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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25)] ‘탐미주의의 거장’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사랑밖에 난 몰라’ 

“여자 없이는 시도 예술도 없다” 

아름다운 여성과의 사랑이 작품 생산의 원동력으로 평가
“예술은 자신의 육체를 아름답게 하는 데서 시작” 주장도


▎오스카 와일드의 동성애 사건을 통해 사랑과 우정, 인생과 예술의 의미를 묻고 있는 연극 [유다의 키스]의 한 장면.
예술에 대한 정의도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 어려울 뿐 아니라 정답도 있을 수 없다. 인생을 걸었던 예술가들도 신통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난제다. 수많은 예술가가 저마다 답을 내놓았지만, 정작 소비자들은 각자의 주관대로 해석한다.

문학은 언어의 은유를 통해 미적 발견을 시도하고, 음악은 애호가들을 소리의 오묘한 경지를 끌어들여서 환각 상태에 이르게 한다. 미술은 빛을 이용해 화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최고의 장면을 정지화면에 담는다.

평생 일관되게 ‘여자’라는 주제 하에 미(美)를 추구한 인물을 보면 집요한 광기가 읽힌다. 그는 작품과 실생활의 구분이 없는 투명한 인간이었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세계에서 자신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살았다.

일본의 문호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郎, 1886~1965)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그린 작가다. 그는 [문신] [치인(癡人)의 사랑] [춘금초(春琴抄)] [음예예찬(陰翳礼讃)] [여뀌먹은 벌레(蓼喰ふ虫)] [세설(細雪)] [만(卍)]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미친 노인의 일기] [열쇠] 등 50년 이상 숱한 화제작을 발표했다. 실생활에서 그는 여성 편력을 자랑했다. 세 번의 결혼에 여러 여성을 만나고 사랑했다. 아름다운 여성과의 사랑은 다니자키가 작품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그에게 여자라는 존재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을 이끌어줄 유일한 빛이었다. 다니자키는 “여자 없이는 내 시도 예술도 없다. 하얀 것, 여자, 그것은 내 육신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내 생활, 내 사상, 내 이념, 내 모든 것의 모체”라고 말한다.

다니자키 문학은 마조히즘적이다. 노예가 돼가는 남성의 ‘여성 숭배’와 정치(精緻)하게 묘사한 ‘에로스’ 그리고 고전 작품의 회귀를 통한 높은 ‘예술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에게 여자는 평생을 바쳐 숭배한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철저하게 유린할 수 있는 도도한 미인의 발밑에서 노예가 돼갔다.

다니자키는 가슴에 품은 그대로 살았고, 자신의 일생을 자신이 아닌 것처럼 허구화해 그렸다. 위선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다니자키는 진리나 선의 세계가 아닌 미의 세계를 추구했다. 평생 예술에 천착한 톨스토이는 “예술의 사명은 신의 왕국, 즉 사랑의 왕국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니자키는 그런 사랑의 왕국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 그것도 모자라 변태적이라고 부르는 사디즘·마조히즘의 가학과 피학의 세계를 주로 그렸다. 사람들은 그에게 탐미주의자라는 타이틀을 수여한다.

미는 선보다 악과 한층 더 일치


▎마조히즘적 탐미주의 작가로 평가되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빌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미는 선보다도 한층 더 악과 일치한다. 다니자키는 ‘어리석음‘이라는 미덕을 갖춘 시기에는 지금처럼 세상이 삐걱거리지 않았다고 했다.

