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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24)] 이성계의 낙마 사고, 조선 개국 방아쇠로 

정몽주와 공양왕의 공세에 깨어난 ‘잠룡(이성계)’ 

고려수호파, 明의 정통성 부여에 고무돼 이성계파 탄핵 화살
정도전·조준·남은 등의 목숨 경각에 처해… 이방원은 모친상 중에도 반격


▎조선 건국의 방아쇠를 당긴 태종 이방원의 기일에 올리는 산릉제례행사가 서울 세곡동 헌인릉에서 재현됐다.
1392년 새해 벽두부터 밀직사 이염의 난동 때문에 공양왕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이 해에 고려왕조의 운수가 다할 것으로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2월, 정몽주가 신정률을 편찬해 바친 것만 봐도 그렇다. 그것은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중흥파의 역작이었다. 정도전 등 역성혁명파에 대한 통렬한 일격이었다. 1391년 7월, 공양왕과 화해한 이래 이성계 자신도 정몽주의 대안에 동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정도전, 남은 등 혁명파가 모두 조정에서 축출됐다. 이런 기조를 무너뜨리고 역성혁명 쪽으로 급격히 방향이 전환된 것은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해 중상을 입은 뜻밖의 사건 때문이었다.

2월 27일, 이성계가 사직을 간청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겸양의 의미였던 듯하다. 왕 역시 예우 차원에서 잔치를 베풀고 사직을 만류했다. 3월 4일, 이성계 역시 답례로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표면상 공양왕과 이성계의 사이는 평화로웠다.

이성계의 사고 예언한 무당


▎신윤복의 ‘무녀신무’. 이성계가 황주로 출발하기 전, 무당 방올은 이성계의 낙마를 예언했다. / 사진:위키백과
3월 10일, 통역관인 통사 이현이 명나라 수도 남경에서 돌아와 세자 왕석의 귀국 날짜를 보고했다. 1391년 9월 22일 출발했으니 6개월여 만이었다. 왕은 이현에게 말 한 필을 하사했고, 국대비와 왕비, 세자빈도 모두 후사했다. 왕실 전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명에 직접 입조해 사대의 정성을 표하고 명이 이를 수용했으니, 왕위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의미가 있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근심하던 이들에게 이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3월 17일, 공양왕은 아우 왕우와 이성계에게 명하여 황주에 가서 세자를 영접하게 했다. 양력으로는 4월 15일이니, 봄이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그런데 이성계가 해주에서 새 사냥을 하다가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졌다. 이성계도 말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다. 황주는 평양 아래, 사리원 위쪽에 있으며, 해주로부터 직선거리로 약 74㎞ 북녘에 있다.

이성계가 집을 나설 때 무당 방올(方兀)이 경처 강씨에게 점괘를 말했다. “공의 이번 행차는, 비유하건대, 사람이 백 척의 높은 누각에 오르다가 실족하여 떨어져서 거의 땅에 이르매, 만인이 모여서 받드는 것과 같습니다.” 방올은 우리말 방울을 한자 음을 빌려 적은 것이다. 실제 방올의 말대로 되었으니, 매우 신통한 무당이었다.

반(反)이성계파에게 이성계의 낙마는 하늘이 준 기회였다. 그러나 이 소식은 개성에 즉시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왕은 3월 23일 경연에 참석했다가 소식을 들었다. 낙마한 지 8일이나 지난 뒤였다. 이성계파는 아마 기밀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는 세자가 개경에 도착할 때까지였다. 세자는 3월 24일 개경에 도착했다. 그 하루 전에서야 이성계의 낙마 소식이 알려진 것이다.

