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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1)] 청와대는 언제부터 왕궁터였나 

1000년 전 고려 남경의 신궁(新宮)이 열리다 

임진왜란·대일항쟁기 거치며 소실·복원·강탈 등 우여곡절
1946년 세종로 1번지로 개명… 면적은 23만여㎡로 조정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옛날부터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여러 궁궐을 비롯해 능(陵)·원(園)·묘(墓)·사당 등 아직도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대일항쟁기 국가 주권 상실과 함께 맞게 된 급격한 왕권 몰락과 정부 수립 이후 경제논리에 우선한 개발과 정비로 인해 많은 유적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현재도 사라지고 있거나 훼손돼 가고 있다. 서울의 중심 지역이었던 청와대와 그 주변 지역에 남아 있거나, 이미 사라졌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지 못했던 역사문화 유적들을 소개함으로써 우리의 소중한 옛것을 널리 알림과 동시에 다 함께 아끼고 보존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연재를 기획하게 됐다. [편집자 주]


▎청와대란 명칭은 윤보선 전 대통령 때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철통 같은 경비가 이뤄지고 있는 청와대 정문.
1. 고려시대의 청와대 자리

경복궁에서 북악(백악)산 정상을 바라보면 8부쯤 바위 위에 다른 바위가 얹힌 듯 돌출돼 보이는 바위가 있다. 부아암이라고도 하고 해태바위라고도 하며 오리바위라고도 한다. 부아암이란 이름은 서로 포개진 두 개의 바위가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바위는 멀리서도 보여 북악산을 상징하는 특징적인 바위로 손색이 없다고 하겠다.

이 바위에는 조선왕조 창건 당시 경복궁의 위치 선정·배치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풍수 전문가이며 예언가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는 “경복궁의 정면에 바라보이는 관악산이 불의 형상을 하고 있어 경복궁이 남향하면 200년 뒤에 화마의 재앙이 생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유학자이자 치세가였던 정도전은 “군주는 남쪽을 향해 정사를 보는 법이며, 또한 북악산의 해태바위가 물을 상징하고 앞에 한강이 흐르고 있어 화마(火魔)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궁궐을 배치했는데 무학대사의 화마 예언은 200년 뒤의 임진왜란으로 정확히 맞았다는 것이다.

‘200년 후 화마’ 무학대사의 예언 적중


▎경복궁 집옥재(集玉齋)와 북악산. 북악산의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 사진:이성우
물론 이 이야기는 실록과 같은 정사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하게 살펴봐야 하는 것은 현재의 경복궁이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離宮) 자리인 백악 밑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복궁의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면 청와대 터는 고려시대 남경의 왕궁터라는 의미가 된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 판삼사사(判三司使) 정도전, 청성백(靑城伯) 심덕부 등을 한양에 보내서 종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했다. 권중화 등은 전조(前朝) 숙왕(肅王) 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터가 너무 좁다하고, 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 북북서쪽을 뒤로하고 남남동을 앞으로 향한 방향)이 평탄하며, 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 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종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쳤다. _[태조실록] 3(1394)년 9월 9일 위의 내용은 조선시대의 기록으로, 전조 숙왕이란 고려의 숙종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볼 때 숙종 때의 남경 왕궁은 지금의 경복궁보다 더 북쪽, 즉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개국 초기부터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크게 의존했다.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융성·영속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수도 이외의 땅에 삼경(三京)과 삼소(三蘇)를 설치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고려 문종 역시 풍수지리와 도참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문종은 1067(문종 21)년에 지금의 서울인 양주를 남경으로 고치고, 다음 해에는 남경에 신궁(新宮)을 건설했다. 몇 년 후 남경은 폐지됐는데 숙종 9(1104)년에 이르러 다시 설치됐다.

