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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 전문기자의 대학총장 열전] 서해안 중심대학 이끄는 임태희 국립 한경대 총장 

“AI농업·웰니스·미세먼지 연구 특화 길을 만드는 T자형 인재 키울 것” 

80년 역사 입학정원 1134명 강소 대학, 농업·복지·환경 경쟁력 탄탄
세계 AI농업대회 본선 진출… 록히드 마틴사와 미세먼지 공동 연구도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융복합 인재를 양성하는 ‘한경 비전 2030’을 선포한 임태희 한경대 총장이 중앙도서관에서 미래 구상을 밝히고 있다. 쉼 없이 도전하고 창조할 수 있는 젊음의 특권은 질문(Question), 즉 Q에 있다는 의미로 도서관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경기도 안성시 중앙로(석정동)에 있는 한경대학교는 작지만 강한 국립대학이다. 13개 학부 31개 전공의 입학 정원은 1143명, 전체 재학생은 5400여 명이다. 규모는 작아도 농생명과 웰니스(wellness) 사회복지, 환경과 공학 분야는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새로운 도전과 창조, 경기도의 유일한 국립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캠퍼스에 있는 중앙도서관과 농학관을 둘러보니 기말고사 준비 중인 학생들과 연구에 몰두하는 학생들에게서 자신감과 열정이 느껴졌다. 제1 농학관 3층 채소원예학 실험실에서 만난 이효주(식물바이오 박사과정)씨는 “쌀 전분 함량변화와 유전자 기능을 연구하고 있다”며 다양한 식물의 유전자를 분석하는 과정을 소개했다.

교육분야를 오래 취재했어도 한경대 방문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친근감이 느껴졌다. ‘안성맞춤’의 고장 안성에 있는 한경대의 출발이 농업이어서 그럴까. 뿌리를 찾아보니 흥미롭다. 모태는 안성공립농업학교다. 1939년에 독지가 박필병(朴弼秉) 선생이 10만원을 기부했다. 당시 쌀 1말이 3원60전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가치는 엄청났다. 농업학교 설립에 필요한 16만원 중 10만원을 박필병 선생이 댄 것이다. 그해 3월 24일, 안성읍 석정동의 5만8000여 평 부지에 학교 설립 인가가 떨어졌다. 개교 당시엔 교사(校舍)도 마련되지 않아 1년을 안성공립보통학교(현 안성초교) 교실을 빌려 사용하다 1940년부터 석정동 현 위치에서 수업했다.

2030년까지 전국 30위권 대학 목표


▎임태희 한경대 총장이 2019년 10월 31일 국내 최초의 직업 중점 특수교육기관인 한길학교와 공동 개최한 장애인 직업체험경진대회 체험 부스를 방문하는 모습. / 사진:한경대
1940년 교사를 신축 이전하고 실험실습지와 운동장을 닦으면서 터전을 잡았다. 1949년 안성농업중으로 교명을 바꿨으며, 1965년 농업·축산·원예과 등 3개과 15개 학급으로 구성된 5년제 안성농업고등전문학교로 승격했다. 1970년 2년제 안성농업전문학교를 거쳐 1979년 안성농업전문대로 승격돼 본격적인 대학의 모습을 갖췄다. 이후 1993년 안성산업대로 개편되고 1999년 한경대로 교명을 변경한 뒤 2012년 3월 1일 일반대로 거듭났다. 성상(星霜)의 80년 역사를 간직한 한경대는 ‘2030 비전 선포식’을 통해 새로운 날개를 펴고 있다.

