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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집중해부] ‘민중의 벗’ 민변의 심상치 않은 권력화 

“전관예우 버금가는 ‘민변예우’ 생길 수도” 

노무현·문재인 정부에서 입법·사법·행정 3부 권력 요직마다 진출
공수처 출범하면 판·검사 잡는 민변이 사법체계 정점 차지할 가능성도


▎민변은 지난 30년간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국내 최대 재야 변호사 단체로 성장했다. 사진은 성 소수자 페스티벌인 퀴어축제에 참가한 민변 깃발. / 사진:민변 홈페이지
1990년대 후반 학생운동을 했던 직장인 박정식(44)씨에게는 시위 현장에서 겪었던 일 중 평생 잊히지 않을 장면이 있다.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학생운동 지도부 석방 투쟁을 벌이기 위해 광주광역시를 찾았을 때였다. 시위대를 포위한 경찰의 거친 진압 작전이 시작되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중년 남성이 경찰 앞을 가로막고 외쳤다. “변호사입니다. 불법적인 폭력 진압을 당장 멈추세요!”

그의 외침에 방패를 바닥에 두들기며 전진하던 전경들이 멈칫했다. 이윽고 경찰 지휘관이 나서 변호사와 상의하더니 경찰을 뒤로 물렸다. 바들바들 떨고 있던 학생들에게 변호사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저는 민변 소속 아무개 변호사입니다. 저희가 지켜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후 경찰은 강제 진압을 자제했고, 학생 시위대는 연행자 없이 시위를 마무리하고 해산했다. 박씨는 “그날 보았던 민변 변호사는 ‘민중의 든든한 벗’으로 가슴 깊이 새겨졌다”고 말했다.

박씨처럼 ‘거리의 법률가’ ‘민중의 벗’으로 사랑받아온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민변은 1988년 5월에 출범했다. 87년 6월항쟁으로 제도의 민주화를 이뤘지만, 거리에서는 폭압과 저항이 폭력으로 맞부딪히던 때다. 변호사 사무실의 문턱이 아직은 높았던 시대, 거리의 변호사는 누구보다 든든한 조력자였다.

민변은 올해 출범 31년째를 맞는다. 출범 당시 51명에 불과했던 회원 수는 1000명이 넘었다. 변호사 단체 중 가장 크다. 전국 8개 권역에 지부가 있고, 분야별 위원회는 15개에 이른다. 사법·노동·인권·여성·통일·환경·교육·경제 등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다.

외적 성장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영향력은 어떤 직능단체도 비교 대상이 못 된다. 노무현, 문재인 두 대통령을 배출했다. 김선수 대법관과 이석태 헌법재판관은 민변 회장을 지냈다. 국회와 행정부의 장·차관급 공직을 맡은 이들도 부지기수다. 대한민국의 파워엘리트로 꼽힐 만한 인물 중 민변 출신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노동자의 벗으로 시작해 최대 법률 단체로 몸집 불려


▎1990년 3당 합당 직후 민변 소속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가운데)이 시위대 앞에서 전경과 마주 보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 역사에서 민변은 출범할 때부터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 1988년 출범하기 전에 재야 변호사 단체인 ‘정의실현법조인회(정법회)’와 ‘청년변호사회(청변)’가 모태가 됐다. 정법회는 민주화 열망이 끓어오르던 1986년 5월 19일 구로동맹 파업 사건의 공동변론을 계기로 결성됐다. 강신옥, 고영구(전 국정원장), 이돈명, 이돈희(전 대법관), 조준희, 하경철(전 헌법재판관), 조영래 변호사 등 당대 인권변호사들이 두루 참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1987년 9월 부산 가두집회에 나섰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8년에 결성된 청변에는 이석태(헌법재판관), 박원순(서울시장), 백승헌(전민변 회장) 등 청년 법조인들이 뜻을 모았다.

저마다 개성이 뚜렷하고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데 익숙한 변호사들이 한뜻으로 뭉쳐 연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변이 출범하자 재야세력의 가장 든든한 우군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각자의 역할 분담을 통해 조직적으로 법률 지원 활동을 벌였기에 가능했다. 90년대 초 지방국립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89학번 김모(53) 씨는 “당시만 해도 경찰에 잡혀가면 때리거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경찰에 유리한 쪽으로 조사가 이뤄지는 게 비일비재했다. 그런 비민주적인 환경에서 민변 변호사는 학생운동 진영에 법적인 조력을 주고, 경찰의 불법 행위를 감시해 운동가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시국 사건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줄었다. 더불어 386세대가 학교 울타리를 넘어 사회에 본격 진출하면서 시민운동의 저변이 넓어졌다. 이 같은 시대 흐름에 발맞춰 민변은 노동·학생운동 중심에서 인권과 공익소송 활동으로 반경을 넓혔다.

특히 2000년 총선은 민변의 대중성을 확장한 계기였다. 4월 13일 제16대 총선을 앞두고 전국 412개 시민단체가 ‘총선시민연대’로 뭉쳤다. 정치구조 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사상 첫 낙천낙선운동이 펼쳐졌다. 낙천낙선운동을 제한한 선거법 개정이 시민사회 진영의 시급한 과제 중 하나로 떠올랐다. 법적 쟁점을 연구하고 개선할 500명의 자문 변호사단이 발족했다. 그 중심에 민변이 있었다.