당시 숙종(肅宗: 재위 1095~1105년)은 아예 남경으로 천도하고자 직접 남경에 가서 지세를 살펴봤다. 그 당시 남경 궁궐 자리로는 여러 곳이 거론됐는데 최종적으로 삼각산 면악(面嶽)의 남쪽이 채택됐다. 이 면악이 바로 지금의 북악산이다. 면악이란 산의 모습이 얼굴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라 생각된다. 예로부터 북악산은 호랑이 또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겼다고 봤다.

749년째 자리 지키고 있는 유일한 흔적은

최사추 등은 후보지를 돌아보고 돌아와 노원역(지금의 노원구 일대), 해촌(지금의 도봉산 아래), 용산(지금의 용산 일대) 등지는 산수가 도읍으로 삼기에 부적합하며 다만 삼각산 면악의 남쪽이 산수의 형세가 고문(古文)에 부합하므로 주간(主幹) 중심대맥(中心大脈)에 임좌병향으로 땅의 형세에 따라 도읍을 세울 것을 청해 허락을 받았다. _[고려사] 권 11, 숙종 6(1101)년 이후 남경 왕궁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계속 남아서 예종·인종이 행차해 신하들로부터 조하(朝賀)를 받고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고종 18(1231)년부터 시작된 세계 대제국 몽골(원나라)과 약 40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국토는 황폐해지고 많은 건물과 문화재가 소실됐다.

충렬왕(재위 1274~1308) 당시에도 왕이 남경으로 행차했거나 그곳에서 사냥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왕궁과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마 몽골과의 전쟁 때 남경 왕궁이 피해를 봤고, 왕이 거처할 정도의 집조차도 없어서 임시 행궁에서 머물렀으리라고 본다.

남경은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마자 한양부(漢陽府)로 강등된 상태로 유지됐다. 그러다 원의 간섭을 배격하고 자주적인 고려 재건을 위한 개혁 정책을 편 공민왕(재위 1351~1374년)대에 이르러 남경을 복원하고 나아가 한양 천도를 계획해 왕궁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남경 왕궁 건설과 천도 계획은 중단됐다. 공민왕의 아들 우왕과 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 때도 남경으로 천도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국력이 기울어가던 상황에서 천도는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현재 청와대 구(舊) 본관 터에는 역사의 흔적을 가늠할 수 있는 주목(朱木)이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청와대가 고려의 옛 왕궁터였다는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수령 약 749년(2019년 기준)으로 추정되는 이 주목은 나이 기준으로만 한다면 고려 원종(재위 1259~1274년) 때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일한 흔적인 셈이다.

2. 조선시대의 청와대 자리


▎경복궁 내 건물 배치를 그린 ‘경복궁도’.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2007년) 56면 전재(轉載). / 사진:이성우
조선시대(대한제국시대 포함)의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북쪽, 즉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을 포함한 궁장(宮牆) 뒤쪽에 위치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지금의 청와대 자리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아래의 3기로 나눠 볼 수 있다.

⑴ 조선 전기 청와대 자리

조선 전기는 대략 조선의 건국부터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될 때까지 약 200년간을 이른다.

경복궁은 조선이 건국된 지 3년여가 지난 태조 3(1394)년 12월에 착공돼 태조 4(1395)년 9월 말에 1차 완공됐다. 그러나 태조 7(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 정종이 개경으로 천도하면서 4년 만에 경복궁은 빈 궁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태종 5(1405)년 한양 재천도를 단행했지만 이때 태종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새로 건설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 전기 대부분의 왕은 경복궁에 거처했으며, 청와대는 그 북쪽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서는 회맹(會盟)을 실시하기도 했다. 회맹이란 왕이 공신과 역대 공신의 적장자손(嫡長子孫)들과 함께 회맹단(會盟壇)에서 천지신명 앞에 맹서하고 봉군(封君)·봉작(封爵) 등 논공 행상을 행하는 의식이다. 이 회맹단은 겸제 정선의 ‘취미대(翠微臺)’ ‘북단송음(北壇松陰)’ 등의 그림과 기록을 통해 지금의 신무문 밖 북동쪽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또 여러 기록을 검토한 결과 회맹단을 포함한 인접 지역에는 마을도 있었다고 보는데 그 이름은 북동(北洞) 또는 대은암동(大隱巖洞)이다. 그중 [태종실록] 17(1417)년 4월 11일 기록(공신적장이 경복궁 북동에서 회맹했다)을 보면 경복궁의 북동에서 회맹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뤄 회맹단을 포함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폐허 상태로 남아야 했던 270년

