다. 로베스피에르 사후에 이뤄진 극좌파에 대한 단두대 처형과 공포정치 기간 중 재판 없이 처형된 사람을 포함할 경우 약 3만 명으로 늘어난다.

단두대 처형이 빈발했던 곳은 남부 마르세유(Marseille)와 서부 벤디(Vendee)와 같은 해안 도시다. 영국의 지원을 받던 왕당파 거점지역으로, 혁명군이 점령한 뒤 대량학살이 자행된다. 현재 프랑스 국가(國歌)는 혁명 당시 히트곡이었던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원형으로 한 곡이다. 혁명 당시 마르세유 출신 의용군들이 불러 파리에 퍼져나간 노래다.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설지만, 중국과 러시아, 심지어 북한에서도 유명한 노래다.

그러나 혁명 당시 상황을 보면, 혁명가를 바친 마르세유는 거꾸로 반혁명지로 전락하면서 피바다로 바뀌었다. 3만 명에 달하는 단두대 처형자의 7할 정도가 마르세유와 벤디와 같은 해안지대였다.

혁명의 ‘전’에 선 공포정치 속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시민 동원 정치다.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 시민들의 명칭은 ‘시토이얀(Citoyen)’으로 통일돼 있다. 영어의 ‘Citizen’에 해당하는 말이다. 혁명 공동체를 유지·책임지는, 자유·평등에 기초한 개인이란 의미다. 성직자·귀족에 대한 경어체 호칭은 물론, 미혼 여성인 마드무아젤(Mademoiselle), 기혼 여성인 마담(Madam), 남자에 대한 무슈(Monsieur)라는 용어도 폐지한다. 계급·계층·남녀노소를 넘어서, 심지어 5살 어린이까지도 ‘시토이얀’으로 호칭했다. 북한의 ‘동무’, 중국의 ‘동지’라는 호칭은 프랑스 시토이얀을 차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상대를 부르는 2인칭 호칭도 모두 평등하게 ‘투(Tu, 당신)’로 통일했다. 자식이 부모를, 시토이얀이 대통령을 부를 때도 ‘투’ 하나면 충분하다.

프랑스 혁명의 기반은 하층 시토이얀이다. 성직자와 귀족을 타도하고, 빵·평등·자유를 얻기 위해 바스티유를 공격했다. 그러나 시토이얀은 조직력이란 점에서 볼 때 취약하다. 첫 시작과 달리 날이 갈수록 혁명 열기도 약해진다. 혁명 피로증에 따른, 반혁명 분위기가 등장하면서 혁명 주체 세력들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공포정치는 그 같은 상황 하의 결과물이다. 반혁명 분자에게는 공포정치를 시행하지만, 혁명 지지 시토이얀에게는 다른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시토이얀이 뽑은 국민공회는 시토이얀을 동원한 시민정치 확산에 주력한다. 21세기 정치무대에 그대로 활용될 법한 갖가지 정치 이벤트가 시행된다.

공포정치의 단짝, 대규모 이벤트


▎로베스피에르, 장 폴 마라와 함께 ‘혁명 3걸’로 꼽히는 조르주 당통의 동상.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1793년 6월 8일 파리 이벤트는 세기적 볼거리로 기록된다. 연출가는 어용(御用) 화가의 대명사인 자크 루이다비드(Jacques-Louis David)다. 당시 혁명정부 국민공회 의장으로 일했다. 이벤트 핵심은 프랑스 혁명을 기념한 시토이얀 행진이다. 파리 거주 시토이얀 대부분이 참가했다. 바스티유에서부터 시작해 파리 전부를 순회했다. 왕당파와의 전투가 벌어진 곳은 혁명 유적지로 개조돼 눈길을 끌었다.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는 혁명 정신 고양만이 아닌, 마시고 떠드는 오락에 있다. 중국 문화혁명 당시 보여준 악극단·합창단·무용단의 광기는 프랑스 혁명 당시의 재현에 불과하다. 혁명 달성을 축하하기 위한 감정 분출이겠지만, 다른 각도에서 풀이해 볼 수도 있다. 혁명이 낳은 불안과 공포를 잊기 위한 집단최면으로서의 춤과 노래다. 시토이얀 대부분은 푸른색 상의에다 혁명 상징인 고깔모자를 썼다. 원래 왕정 하의 거리행진은 십자가를 앞세운 성직자를 시작으로, 귀족·군인·농민·여자·아이들이 뒤를 이었다. 혁명 정부는 어떨까? 나이가 기준이다. 계급·계층·남녀 구별 없이 연장자가 앞이다. 어린이는 제일 뒤에 따라붙었다.