2019년 12월 5일, 임태희(63) 총장은 총장 부임 2년여 만에 ‘2030 한경 비전’을 선포했다. ‘길을 만드는 대학, 경기 대표 국립대’로서 2030년까지 전국 30위권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도전하는 지성인, 융합형 전문인, 소통하는 사회인이 3대 키워드다. 1단계(2019~2021년)는 기반 구축, 2단계(2022~2025년)는 개혁 확산, 3단계(2026~2030)는 조직문화 확립이다. 행정고시 24회로 엘리트 재무 공무원을 거쳐 제16·17·18대 국회의원, 고용노동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거쳐 2017년 10월 한경대 리더가 된 임 총장은 대학인은 아니다. 그런 그가 학령인구 감소에 따른 위기를 극복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 고등교육 패러다임을 이끌 수 있을지 궁금했다.

총장이 되신 걸 보고 놀랐습니다. 공직과 정치에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총장직은 3D 직업이라는 분들이 많더군요. 위계가 확실한 공직이나 조직에서 일했던 분들은 ‘말 안 듣는다’ ‘뭘 하고 싶어도 안 따라준다’고 하십니다. 그런 요소를 고려해도 국회의원보다 훨씬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곳이 학교네요.”

한국 대학, 획일화되고 서열화만 남아


▎한경대와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2018년 5월 16일 종자보호 및 연구를 위한 상호협정을 체결했다. 임태희 총장이 수목원 종자실험실을 찾아 연구원들을 격려하고 있다. / 사진:한경대
왜 대학 총장이 되셨나요?

“저도 사실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연(緣)도 없었고요. 정치권을 떠나 2014년부터 한국정책재단 이사장을 맡았어요. 정부 정책 사각지대 놓인 분들을 돕는 재단으로 소상공인과 다문화 가정 등 소외계층을 위해 일합니다. 그런 일을 하다 총장 제의를 받고 고민했는데 예전 경험이 떠오르더라고요.”

인생은 경험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경험이었나요?


▎공학 인재양성을 위해 한경대는 매년 대학·고교와 함께 공학 페스티벌을 연다. 지역 내 고교 학생들이 출품한 작품을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는 임태희 총장. / 사진:한경대
“의원 시절 국회 교육위원회 활동을 한 적이 있어요. 한나라당 교육선진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위원회 회장을 맡고, 간사를 이주호(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당시 의원이 했지요. 대학보다는 초·중·고에 집중했어도 느낀 게 많았어요. 교육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생각도 했고요. 그런 생각을 더 굳히게 된 건 서울대 초빙교수로 1년 동안 강의한 경험이었어요. 고민을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치에 연연하기보다는 대학에서 공적 책임을 다하는 것도 보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막상 한경대에 와 보니 어떻습니까?

“국립대지만 브랜드 파워가 아직은 약하고, 정부의 고등교육 정책도 문제가 있더군요. 제 생각으론 대한민국 대학은 서열만 있을 뿐 ‘아, 이 분야는 이 대학이 최고’라는 브랜드화는 전무한 것 같아요. 대학 책임도 있지만 사실 교육부 책임이 커요. 동일 기준으로 평가하고 구조조정을 하니 자율운영이 어렵잖아요. 대입 때문에 고교교육이 획일화되는 것처럼 각종 평가 때문에 대학이 획일화되고 서열화만 남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경대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요?

“국립대도 ‘이렇게 변화할 수 있구나’하는 사례를 만들자는 게 구성원과 저와의 합의 사항입니다. 그걸 내걸고 총장에 응모했고, 선택됐고, 전진하고 있습니다.”

총장실 벽에는 ‘길을 만드는 대학, 경기 대표 국립대학’이란 문구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었다. 임 총장이 부임 후 새로운 비전 방향을 제시하며 만든 구호다. 그는 개혁 방안을 네 가지로 설정했다. 인공지능(AI) 스마트팜이 중심이 되는 농생명 바이오, 호모 헌드레드 시대의 웰니스, 전문대인 한국복지대(평택시)와의 통합, 그리고 미세먼지 연구 등 환경 분야 특성화다. “한국 교육에서 가장 필요한 건 도전과 창조적 발상입니다. 그런데 국립대에선 그런 정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학교에 오자마자 어떤 도전을 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런 과정에서 농생명과 고령화, 환경을 가장 큰 시대적 변화로 보게 되었죠.”