청와대 지역이 경복궁의 후원(後園)이었다는 것은 경복궁 중건 이후인 조선 후기의 상황으로 조선 전기의 후원 권역과는 차이가 있다. 이 시기 경복궁 후원에는 충순당(忠順堂)·접송정(接送亭)·취로정(翠露亭)·서현정(序賢亭)·관저전(關雎殿) 등의 전각이 있었다. 이 전각들은 조선 전기 경복궁의 모습을 간략하게나마 전하는 아래의 ‘경복궁도(景福宮圖)’와 실록 등을 통해 대부분 오늘날 청와대와 인접한 경복궁의 북쪽 궁장 안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농작(內農作)의 모든 기구를 후원에 배설(排設)했는데, 왼편은 경회지(慶會池) 북쪽 첫 섬돌로부터 북쪽 담장 소문(小門) 안까지 이르렀고, 오른편은 충순당 앞섬돌로부터 취로당 앞까지 이르렀다. _[중종실록]9(1514)년 1월 14일

이 그림을 통해 볼 때 조선 전기의 경복궁은 고종 때 중건한 경복궁과 전체적 형태는 유사하지만 내부의 전각 배치 및 규모 등은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북쪽 궁장 안쪽에 선원전(璿源殿)·문소전(文昭殿)·무송정(撫松亭)·취로정·서현정(序賢亭)·충순당·간의대(簡儀臺)·내사복시(內司僕寺)·관상감(觀象監) 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세조 2(1456)년 3월 5일에 낙성된 취로정이 있는 만큼 그 이후부터 임진왜란 이전 어느 시기의 경복궁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조실록’에 등장하는 영조의 글씨가 새겨진 정해친잠비각(丁亥親蠶碑閣)이 표기돼 있어 그 작성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 창의궁(彰義宮)에 거둥했고, 밤에는 경복궁의 친잠단(親蠶壇) 비(碑)를 세운 곳에 나아갔다. 지난 정해년의 친잠 때 단(壇)을 근정전(勤政殿) 북쪽에 쌓고 오소례(五繅禮)를 행한 바 있었는데, 이때 와서 임금이 ‘정해친잠’이란 네 글자를 직접 써서 돌에 새기고, 유사(有司)에게 명해 비음기(碑陰記)를 지어서 기록하게 했다. _[영조실록] 46(1770)년 1월 9일

⑵ 조선 중기 청와대 자리

조선 중기는 경복궁이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부터 고종 때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당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익황후조씨(속칭 조 대비)에 의해 중건되기 이전, 폐허 상태로 남아 있었던 약 270년간이다. 이 시기 지금의 청와대 지역은 대체로 앞 시기와 마찬가지 양상이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폐허 상태인 경복궁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욱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상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선의 그림 ‘은암동록(隱嵓東麓)’과 지금의 청와대 근처에서 살았던 김상헌의 시 ‘회맹단’(“사람이 없어 허공이 적막하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리고 심지어 회맹단 부근에서 활쏘기할 수 있었다는 아래 기록 등을 통해 이 같은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경복궁의 신무문 밖에서 회맹할 때 전하께서 앉으셨던 단이 있는데, 그전부터 무사가 모여 활쏘는 것을 금했습니다. 한 재신(宰臣)이 어제 떼지어 모여서 마구 쏘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금지하니 그중 두 무사가 팔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돌진해 거의 구타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_[숙종실록] 28(1702)년 10월 27일

⑶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기 청와대 자리

조선 후기 및 대한제국기는 고종(재위 1863~1907년)이 즉위하면서 경복궁이 복원돼 다시 왕궁으로서 기능한 이후부터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약 50년간이다. 이 시기 지금의 청와대 자리, 즉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에 대한 일반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통제됐다.

