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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1)] 강대국 명나라의 탐욕을 다스리는 법 

맞서지 않으면서도 이기는 지혜를 찾다 

明의 과도한 요구 조건부 수용하며 조선의 독자성 지켜
조선을 찾는 사신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 필요하면 로비도


▎세종은 사대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한 적이 없었다. 세종을 소재로 한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 사진: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21세기 들어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를 ‘대공위(大空位)의 시대’라고 불렀다. 정치권력이 자본의 힘에 밀려 실종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옳은 진단이다. 우리나라 안을 두루 살펴보아도 이렇다 할 정치적 리더십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지구적인 차원에서 보아도 문제는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도처에 널려 있다. 이미 발등에 떨어진 기후위기의 해법은 뭔가. 국가 간의 무역 분쟁은 장차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4차 산업혁명의 와중에서 더욱 불거질 계층 및 세대 간의 문제는 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세종의 시대를 함께 찬찬히 되돌아보기를 제안하는 이유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도 그의 역작 [대변동](김영사, 2019)에서 강조했듯, 우리는 역사로부터 “유용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세상사가 제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있기 마련.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실용적인 정책을 창안했던 군왕을 꼽자면 단연 세종이 떠오른다. 그는 여러 분야에 걸쳐 당대 최고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성공했고, 지식의 창조적인 융합을 통해 제기된 문제를 해결했다.

역사가 그대로 되풀이되는 법은 결코 없다. 하지만 비슷한 유형의 위기와 기회는 몇 번이고 등장한다. 대변동의 시대를 헤쳐나갈 역사적 지혜를 탐구해야 할 시간이다.

한도 끝도 없는 명나라의 요구

세종의 치세는 명나라 시기와 겹친다. 명 태조 주원장이 몽골 제국을 무너뜨린 이래, 그의 후예들은 천하의 주인을 자처했다. 한편으로 명나라는 주변 국가들을 너그러운 언사로 회유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 희귀한 자원을 약탈하는 등 여러모로 압박했다.

사정은 세종 때도 다름없었다.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는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조선의 진귀한 특산물을 요구했고, 그에 더해 수많은 사적 요구까지 늘어놓았다. 조정은 그들의 끝없는 탐욕을 채워주기에 지쳤다. 과연 언제까지 저들의 장단에 맞춰 춤출 것인가.

세종은 출구전략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왕은 믿음직한 신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사태의 전환을 가져올 전략을 짰다.

14세기 말 대륙의 정세가 바뀌어 몽골 제국의 시대는 갔어도 오랜 관행이 그대로 남았다. 명나라는 조선과 베트남 등을 상대로 크고 작은 약탈을 멈추지 않았다. 조선은 등이 휠 지경이었다. 별로 나오지도 않는 금과 은을 요구했고, 환관으로 삼을 어린아이들과 궁녀가 돼 황제를 기쁘게 할 공녀(貢女)를 데려갔다. 그 밖에도 자기들이 필요하다 싶으면 한꺼번에 수천 마리의 말을 끌어갔다. 사냥에 쓴다며 조선의 매와 개도 내놓으라 을러댔다.

조선은 이른바 제후의 나라라 명나라 황제에게 각양각색의 공물을 바치게 됐다. 명나라는 그들이 원하는 물자를 언제든 징발할 수 있어 편리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이 공물을 마련하느라 여념이 없어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지 못할 테니 그 또한 명나라의 국익에 이롭다. 조선을 못살게 굴면 장차 일어날지도 모르는 변방의 후환을 예방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조선이 노골적으로 반발하지 않는 한계 수준까지 명나라는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의 역사가들은 조공무역을 통해 명나라보다는 조선 측이 도리어 많은 이익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말 그랬을까?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다. 조선도 중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로부터 필요한 물자도 많았고, 외래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수요도 컸다고는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명나라에 지불한 대가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똑똑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세종 때에 국한해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해보자.

15세기 명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유교 국가였다. 그럼에도 사신을 보내 조선 각지의 사찰에 애지중지 보관하던 진신(眞身) 사리 곧 부처의 사리들을 가져갔다. 세종 1년(1419) 황엄은 한양에 머무르며 조선 측이 수집한 진신 사리를 낱낱이 비교 검토해 쓸 만한 것만 따로 간추려 명나라로 가져갔다. 명나라 영락제는 조선 팔도에 수백 년 동안 깊이 간수된 진신 사리마저 빼앗은 셈이었다.

황엄이 누구인가. 그는 태종 때 무려 9차례나 조선에 사신으로 드나들었고, 태종의 면전에서 여러 차례 무엄한 언행을 연출했다. 전라도에 내려갔을 때는 장성(진원현)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 원성이 자자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관찰사 박은이 그 일로 사직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을까.