왕은 환관을 보내 이성계의 안부를 묻고, 의원과 약을 보냈다. 예우를 갖춘 것이자, 용태를 염탐하려는 것이다. 함께 소식을 들은 경연 강독관 이확은 “제군사(諸軍事, 이성계)는 나라의 장성(長城)인데, 말을 달려 사냥하다가 만에 하나 다치면 국가의 복이 아니다”고 걱정했다. 이확의 본심은 알기 어렵다. 이후 그는 김진양과 더불어 이성계파를 탄핵하는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건국 후 양광도로 유배돼 장살 당했다. 이확의 말을 듣고도 공양왕은 책을 덮은 채 묵묵부답했다. 이확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도 기뻐하는 빛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정몽주는 이성계의 “위세와 덕망이 나날이 커져 온 나라 사람들이 귀복하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그리고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태조를 추대하려고 모의하는 것을 알고서, 일찍부터 틈을 타 그 모의를 분쇄하려 하였다.”

이를 보면 1392년 무렵 이성계파의 역성혁명 모의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는 1390년 7월부터 이미 이색 등에 대한 사면을 건의하고, 8월에는 윤이·이초 사건의 죄상이 불분명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었다. 이것은 혁명파의 입장과 정면 배치됐다. 그리고 1391년 7월에는 위화도회군 이후의 옥사에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후 역성혁명파에 대한 반격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정몽주는 정도전 등의 모의를 더는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는 이성계를 설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성혁명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큰 부상을 당했다. 천재일우의 기회가 눈앞에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게 정보에 접했다. 시간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3월 24일, 이성계의 낙마 소식이 알려진 이튿날 세자가 개경에 도착했다. 최고위 기관인 도당은 멀리 금교역까지 영접을 나갔고, 백관은 개성의 서문 선의문에 도열해 세자를 맞이했다. 명나라는 세자를 융숭하게 대우했다. 명 조정에 입조했을 때 주원장은 세자를 공후(公侯) 다음 서열에 서게 했다. 공양왕과 세자는 아직 명의 책봉을 받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 그 지위를 인정받은 것이다. 주원장은 또한 내전에서 5차례나 잔치를 베풀어주고, 매일 잔치를 베풀었다. 선물로 황금과 백금, 옷감을 하사하고 수행한 관리들에게도 선물을 줬다. 이로써 공양왕과 세자의 정통성이 강화됐다. 공양왕과 고려 수호파의 대명 외교가 거둔 빛나는 결실이었다.

3월 28일, 궁궐 안 상춘정(賞春亭)에서 세자의 노고를 위로하는 연회가 열렸다. 상춘정이란 봄을 완상하는 정자란 뜻이다. 고려 궁궐의 안쪽 깊숙이, 북문인 현무문과 송악산 바로 아래에 있는 정자였다. [고려사]를 보면, 4월이면 이곳에서 술을 마시며 꽃을 보고, 시를 짓는 연회가 열렸다. 양력으로는 5월이니, 봄이 한껏 무르익는 계절이다. 1392년의 연회는 양력으로 4월 20일이니 평소보다 다소 일렀다.

하지만 공양왕과 고려 수호파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그들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있었다. 이제 이성계도 쓰러지고, 긴 형극의 시간 끝에 꽃피는 봄이 왔다. 하지만 이렇게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사실은 전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미천한 신분


▎고려 말의 걸출한 문장가인 이숭인의 초상화. 조준은 이숭인을 꺼려 죽이고자 했다. / 사진:위키백과
상춘정의 연회가 열린 지 사흘 뒤인 4월 1일, 마침내 고려 수호파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됐다. 위화도회군 이후 실질적인 첫 공세였다. 정몽주·이색·우현보는 먼저 대간에 사람을 보내 조준 등 이성계의 심복들을 탄핵했다. 손발인 정도전 등을 처형하고, 최종적으로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그래서 이성계는 일단 공격 대상에서 제외했다. 대간에서 공격의 선봉에 선 것은 간관 김진양·이확·이내·이감·권홍·유기 등이었다. 공격 대상은 조준·정도전·남은·윤소종·남재·조박 등이었다.

