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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2부)] 중세 중국화와 유교 수용의 주역들(5) 정도전, 성리학 혁명을 결심하다 

‘실패든 성공이든 역사에 이름 남기는 게 중요하다 

망년지우 정몽주의 깊은 가르침 이후 4서집주 연구에 매진
존사문(存斯文) 기치 걸고 고려왕조 뒤집어엎기로 마음먹어


▎북한 개성의 만월대와 송악산 전경, 1998년 모습이다.
정도전은 1342년(충혜왕 복위 3)생으로 호는 삼봉(三峯)이다. 이성계보다 7세, 정몽주보다는 5세 연하다. 부친은 정운경(鄭云敬)인데 정도전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행장에 의하면 젊은 시절 과거를 준비하던 정운경은 외삼촌 안분(安奮)을 따라 개경에 갔으며 목은 이색의 부친인 가정 이곡과 망년지우가 됐다.

정운경은 1330년(충숙왕 17)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시작했는데 강직과 청렴으로 이름을 날렸다. 1366년(공민왕 15) 1월 정운경이 세상을 떠나자 친구들은 ‘염의(廉義)’라는 사시(私諡)를 지어 줬다. 그 이유를 친구들은 “돌아가신 벗 정 선생은 일찍 과거에 합격했고, 또 빛나는 벼슬도 지냈으니 출세했다고 할 만하지만 집에는 여유 있는 재물이 없어 처자식들이 춥고 배고픔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선생은 담담하게 여겼으니 염(廉)이 아니겠는가? 또한 선생은 벗이 작은 환란을 당해도 몸소 구제하는 책임을 졌다. 하지만 의리가 아니라면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하찮게 봤으니 그 또한 의(義)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친구들이 지어준 ‘염의’라는 사시 그대로 정운경은 청백리(淸白吏)였다. 그 같은 정운경의 큰아들 정도전 역시 아버지를 닮아 청렴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정도전은 아버지와 같은 관리가 되고자 어려서부터 과거를 준비했다. 그렇게 과거를 준비하던 정도전의 삶은 10대 후반 정몽주를 만나면서 크게 변했다. 16~17세 즈음 정도전은 진사시험을 준비하면서 주로 한시(漢詩) 공부에 전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민안인(閔安仁)이 찾아와 “내가 정몽주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한시나 짓는 공부는 말예(末藝)다. 그것 말고 신심(身心)의 학문이 있는데 그것은 [대학]과 [중용] 두 책에 잘 갖춰져 있다’ 하시기에 나는 이순경(李順卿)과 함께 두 책을 가지고 삼각산 절에 들어가 공부하고 있다. 그대는 그 사실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그 당시 한시 공부에 전념하고 있던 정도전에게 ‘한시나 짓는 공부는 말예’라는 정몽주의 언급은 큰 충격이었다. 한시를 공부해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정도전에게 과거 합격은 왜 하려는 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함께 신심의 신학문이 유행하는데 자기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신심의 학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대학]과 [중용]을 구해 읽어 봤다. 이 독서가 정도전과 성리학의 최초 만남이었다. 즉 젊은 정도전을 성리학자로 인도한 인물은 정몽주였던 것이다. 훗날 정도전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비록 잘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자못 기뻤다”고 했다.

당시 정도전이 구해 읽은 [대학]과 [중용]은 당연히 주자의 4서집주(四書集註)였다. 성리학 개념을 전혀 모르던 정도전에게 성리학 개념을 중심으로 해설된 주자의 [대학집주]와 [중용집주]는 당연히 낯설었다. 그럼에도 ‘자못 기뻤다’고 한 것으로 봐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감동되는 부분이 제법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정도전은 일단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한시 공부에 전념하며 그 이상 성리학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정도전이 19세 되던 1360년(공민왕 9) 포은 정몽주가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는 일이 있었다. 단순한 장원급제가 하니라 초시·복시·전시에서 모두 장원급제하는 사건이었다. 이런 것을 3장원이라고 했는데 바로 정몽주가 3장원을 차지했던 것이다.

고려 최초 3년 시묘살이 실천

당시 과거 준비생들에게 정몽주의 3장원은 크나큰 사건이었다. 우선 3장원의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다음으로 3장 원의 비결은 분명 정몽주가 언급했던 신심의 학문에 있을 것인데 그 신심의 학문이 무엇일까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과거 준비생들은 신심의 학문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노력했다.