스마트팜은 미래 융·복합 농업의 모델


▎구성원과의 소통을 중시하는 임태희 한경대 총장이 2018년 9월 잡카페에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임 총장은 학교 정책에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 사진:한경대
한경대의 미래 스트롱 포인트를 설정하신 거군요.

“대학은 원래 보수적인 집단이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모태인 농생명에 집중하고, 공학을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전통의 가치를 지키면서 장점을 강화하는 게 중요합니다.”

농생명 분야부터 이야기하죠. 가장 상징적인 건 세계 농업 인공지능대회 본선 진출인 것 같습니다. AI 농업, 참 매력적입니다. 전문가를 많이 키우면 국내 최고가 될 수 있을 텐데요.

“한경대는 종자(種子)와 스마트팜, 그리고 신재생 에너지인 바이오 가스 연구 경쟁력이 탄탄합니다. 공대와 연계한 스마트팜은 실제로 축산 농가를 스마트팜으로 바꾸는 일을 기업과 공동으로 하고 있어요. 농업은 전통적이고 학교는 보수적이니 쉽게 도전 못 하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미래 농업 전문가인 민승규 박사를 석좌교수로 모셔왔어요. 이명박 대통령 때 청와대 농업비서관, 농림부 차관, 농촌진흥청장을 지낸 분이죠. 민 교수는 벤처 농업대학을 운영하면서 농업 전문가를 키우는 도전을 하고 있어요.”

민 교수팀이 AI 농업대회 본선에 진출했지요?

“농업 분야 세계 최고 대학인 네덜란드 바헤닝언대와 중국 IT기업 텐센트가 공동 주체한 ‘2019 세계 농업 인공지능대회(Autonomous Greenhouses International Challenge 2019)’에서 당당히 2위로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진출했어요. 재배 전문가가 직접 온실 환경과 급수 조건을 설정하는 것과 AI가 온실 환경을 제어하는 것을 비교해 어느 쪽이 생산성과 에너지 절감이 우수한지를 겨루는 대회죠. 세계 21개 팀이 경쟁했는데 우리가 2위를 했어요.”

글로벌 농업 경쟁력이 시설·장비·기술에서 빅 데이터와 AI 활용능력으로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이번 쾌거는 의미가 크다. 우리 농업도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국팀은 민승규 교수를 단장으로 에이넷·스페이스워크·팜에이트·이지팜·아이오크롭스 등 농업 IT 기업과 함께 팀을 꾸렸다.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 석좌교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인 ‘디지로그(DigiLog)’를 팀 명으로 지어주며 응원했다. 그 결과 디지로그는 본선에 진출한 5개 팀 중 2위로 최종 자웅을 겨루게 된 것이다.

본선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네요.

“12월 19일부터 6개월 동안 바헤닝언대 유리온실에서 AI를 활용해 방울토마토를 재배합니다. 농업의 이세돌하고 AI 알파고 하고 시합하듯, 5개 팀이 네덜란드 농사왕하고 실력을 겨룹니다. 5개 팀은 사람 개입 없이 AI의 판단만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물·햇빛·비료의 총량 판단을 AI가 내립니다. 6개월 뒤 AI가 수확한 방울토마토 품질과 수량을 농사왕하고 비교해 성적을 매깁니다.”

오이를 재배한 2018년 1회 대회에선 우승팀 수확량이 재배 경력 20년의 베테랑 농부 수확량보다 14% 많아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인공지능과 빅 데이터가 농업의 미래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임 총장은 “AI와 빅 데이터를 활용하면 장비 자동화와 질병 조기 탐지와 예방, 시장 변화와 소비자 기호까지 분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농업의 ‘업(業)’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런 혁신적인 방법을 커리큘럼에 반영하는 게 중요합니다.

