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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46)] 세종에 쓴소리 마다치 않은 재상 경암(敬庵) 허조 

“아랫사람 고소로 수령 처벌하면 존비(尊卑) 질서 무너져” 

이조·예조판서 18년 맡아 유교 국가 초석 놓고 세종 태평성대 보좌
좌의정 역임하고 천수 누렸지만 아들과 손자는 단종사화로 멸문 당해


▎금호서원 사당인 경덕사(景德祠) 앞에 선 하양허씨 문경공파종친회 허광열 회장(왼쪽)과 허문환 총무.
"전에는 본국 예제(禮制)가 갖춰지지 못해 태종께서 허조(許稠)를 예관(禮官)에 임명하여 국휼(國恤, 왕실의 장례)을 제정하고 조의(朝儀, 조정의 의식)를 세우며 제례(祭禮)를 만들었다. 허조가 옛날 예문(禮文)을 참고해 조의와 제례는 제정했으나 국휼은 원고를 만들어 놓고 올리지 못했는데 두 차례 국상(國喪)을 관장하면서 민간 풍습을 고치고 옛 제도를 따르게 했다.”

조선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6의 내용이다. 1422년(세종 4) 7월 사관(史官)은 허조가 예제와 의식을 만들어 그때까지 시행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뿐만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 수많은 제도를 만들고 정비했다. 신생 왕조의 유교적 의례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종은 이 일을 예조와 의례상정소·집현전에 맡겼다. 여기서 나온 성과물이 1444년(세종 26) 집현전을 중심으로 편찬된 [오례의주(五禮儀注)]다. 이것을 30년에 걸쳐 보완한 게 성종 시기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다. 조선 유교 정치의 한 축이 정립된 것이다.

스승 권근 따라 '소학' 보급하고 장려


세종을 도와 이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신하는 실록에서 보듯 허조라는 인물이다. 본관은 하양(河陽). 경산 대구가톨릭대에서 대구로 들어가는 대경로 한쪽에서 ‘금호서원’이란 문화재 이정표와 마주쳤다. 위치는 하양읍 부호리. 큰길에서 마을로 300m쯤 들어가니 언덕에 서원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서원은 비어 있었다. 입구 안내문에는 ‘세종 시기 좌의정을 지낸 허조는 조선시대 초기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황희와 함께 세종 30년을 태평성대로 이끈 재상’으로 적혀 있었다. 도서관에 들렀다. 관련 자료 7권에서 경암(敬庵) 허조(許稠, 1369~1439) 선생의 자취를 탐색했다.

선생은 의례 제정과 함께 [소학(小學)] 교육을 장려했다. 주자(朱子)가 편찬한 [소학]은 쇄소(灑掃)·응대(應對)를 비롯해 애친(愛親)·경장(敬長)·충군(忠君) 등의 글을 여러 경전에서 뽑아 편집했다. 경암의 생애를 연구한 고 이수건 영남대 교수는 “[소학] 교육과 주자 [가례(家禮)]에 따른 상·제례 권장은 고려 불교 사회를 유교 사회로 바꿔 나가는데 필수적이었다”며 “경암은 스승 권근을 따라 그것을 보급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고 정리했다. 성균관과 4부 학당, 향교 등이 중심이 돼 [소학] 등 성리학을 보급한 것이다. 경암 자신도 부모상을 당했을 때 종래 불교의식을 취하지 않았다. 남수문은 묘지명에 “(허조는) 새벽닭이 울면 단정히 앉아 날마다 [소학]과 [중용]을 암송하고 정일(精一)한 사념으로 힘써 실천했다”고 썼다. 또 경(敬)을 중시해 거실에는 ’경암(敬庵)‘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는 이렇게 조선의 정체성 확립에 앞장섰다.

경암을 만나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그가 세종 시기 태평성대를 일군 주역인데 역사책은 물론 지역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무슨 까닭일까. 같은 시기 재상 황희·맹사성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11월 22일 금호서원을 다시 찾았다. 경암은 사후 문경공(文敬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하양 허씨 문경공파종친회 허광열(73) 회장을 만났다. 허 회장은 하양향교 전교를 겸하고 있었다. 하양이라는 지명은 1018년(고려 현종 9) 처음 붙여졌다. 벌써 1000년이 지난 이름이다. 하양은 한때는 경주에, 한때는 대구에 포함됐다가 지금은 경산시의 한 읍이 됐다. 허 회장은 경암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까닭을 “조상들이 나서서 그 어른을 알리는 게 도리가 아닌 것으로 본 것 같다”고 운을 뗐다.