정도전 역시 마찬가지였다. 훗날 정도전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때 마침 국가에서 과거를 시행하자 정 선생은 삼각산에서 내려와 연속 3장에서 장원해 명성이 자자했다. 그래서 나는 급히 찾아가 뵈었다”고 언급했다. 그때 정도전이 급하게 정몽주를 찾아간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몇 년 전 읽던 [대학집주]와 [중용집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정몽주를 찾은 정도전은 우선 [대학집주]와 [중용집주]부터 질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질문들은 매우 예리하고 깊이 있었을 듯하다. 그래서 정몽주는 깊이 감동했던 것이 분명하다. 당시를 회고하면서 정도전은 “정 선생은 급히 찾아온 나와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평생 친구처럼 하시고, 드디어 가르침을 주셨는데 날마다 듣지 못한 바를 가르쳐 주셨다”고 했다.

정도전이 언급했듯이 정몽주가 처음 찾아온 정도전을 ‘평생 친구처럼’ 대우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예리한 질문 때문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정몽주는 벽이단(闢異端)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벽이단이란 말 그대로 ‘이단을 물리친다’는 뜻인데,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무속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배척하는 것이 벽이단이었다.

사실 안향이 성리학을 고려에 들여온 목적도 벽이단을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안향 이래의 성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벽이단을 자신의 사명으로 간주했고, 정몽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같은 정몽주를 찾아온 젊은 정도전은 부친 정운경을 닮아 청렴 강직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을 것이다. 그런 정도전이 예리하고 공격적인 질문을 퍼붓자 정몽주는 성리학의 벽이단을 위해서는 이런 인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듯하다. 그래서 정몽주는 처음 본 정도전을 마치 평생 친구처럼 친근하게 대하며 자세하게 설명해 줬을 듯하다.

뿐만 아니라 정몽주는 한 번만의 가르침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상당한 기간 동안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정도전은 [대학집주] [중용집주]에 더해 [논어집주] [맹자집주] 등 4서집주를 두루 배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정몽주에게 4서집주를 배운 정도전은 성리학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게 됐다.

그 결과 정도전은 19세이던 1360년(공민왕 9) 성균관 시험에 합격했고, 2년 후인 1362년(공민왕 11)에는 과거시험에도 합격했다. 결국 정도전에게 성리학을 가르쳐 과거시험에 합격하게 만들어준 은인은 정몽주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벼슬길에 들어선 정도전은 정몽주를 사표로 삼아 벽이단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불교와 무속 공격에 앞장섰다.

그런데 정도전이 과거에 합격하고 4년 후인 1366년(공민왕 15) 1월 부친 정운경이 세상을 떠났고 연말에는 모친까지 세상을 떠났다. 정도전의 나이 25세 때였다. 당시 관행은 불교 장례였지만 정몽주에게 성리학을 공부한 정도전은 불교 장례를 거부하고 유교의 3년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당시 고려에서 유교의 3년상과 3년 시묘살이를 실천한 인물은 포은 정몽주가 처음이었다. 정도전은 자신도 정몽주처럼 3년상과 3년 시묘살이를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청렴강직한 성품에 더해 정몽주에 대한 존경심에서였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불교 장례는 100일 장례가 보통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교의 3년상을 치른다는 것은 기간도 기간이지만 너무나 위험하고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장례 이후 산속에서 홀로 3년 간 시묘살이를 해야 하는 것이 위험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에 최초로 3년 시묘살이를 결행한 인물이 바로 정몽주였다. 정몽주가 청렴 강직하고 실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 역시 정몽주처럼 청렴 강직하고 실천적인 인물이었기에 3년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 3년상의 위험과 괴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맹자]를 보내 줬다고 한다. 그 [맹자]는 주자의 [맹자집주]가 분명하다. 3년 간 시묘살이 틈틈이 [맹자집주]를 읽으면서 마음을 가다듬으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정몽주는 정도전이 [맹자집주]를 읽고 벽이단의 선봉장이 되기를 바랐을 듯하다.

'맹자'의 벽이단 신념에 푹 빠져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되는 정도전의 초상.
맹자는 중국 전국시대에 유행하던 묵자(墨子)와 양주(楊朱)를 유교 입장에서 ‘무부무군(無父無君)의 금수(禽獸)’라고 공격하는데 앞장섰던 이론가인데, 이를 본받아 고려의 불교와 무속을 ‘무부무군의 금수’라 공격하는 데 앞장서라는 뜻에서 [맹자]를 보냈을 것이다.

