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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준봉 전문기자의 ‘젊은 작가 列傳’(9)] 새 소설집 '맨해튼의 반딧불이' 낸 손보미 

“별 얘기 아닌데 소설이 되는 그런 작가였으면 좋겠다” 

찬찬히 읽어야 재미·웃음 보이는 세계… 지금까지 다섯 권 출간
“몸에 힘 들어가면 재즈 댄스 잘 출 수 없어, 글쓰기도 마찬가지”


▎1980년생 소설가 손보미. 2009년에 등단해 지금까지 다섯 권의 소설책을 출간했다. 소설 쓰기에 대한 낯선 접근법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사진 : 임안나
린디합(Lindy Hop)은 스윙 댄스의 한 갈래다. 간단히 휴대폰 검색창을 두드리면 3초 만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스윙 댄스는 그냥 스윙 재즈에 맞춰 추는 춤이라고만 해두자. 유튜브로 검색 경계를 확장하면 린디합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재즈라고 알고 있는(※전문가들에게는 무성의한 글의 전개이겠지만), 고개나 발끝을 저절로 까딱이게 되는 흥겨운 스윙 음악에 맞춰,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라도 올라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무척 흥겨운 일을 만나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 한 쌍의 다람쥐처럼, 팔다리와 몸을 마구 뒤흔드는 남녀의 영상들이 뜬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떤 세대든, 가령 586이든 밀레니얼이든, 지금까지 당신 인생에서 린디합 댄스 장면을 단 한 번이라도 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그만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곁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춤이다.

재즈 댄스 ‘린디합’ 배운 경험 녹인 단편으로 눈길


▎(왼쪽부터) 2013년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2017년 장편소설 [디어 랄프 로렌], 2018년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2019년 짧은 장편 [우연의 신], 2019년 짧은 소설집 [맨해튼의 반딧불이]
그런데도 린디합이라는 춤 이름은 많은 사람에게 낯설 텐데, 이런 억울한 상황을 소설가 손보미(39)식으로 표현해 본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의 몇 작품을 읽어 보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역으로 일어난 일은 역시, 일어난 일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그나마 린디합 대중화의 공로를 따진다면 그 일부는 바로 손보미에게 돌아가는 게 맞다. 물론 이 춤 이름을 제목에 포함시킨 그의 2013년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때문이다. 당연히 기자의 이 글은 린디합 대중화를 위한 글이 아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손보미의 문학 공적 혹은 그가 요즘 한국 소설의 다채로움에 기여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낯선 춤 정보를 제공해 우리의 교양을 늘렸다는 데 있지 않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 ‘그들에게 린디합을’은 린디합이라는 스윙댄스 갈래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고, 외골수 감독의 집착에 관한 이야기이고, 남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이야기들로, 마치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는 듯 두루뭉술하게 처리한, 어떤 인간 감정, 그것들의 교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런 주제의식 혹은 메시지를 손보미는 지금까지 한국 문학이 잘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시공간, 낯선 상황, 어쩌면 지금 여기 우리의 우주 아닌 아득한, 그러나 무시무시한 시공간 저쪽 기적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할 것만 같은 평행우주 시공간 같은 곳에 풀어놓는다. 이런 문장들이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다. 손보미 소설 세계를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해 볼 수 있다.

단순하게 접근하자.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경남 마산에서 보낸 손보미는 2009년 계간 문학잡지 [21세기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침묵’이라는 단편인데 [그들에게 린디합을]에 실려 있다. 단숨에 문학잡지 편집위원들이나 문학출판사 편집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하면 등단했다는 상훈만 남을 뿐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해도 살릴 수 없는, 이 땅의 많은 작가가 경험하는 난관에 봉착해 타개책으로 이른바 ‘등단 세탁’을 감행했다.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재등단했다. 역시 [그들에게…]에 실린 단편 ‘담요’가 그 작품이다. 그러니 손보미 소설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다면 [그들에게…]를 피해갈 수 없다.

사실상 무적 상태였던 첫 2년을 뺀다면 2011년부터 9년째 맹렬히 활동 중인데 지금까지 모두 다섯 권의 소설책을 출간했다.

단순하게 가고 있다는 걸 명심하자. 다섯 권을 순서대로 줄 세우면 2013년 첫 소설집, 놀랍게도 2017년 첫 장편 [디어 랄프 로렌](보통 한국 작가들은 장편을 이렇게 빨리 쓰지 않는다. 대개 단편을 더 써서 소설집을 묶어 낸 다음 장편에 도전한다. 이것 역시 누구의 잘못은 아니다. 그저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2018년 두 번째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올해 1월 짧은 장편 [우연의 신], 지난 9월, 그러니까 아직 따끈따끈한 짧은 소설집 [맨해튼의 반딧불이], 이렇다. 어떻게, 발견하셨나. 다섯 권 가운데 세 권의 제목이 어떤 식으로든 사실상 우리에게 평행우주와 다를 바 없는, 이국의 시공간에 관련된 이야기리라는 점을 드러낸다. [우아한 밤과…]가 덜할 뿐 [우연의 신] 역시 프랑스 리옹이 주 무대다. 2001년 미국의 9·11 테러가 배경에 깔려 있다.