그중 하나가 경암이 건의하고 실시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다. 그가 예조판서 또는 이조판서로 있을 때다. 세종은 중앙 못지않게 지방을 통치하는 데도 좋은 시책을 많이 폈다.

세종은 기존 군현제를 근간으로 지방제도를 정비, 위로는 8도 체제와 아래로는 면리제(面里制)를 확립한다. 지방행정은 감사와 수령(守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군현은 규모에 따라 주·부·군·현으로 구획되고 수령은 종2품에서 종6품까지 부윤(府尹)·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목사(牧使)·부사(府使)·군수(郡守)·현령(縣令)·현감(縣監)이 파견됐다. 세종은 한나라 선제(宣帝)를 본받아 지방 수령을 일읍(一邑)의 군주와 같이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분신으로 생각했다.

조선 초기 지방에는 유향소(留鄕所)가 있었다. 그 지역 출신 전직 관리들이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하기 위해 만든 자치기구다. 이 기구가 곳곳에서 도리어 수령을 비방하고 진퇴를 좌우하는 등 중앙집권과 수령의 권위 확립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갑질이다. 태종은 마침내 유향소를 폐지하고 토호세력의 횡포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후 수령의 권한 강화가 절실해졌다. 그때 경암이 세종에게 부민고소금지법을 건의한 것이다.

치국의 근본은 상하를 엄격히 구분하는 것이니 부민이나 아전 등이 고을 원을 고소해도 종사(宗社)나 살인 등이 아니면 불문에 부치자는 법안이었다. 세종은 받아들였다. 시행 9년 뒤에는 황희·변계량까지 가세해 부민고소에 관한 처벌을 강화한다.

하지만 만인을 만족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법이 수령의 권위를 세우는 데는 기여하지만 한편으로 수령의 비행을 조장하고 특히 부민은 억울함을 풀 수 없게 됐다. 애민(愛民) 군주 세종이 지나칠 리 없었다. 세종은 대안으로 중앙 관리를 내려보내 백성의 어려움을 탐문하고 관찰사가 수령을 철저히 감독하며 백성은 억울함을 소장으로 호소하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경암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종의 조치가 옳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암이 곧바로 세종에게 아뢴다. “부민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을 수리한 뒤 관리의 오판을 처단하게 하는 것은 존비(尊卑)의 구분을 없애게 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소신이 건의한 것을 따르게 하소서.” 세종이 답한다. “고금(古今) 천하에 약소한 백성이 억울함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이치에 맞겠는가. 경의 뜻은 알겠지만 실행키엔 온당치 않다.”

경암이 물러가자 세종이 옆의 신하에게 말한다. “허조는 고집불통이야.” 그러면서 세종은 경암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인다. 이튿날 세종은 형조에 이렇게 지시한다. “지금부터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부민의 소장을 수리해 바른 대로 판결만 하고 관리의 오판은 처벌을 없게 해 존비의 분수를 보전하게 하라.” 절묘한 세종의 대응이다.

그 대목에서 종친회 허문환(64) 총무는 “성품이 강직한 경암 선조는 요즘으로 치면 융통성이라고는 없는 원리원칙 공무원”이라고 표현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에는 경암을 묘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암은 척추가 굽은 장애인이었으며 식사도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먹은 탓에 늘 깡마른 체격을 유지해 말라깽이 재상 또는 수응재상(瘦鷹宰相, 송골매재상)으로 불렸다.

임금에게도 쓴소리 마다치 않은 ‘고집불통’


▎금호서원 경덕사 안 ‘문경공경암허선생’ 위패와 최근에 제작된 선생의 초상화.
경암은 태종을 18년간 보필했다. 그는 태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예조와 이조에서 의례 개정과 인사정책을 주로 맡았다. 태종은 경암을 “이 사람이야말로 참 재상”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바탕에서 세종이 즉위하자 경암은 태종의 천거로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18년간 번갈아 지낸다. 또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지공거(知貢擧)를 맡는 등 7회에 걸쳐 하위지·신숙주 등 많은 인재를 발탁했다.