정도전은 부친과 모친의 장례를 치르면서 약 4년을 보냈다. 그동안 정도전이 주로 읽은 책은 당연히 [맹자집주]였다. 정도전은 “부모의 3년상 동안 겨를이 있으면 하루에 반 페이지 또는 한 페이지를 읽었는데 알 듯하기도 하고 의심스럽기도 해 정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는데, 그동안 [맹자]에 대한 식견이 매우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럴수록 벽이단에 대한 정도전의 신념 역시 높아졌다. 청렴 강직한 성품에 더해 [맹자]의 벽이단 신념이 결합되면서 정도전은 그 누구보다 과격한 비판가이자 실천가로 변해갔다.

28세 되던 1369년(공민왕 18) 정도전은 부모의 3년상을 마치고 양평의 삼각산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정도전은 틈이 날 때마다 개경으로 가서 정몽주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뜻밖에 고루한 내가 체득한 것과 이따금 서로 일치하는 내용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3년상 동안 정도전의 성리학 공부가 일취월장해 정몽주 수준에 근접했던 것이다. 이에 정몽주는 성균관 대사성 이색에게 정도전을 성균관 박사로 추천했다.

그 결과 29세이던 1370년(공민왕 19) 성균관 박사에 임명됐다. 이색의 부친인 이곡과 정도전의 부친인 정운경은 망년지우(忘年之友)의 인연이 있었고, 정몽주는 정도전에게 성리학을 가르쳐준 인연이 있어서 성균관 박사가 됐던 것이다.

당시 성균관에는 정도전의 과거 동기인 이숭인을 비롯해 정몽주·박상충·윤소종 등 당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근무했다. 이들 중에서도 정도전은 특히 이숭인·정몽주와 절친했다. 당시의 정도전에 대해 권근은 “삼봉은 포은 정도전, 도은 이숭인과 더불어 서로 친해 강론하고 연마하며 얻는 바가 있었고, 항상 훈후진(訓後進)과 벽이단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고 평했다.

정도전의 인생에서 성균관 근무는 행복하다면 행복한 시절이었다. 당시 성균관을 이끌던 이색은 정몽주와 정도전을 그 누구보다 아끼고 지지했다. 이색은 정몽주에 대해 “호방하고 탁월해 횡설수설(橫說竪說)이 모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극찬했다. 정도전은 그런 정몽주와 더불어 “정 선생과 오래도록 교류해 보고 느낀 바도 깊었으니, 비록 내가 정 선생을 가장 잘 안다고 말해도 참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가까이 지냈다.

성균관 선생으로서 이색·정몽주 등과 함께 벽이단을 시대 사명으로 여기던 정도전은 당시 공민왕이 신돈을 중임하는 상황에서도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예컨대 1371년(공민왕20) 봄에 정도전은 ‘증양곡역사(贈陽谷易師)’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그대는 7일 만에 회복되는 복괘(復卦)를 봤는가?(君看七日復)/ 벗이 오면 질병과 상처는 사라지고 만다네(朋來無疾傷)”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7일 만에 회복되는 복괘를 봤는가?’라는 말은 음이 시작되는 구괘(姤掛)에서 양이 시작되는 복괘(復掛)로 변하는데 7번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공민왕 시해 후 친원으로 돌아선 고려 조정


▎고려왕조 체제 안에서 개혁을 추진했던 정몽주의 초상.
구괘(姤掛)가 여섯 번 변하면 음만 남아 있는 곤괘(坤卦)가 되지만 그 곤괘가 다시 한번 변하면서 복괘(復掛)가 되고 뒤이어 양이 늘면서 음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즉 당장은 신돈으로 대표되는 이단세력과 간신들이 판을 친다고 해도 공민왕의 지혜와 하늘의 운행으로 조만간 그들이 사라지고 성리학자들이 득세할 것이라는 낙관을 상징하는데, 그런 낙관을 정도전은 ‘벗이 오면 질병과 상처는 사라지고 만다네’라고 비유적으로 노래했던 것이다.

하지만 젊은 성리학자로서 이색과 정몽주의 지우(知遇)를 받으며 득의의 나날을 보내던 정도전의 삶은 그가 33세 되던 1374년(공민왕 23) 9월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격변했다. 공민왕이 갑자기 시해되자 이인임은 우왕을 옹립해 후계왕으로 만들었다. 아울러 공민왕의 친명(親明) 정책도 친원(親元) 정책으로 바꿨다.