탄핵문을 보면, 그들의 죄상과 역할을 구분해 놓았다. 수괴는 정도전과 조준이며 남은, 남재 등은 난을 선동하는 보좌가 되고 윤소종, 조박 등은 말을 꾸며내는 앞잡이로 봤다. 실제로 윤소종과 조박은 위화도회군 이후 혁명파 언론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첫 번째로 지목된 것은 정도전이었다. 탄핵에 따르면, “정도전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몸을 일으켜 당사(堂司)에 자리를 차지하였으므로, 미천한 근본을 덮고자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하는데, 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참소로 죄를 얽어 만들어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다”는 것이다. 위화도회군 뒤의 역사기록을 보면, 정도전은 1391년 5월까지 정치투쟁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개혁의 전면에 나선 것은 오히려 조준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은 무대의 뒤에서 사태를 조종하는 것은 정도전이라고 생각했다. 1391년 성균사예 유백순은 “정도전 등이 나라의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혹시 옛날 무신의난 같은 변란이 있게 되면, 우리가 그 화(禍)에 빠질까 두렵다”고 말했다. 정도전을 주모자로 지목한 것이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무릇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어 진실로 상등의 공훈이 되었다”고 한다. 태종 이방원도 정도전이 “부왕의 은혜에 감격해 힘을 다하였다”고 회상했다. 정도전은 1374년 유배된 이래 10년간 복직되지 못하고 세파의 신산을 모두 맛봤다. 수렁에 빠진 정도전에게 구원의 손을 내민 게 이성계였다. 그 은혜에 감읍한 정도전은 이성계를 위한 일이라면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은 것이다.

반대파의 지적대로, 위화도회군과 그 후의 정치적 안배 가운데 정도전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의 그물에 걸려 투옥되고, 고문받고, 유배되고, 가산을 적몰당하고, 심지어 목숨을 잃고 일족이 큰 불행에 빠진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도전을 두려워하고 미워했다. 태종의 장인 민제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하윤을 꺼려, 일찍이 아들 민무구 등에게 “온 나라 사람들이 하윤을 정도전에게 비유한다. 사람들이 하윤을 꺼림이 이와 같은즉, 머지않아 환난을 겪을 것이다”이라고 말한 바 있다.([태종실록]) 정도전이 흉인을 뜻하는 일종의 보통명사처럼 쓰인 것이다. 1392년 고려 수호파가 첫 번째로 죽이고자 한 인물도 정도전이었다.

조준은 위선자였는가?


▎이성계파의 책사 정도전의 글씨. /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도전이 미천한 신분이란 뜻은 외조모가 종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노비인 외증조모가 우현보 집안의 김진이란 승려와 간통해 낳은 이가 정도전의 외조모였다. 정도전은 과거에 합격한 뒤 한동안 합격증을 받지 못했다. 그는 우현보 일족이 자신의 출신을 남에게 알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또한 정도전이 관직을 옮길 때도 언제나 대성(臺省)이 고신(告身, 임명장)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 대성이란 중서문하성 간관과 사헌부 대관의 합칭이다. 언론과 규찰을 담당하는 관리로서, 임명된 관리의 경력에 하자가 없는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서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자가 있다는 뜻이다.

정도전은 이 역시 우현보 아들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우현보의 아들들은 정도전이 처음 벼슬할 때부터 그를 경멸했다고 한다. 정도전의 삶에 사슬 같은 천형이 따라다닌 것이다. 탄핵문에 따르면, 정도전은 그 일에 원한을 품고 이른바 본주인 우현보를 제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무고한 많은 사람을 연좌시켰다는 것이다.

1391년 5월 이후 정도전이 우현보의 처형을 끈질기게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조선 건국 뒤 우현보의 아들 우홍수·우홍명·우홍득 3인을 죽였다. 우홍수의 아들이자 공양왕의 둘째 사위인 우성범도 1392년 7월 12일 처형됐다. 이 모든 일이 정도전의 소행이라면, 그 원한이 참으로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에도 “우성범 등이 형세를 이용하여 그 근원을 발각시킬까 두려워하여, 우현보의 한 집안을 무함시킬 만한 일은 계획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소행을 정도전 개인의 원한으로 치부하는 것은 다소 과도한 것이다. 우현보는 이색, 정몽주와 함께 고려 수호파의 핵심인물이자 공양왕의 외척이었다. 역성혁명 과정에서 우현보는 비껴갈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스승 이색조차 처형을 요구했다. 역성혁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야수의 길을 걸은 것이다.