종친회 허광열 회장은 경암이 세종 시기를 대표하는 공신 5명(황희·최윤덕·허조·신개·이수)에 포함돼 종묘(宗廟)의 세종묘정에 배향돼 있다고 설명했다. 조선 왕조의 신하로 가장 영예로운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어 문묘(文廟) 이야기가 나왔다. 문묘는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현 위패를 성균관과 향교에 모신 묘우(廟宇)를 가리킨다. 종묘와 문묘는 배향 기준이 다르다. 유림의 경암에 대한 평가는 한마디로 호의적이지 않다. 이유는 이렇다. 경암이 고려에서 벼슬살이하고 두 왕조를 섬겼기 때문에 올곧은 선비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림은 여말 충절을 지킨 삼은(이색·정몽주·길재)을 높이 평가한다. 허 회장은 “경암이 스승 권근을 비롯해 당시 관계한 인물이 조선의 개국 쪽에 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금호서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9호)을 둘러봤다. 유림은 1653년(효종 4) 지금의 경산시 하양읍 금락리에 처음 사당을 짓는다. 경암이 세상을 떠난 지 214년 뒤다. 그로부터 137년이 지나 정조는 서원 편액을 써서 내린다. 다시 81년 뒤 대원군은 금호서원을 철폐했다. 지금의 자리에 복원된 것은 1923년.

서원은 자그마하다. 사당인 경덕사(景德祠)로 올라갔다. 사당 오른쪽에 최근 그려진 경암의 대형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예를 올렸다. 위패에는 ‘문경공경암허선생’이라 쓰여 있다. 강당인 수교당(修敎堂) 앞면에 금호서원 편액이 보였다. 서원은 경상북도와 함께 중수를 계획 중이다. 문중은 2007년 [금호세고] 책판과 고문서 등 131점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경암이 세종 시기 뛰어난 재상이면서도 황희·맹사성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한 데는 또 다른 사연이 있었다. 바로 경암의 아들·손자와 관련이 있다. 경암 가문은 본래 위로 10대까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가문이 경암 대에 이르러 꽃을 피운다. 경암이 문과에 급제했고, 아들 허후(許詡)와 손자 허조(許慥, 할아버지 이름과 발음이 같다)가 대를 이어 과거에 합격한 것이다. 아들도 관운이 순탄했다. 1447년(세종 29) 아버지에 이어 예조판서에 발탁돼 문종이 즉위할 때까지 재직했다. [세종실록]에는 그가 사형수를 많이 구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시절은 수상해졌다. 짧은 문종 치세가 끝나고 ‘단종사화’(세조정변) 피바람이 불어 닥친 것이다. 문중은 ‘단종사화’로 표현했다.

경암의 아들과 손자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충절을 선택한다. 영남대 이수환 역사학과 교수는 “허후는 단종 초기 김종서·황보인 등과 함께 의정부를 대표하는 대신으로 계유정난 뒤 수양대군이 손을 내밀지만 그들 행위를 불의로 간주하고 죽음을 택했다”고 규정했다. 손자 허조도 허후를 이어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사전에 발각되자 자결한다. 형벌은 자결로 끝나지 않았다. 허조는 다시 사육신과 함께 팔과 다리를 찢기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한다. 허후·허조가 단종사화에 맞서면서 가문은 세조 측의 가혹한 보복으로 멸문의 화를 입었다.

아들·손자 단종사화 연루돼 멸문의 길로


▎단종사화에서 충절을 지킨 경암의 아들 정간공(貞簡公) 허후 정려문.
서원을 나와 마을 입구 대로변에 세워진 허후·허조의 정충각(旌忠閣)을 찾았다. 허광열 회장은 “허후 선조는 당시 문종의 최측근 3인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애틋해 했다. 정려가 내려진 것은 1792년(정조 16). 화를 입은 지 336년이 지나서다. 그 긴 세월 가문은 명맥만 겨우 유지했다. 허후·허조는 경암의 후광을 업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충(忠)과 의(義)로 절의와 지조를 지킨 것이다. 여기서 경암과 황희 두 가문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 황희의 자손은 세조 시기에도 훈구 대신으로 가세가 보존됐다.

정충각을 나와 한 곳을 더 답사했다. 하나 더 있는 금호서원이다. 그곳에서 2.8㎞ 떨어진 하양읍 금락리 금호서원이다. 담장은 높고 문은 잠겨 있었다. 입구 안내판에는 경암과 허후·허조 3인을 배향한다고 쓰여 있었다. 후손들이 서원 훼철 이후 복원 때 의론이 맞지 않아 한 지역에 금호서원 둘이 들어선 것이다. 후손들이 다퉈 경암 선조를 모신 결과다.