‘여유로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이는 모두 강자였고 추한 이는 모두 약자였다.’ 그의 데뷔작으로 여겨지는 [문신]의 첫 단락에 나오는 내용이다. 젊은 문신사(文身士) 세이키치(淸吉)의 빼어난 예술혼을 그린 소설이다. 그의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는 그 누구도 헤아리기 어려운 쾌락과 숙원을 품고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직 본 적도 없고 마음속으로만 그리고 있는 미지의 여인을 본 것은 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다. 요정(料亭) 앞을 지나다 가마에서 삐죽 튀어나온 ‘새하얀 맨발’을 발견하고 그녀를 뒤쫓았으나 놓치고 말았다. 그 여인에 대한 동경은 실물을 접한 뒤 열렬한 사랑으로 변했다. 해가 저물어 다섯 번째 봄도 끝나가던 어느 날 아침 세이키치는 자신의 작업실로 심부름 온 여자의 발을 다시 보자 그녀임을 알아챈다. 말이 여인이지 철모르는 소녀였다. ‘정확하게 햇수로 5년,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네 발은 기억하고 있다.’ 그가 1박 2일 동안 혼신을 기울여 그녀의 등에 문신한 동물은 거대한 여덟 개의 발이 달린 무당거미였다. 그리하여 그녀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만들어 준다. 소녀에서 요부로 변신한다. 이 문신이야말로 그의 생명이었고 문신을 마친 그는 어쩔 수 없는 공허감에 싸인다.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너의 비료가 될 거야.”

1910년에 발표한 이 작품으로 다니자키는 문단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남성과 여성의 위치가 역전돼 여성이 우위에 이르게 되는, 마조히즘적 경향이 드러나는 이 소설은 다니자키 소설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렇다면 다니자키가 말하고자 하는 예술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선 그를 규정짓는 탐미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탐미주의라는 세기말의 예술사조는 ‘예술을 위한 예술’로 교훈성을 제거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탐미주의는 심미적 대상에 대해 사심 없이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 칸트, 예술 작품의 목적은 오직 그 형식적 완벽성으로 존재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한 고티에로부터 그 기원을 찾는다.

탐미주의는 19세기 중반 산업시대의 추악성과 속물근성에 대한 반발이었다. 합리주의나 기계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시작됐다.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와 프랑스의 보들레르, 영국의 와일드 등을 거치며 큰 발전을 이뤘다. 일본에서는 다니자키가 유미주의라고도 불리는 탐미주의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1883년 현재 도쿄도 주오구의 니혼바시에 태어났다. 전형적인 에도 토박이였다. 형이 생후 3일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호적상 다니자키가 장남이다.

다니자키의 집안은 그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까지는 유복했지만, 아버지의 사업 부진으로 점차 가계가 어려워졌다. 응석꾸러기에 울보였던 다니자키는 유모가 대동하지 않으면 학교도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가세가 기울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다니자키는 입주 가정교사로 일하며 진학했다.

진학 후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다니자키는 ‘신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수학 성적도 좋았지만, 작문에 특히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다. 그런 다니자키가 문학을 접한 것도 이 무렵으로 담임교사 이나바에게 재능을 인정받자 문학의 길에 뜻을 둔다.

다니자키는 친구들과 ‘학생구락부’라는 회람잡지를 만들었다. 다니자키는 이 잡지에서 [학생의 꿈] [오월우]라는 소품을 썼다. 다니자키는 2학년 1학기 후 3학년으로 월반하는 등 영재성을 발휘한다. 그는 도쿄제일고교 영법과와 도쿄제국대학 국문과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다니자키는 결국 등록금 미납으로 중퇴에 이르게 된다.

다니자키의 성적으로 보면 국문과가 아니라 법학부가 더 어울렸다. 그럼에도 다니자키는 스스로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당시는 작가가 될 뚜렷한 방법도 없었고, 아무런 보장도 없는 시대였다. 훗날 다니자키는 “18~19세 때부터 24~25세에 이르는 6~7년은 참으로 암담한 위기의 시대였다”고 회고했다.

어린 처제와 사랑에 빠진 소설가


▎현대인들의 애정 편력은 불륜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도 마찬가지였다.
다니자키는 1910년 친구들과 제2차 동인잡지 제2차 [신사조(新思潮)]를 만든다. 그는 창간호에 [탄생], 11월에 [문신], 12월에 [기린]을 발표한다. 당시에는 [자작나무] [미타문학(三田文學)] 등의 잡지도 창간되면서 반자연주의 문학의 기운이 거세지고 있었다. 소설가 나가이 가후(永井荷風)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이란 평론에서 “메이지 시대의 문단에서 오늘날까지 누구 하나 손쓸 수 없었던, 혹은 손을 쓴다고 해도 쓸 수 없었던 예술의 한쪽 면을 개척한 성공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라고 평가했다.