행진 이벤트에 맞춰 수많은 혁명 기념물이 파리 전역에 세워졌다. 마리아 조각상을 대신해 농촌 출신 여성 혁명전사 입상이 들어서고, 종교와 무관한 ‘이성의 여신’도 등장했다. 혁명정부는 사후세계를 부정했다. ‘죽음은 영원한 잠’에 불과할 뿐이라고 역설했다. 신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신과 성직자에 얽매이는 것에 반대했다. 당나귀에게 성직자용 면류관을 씌어도 될지, 지방정부가 국민공회에 문의했다. 답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당나귀에게 모욕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이유다. 파리 행진 도중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도 등장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둘기 목 리본에 ‘우리는(프랑스 시토이안은) 자유롭다. 너희들도 (혁명과 무관한 사람들도 프랑스 시토이안처럼) 흉내 내보렴(We are free. Imitate us)’이란 글귀가 새겨졌다.

혁명정부는 달력도 완전히 개조했다. 예수 탄생에 근거한 달력이 아닌, 혁명달성에 기초한 달력이다. 1792년이 혁명 원년으로, 1주일 체제가 아닌 10일 기준으로 바꾼다. 종래의 수많은 종교기념일은 혁명 전사들을 위한 경축일로 바뀐다.

공포정치와 시토이얀 동원 이벤트로 유지되던 혁명정부는 스스로 모순에 빠지면서 한순간 몰락한다. 파리 이벤트가 끝난 지 1달 뒤,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정부 안에 반혁명세력이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왕당파 성직자가 아닌, 자코뱅으로 대표되던 좌파세력 내 숙청작업이 임박했다는 의미다. 혁명세력 내부에서부터 동요가 시작된다. 로베스피에르를 중심으로 한 혁명지도부의 명령 하나로 단두대행이 결정될 수 있다.

혁명도 출구전략이 중요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 장면. 1년 반 뒤 공포정치를 이끌었던 국민공회의 리더 로베스피에르도 같은 처지가 된다.
1794년 7월 27일, 국민공회 회의 중 의회 쿠데타가 일어난다. 지방 출신 의원들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를 권력남용 독재자로 규탄하면서 즉각 체포할 것을 결의한다. 얼떨결에 이뤄진 결의지만, 국민공회 의원들은 체포에 동의한다. 언제 단두대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반(反)로베스피에르 정서로 나타난 셈이다. 로베스피에르 단두대 처형은 다음 날인 7월 28일 전격적으로 거행된다. 로베스피에르 동생과 측근을 비롯한 10여 명이 처형·자살한 혁명정부 내 쿠데타인 셈이다. 그 유명한 ‘테르미도르 반동’이다.

오해 말아야 할 것은 테르미도르는 왕이나 교회와 무관한, 좌파 세력인 점이다. 같은 좌파지만, 로베스피에르 전횡이 내부숙청으로 향해지자, 거꾸로 공격에 나서 제거한 것이다. 더불어 공포정치도 막을 내리면서 이후 나폴레옹이 프랑스 정치무대에 등장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잇는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 전복을 통한 인류 혁명사의 모델에 해당한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러시아·중국은 프랑스 혁명을 철저히 모방한 모범생이다. 주목할 부분은 자유·평등 같은 이념으로서의 혁명 모델이 아니다. 어떻게 혁명을 일으키고, 체제 변화에 성공할 수 있을지 관한 수단과 방법, 즉 ‘How to’로서의 참고서다.

‘How to’ 모델로서의 프랑스 혁명은 러시아·중국만이 아닌, 촛불혁명 이후 한국 정치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사를 이해하면서 지난 2년6개월간 추진된 법 집행과 정책들의 의미와 배경을 음미하면 어떨까. 물론, 프랑스 혁명사와 비교하는 과정에서 촛불혁명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관한 전망도 가능하다. 인류 혁명사의 공통점이지만, 문제는 항상 내부에서 발생한다. 아무리 집안 단속을 철저히 해도 내부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다. 자신의 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강경책에 휘두르는 과정에서 내부세력의 피해도 나타난다. 피해 당사자의 경우, 당하기 전에 미리 치고 나가게 된다. 사분오열·공동몰락인 셈이다.

2년 전 여름 문 대통령이 혁명 얘기를 꺼냈을 때, 마크롱 대통령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꿈과 슬로건으로서의 혁명도 좋다. 그러나 이미 정권을 잡고 있는 최고책임자라면, 혁명이 가져다줄 현실에 관한 대화가 건설적일 듯하다. 왜 혁명광장이 없는지, 왜 로베스피에르 동상이 파리에 없는지 물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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