다음 공격 대상은 조준이었다. 정도전을 공격하는 내용은 대단히 간략하다. 그러나 조준은 매우 길고 상세하다. 조준도 탄핵문만 보아서는 그가 왜 혁명파에 가담해 분란을 일으켰는지 이유가 박약하다. “한두 사람의 재상 사이에서 우연히 원수와 틈을 일으켜 정도전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변란을 선동하고, 권세를 희롱하여 여러 사람을 꾀고 협박했다”고 한다. 조준의 동기 역시 정도전처럼 개인적 원한이다. 무슨 원한인지 명확하지도 않다. 조준과 원수진 재상이 누구인지도 명기돼 있지 않다. [태조실록] 정도전 졸기에는 정도전이 “조준과 교제하고자 하여 세 사람을 참소하고 헐뜯어 원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색·정몽주·이숭인이 그들이다. 이숭인 졸기를 보면, 정도전이 “조준이 이숭인을 미워함을 알고서는 도리어 몰래 험담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우홍수 졸기에도 “조준이 이색, 이숭인과 틈이 있으므로 인하여 이내 이색과 이종학·이숭인 등을 모함하여 원례(援例)로 삼고자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조준은 이숭인과 사이가 매우 나빴고, 이색과도 좋지 않았던 듯하다. 정몽주와의 관계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 조선 건국 후 조준이 춘추관에서 고려의 사초를 보다가, “윤소종이 이숭인의 재주를 꺼려서, 조준에게 알려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고 쓴 기록을 봤다.([태조실록]) 전 예문춘추관 학사 이행의 사초였다. 조준은 윤소종과 절친한 벗이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조준이 본래 이숭인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 두고 조준은 해를 가리켜 맹세하기를, “윤소종의 말을 듣고 이숭인을 해치려고 하였다는 것은 하늘의 해가 증명하고 있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당시는 윤소종도, 이숭인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남은, 역성혁명의 원조