1915년 29세에 다니자키는 이시카와 치요코(石川千代子)와 결혼한다. 가정을 이룬 다니자키였지만 안정된 가정과 예술 작품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는 결혼 후 아내의 동생인 15세 소녀 세이코를 맡아서 양육한다. 세이코는 당시로서 보기 드문 모델 체형의 아름다운 소녀였다. 세이코는 훗날 다니자키의 작품 [치인의 사랑] 주인공인 나오미의 모델이 됐다.

결국 어린 처제 세이코에게 온 정신 팔린 다니자키는 아내와 딸을 친정에 보낸 뒤 처제와 동거한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다니자키의 절친인 문인 사토 하루오(佐藤春夫)는 치요코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21년 다니자키는 친구인 사토에게 자신의 부인 치요코를 보내 주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다니자키는 결정을 번복한다. 세이코에 대한 청혼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치요코를 마음에 두고 있던 사토는 이에 분노해 다니자키에게 절교를 선언한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다니자키가 살고 있던 곳이 오다와라였기에 이들의 치정극에는 ‘오다와라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몇 년이 지난 1930년 다니자키는 결국 치요코와 이혼했다. 그리고 치요코와 사토는 결혼에 이른다. 당시 이 스캔들은 신문에까지 보도되는 등 큰 스캔들로 비화됐다.

과거·현재·미래의 부인을 동반한 희한한 여행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 사건은 조선에서도 유명했다. 1930년 10월 발행된 대중잡지 [삼천리]에는 ‘남성의 무정조에 항의장’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 1세대 여성 의사인 허영숙의 인터뷰가 실렸다. 기사에서 ‘애처의 양도에 대하야’라는 소제목을 통해 허영숙은 이 사건을 비판한다.

1931년 다니자키는 외국 문학을 번역하던, 20세가량 연하의 여대 졸업생 도미코와 두 번째 결혼에 이른다. 도미코와 별개로 다니자키의 마음속에는 1925년부터 또 다른 연정이 싹트고 있었다. 상대는 유부녀 네즈미 마쓰코(根津松子)였다.

1934년 다니자키의 두 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났고, 같은 해에 바람 난 남편과 이혼해서 혼자가 된 마쓰코와 세 번째 결혼한다. 마쓰코야말로 다니자키가 죽을 때까지 그의 예술혼을 불러일으킨 뮤즈였다. 마쓰코는 다니자키가 명작을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다니자키는 입주 과외 시절부터 가정부와의 밀애가 들통나는 바람에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많은 여인에게 추파를 던진다. 자신의 처제는 물론 마쓰코가 시집올 때 데려온 의붓딸에게까지도 눈길을 준다.

그의 여성 편력과 작품에 등장하는 관련성에 대해 알아보자.

자신의 처제인 세이코를 모델로 한 나오미라는 여성을 등장시켜 ‘나오미즘’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낸 작품이 [치인의 사랑]이다.

다니자키는 자신이 각본을 맡은 [아마추어 구락부]에서 세이코를 여배우로 데뷔시키는 등 영화 제작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 경험을 살려 그는 영화를 소재로 하는 소설을 쓰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처제와 결혼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러다 다니자키는 갑작스럽게 도미코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이 시기는 세 번째 부인이 되는 마쓰코와 관계가 급속하게 깊어지는 때이기도 했다.