단순히 소설의 시공간만 낯선 거라면 지금 우리 곁의 손보미가 아니라 우주 저쪽 어딘가 평행우주의 손보미일 것이다. 손보미는 그의 소설에 등장시킨 과학자처럼(‘과학자의 사랑’, [그들에게 린디합을]) 온갖 연고와 어떤 경우에는 토착어, 손보미가 한국 작가니까 한국어, 그런 끈적끈적한 것들의 자장이 미치지 않는 무중력 공간에서 인간 감정의 순수한 방정식을 개발해 그 정합성을 입증하려는 사람인 것만 같다.

무중력 공간의 과학자처럼 인간 감정 묘사


▎손보미에게 세상은 우연으로 가득찬 곳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우연을 소설 속에 녹이는 게 관심사라고 했다. / 사진: 임안나
물론 방정식을 풀려는 인간 감정들 자체가 우리에게 낯선 건 아니다. 오히려 익숙한 것들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것들이다. 그의 세계 안에는 가족이나 가정 혹은 부부라는 울타리 안팎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도 있고(‘산책’,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자녀 보육을 둘러싼 갈등도 있다(‘임시교사’, 같은 책). 아, 어딘가 미국의 재즈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1920년대의 흥청망청하고 음험한, 그러면서도 퇴락한 것 같은 쓸쓸함의 정서를 발산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연상시키는 ‘대관람차’ 같은 작품도 있다(역시 같은 책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그런데 기대가 크면 실망할 수 있는 법. 어디까지나 소설 읽기는 투자하는 시간에 비례하는 함수. 이런 점들을 기억하고 손보미 소설에 접근하자. 그의 소설의 서사는 독자를 강한 완력으로 휘어잡지 않는다. 찬찬히 읽어야 웃음이 보이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감을 잡게 된다.

우연이라는 요소를 비중 있게 채택하는 손보미 소설 세계처럼, 우연찮게 2019년 월간중앙 송년호에서 다루게 된 그의 인터뷰는 11월 4일 임안나 사진작가의 서울 자하문로 작업실에서 진행했다. 당신은 당신이 먹은 것이다. 이런 말이 성립한다면 다음과 같은 말도 성립하리라. 당신은 당신이 읽은 것이다. 어떤 독서가 지금의 손보미를 만들었나. 물었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꽤 알려진 이야기인데, 학교 다닐 때(손보미는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여기서 남편인 역시 소설가 김종옥을 선배로 만났다) 레이먼드 카버나 존 치버의 작품들을 정말 많이 읽었다. 지금은 앨리스 먼로를 읽을 때마다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하나, 어떻게 이렇게 소설 쓰지 하는 생각을 한다.”

카버는 기자도 익히 접해본 미니멀리즘 계열 작가. 소설에서 미니멀리즘이란? 미술 회화에서의 미니멀리즘처럼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를 최소한 단순화해 정보와 정서를 가급적 적게 전달하는 계열로 이해하고 있다. 먼로는 노벨상 작가이니 그렇다 치고.

치버의 대표작이라고 손보미에게 소개받은 소설집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황보석 번역)의 표제작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을 이번에 구해 읽어 보니 과연, 손보미 소설의 어떤 대목이 보이는 것 같다. 그저 이렇게만 얘기하고 넘어가자.

노벨상 받은 먼로 소설 읽을 때마다 감개무량


▎손보미에게 소설 잘 쓰는 왕도는 없다. 한 작품 한 작품에 연연해하지 않는 태도로 거침없이 소설을 써낸다. / 사진 : 임안나
지금까지 쓴 작품들 가운데 최고의 작품을 꼽으라면? 이런 얼핏 흥미로운, 그러나 경험적으로 실익은 하나도 없는 질문에(어떤 작가든 클리셰처럼 가장 최근에 쓴 작품이라고 대답한다는 점에서) 손보미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반드시 그 대답이 아니었더라도 그의 가장 최근 소설책 [맨해튼의 반딧불이]는 무르익은 손보미(길이가 200자 원고지 80쪽 안팎 분량의 단편소설보다 훨씬 짧아서였을까), 어쩌면 손보미스러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작품집이다.

이 소설책 가운데 ‘분실물 찾기의 대가’ 연작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제목과 소설 내용과의 상관관계를, 의뢰인의 부탁을 받고 분실물 찾아주는 소설 속 탐정처럼, 그 상관관계를 찾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희미한 이야기, 숨어 있는 이야기, 그런 것들이다. 그런데도 공감의 파장이 만만치 않은 글들.