그런 황엄이 세종이 즉위하기가 무섭게 다시 조선으로 나와 보물급 사리까지 몽땅 가져갔다. 비루한 언행과는 딴판으로, 황엄은 불심(佛心)이 있었는지 사신으로 나올 때도 불상을 모시고 나온 적도 있었다. 일설에는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명나라 환관 해수 역시 조선의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인물이었다. 세종 5년(1423) 조선에 와서 어린 환관을 데려갔다. 말이 나온 참에 조선 출신의 명나라 환관들에 관해서도 몇 마디 보탠다. 명나라는 원나라 때의 관습대로 중국 주변의 여러 국가로부터 환관을 데려갔다. 명 황제는 천하의 주인에 걸맞게 각국에서 온 환관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들 가운데는 자연히 황제의 눈에 들어 출세하는 환관도 나왔고 후궁도 여럿이 나왔다. 조선 출신의 환관들 중에서 출세한 이들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고국에 사신으로 파견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고국에서는 평민이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황제의 사신이 돼 귀국했으니, 높이 출세해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셈이었다. 나라에서는 행여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까 매우 조심스럽게 대접했다. ‘칙사대접’이라는 표현이 나온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세종 11년(1429) 영락제의 사신으로 일시 귀국한 진입의 경우만 해도 그랬다. 그 역시 세도를 부리며 잡다한 물품을 많이 요구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고향을 특별히 높여 승격시키라는 주문도 내놓았다. 어떤 경우에는 본가의 친척들을 특정한 집안과 결혼하게 주선해 달라는 부탁도 늘어놓았다. 한마디로, 성가시고 불편한 청탁이었다.

이런 자잘한 부탁까지 일일이 챙겨줘야 하는 조정으로서는 본국인 환관이 사신으로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을 법하다. 그러나 명나라로서는 조선 출신 환관을 거느리는 게 여러모로 유익했다. 본국 출신 환관이 있음으로, 조선의 내부사정을 환히 꿰뚫을 수 있었다. 그들을 통해 일단 유사시에는 조선을 속속들이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다시 명나라 사신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환관 해수는 잡다한 여러 물품을 제공하라고 조선 측에 강요했다. 한꺼번에 워낙 여러 가지를 요구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각 도에 명령해 이를 준비하게 조치할 정도였다. 해수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많은 양의 비단을 강제로 팔아 한 밑천을 마련하기도 했다.

창성(昌盛), 탐욕스러운 명나라 환관의 대명사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 전시된 세종대왕 어진(운보문화재단 소장). / 사진:연합뉴스
물론 사신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명나라 사신치고 조선을 능멸하고 괴롭히지 않은 이는 드물었다. 그들이 내놓으라고 졸라대는 물품은 종류도 다양했고 수량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환관은 돌로 만든 조선의 석등잔(石燈盞)까지 탐을 냈다(세종 11년). 조선을 괴롭히는 중국 관리는 명나라 안에도 있었다. 외교 사무를 담당하는 명나라 예부의 하급관리들조차 조선에서 사신이 가면 이런저런 물품을 함부로 요구했다(세종 11년). 사대(事大)를 하며 조공을 바치며 산다는 것은 낭만적인 일로는 결코 볼 수가 없었다. 실로 힘겹고도 역겨운 일이었다.

사신으로 온 환관 중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이는 바로 이 사람이었다. 환관은 조선에 파견돼 공물을 거둬가는 채방사였다. 세종 9년부터 10년까지 두 해 동안 그는 조선과 요동을 드나들며 해동청 곧 당시에 사냥매로 가장 각광을 받던 조선의 매를 찾아 나섰다.

환관 창성(昌盛)은 조정의 큰 두통거리였다. 자신이 직접 사람들을 부려서 조선의 표범과 매를 잡아들이겠다고 주장하면서 이곳저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세종 12년에도 같은 문제로 조선에 찾아와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

창성의 탐욕은 그 끝을 알기 어려웠다. 세종 10년에는 전부터 조선을 출입하던 환관 황엄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토색질(돈이나 물건 따위를 억지로 달라고 하는 짓)을 일삼았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일거에 증식하려고 작심이라도 한 듯, 많은 물건을 강매하기도 했다.