▎태종 이방원의 생모인 신의왕후의 옥보(玉寶). 고종 시대에 제작됐다. /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준의 또 다른 죄는 당초 공양왕의 즉위에 반대한 것이다. 1389년 11월 15일, 이성계를 비롯한 정몽주·정도전·조준 등 회군파 요인 9인이 흥국사에 모여 창왕의 폐위와 새 왕의 옹립을 논의했다. 이성계는 처음부터 정창군 왕요(공양왕)를 추천했다. 그러나 조준은 “정창군은 부귀하게 생장하여 치재할 줄만 알고 치국할 줄은 모르니 세워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결국 추첨에 의해 정창군이 공양왕에 올랐다. 그러나 조준은 공양왕을 옹립한 9공신에 책봉됐다. 그리고 “내가 일찍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자신의 말을 부정한 듯하다. 이에 대해 대간은 “왕의 곁에 있는 여러 재상이 이 말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높지마는 이 낮은 곳의 말을 두려울 만큼 환하게 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준은 공신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크게 불충한 신하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공신의 반열에 참가하여 화상을 그려 빛나게 전한 것이 큰 공신과 다름이 없으며, 품계를 뛰어 관직을 받은 것이 참 공신보다도 십 배나 되니, 영화가 이보다 큰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성계의 낙마 후 위기가 닥치자, 조준은 공양왕 앞에서 울며 거짓 반성하는 척했다고 한다. 대간은 “조준이 전하의 앞에서는 거짓으로 울고 슬퍼하여 겉으로는 고치고 뉘우치는 형상을 보이고, 속으로는 죄를 용서받을 계책을 부리니, 이것은 곧 거짓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고려사절요])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순진한 공양왕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인제 와서 반성한다는 것은 기세가 꺾여 어쩔 수 없이 하는 연극이었다. 훗날도 아니고 불과 3일 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조준이 이렇게까지 위선적으로 행동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반대 기록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왕이 윤허를 내리기도 전에, 김진양 등은 아전과 병졸을 동원해 조준의 집을 포위했다. 그러나 조준은 태연히 글을 읽으면서, “나는 사직을 위할 뿐이니 또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말했다.([김진양전]) 조준은 학자보다는 경세가였고 임협의 풍도를 지닌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빼어났으며 큰 뜻(大志)이 있었다”고 한다. 권근도 조준의 시에 대해 “호방하고 걸출한 모습은 문인재사(文人才士)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태종실록] 조준의 졸기에 따르면, 그는 “광명정대하고 과감하여 의심하지 아니하며, 비록 대내(大內)에서 지휘를 내릴지라도 옳지 못함이 있으면, 문득 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리지 아니하여도, 동렬들이 숙연하여 감히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왕의 명령도 옳지 못하면 시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성격의 조준이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연극을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셋째로 남은이다. 남은은 1년 전 상소에서 “전하께서 속으로는 욕심이 많으면서도 겉으로는 인의를 베푼다”고 공양왕을 비판했다. 비록 왕의 구언교서에 응하는 상소였지만, 신하의 분수를 넘어선 것이었다. 대간은 “감히 전하를 경멸하고 모욕하는 불경한 말을 내게 되니, 왕의 뜻을 격발시켜 정도전에게 붙어서 그 욕심을 부리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남은은 1374년(우왕 즉위년) 성균시에 합격한 문관이지만 성격은 무관에 가까웠다. “성품이 호매(豪邁)하여 자유분방하게 행동했으며 어려서부터 기발한 꾀를 많이 내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삼척군의 수령을 자원했다. 하지만 성이 작아서 왜구가 침입하면 위험했다. 그런데 부임하자마자 왜적이 쳐들어왔다. 남은은 즉시 10여 명의 기병과 함께 성문을 열고 돌격하여 적을 패퇴시켰다. 그의 용맹을 알 수 있다. 그는 1388년 이성계의 휘하로 요동 정벌에 참전했다가 조인옥과 함께 이성계에게 회군을 건의했다. 또한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비밀리에 모의했다. 하지만 이성계가 워낙 엄했기 때문에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회군 뒤 이방원에게 이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이방원은 이 말을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칫 삼족이 멸문지화를 당할 일이었다. 이방원은 당시 22세에 불과했으나 신중하고 조숙했다. 남은이야말로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꿈꾼 원조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대간은 이 상소에서 이성계를 탄핵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공적을 찬양했다. 이성계의 공로는 첫째 우왕의 요동 정벌을 막아 백성을 살렸고, 둘째 조준 등의 책동을 막고 공양왕을 옹립한 것이다. “그 지극한 충성심은 해와 달을 꿰뚫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의 사가는 “김진양이 상소문에서 비록 우리 태조(이성계)를 높였으나 기실은 위태롭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조선왕조의 입장에 선 평가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몰살 직전까지 몰린 이성계의 측근들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수호파의 핵심인 이색의 초상화. / 사진:위키백과
결론적으로 대간은 공양왕의 단호한 결단을 촉구했다. 또한 안이하게 생각하면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구체적인 처벌의 수위는 조준·남은·남재·윤소종·조박에게는 직첩과 공신녹권을 회수하고, 죄를 심문해서 형벌을 내리라는 것이다. 정도전은 귀양지에서 처단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공양왕은 대간의 상소를 일단 보류했다. 이튿날 김진양 등 대간이 대궐 뜰에 엎드려 재차 강청했다. 공양왕은 시중 심덕부와 정몽주를 불러 논의한 뒤 이를 윤허했다. 조준 등에 대한 처벌은 대간의 요청 그대로 이뤄졌다. 그러나 지신사(왕의 비서실장에 해당) 이첨이 정도전에 관한 사항을 잊고 누락했다. 정도전에게는 천운이었다. 하지만 김진양 등은 유배지 봉화에 관리를 파견해 정도전을 체포, 보주(甫州)에 가두었다. 보주는 지금의 예천으로, 봉화 바로 남쪽에 있다.