그때 정도전은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이인임의 친원 정책을 반대했다. 벽이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교는 중국 한족(漢族)에서 기원했으므로 당연히 한족의 명나라를 지지해야 마땅했다. 또한 공민왕에 대한 의리라는 면에서도 친명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인임은 명나라 대신 원나라를 지지했다. 우왕이 즉위한 직후 원나라 사신이 오자 이인임과 경복흥은 그 사신을 정도전으로 하여금 맞이하라 명령했다.

분개한 정도전은 경복흥의 집으로 찾아가 “제가 마땅히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에 묶어 보내겠습니다”라고 항명했다. 경복흥이 성내며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역적 김의(金義)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꾸짖었다. 역적 김의란 명나라의 사신 채빈(蔡斌)을 살해하고 원나라로 망명한 고려인을 지칭하는데, 경복흥은 정도전도 원나라의 사신을 살해하고 명나라로 망명할 것이냐고 따진 것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굴복하지 않고 태후에게 가서 원나라 사신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벽이단을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는 젊은 성리학자의 날카로움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분기탱천한 이인임과 경복흥이 국정에서 손을 떼겠다고 하자, 태후는 그들을 달래고자 정도전을 전라도 나주로 유배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때가 1375년(우왕 1) 여름으로 정도전의 나이 34세였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정도전이 나주 귀양길에 오르자 염흥방이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내가 시중에게 말씀드려 화가 조금 풀리셨으니 가지 말고 조금 천천히 기다리게”라고 전갈했다 한다. 그 말은 나주로 향하지 말고 경복흥이나 이인임의 집에 가서 사과하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유배 명령이 취소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죽을지언정 신념은 버릴 수 없다


▎조선왕조 창업 군주인 태조 이성계의 어진.
하지만 정도전은 화를 내며 “정도전이 말한 것이나 시중이 노한 것이나 각자의 견해를 지킨 일로 모두 나라를 위한 것이오. 지금 왕명이 내린 터에 어찌 공(公)의 말을 듣고 중지하리까”라고 말한 후 가버렸다.

나주 유배지로 향하면서 정도전은 감흥(感興)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조국의 멸망을 차마 외면할 수 없기에(不忍宗國墜)/ 충의의 심장과 간장이 찢어진다네(忠義心肝裂)./ 손수 대궐문 밀고 들어가(手排閶闔門)/ 임금 앞에 소리 높여 간쟁했다오(抗辭犯主顔)./ 예로부터 누구나 한번은 죽는 법(自古有一死)/ 구차한 삶은 편한 것이 아니라네(偸生非所安).”라는 내용이 있다.

이로 본다면 정도전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인임이나 경복흥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애걸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자신이 믿는 소신에 따라 할 말을 하고 유배지로 가겠다는 결기가 넘쳐나는데, 그 정도로 젊은 시절 정도전의 신념이 강력했다.

[삼봉집]에는 나주 유배 시절 부인이 보낸 편지가 하나 전한다. 가난(家難)이라는 제목의 편지다. 그 편지는 1376년(우왕 2)에 쓰였다. 격노한 이인임이 정도전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개경에 파다하자 부인이 정도전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이인임에게 사과하라는 취지로 쓴 것인데 이런 내용이다.

“경(卿)은 평상시 글 읽기만 일삼아 아침에 밥을 짓는지 저녁에 죽을 쑤는지도 몰랐습니다. 집이 곤궁해 한 섬 곡식도 없어 아이들이 기한(飢寒)에 울부짖을 때, 내가 안살림을 도맡아 끼니를 겨우 이어간 것은 경이 입신양명해서 처자식들을 살리고, 가문을 일으키리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국 나라의 형법에 걸려 이름은 욕되고 자취는 깎여 몸이 남쪽 변방에 귀양을 가 독한 장기(瘴氣)를 들이마시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제들은 나가 쓰러지고 가문은 분산돼 세상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돼버렸습니다. 현인군자란 것이 진실로 이런 것인가요?”

위의 내용에서 드러나듯 정도전의 부인은 정도전 본인은 물론 처자식 그리고 가문을 살리기 위해 쓸데없는 신념 또는 자존심을 버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부인의 편지에 정도전은 이런 답장을 보냈다.