15세기 전반 창성은 여러 차례 사신으로 와서 조선사회에 큰 피해를 주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런 사실이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역대요람]에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세종 10년 한양에서 그가 조정에 요구한 물품 목록에서 몇 가지만 예로 들어본다. 가령 그해 7월 26일에는 쇠를 녹여 주조하고 그 위에 도금(鍍金)한 일월진언자(日月眞言字), 각종 구리그릇, 놋그릇, 돗자리, 세마포(細麻布)에다 도련지(擣鍊紙)를 요구했다. 며칠 뒤 8월 4일에는 마함(馬銜) 6개, 이마장(理馬粧), 동선(銅鐥), 동주굉(銅鑄觥), 청서피(靑鼠皮) 25장, 초피(貂皮) 5장을 따로 달라고 했다. 또 8월 6일에는 호피(狐皮) 10장, 수달피(水獺皮) 5장, 경자(磬子) 1개를 요청했다. 뇌물에 대한 요구는 이후로도 줄곧 이어졌다.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였다.

세종은 창성의 탐욕에 고개를 저었다. 연어 젓갈까지 요구하는 데는 인내심이 많은 왕도 그만 질려버렸다(실록, 세종11년 8월 7일). “창성은 욕심껏 청하고 그만둘 줄을 모른다.” 세종은 그의 탐욕에 한숨을 내쉬었다.

공무역은 허용하되 사무역은 절대 불가(不可)


▎1.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림 ‘송조천객귀국시장’. 북경에서 조선 사신을 송별하는 장면을 담았다. / 2.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영접도감사제청의궤’. 조선에 왔던 명나라 칙사의 행렬도를 그렸다. 중앙포토
예부터 국가 간의 무역은 필수불가결한 측면이 있었다. 더욱이 조선처럼 영토가 작은 나라로서는 특권층의 수요를 자급자족하기 어려웠다. 특히 고급 약재라든가 사치품은 수입을 통해 해결하는 편이었다. 또 사신들의 여행 경비가 상당했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조선의 특산품을 팔아 다소나마 비용을 충당할 필요도 있었다. 명나라를 오가는 사신들이 공무역에 종사하게 된 배경이다. 이런 전통은 고대로부터 시작돼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세종 5년(1423)의 사은사 일행도 그러했다. 호조의 건의에 따라 조선 사신들은 중국에서 고급 약재를 구입했다. 7년 뒤인 세종 12년에도 역시 같은 목적으로 공무역이 이뤄졌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사무역을 철저히 금했다. 여기에는 적지 않은 이익이 달려 있었다. 때문에 사무역을 아무리 금지하더라도 과연 실질적으로 효력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세종을 비롯한 조정의 태도는 엄격했다.

한성부에서 사무역에 관여한 부상대고(富商大賈)들, 즉 부유한 상인을 고발하자 세종은 엄벌을 지시했다(실록, 세종 5년 8월 23일). 왕의 의지는 완강해, 그보다 4개월 뒤에는 천추사(조선 때 해마다 명나라에 보내던 사절) 총재 최운까지도 처벌했다. 왕은 “최운이 무역한 물품을 몰수하고 직첩(職牒)을 빼앗은 다음 시골로 쫓아내라”고 명할 정도였다(실록, 세종 5년 11월 25일).

오늘날의 입장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 당시 서양의 관행이나 중국 및 일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견줘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15세기 조선 사회는 외국과의 자유로운 무역활동을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그들이 보기에 사무역이란 일확천금을 노린 투기꾼들의 협잡에 불과했다. 돈벌이에 눈먼 명나라 사신들의 행동거지에 실망한 조선의 국왕과 대신들은 무역행위 자체를 필요악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사신에게 아부한 자는 파면하라”


▎조선 태종 2년(1402) 제작된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당대 조선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조선사회는 명나라 환관 해수의 탐욕스러운 행동에 기가 질렸다. 그가 떠난 뒤 예조에서는 장차 사신의 횡포를 막기 위해 몇 가지 시정방침을 마련했다. 무리한 요구는 절대 들어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의 호구가 아니라는 선언이었다. 세종 5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사신들의 탐욕을 단속하기는 어려웠다. 뜻있는 신하들은 세종의 사대주의가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니냐며 조심스레 문제를 제기했다. 세종은 신하들의 용기 있는 태도와 비판적 관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왕은 사신들의 몰염치로 빚어진 경제적 손실을 막고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도 사태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세종 10년 창성 등이 사신으로 와서 더욱 많은 물건을 요구하자 왕과 신하들이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회의도 열고 대책을 궁리했다. 어떻게 하면 명나라 사신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지혜를 모으기 시작한 셈이었다.

세종은 명나라 사신들의 방자하고 탐욕스러운 행위가 되풀이되자 황해도와 평안도 감사 등에게 명령을 내렸다. “창성이 요동으로 돌아갈 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요구하면 들어주지 말라”고 명령했다(실록, 세종 10년 7월 25일). 사신 접대에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 이듬해, 예조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거듭해 신발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이를 거절하는 일도 있었다(실록, 세종 11년 6월 8일).