“교수들이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있어요. 스마트팜은 미래 융·복합 농업의 모델입니다. 생산성이 좋은 육종의 빅 데이터, 즉 온도·습도·일조량·영양 성분 데이터가 출발점이죠. 우리는 현실적으로 그런 자료 확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외국 종자 빅 데이터를 들여와 연구할 수밖에 없어요. 계속 실험하며 축적해야죠. 데이터 사이언스입니다. 공대가 관련 기술을 개발하며 시너지를 낼 겁니다.”

스마일 에이징 연구, 한국복지대와 통합 추진


▎한경대 인문사회과학관과 운동장 전경. 80년 역사의 한경대는 독지가 박필병 선생의 기부금으로 1939년 설립된 농업학교가 모태다. / 사진:한경대
스마트팜이 일부 진행 중이지만 갈 길이 멀지요?

“수원 친환경농업센터에 경기도형 스마트팜을 구현할 계획입니다. 스마트형 친환경 농업, 다시 말해 AI 생산시스템을 통해 농업 패러다임의 대전환을 꾀해야 합니다. 그래야 저출산·고령화 시대 노동 구조 변화에 탄력성이 생겨요. 세계적으로 종자 전쟁도 벌어지고 있는데 한경대가 토종 종자는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을 겁니다. 김태완 식물생명환경공학과 교수가 1400개 넘게 확보했어요. 통일에 대비해 북한산 종자도 확보해야 합니다. 국가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해요.”

임 총장은 한경대의 두 번째 브랜드로 ‘웰니스(Wellness)’를 꼽았다. 웰니스는 ‘well being + happiness + fitness’의 합성어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를 맞아 ‘웰니스산업융합부’를 만들고, 전문대인 한국복지대와의 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장·노년기의 삶의 질 향상 관련 분야를 특화하는 국내 최초의 융합 시도다. 고령화를 고령화로만 접근하는 건 간접 대책에 불과하고, 건강하게 나이를 먹는 ‘스마일 에이징(smile aging)’ 케어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기성 세대는 연간 100만 명이 태어나 모든 시스템이 100만 명에 맞춰져 있었어요. 하지만 30만 명도 태어나지 않는 시대의 고령화는 젊은 세대에게 짐이 됩니다. 그걸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웰니스입니다. ‘웰 에이징’이라고도 하지만, 한경대는 ‘스마일 에이징’이란 용어를 쓰기로 했어요.”

왜 스마일 에이징인가요?

“웃어야 합니다. 건강해야 웃을 수 있어요. 그다음엔 일이 있어야지요. 일이 없으면서 스마일 할 수 없잖아요. 그다음엔 문화와 인간관계가 중요하지요. 그리 안 되면 스마일 에이징은 어려워요. 고령화 사회의 키워드입니다.”

웰니스산업융합학부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게 됩니까?

“세부 전공은 의류산업학·아동가족복지학·식품영양학·웰니스스포츠과학입니다. 기존 전공을 학부로 개편한 것이죠. 웰니스 전공이 융합되고 다시 스마일 에이징 학문으로 발전하는 거지요. 그 과정에서 융·복합이 일어납니다. 식품영양·패션·가족·복지·건강·스포츠 등이 녹아든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국립 전문대인 한국복지대와 통합을 시도하는 것이군요?

“그렇죠. 장애는 어느 한 분야가 ‘disable’ 된 것이지만, 나이가 들면 활동력이 떨어지는 ‘less able’이 나타나죠. 둘은 사실 통합니다. 해결 방법이 상통해요. 노하우가 쌓인 복지대와 합쳐 시너지를 내려는 이유입니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 간 통폐합은 더 활발해져야 합니다.

“그간의 통폐합은 구조조정이나 규모 확대 시도만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실패로 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부산대와 밀양대를 통폐합하니 밀양대가 사라지고, 경북대와 상주대를 통폐합하니 상주대가 없어지는 식이죠. 우리는 서로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시도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보지 못한 통합 사례가 될 수 있어요.”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교육부의 입장이 중요하네요.