두 번째 결혼의 신혼여행의 모습은 소설가 다니자키의 소설 같은 풍경이다. 1931년 4월 하순 신혼여행을 겸해 당시의 부인인 도미코와 전 부인 커플 사토 부부, 미래의 부인인 네즈 마쓰코 등 7명이 무로지(室生寺)에서 도죠지(道成寺)로 여행을 떠났다. 과거·현재·미래의 부인을 동반한 이 희한한 여행에서 확인한 사실은 다니자키 ‘구원의 여인’은 마쓰코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마쓰코는 자신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진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만년에도 다니자키의 지독한 애정 편력은 멈출 줄 몰랐다. 며느리의 발에 이상 성욕을 느끼는 노인의 풋 페티시즘(Foot Fetishism)을 다룬 [미친 노인의 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실제로는 세 번째 부인 마쓰코가 데리고 온 딸이었다.

다니자키는 작가답게 여인들에게 대량의 편지로 애정 공세를 폈다. 다니자키와 마쓰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다니자키 40세, 마쓰코가 24세였던 1927년이다. 두 사람은 각각 가정이 있었다. 오사카 거상의 귀부인이었던 마쓰코는 화려하고 기품이 있는 문화적 소양을 갖춘 여성이었다.

다니자키의 대표적 장편소설 [세설]은 자신의 아내 마쓰코와 그 자매가 모델이 된 이야기다. 간사이(關西) 지방 가미가타문화(上方文化)의 화려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세설]에 등장하는 사치코로 그려져 있는 인물은 실상 마쓰코다. 마쓰코는 오사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다니자키와 마스코는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다니자키가 마쓰코를 처음 만난 지 얼마 안 돼 쓴 편지에는 “당신이란 분의 꿈을 날이 새도록 꿨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 뒤 4년 뒤 다니자키가 마쓰코에게 보낸 편지에는 “저는 숭배하는 고귀한 여성이 없으면 창작할 수 없습니다만, 드디어 오늘에야 그러한 분을 만나게 됐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그대의 충복이 되게 해주소서”


▎가네다 사토시 감독의 영화 [춘금초]의 한 장면.
당시 다니자키와 마쓰코를 둘러싼 환경은 크게 변하고 있었다. 1929년에 세계 공황이 시작됐고 마쓰코 남편의 사업도 급속히 기울어져 갔다. ‘마쓰코가 뿜어내는 기품이나 화려함도 머지않아 사라지지 않을까’ 다니자키는 걱정했다고 한다.

“만일 다행히도 나의 예술이 후세까지 남게 된다면, 그것은 당신이라는 분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십시오.” 다니자키는 자신의 사랑은 영원하며 마쓰코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서약서까지 쓰기에 이른다. “그대의 충복(忠僕)으로서 나의 생명·신체·가족·수입 등 모두 그대의 소유로 하고 그대의 곁에서 모시게 되시길 바랍니다.”

다니자키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형태는 작품에도 잘 반영된다. [춘금초]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의 화신이자 시각장애인인 샤미센의 스승 슌킨(春金)과 그의 연인이자 제자이며 머슴인 사스케(佐助)의 사랑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정체를 모르는 자의 습격으로 불의의 큰 화상을 얼굴에 입은 슌킨은 사스케가 얼굴 보는 것을 꺼린다. 사스케는 스스로 두 눈을 바늘로 찔러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만을 평생 기억하며 모실 것을 맹세한다. 같은 조건의 암흑 속에 갇혀 연인의 길을 따르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다. 시력을 잃어버린 연인의 사랑은 관념의 세계가 아닌 육체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이야기다.

“스승님 저도 맹인이 됐습니다. 이제 평생 스승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게 됐습니다.” “사스케! 그게 정말이더냐?“ 이 한마디를 끝으로 슌킨은 한동안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스케는 이 세상에서 태어나 평생 이 침묵의 몇 분간만큼 행복을 느낀 적이 없었다. _[춘금초]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 소설에 대해 “탄식할 뿐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명작”이라고 평가한다. 다니자키 소설의 구조적 아름다움과 소설 미학을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춘금초] 발표 후 2년 후 연인은 결혼에 성공한다. 창작을 위해서는 둘은 보통의 부부처럼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다니자키와 마쓰코는 떨어져 사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격랑이 덮친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다. 마쓰코는 다니자키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 일상의 다양한 사건이나 변해 가는 생활에 대해 세세하게 전했다. 1943년에는 소설 [세설]의 내용이 시국에 맞지 않는다는 군부의 판단에 따라 잡지 연재가 중단되기도 한다.