신무문 밖에 지은 후원, 지금의 청와대 지역으로 출입하는 정문은 신무문이다. 그리고 신무문을 거치지 않고 후원으로 들어가는 문으로는 동쪽의 춘생문(春生門)과 춘화문(春和門), 서쪽의 추성문(秋成門)과 금화문(金華門), 경농재 인접 담장의 용강문(用康門) 그리고 ‘천하제일복지’라는 각자(刻字)에서 서쪽으로 일직선으로 연(連)하는 서북쪽 담장의 현무문(玄武門)이 있었다.

이 가운데 춘생문의 담장은 태화궁(太和宮)과 연결됐고, 춘화문에서 시작한 담장은 북으로 북악산 중턱을 지나 서쪽 추성문으로 이어지는데 그 길이는 698간(間, 약 1675m)에 이르렀다. 후원의 중앙과 동쪽 춘화문 안에는 후원을 지키는 금위군의 수직소(守直所)인 수궁(守宮)이 있었다.

1912년 일본 소유가 되는 경복궁

이곳에는 고종 5(1868)년 9월부터 이듬해 7월에 걸쳐 융문당(隆文堂)·융무당(隆武堂)·비천당(丕闡堂)·중일각(中一閣)·오운각(五雲閣)·벽화실(碧華室)·옥련정(玉蓮亭) 등 488칸의 건물이 각각 들어섰다. 이후 고종 30(1893)년 경농재(慶農齋)·대유헌(大有軒)·양정재(養正齋)·관풍루(觀豊樓)·지희실(至喜室) 등을 지었으며, 융무당의 동남편에는 수궁과 금위군직소(禁衛軍直所) 등 군 사용 건물이 담장으로 구획된 독립 권역을 갖고 있었다.

후원은 융문당과융무당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열병(閱兵)·교련을 위한 권역, 오운각을 중심으로 하는 완상(玩賞)과 휴식을 취하는 권역, 경농재를 중심으로 하는 친경(親耕, 왕이 농사를 직접 체험하는 일 또는 그를 실행하는 전답)과 관련된 권역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대한제국 말기 후원의 건물 배치는 ‘북궐도형’(北闕圖形, 1901년과 1907년 사이에 만든 경복궁 도면, 북궐은 경복궁의 별명)을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확인된다. 이 ‘북궐도형’과 1907년쯤 만든 [궁궐지(宮闕志)]에는 후원 건물이 모두 256칸 반(半)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대한제국 말기에 이르러 후원 건물의 상당 부분이 훼손되거나 철거됐음을 알 수 있다.

위 [궁궐지] 기록에 따르면 원래 후원 건물의 전체 칸수는 256칸 반이었으나 그 이전 언젠가 24칸의 건물이 사라지고 232칸 반만 남아 있다.

3. 대일항쟁기의 청와대 자리


▎[궁궐지]에 수록된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의 기록. [청와대와 주변 역사· 문화유산](2007년) 59면 전재. / 사진:이성우
다소 낯선 듯하지만 대일항쟁기란 2007년 9월 20일 국회 결의로 공식 채택된 일제강점기를 대신한 용어다. 일제 강점기는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35년간 일제(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일제에 강제로 점령당한 일본령(領) 조선으로 존재했던 기간을 의미한다.