조선사회가 이렇게 변화하는 시점에, 창성과 같이 파렴치한 환관이 또다시 사신으로 나왔다. 세종은 그의 행동을 좌시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사신의 잘못을 (명 황제에게) 보고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부득이한 사유가 있으면 아뢰지 않을 수 없겠다. 지금부터 창성 등 사신들이 한 말을 모두 기록하라.”(실록, 세종 12년 8월 6일) 왕명이 이러했다. 조정에서는 명나라 황제가 보낸 사신이라 해도 부당한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다는 결의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뚜렷해졌다.

명나라 사신들에게 휘둘리지 않으려면 조선 내부를 좀 더 철저히 단속할 필요도 있었다. 많은 신하가 공감하는 바였다. 세종 12년 사헌부에서는 사신에게 지나치게 아부했다는 이유로 동지총제(종2품 무관직) 남궁계를 벌하라고 주장했다. 왕은 그를 파면하라고 명을 내렸다(실록, 세종 12년 1월 21일).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세종과 그의 신하들은 명나라에서 활동하는 조선의 환관들과 이쪽 관리들이 사적으로 접촉하는 것도 엄격히 금했다. 사신이 돼 중국에 파견된 관리라 해도 사적인 인연으로 본국 출신의 환관이나 궁녀와는 결코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불가피한 접촉이 발생했을 때는 반드시 그 실상을 자세히 보고하게 조치했다(세종 16년). 그렇게 함으로써 장차는 조선 출신의 환관들이 조선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종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장차 조선 사람이 명나라의 환관이나 궁녀가 되지 못하게 막고자 했다. 조선의 독자성을 확고하게 지키려면, 명나라 황제의 궁궐에 조선의 내부정보를 제공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것이 바람직했다. 우리 측의 끈질긴 노력도 있었던 데다가 명나라 내부의 사정도 없지 않아, 공녀와 환관의 송출은 15세기를 고비로 막을 내렸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크게 다행한 일이었다.

‘대천이물(代天理物)’의 뜻을 따랐던 세종

세종은 일찌감치 명나라 사신들의 전략적 가치에도 주목했다. 조선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데 사신으로 오가며 인연을 쌓은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이미 세종 2년(1420)부터 그의 외교적 수완은 발휘됐다. 왕은 대신(大臣) 하연을 통해 환관 황엄에게 접근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금과 은을 조공에서 면제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현대식으로 말해 환관을 통한 일종의 로비였다.

쉽게 성사될 사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될 때까지 차근차근 밀어붙이는 것이 그의 정치 스타일이었다. 결국 명나라는 금은을 조공에서 제외해줬다(세종 11년). 그 대신에 조선에서 생산한 말을 바치는 쪽으로 절충이 이뤄졌다.

세종은 용의주도한 왕이었다. 그는 한편으로 금과 은의 조공을 피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 각지에 사람을 보내 금광과 은광을 샅샅이 조사했다. 혹시라도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쉽게 개발할 수 있는 광산이 있는지를 파악해, 국가의 쓰임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왕은 중국과의 외교 현안이 언제든지 불거질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외교 전문가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외교 문서를 정확하고, 세련되고, 우아하게 작성할 인재가 필요했다. 아울러 고급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통역관도 필요했다. 세종은 바로 그런 어학교육에도 많은 정성을 쏟았다. 그때 세종에게 발탁된 중국어 전문가 중에는 이순신의 5대조인 이변도 포함됐다.

여담이지만 세종 자신도 중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명나라 사신이 중국어로 말하는 동안 이미 그 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래야만 왕이 핵심을 찌르는 대답과 질문을 할 수 있다. 물론 왕은 언제나 명나라 사신 앞에서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꾸민 채 훌륭한 우리 측 통역관을 통해 공식적인 대화를 이어나갔다.

세종의 문제 해결 방식이 후세에 주는 교훈은 적지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는 실용적인 방법을 중시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왕은 절대 이념에 사로잡히는 법이 없었고, 무모하게 초강대국에 함부로 맞서 고난을 자초하지도 않았다. 겉으로 보면 세종은 항상 사대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제로는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한 적이 없었다. 그는 조정대신들과 지혜를 모아 명나라의 압박에서 벗어날 해결책을 마련했다. 또한 해마다 조선에 파견되는 명나라 사신들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해, 그들의 토색질을 막아낼 방법을 강구했다.

아무리 어려운 경우라도 세종은 지레 포기하는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나라와 백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즐겨 읽은 [서경(書經)]에서는 왕을 ‘대천이물(代天理物)’의 존재라고 했다. 왕은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다스린다는 뜻이었다. 적절한 대책이 나올 때까지 왕은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그를 우리 모두의 보배로운 어진 왕으로 만들었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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