은은하면서도 싱그러운 소설 특징은 그러고 보니 고삐 풀린 이야기들이 연쇄적으로 꼬리를 무는, 장편 [디어 랄프 로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올 로케’ 같은, 지금은 잘 쓰지 않는 구시대 영화용어를 떠올리게 하는, 한국·미국·독일·스위스를 배경으로 출렁이는 이야기. 그럼에도 결국 풋풋했던 시절, 가슴에 새겼던 인연으로 이야기가 돌아가는.

이쯤 해두고, 듣자. 손보미 육성을. 작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작가를 묻는 대목 이후의 문답이다.

카버나 먼로는 알겠는데 치버는 어떤 작가인가?

“냉소적이라는 점은 비슷한데, 카버가 도시노동자 같은 하층민을 다룬다면 치버는 중산층 남성들의 허위의식 같은 것을 우스꽝스럽게 드러내는 작품을 많이 썼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시대정신인 미투, 페미니즘에 잘 맞지 않는 사람인데, 본인 스스로 그런 면에 대해 엄청나게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얘기했고, 근데 굉장히 잘 쓴다.”

짧은 장편 [우연의 신]도 그렇고, 세계의 우연성이랄까, 필연적이 아닌 세계가 당신 소설에서 중요한 것 같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산문을 잘 썼던 영국 의사 올리버 색스(2015년 작고)가 임상 기록을 풀어 쓴 글에, 치료가 어려운 수면병에 걸린 어떤 환자가 나는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그냥 하느님의 뽑기에 걸린 거다, 이렇게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 구절을 접하고 엄청 많은 생각을 했다. 어떤 사고가 발생해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을 때 죽은 사람들은 정말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우연히, 죽고 살아난 것 아닌가. 그런 걸 어떻게 소설에 녹여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할까. 나도 그냥 우연히 살아남은 사람이야. 그런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소설가여서 좋은 점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것? 되게 뻔한 이야기이긴 한데 레이먼드 카버가 자기는 소설 쓰는 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 쓰는 건 고래 한 마리 구하지 못한다, 다만 내가 하는 일은 세상 사람들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휘트니 휴스턴이나 브리트니 스피어스처럼 한때 잘나갔지만 타격을 입은 여성들 얘기에 관심이 많다. 그런 관심 분야가 있다면 어쨌든 나는 그걸 문장으로 쓸 수 있다. 그렇게 하는 데 돈도 들지 않는다. 그게 가장 좋은 것 같다.”

글 안 될 때 빠져나가는 뾰족한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어려운 점은?

“창작이라는 게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되게 외로운 일인 것 같다. 소설이 너무나 안 돼 괴로워도 아무도 날 도와줄 수 없다. 옆에서 아무리 너는 잘할 수 있어 용기를 북돋워 줘도 결국 써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굉장히 많은 노력을 퍼붓는다고 해도 인풋 대비 아웃풋이 정직하게 나오는 것도 아니다. 가끔 시간 투자한 만큼 결과가 나오는 일을 했더라면 아마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아마 그런 일은 못 했을 것 같다.”

마감은 닥치고 글은 안 돼 괴로울 때 이겨내는 방법이 있다면.

“나는 그런 방법은 없다. 그냥 빨리 끝내자, 이거밖에 없다.”

그래도 웬만큼 수준 있는 글이 나와야 끝낼 수 있는 거 아닌가?

“요즘 느끼는 건데 너무 한 작품에 연연하지 말자, 그런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도 많이 쓸 작가고, 막말로 장편도 1년에 한 편, 단편소설도 한 달에 한 편씩 쓸 수 있잖아, 그런 생각 한다. 남편이 맨날 내게 해주는 얘기도 그런 얘기다. ‘그냥 흘려보내.’”

스스로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하나?

“작가로서 남편은 스타일리스트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스타일리스트이고 싶지 않다. 그냥 별 얘기 아닌 걸 썼는데 그냥 소설이었으면 좋겠는, 그런 작가였으면 좋겠다.”

이 얘기는 꼭 하고 넘어가자. 손보미는 실제로 린디합에 빠져 도합 5, 6년, 등단 이후에도 한동안 춤을 췄다고 했다. 그는 어깨나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춤을 절대 잘 출 수 없다는 점을 뼈저리게 배웠다고 했다. 스스로 자신의 신체에 대해 잘 알고 잘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아니었다는 것. 춤 선생의 지시에 따라 몸에서 힘을 뺀다고 뺐는데도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다는 지적을 받곤 했단다. 이런 교훈을 확장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가령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손보미는 소설도 힘 빼야 잘 쓸 수 있다고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당신은 어디까지 힘 뺄 수 있나. 일이든 생활이든 사랑에서든.

※ 신준봉 문화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 1993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신문사에서 10년 가까이 문학담당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문학과 인연을 맺었다. 상식의 눈에는 괴짜인 문인들, 그들이 생산한 영롱한 것들을 초롱초롱한 독자들에게 중개하는 일, 제도로서 문학의 생로병사에 관심이 많다.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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