“한국복지대는 13개 학과에 입학정원이 211명인 미니 대학입니다. 총 입학정원의 30%를 장애학생으로 선발하는데 공공행정과·장애상담심리과·장애인레저스포츠과는 100% 장애 학생입니다. 한경대와 통합해도 특수성을 인정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교육부는 4년제 간 통합은 정원의 40%, 4년제와 전문대는 정원의 20%를 줄이라고 합니다. 기준을 획일적으로 적용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통합 목적이 구조조정이 아니라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지금은 소품종 대량생산이 아니라, 다품종 소량 생산이 중요해요. 그게 대학의 인재 양성 메커니즘이어야 합니다.”

“조국사태로 입시제도 바꾼 건 신중치 못해”


▎한경대 건축학부는 매년 노후 농가를 찾아가 무료로 집을 고쳐주고 있다. 경기도 안성의 노후농가를 방문해 학생들을 격려하는 임태희 총장. / 사진:한경대
교육부 정책에 총장들의 불만이 많습니다. 국회의원과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을 하시며 직접 정책에 관여하셨는데 문재인 정부의 정책을 어떻게 보나요?

“기본적으로 건전성 규제만 해야지요. 건전성만 살피고 자유롭게 놔두라는 얘기입니다. 그게 안 되고 있어요. 예전에 금융을 몽땅 정부가 통제할 때가 있었죠. 당시 금융서비스라는 게 은행 간 차이가 거의 없었어요. ‘집에서 가깝나’ 여부가 기준일 뿐 실질 서비스는 똑같았어요. 그런데 카카오뱅크를 보세요. 얼마나 서비스가 다양해요. 정부는 기본 관리만 하면 되잖아요. 고객 돈을 이렇게 관리하라, 위험하지 않게 적어도 이 정도는 건전하게 운영하라는 식으로요. 기본이 안되면 권고만 하고요. 대학도 그래야 하는데 전부 사전규제입니다.”

답답한 듯 임 총장은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재무부 공무원 시절 규제를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는데 ‘이재국(理財局)’ 간판을 내려도 전혀 상관이 없고 외려 더 잘 되더라는 것이다. “조직을 만들어 놓으면 자꾸 영향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흘러요. 공무원 세계의 법칙 같아요. 교육부도 그런 차원에서 봅니다. 20, 30년을 내다봤으면 좋겠어요.”

교육부가 입시를 통제하는 데 그건 어떻게 봅니까?

“조국 사태로 대입을 바꾼 건 신중하지 못했어요. 나름대로 학생부종합전형을 통한 수시는 장점이 많아요. 수시 입학생이 정시 입학생보다 적응 잘하고 만족도도 높아요. 스카이대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학이 그렇죠. 그런 추세를 꺾어버리는 것은…. 저는 교육부가 몇 년 후에 이번 결정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요. 정치권력에 맞춰 중요한 제도를 또 바꿨다는 비판을 받을 겁니다.”

곧 정시가 시작됩니다. 한경대는 어떻게 뽑는지요?

“이번 입시(2020학년도)부터 학부제를 도입했어요.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다양한 부분에 능통한 T자형 인재를 키우기 위한 것입니다. 연관성이 깊은 기존 학과를 13개 학부로 통합했어요. 신입생들은 여러 전공이 융합된 학부에서 공부한 뒤 2학년부터 자신의 전공을 고르게 됩니다. 정시는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정원 내에서 385명을 모집합니다. 실기를 치르는 일부 전공을 제외하고 수능을 100% 반영해요. 백분위를 반영하며 영어영역만 등급별 배점을 적용합니다. 한국사는 응시 여부만 확인하고 탐구영역 중 직업탐구는 반영하지 않습니다.”