공양왕과의 논의에서 심덕부가 어떤 입장에 섰는지도 의문이다. 위화도회군을 지지한 유력한 무장 중 마지막까지 생존한 인물은 드물다. 정지조차 제거되었다. 심덕부는 거의 유일한 이성계의 파트너였다. 그의 6남 심종은 이성계의 둘째 딸 경선공주와 결혼했다. 또 5남 심온의 딸은 세종의 왕비로 간택됐다. 심덕부는 원래 대왜구 전투에서 활약한 용장으로, 1380년 진포해첩의 영웅이었다. 조민수 휘하에서 위화도회군에 참여했고, 1389년 우왕·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에도 참여했다. 그 직후 그는 이성계보다도 높은 문하시중에 임명됐고, 공신에 책봉됐다.

그러나 1390년 정몽주가 입장을 선회할 때부터 미묘하게 정치적 태도가 바뀌었다. 공양왕이 대간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함을 순시하고자 했을 때, 왕의 입장을 지지했다. 또한 이성계의 유화적 태도를 비판한 윤소종의 말을 왕에게 전해, 공양왕에게 윤소종을 축출하는 빌미를 줬다. 이성계의 뜻에 반하는 조처였다. 그러다 1390년 11월, 심덕부는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김종연사건에 연루됐다. 윤이·이초사건에 연루된 무신 김종연이 도피 중 심덕부 등과 합세해 거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유력한 무장인 심덕부에게 족쇄를 채우려는 이성계파의 견제였을 것이다. 심덕부는 유배됐지만 3개월 뒤인 1391년 2월 청성군충의백으로 봉해졌다. 9월에는 다시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세자 왕석의 입조를 수행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파견됐다. 심덕부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역성혁명파를 변호하지 않은 듯하다. 이성계는 낙마하고 왕과 정몽주, 대간이 총공세에 나섰으니, 감히 흐름에 거역할 수 없었을 것이다.

4월 2일, 대간의 요청은 전날보다 처벌 수위가 높아졌다. 모두 극형에 처해 아예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풀을 베고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끝내 다시 돋아나고, 악을 제거하고 근원을 제거하지 않으면 그 악이 자라난다고 옛사람은 말했습니다. 조준과 정도전은 악의 뿌리요, 남은·윤소종·남재·조박은 그 뿌리가 자라나 무성하게 퍼진 자들입니다. 전날에 저희가 글을 올려 처형할 것을 청하였는데, 정도전만 특별히 처형하라고 분부하시고 나머지는 밖으로 쫓아내는 데 그쳤으니 죄는 같은데 적용된 벌이 다릅니다. 바라옵건대 조준 등도 모두 극형에 처하소서.”([김진양전]) 그러나 왕은 깜짝 놀라며, 전날 자신이 정도전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리고 정도전은 광주(光州)로, 조준은 이산(泥山, 논산)으로 귀양 장소를 옮겼다. 사헌부는 윤소종과 같은 죄목으로 판전교시사 오사충도 새롭게 탄핵했다. 오사충은 혁명파 언론의 선봉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남은·남재·조박·윤소종·오사충을 모두 수원(水原)에 집결시킨 뒤 순위부천호 김구련, 형조정랑 이반, 양광도 관찰사 강은을 보내 함께 국문하도록 지시했다. 이들을 한꺼번에 처형하기 위한 예비조치였다.