다니자키는 비행기 공습 때마다 [세설]의 원고를 안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리고 종전(終戰) 다음해 드디어 소설을 간행한다. 만년에 다니자키는 마쓰코와 함께 사는 시간이 늘어난다. 오른손이 불편해지면서, 구술 집필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다니자키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소설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마쓰코가 지켜보는 가운데 79년의 생을 마쳤다.

다니자키가 추구한 일관된 미의식은 바보·미치광이·어리석음의 덕으로 무장한 남성이 여성의 노예가 돼가면서 희열을 느끼는 장면을 통해 드러난다. 어찌보면 사랑이라는 판타지는 이런 지고지순한 ‘변태적’ 형태로 등장해야 제멋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다니자키의 여성 숭배는 모성 사모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어머니를 그리는 글] [소장 시게모토의 어머니]가 이런 유형의 작품에 속한다. 다니자키의 어머니 세키는 수려한 외모에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구라고로는 이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 어머니 사후에도 후처를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부유하게 자라서 하녀가 없어진 뒤에는 밥 짓는 법조차도 몰랐고, 밥은 아버지가 지었다고 전해진다.

교만하고 자부심 강한 자신의 어머니가 이상형


▎극단 ‘청우’가 올린 연극 [오이디푸스]의 한 장면.
다니자키가 그리는 이상적인 여인은 어머니 세키를 닮은 교만하고 자부심 강하며 남자를 혹사시키는 여성이었고, 그 미인을 위해 봉사하는 남성상은 아버지가 원형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1964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일본인 작가 4명이 동시에 거론됐다. 당시 수상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였다는 사실이 50여 년이 지나 스웨덴 아카데미의 회의록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이 해는 세계적인 76명의 작가가 수상 후보가 됐고 일본에서는 다니자키 준이치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시인 니시와키 준자부로 4명이 이름을 올렸다. 다니자키는 1965년 사망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으로 그가 묘사한 일본의 사계와 아련한 사랑의 그림자가 서구인들의 가슴에 자리한다. 만약 좀 더 오래 살았다면 다니자키의 탐미주의가 일본의 미의식을 대표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의 탐미주의는 철저하게 ‘지금·여기·현세’ 중심이다. 천국은 지상의 여자에게 있다는 게 다니자키의 주장이다.

다니자키는 예술론을 집필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작품 [금빛 죽음(金色の死)]에서 주인공 오카무라의 말을 빌려 예술론을 펼친다. 대표적 주장은 “예술은 자신의 육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영혼이냐 육체냐? 다니자키는 서슴없이 육체를 택했다. 시각으로, 촉감으로, 후각으로 느낄 수 있는 실체의 세계만을 인정했으며,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대지의 품성을 지닌 어머니로 대표되는 여인이었다.

여성을 숭배하는 집안의 분위기, 아름답고 교양 있는 어머니, 몰락한 가정에서 성장한 다니자키는 평생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시달린다. 그의 초기 작품군은 악녀형 여성상이 주를 이룬 게 방증이다. 간사이(關西)로 이주하면서 안정을 찾아갔을 때 다니자키는 전통미가 넘치는 고상한 여성상을 등장시킨다. 노년기에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본능을 발휘하는 생명력 넘치는 자유분방한 여성상에 이른다.

예술이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끝없이 도전하고자 하는 행위이고, 일관되게 무모할 정도로 도전하는 자를 예술가라고 한다면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훌륭한 예술가다. 왜냐하면 그는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신적인 존재에 가까운 여성의 발밑에 바짝 엎드려서 노예가 되기로 맹세하고 황홀함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 최치현 -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같은 대학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에서 중국지역학 석사를 받았다. 보양해운㈜ 대표 역임.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독서회 ‘고전만독(古典慢讀)’을 이끌고 있으며 동서양의 고전을 읽고 토론한다.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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