임 총장의 또 다른 키워드는 미세먼지였다. 안성지역은 초미세먼지 농도가 전국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대기오염이 심각하다. 중국에서 날아드는 미세먼지, 평택항 선박과 산업단지 오염물질이 안성 동쪽 차령산맥에 막혀 빠져나가지 못하는 탓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에 주목한 한경대는 정부 미세먼지 대책사업비(240억원)를 받아 도로 미세먼지 저감 실증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도심 도로변 미세먼지를 10~30% 이상 감축하는 청정도로 인프라 적용 기술개발이 목표다.

미세먼지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특이합니다.

“수질 분석은 우리 대학이 경기 남부권에서 최고예요. 식품 오염도 분석과 토양 질 관리, 오염 토양 정화 기술도 독보적입니다. 물·흙·공기는 인간의 기초 환경이죠. 미세먼지 연구에 나선 까닭입니다. 1차로 도로에서 발생하는 오염원부터 연구합니다. 자동차 미세먼지를 30%까지 절감하는 기술 실용화가 중요해요. 계절 빅 데이터를 활용하면 바람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어요. 바람장, 즉 바람길 지도를 만들려고 합니다.”

미국 록히드 마틴사와 MOU를 체결한 배경은 뭔가요?

“국내 동북아 바람장 정보와 외국 미세먼지 지도를 이원화해 조사, 추적할 플랫폼 구축이 시급해요. 세계 최대 방위산업체 록히드 마틴은 바람장 측정용 도플러-라이다를 보유하고 있어요. 그래서 한경대 한국미래융합기술연구원과 함께 우리 실정에 맞게 도플러-라이다 공동 개발을 통해 한반도 미세먼지 근원 추적과 저감 연구를 진행하려 합니다.”

은행원·공무원·정치인·총장 인생 4모작


▎80년 역사의 한경대는 농생명 분야에 강점이 있다. 임태희 총장이 학생 교육과 창농수업에 활용되고 있는 부속농장을 방문해 직접 포도 따기 체험을 하고 있다. / 사진:한경대
고등교육 담론을 나누다 개인 임태희가 궁금해졌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은행에 다니다 행시에 합격한 엘리트 공무원이 국회의원을 거쳐 고용노동부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총장에 이르렀으니 다양한 스토리가 있지 않겠는가. “세계적인 국제활동을 하고 싶어서 처음엔 외환은행에 다녔어요. 7개월 다니다 보니 재무부에서 정해놓은 룰을 집행하는 곳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룰을 지키는 곳이 아닌 룰 메이킹을 하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행시를 쳤어요.”

20대에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네요.

“서울대를 재수해 들어갔고 곧바로 은행 취직을 했어요. 형편이 어려워 가장 역할을 해야 했거든요. 대학생 땐 공인회계사 준비를 조금 했었죠. 그런데 1979년에 문제지 유출사건이 있었어요. 그래서 시험을 다 치르지 못했어요. 은행에 취직한 그해 가을, 공인회계사 시험준비를 했던 사람들이 행시 1차를 봤어요. 저도 1차는 붙었죠. 운도 따랐어요. 2차를 볼 때 사실 다른 건 준비됐는데 헌법은 준비가 안 돼 있었어요. 그런데 5.18 때문에 헌법이 정지됐어요. 일반 법리만 공부하면 됐죠. 그 덕에 1980년 10월에 붙었어요. 수습 받다가 1982년 공군 장교로 입대했고요.”

재무 공무원으로 일하던 그는 1996년부터 2년간 영국 옥스퍼드대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당시 토니 블레어 총리의 당선 과정과 국정 운영을 보면서 정치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블레어는 제3의 길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때의 경험이 인생을 뒤흔들었습니까?

“정치가 사회를 바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국 정치인들은 확실하고 실력이 있어요. 1998년 외환위기 때 귀국한 뒤 청와대 경제비서실 금융담당 행정관으로 금융 구조조정 업무를 했어요. 은행·증권·보험 등 제도 금융권 임직원을 3분의 1 해고하는 일을 해야 했어요. 24만 명 중 8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어요. 기막힌 일이죠. IMF에서 그렇게 요구를 하니까. 원래 경제부처 갈 때는 국민을 잘살게 하는 역할을 하려고 했는데 자르는 일을…. 너무 충격적이었죠. 자괴감이 들었어요. 정치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사표를 냈어요. 과장 시절인데 제 동기들은 과장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었죠.”