이반은 정몽주파다. 1390년 7월 이후 정몽주는 대사면령을 건의하고, “윤이와 이초 일당들의 죄는 본래부터 명백하지 않았고, 또한 사면을 거쳤으니 다시 논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성계파인 대사헌 김사형은 형조가 정몽주를 공격하게 했다. 이때 간관인 헌납 이반은 “탄핵은 형조의 임무가 아니다”라고 반대했다. 정몽주의 입장을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치들은 결국 시행되지 못했다. 이틀 뒤 정몽주가 격살되고, 모든 공세가 무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결과를 놓고 보면, 공양왕에게 남은 시간은 4월 2일과 3일, 이틀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이상 가능한 한 신속하게, 그리고 끝을 봐야 했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반대파가 자비를 베풀지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정몽주는 물론이고 공양왕과 그 가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조선 건국 뒤 1394년 4월에는 왕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강화와 거제 앞바다에 수장됐다. 조선판 제노사이드(genocide)였다.

이방원, 반격을 개시하다

공양왕이 대간의 상소를 윤허한 4월 2일 밤, 이성계가 해주에서 수레를 빨리 달려서 개성으로 돌아왔다. 본래 이성계는 해주에서 벽란도에 이르러 유숙하고, 이튿날 개성에 돌아가고자 했다. 벽란도는 한강과 예성강이 서해에서 만나는 교차점에서 예성강 쪽으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다. 현재 강화도 북단의 평화전망대에서 2㎞ 정도 떨어져 있어 육안으로도 뚜렷이 보인다. 고려의 대표적인 국제무역항으로서, 외국 사절과 송나라, 아라비아, 류큐(琉球, 오키나와), 거란, 여진, 일본 상인들이 출입했다. 남도에서 올라오거나 한강을 따라 운송되는 조세가 모두 집결돼 하적되는 곳이기도 하다. 벽란도에서 개성 선의문까지는 약 12㎞로서, 상인들을 위한 숙소가 발달해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도 하룻밤을 머무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이 달려가서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해칠 것”이라고 위급을 고했다. 이성계는 묵묵부답했다. 그러자 이방원은 “이곳에 유숙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길을 재촉했다. 이성계는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방원이 강력히 요청하자, “병든 몸을 억지로 참고 드디어 견여(肩輿)를 타고 밤에 사저로 돌아왔다.” 낙마한 지 15일 만이었으니, 부상이 심각했던 것이다.

당시 이방원은 개성 남쪽 속촌(粟村)에서 생모 한씨(1337-1391, 신의왕후)의 상을 치르고 있었다. 속촌은 현재 황해도 개풍군 대련리에 있다. 강화도 맞은편 해안인 승천부에서 개성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 있다. 신의왕후의 제릉(齊陵)이 그곳에 있다. 상황이 너무 긴박하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시묘살이하며 효자 노릇만 하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속촌과 벽란도는 직선거리로 10㎞ 정도이다. 이성계가 벽란도에 오기를 기다려 속촌에서 직접 달려갔을 것이다. 정치가로서 이방원의 큰 장점 중 하나는 기민함에 있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도 그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씨는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으로, 이성계보다 두 살 아래였다. 고향은 동북 지방의 안변으로, 이성계에게 시집와 함흥에서 세거했다. 이른바 향처(鄕妻)다. 첫아들 이방우가 1354년생이니, 이성계가 20세 무렵 결혼한 것이다.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을 따라 22세에 개성에 왔다. 한씨는 이때 함흥에서 살다가 우왕대에 포천 제벽동 전장(田莊)으로 옮겨왔다. 이성계는 개성에서 두 번째 부인 강씨(1356-1396)를 경처(京妻)로 맞이했다. 강씨의 첫아들 이방번이 1381년(우왕 7) 태어났으니, 적어도 그 이전에 결혼했을 것이다. 1380년 결혼했다면 이성계는 46세, 강씨는 25세 때였다. 한씨는 조선 건국을 1년 앞두고 1391년 9월 23일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연려실기술]) 위화도회군 뒤 불안한 정국에서 이성계의 안위를 너무 염려한 나머지 병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이방원의 조치를 보면, 그는 생모의 죽음 속에서도 한시도 정치를 잊지 않았다. 타고난 정치가이자 왕자의 풍모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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