경암의 마지막도 놀랍다. 그는 눈을 감기 직전 도승지 김돈을 보고 싶어 한다. 김돈이 도착하자 경암은 자제를 물리치고 국사에 관한 유언을 남긴 뒤 임금께 전하라고 당부한다. “우리나라는 북쪽에 야인(野人)이 있고 동쪽에 왜가 있는데 만약 일시에 남북이 함께 난리를 일으키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사람들은 모두 태평성대라 하지만 위태하기 전에 난리를 근심하는 자가 과연 있겠는가. 원컨대 성상께서 남북 변경을 더욱 철저히 방비하소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나라 안위를 걱정한 것이다.

태평성대 일구고 웃으면서 세상을 떠나다


▎단종사화에서 충절을 지킨 경암의 손자 허조 정려문.
경암은 좌의정에서 물러난 1439년(세종 21) 12월 병상에 누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태평한 시대에 나서 태평한 세상에 죽으니 천지간에 굽어보고 쳐다보아도 홀로 부끄러울 것이 없다. 내 나이 이제 일흔이 넘었고, 지위가 상상(上相,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성상의 은총을 만나 죽어도 여한이 없다.”


▎금호서원 아래 도로변에 세워진 허후와 허조의 정려문이 새겨진 정충각(旌忠閣).
이날 형 허주가 들어가 보니 경암은 혼자 웃고 있었고, 아내가 들어가 보아도 역시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아들 허후가 옆에 앉아 보고 있어도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이상하게 여긴 가족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허조는 웃음을 띤 채 죽어 있었다.

현주(賢主)와 양신(良臣). 하늘이 도운 만남이다. 빼어난 군주 세종과 원칙주의 신하 허조는 서로 의존적이었다. 허조는 세종이 선정(善政)을 베풀 수 있도록 쓴소리를 마다치 않았고 세종은 그런 고집불통 신하를 품어 안았다. 허조는 조선의 태평성대를 충직(忠直)과 수법(守法)으로 떠받친 세종의 인재였다.

[박스기사] 유교적 명분론으로 국가 질서를 유지하다 - 체제 위해 장영실 승진 반대 등 신분제 ‘엄격’

“관기(官妓)를 없애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경암 허조는 당시 일부에서 주장한 ‘관기 폐지론’에 반대했다. 페미니스트가 들으면 가만있지 않을 말이다. 반대한 논리는 관기를 없애면 역설적으로 그 폐단이 결국 다른 여성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문중은 “신분제도가 엄연하던 당시를 지금의 잣대로만 봐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해명한다.

1427년(세종 9) 평강 현감 최중기의 아내 유감동이 공신의 자식을 비롯해 조카·고모부 등 수십 명 남자와 간통하는 희대의 스캔들이 벌어진다. 이때 허조는 혁신적인 의견을 낸다. “때로 남자가 강포한 짓을 하기 때문이다.” 성범죄의 원인이 남자에게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시대는 성범죄의 피해자인 여성을 도리어 처벌하거나 죽이는 예가 허다했다. 허조의 이 발언은 시대를 앞서간다.

그러나 허조는 신분제 문제는 엄격한 유교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 점에선 골수 보수였다. 경암은 평민과 계집종 사이의 자식이 평민이 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그래서 세종이 장영실의 재주를 아껴 관직을 높여 주려고 할 때도 반대한다. 황희는 관노도 재주나 용맹이 있을 경우 관직을 높이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허조는 장영실이 기생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정치적 문제에 대해 “무릇 정치하는 도리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업신여길 수 없으며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길 수 없으니 모름지기 법으로 금해 그것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유교적 질서를 중시했다.

경암은 처제가 자식이 없어 자신의 맏아들 후를 입양해 재산을 전계(傳係)하려는 시도를 맞닥뜨린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거절했다. 경암은 종법적 가족제도에 따라 자신의 가정부터 유교적인 가치를 지키는데 솔선수범한 것이다.

그는 상하(上下)·귀천(貴賤)·존비(尊卑)와 같은 유교적인 명분론이 국가나 사회질서 유지에 기본이 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로 인해 경암은 고집스럽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조선 초기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하층민의 억울함과 불만이 다소 있더라도 이를 무릅쓰고 추진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1호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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