임 총장은 그 후 고향인 성남시 분당구을에 출마해 제 16~18대 의원을 지냈다. 2014년 재보궐선거와 2016년 20대 총선에선 고배를 들었다. 좌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첫 아픔은 고입 1차(서울고)에서 떨어져 2차(경동고)로 들어가고, 대입 재수생 시절에 겪었다. “지금도 서울고에 떨어진 이유를 모르겠어요. 대학도 2차로 갈 수는 없다는 오기로 재수를 했죠.”

임 총장은 진짜 좌절은 다른 데 있었다고 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판교의 시골학교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는데 고교 1학년 때 60명 중 46등을 했다는 것이다.

“충격이 너무 커 당장 유도부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유도부 선배가 ‘공부도 못하는 놈이 무슨 공부냐’며 빠다를 때리더군요. (웃음) 겨우 빠져나왔어요. 미친 듯이 공부했죠. 제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입니다.”

“자신에게는 추상, 타인에게는 봄바람”

큰 사건이었군요. 삶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있습니까?.

“글쎄요. 정치하면서 어떤 정치인이 되면 좋을까 고민했는데 바로 윈스턴 처칠입니다. 대기만성 인물인 데다 옳다는 일은 실행하는 인물이죠. 처칠이 아니었으면 영국은 승전 대열에 끼지 못했을 겁니다. 시대 흐름을 잘 읽은 리더죠. 저는 남북관계에 관심이 많아요. 기회가 되면 역할을 하고 싶어요.”

혹여 “총선도 다가오는데 정치를 또 할 의향이 있냐”고 묻자 “공적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욕심을 부리는 건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총장직을 내려놓고 지역구에서 경선 준비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시대의 역할이 주어지면 정치를 바꾸는 역할을 하고 싶다”며 여운을 남겼다.

국회의원 당시 네 차례나 기자들이 뽑은 ‘신사 국회의원’에 오른 임 총장은 ‘합리적인 조율사’ ‘조용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로 누구도 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만드는 친화력이 있다.

인생의 좌우명이 무엇인지요?

“‘지기추상 대인춘풍(知己秋霜 對人春風)’입니다. 나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봄바람처럼 대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제 인생을 하늘나라에서 제 모든 기록을 다 비디오로 찍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하늘나라 비디오’이지요. 늘 가슴에 품고 삽니다.”


※ 임태희 총장 약력
■ 1956년 경기도 성남 출생
■ 서울대 경영학 학사·석사
■ 영산대 경영학 명예박사
■ 1980년 제24회 행정고시
■ 1985년~1999년 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
■ 1996년 7월~1998년 6월 영국 옥스퍼드대 객원연구원
■ 1998년 7월~1999년 7월 청와대 경제비서실 금융담당 행정관
■ 2000년 5월~2010년 10월 제16·17·18대 국회의원(경기 성남시 분당구을)
■ 2009년 9월~2010년 7월 고용노동부 장관
■ 2010년 7월~2011년 12월 대통령실 실장
■ 2014년 12월~2017년 11월 한국정책재단 이사장
■ 2017년 10월~ 국립 한경대 총장

※ 양영유 교육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 고려대 영어교육학과를 나와 한국외국어대에서 교육저널리즘으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9년부터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교육데스크, 정책사회데스크, 사회1데스크, 행정국장, 사회에디터를 거쳐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마음은 따뜻하고 시선은 엄정해야 한다는 저널리즘 소신을 갖고 있다. 공저[한국의 파워 엘리트]와 역서[멀티미디어 조직혁명]이 있다.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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