대일항쟁기의 경복궁은 고종 33, 건양 1(1896)년 소위 아관파천으로 고종 황제가 경운궁으로 떠나자 정궁으로서 위상이 다시 급속히 추락했다. 대신 고종이 이어(移御)한 경운궁은 대한제국 황궁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위해 증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4년 발생한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돼 이후 복원 공사를 한 바 있다. 이 공사 때 경복궁 건물을 헐어 경운궁 건축 자재로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1912년 경복궁은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됐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통치 5주년을 대내외에 알리고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추진하면서 경복궁 부속건물을 이용하거나, 많은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다수의 가건물을 지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전근대적인 옛 문물을 전시하고 일본 제품을 홍보하는 데 있었다. 하지만 특히 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연 것은 경복궁이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던 왕궁이 아닌 한갓 행사장에 지나지 않으며, 나아가 조선왕조 및 대한제국의 권위와 향수를 지우려는 데 더 큰 이면의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공진회 때 후원의 왕궁 건물들도 훼손됐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1921년에는 경농재·융문당·융무당·침류각·오운각 등의 일부 전각만 남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옛 후원의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건물들은 1929년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을 기념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몇 동의 건물만을 제외하고 철저하게 파괴됐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박람회 이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 있던 옛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다.

이승만 때 경무대에서 윤보선 때 청와대로


▎1926년 이후 경복궁과 육조거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2007년) 62면 전재. / 사진:이성우
위 사진은 광화문이 경복궁 동쪽 궁장으로 이축된 1926년 9월 이후로 추정된다.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 경복궁 내에는 근정전과 경회루 등 일부 건물만 남아 있고,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훼철돼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청와대 지역도 동일한 전철을 밟으며 거의 모든 건물이 사라졌다.

4. 광복 이후의 청와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우리나라도 종전과 함께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 이후 미 군정 아래에서 일본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고 독립된 새로운 민주 국가 건설을 준비했으며, 1948년 8월 15일 드디어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미 군정의 최고 책임관인 군정 장관 존 하지 중장은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있었던 옛 총독 관사를 이어받아 관사로 사용했다. 또 이 건물은 다시 대한민국 정부로 인계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집무실 겸 관저로도 이용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옛 총독부 건물도 정부의 중앙청사로 사용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열악한 국가재정을 감안한 조치로 추정된다. 특히 옛 총독 관사를 집무실 겸 관저로 그대로 사용한 것도 중앙청과 지척 간인 점을 고려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1공화국 시기에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 이름은 대일항쟁기 때의 명칭인 경무대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 명칭은 이승만 대통령이 총독의 관사 명칭, 나아가 대일항쟁기의 명칭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조선 고종 때 인재 등용의 현장인 경무대를 계승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경무대는 1960년 4·19혁명 이후 탄생한 제2공화국의 윤보선 대통령이 독재정권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1960년 12월 30일 청와대로 공식 개명됐다. 이 명칭은 본관 건물에 ‘푸른 기와(靑瓦)’를 덮은 데서 유래됐다. 청와대란 이름은 청기와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며 동시에 영어 명칭인 ‘Blue House’가 미국의 ‘White House’와 비견될 수 있는 이름이라는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주장에 따라 채택됐다(현재 청와대의 영문 표기는 한글 발음을 따라 Cheong WaDae로 하고 있다).

이후 청와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가운데 하나이며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 등으로 사용되는 지역 및 건물의 총체적 명칭이 됐다. 청와대는 1968년 1·21 사태(김신조 사건)를 계기로 주변 경비가 강화되면서 북악산과 인왕산 및 청와대 앞길 등의 통행이 제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 앞길과 경내가 일반인에게 개방되기 시작했고, 이후 현재까지 그 폭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대일항쟁기에 경복궁의 후원 터이자 총독 관사가 있었던 광화문 1번지의 대지 면적은 64만4337㎡(19만4911평)였다. 이 지번이 광복 후인 1946년 세종로 1번지로 개명됐고 대지 면적은 23만980㎡(6만9871평)로 조정됐다.

이후 사무 공간의 확대와 경호 및 그와 관련된 건물·시설을 확충하면서 청와대 경내 대지는 세종로 1번지 이외에 삼청동 157-94번지 외 9필지, 영빈관, 제101경비단, 구 연무관 위치인 세종로 1-91번지 외 17필지, 궁정동 1-2번지 외 43필지 등 3개 동에 걸쳐 총 73필지 25만3505㎡(7만6685평)로 늘어났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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