“그대의 말이 진실로 맞습니다. 나에게 친구가 있어 우정이 형제보다 나았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고는 뜬구름같이 헤어지니, 그들이 나를 근심하지 않는 것은 본래 세력으로써 친했고 은혜로써 친한 것이 아닌 까닭인가 봅니다. 부부의 도는 한번 혼인하면 종신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니, 그대가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함이며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이 이치는 허망하지 않고, 오직 하늘에서 얻은 것입니다.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할 것이니 여기에 어찌 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각각 자기 직분을 다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대개 성패와 이둔(利鈍)과 영욕과 득실 같은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무엇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답장에 드러나듯 정도전은 자신이 죽고 나아가 처자식이 죽고 가문이 멸망한다고 해도 벽이단이라고 하는 자기 신념을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2년 후에 사면된 정도전은 개성으로 돌아왔지만 이인임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져 있었고, 성균관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 대부분은 실세(失勢)한 상황이었다. 정도전에 대한 정치적 탄압도 가라앉지 않았다. 정도전은 41세가 되던 1382년(우왕 8)까지 8년 동안을 불우하게 지내며 생활고를 겪어야만 했다. 먹고살기 위해 정도전은 훈장 일을 하면서 이직(移職)도 고려했다. 취직하기 손쉬운 군인이 되기 위해 병법을 공부하기도 하고, 당장 입에 풀칠하기 위해 농사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 유학자로 살아온 정도전에게는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어 하는 일마다 실패였다. 그 결과로 생활고는 점점 더 심해졌다. 이미 마흔 살을 넘은 정도전에게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다.

혁명 결심 후 이성계 찾아나서

그뿐이 아니었다. 성리학의 미래도 암울하기만 했다. 이제 정도전은 결단해야만 했다.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던 벽이단을 포기하고 한 가장으로서 현실 생활에 전념할지 아니면 벽이단을 넘어 혁명을 결행할지 결단해야만 했다.

이런 와중에 1383년(우왕 9)이 됐다. 그해 정도전의 나이 42세였다. 1383년은 간지로 계해(癸亥)로서 다음 해가 갑자(甲子)였다. 60년 단위로 반복되는 60갑자에서 갑자년은 새로운 60년이 시작되는 의미 깊은 해였다. 만약 정도전이 혁명을 결심한다면 새로운 갑자년이 시작되는 1384년 이전이라야 했다. 정도전은 새로운 갑자년이 시작되기 한 해 전인 1383년 가을 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 나섰다. 그즈음 정도전은 혁명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즈음 혁명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정도전은 1384년 지은 자영(自詠)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유학은 자기 일에 졸렬한 학문임을 알았기에(自知儒術拙身謀)/ 병법에 뜻을 두고 손자와 오자를 배웠다네(兵畧方師孫與吳)./ 세월이 물처럼 흘렀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해(歲月如流功未立)/ 먼지 낀 책상에서 병법 책을 없앴다네(素塵牀上廢陰符)./ 유학도 병법도 어느 하나 성공하지 못하고(書劒區區兩未成)/ 농사터로 돌아가 몸소 밭을 갈았다오(問歸田舍事躬耕)./ 가뭄과 홍수는 해마다 혹심한데(不堪旱溢年來甚) /문 앞에 찾아드는 땅세 독촉을 어찌하리(爭奈門前責地征)?/ 고금을 돌아보니 백 살 넘긴 사람 없으니(今古都無百歲身)/ 득실을 가지고서 정신을 허비 마소서(休將得失費精神)./ 다만 불후의 역사에 정신을 써서 사문을 보존한다면(只消不朽斯文在)/ 멋 훗날 마땅히 정씨 사람 살아나리라(後日當生姓鄭人).”

이 시에 의하면 정도전은 지난 세월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법과 농사에 신경 쓰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면서,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불후의 역사에 정신을 써서 사문(斯文)을 보존’하는데 목숨을 걸겠다고 다짐했다. 그때가 1383년이었다. 사문을 보존하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은 곧 사문 즉 성리학을 보존하기 위해 혁명하겠다는 뜻이나 같았다.

구구한 논리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결국 성리학이 말살될 것이므로 차라리 목숨 걸고 혁명을 일으켜 성공하든 실패하든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었고, 또한 현실의 삶을 버리고 역사적 삶을 선택하겠다는 생각이기도 했다. 정도전은 ‘벽이단’을 넘어 ‘존사문(存斯文)’을 기치로 혁명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정도전은 벽이단을 사명으로 생각하는 이색·정몽주와도 결별이었다.

이색과 정몽주는 고려왕조 안에서 벽이단을 추진하고자 하는데, 이제 정도전은 ‘존사문’을 위해 고려왕조를 뒤집어 엎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성리학 혁명을 결심한 정도전은 1383년 가을 함흥으로 향했다. 이성계를 포섭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정도전이 결심한 성리학 혁명의 성패는 이성계를 포섭하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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