여러 불합리한 제도 개선과 과거사 회복을 위한 법률 전문가의 역할과 중요성이 점차 커지면서 정계 진출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한다. 2002년 대선에서 민변 회원이기도 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정치권의 민변 인재 영입에 도화선을 당겼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 박주현 청와대 국민참여수석, 고영구 국정원장, 이석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등 참여정부 요직에 어김없이 ‘민변 회원’이 중용됐다.

이 때문에 참여정부 초기부터 민변의 권력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정치권력을 상대로 한 투쟁에 익숙한 자유분방한 기질이 강한 탓에 회원들 사이에서도 민변의 공직 진출에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공익적 변론 외에 민변의 주요 활동 중 하나는 다양한 이슈와 정책에 관한 의견 개진이다. 민변의 이름을 달고 내는 공식 입장인 논평과 성명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를 향한 날 선 비판이 마냥 편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2004년 탄핵 사태를 맞이한 뒤 치러진 총선에서 민변 소속 변호사들이 열린우리당 간판을 달고 대거 국회에 진출하며 논쟁이 뜨거워졌다. 총선 직후인 2004년 5월 29일 민변 제17차 정기총회에 상정된 회칙 개정안은 민변의 내부 고민을 짐작케 한다. 당시 민변은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의장 및 정무직 공무원은 회원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의 회칙 개정안을 내놨다. 범진보 진영에서 격렬하게 반대했던 이라크 파병안에 대해 강금실 법무부 장관과 천정배·이종걸 의원 등 민변 출신 공직자와 국회의원들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게 발단이 됐다.

권력 3부 핵심 두루 포진


▎민변 부회장이던 임종인 전 의원(오른쪽에서 네 번째) 등 변호사 42명이 2003년 11월 9일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참여정부 때 민변의 정치세력화가 본격화했다.
이듬해 이석태 당시 민변 회장은 민변이 권력집단으로 변질됐다는 세간의 비판에 대해 “참여정부 들어 회원들이 개별적으로 나가는 것”이라며 “사회가 법치주의화돼가면서 법률가의 진출이 늘고 있는데, 그것은 좀 더 믿을 수 있는 변호사들이 민변에 있다 보니 우연히 일어난 일이다”라고 일축했다. 그는 “민변과 참여정부는 각자의 길을 갈 뿐”이라며 밀월을 부인했다.

참여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한 문재인 정부에서 민변 쏠림 현상은 더 뚜렷하다. 입법부, 행정부뿐만 아니라 사법부로 진출 영역이 더 확대됐다. 진보성향 법관으로 평가받는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한 뒤 민변 회장을 지낸 김선수, 이석태 변호사가 각각 대법관과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민변 출신의 대법원·헌재 동시 진출은 사법부 역사상 첫 사례다. 국회에 진출하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2016년 20대 총선에는 민변 출신 14명이 당선했다. 19대 때 12명보다 더 늘어났다. 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경기도지사도 민변 출신이다.

행정부의 민변 출신 공직자는 수없이 많다. 대통령 비서실에서는 주요 요직마다 민변 출신을 기용했다. 김외숙 인사수석은 현 정부 첫 법제처장을 지냈다. 조국 전 법무장관과 민정수석실에서 호흡을 맞췄던 최강욱 전 선임행정관은 공직 기강비서관으로 영전했다. 이광철 민정비서관, 조 전 장관의 정책보좌관을 맡았던 김미경 전 민정수석실 법무행정관도 중용된 케이스다.

사법 개혁과 적폐 청산을 위해 정부 각 부처에 설치한 각종 개혁·자문위원회에는 민변과 참여연대 출신이 많이 진출했다. 중앙노동위원장에 임명된 박수근 한양대 로스쿨 교수,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 법무·검찰·경찰 개혁위원회 김인회, 한인섭 서울대 교수(한 교수는 참여연대 출신), 김진국 감사원 감사위원, 보훈처 보훈심사위원회 성춘일 상임위원,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 이인람 위원장과 조성오 상임위원, 경찰청 경찰개혁위원회 박찬운 한양대 로스쿨 교수와 김희수 변호사,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이석범·장유식 위원, 국토교통부 관행혁신위원회 김남근 위원장 등이 민변 출신이다.

민변이 유독 참여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 중용되는 이유는 뭘까. 서초동에서 개인 사무실을 운영하는 한 중견 변호사는 정치권에서 민변 출신을 선호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꼽았다. 전문성, 대중성, 정의감이다.

첫째, 법률 지식이 깊어 정책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입법활동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는 법조인에게 공통으로 해당하는 강점이다. 여야와 보수, 진보를 떠나 율사(법률가)를 인재 영입 1순위로 꼽는 이유다. 둘째, 활발한 사회 참여 활동을 통해 대중적 이미지도 좋다. “비교적 젊고 활동적인 변호사의 모습에 국민이 신선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민변 출신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스타 정치인으로 발돋움한 것이 한 예다. 셋째, 불의에 맞서는 정의감을 지녔다. ‘정의로운 변호사’라는 이미지가 정치인에게 기대하는 원칙과 신뢰라는 덕목의 최적임자로 꼽힌다는 것이다. ‘젊은 피 바람’이 몰아쳤던 2004년 총선에서 민변 출신이 대거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동력이다.

대중성과 정의감, 전문성 표방한 다목적 인재풀


▎참여정부 시절 핵심 권력기관의 수장을 민변 출신 변호사들이 맡았다. 당시 강금실 법무부 장관(왼쪽)과 고영구 국정원장도 민변 출신이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동지애와 동류의식으로 뭉친 끈끈한 유대감을 들 수 있다. 하나의 이념적 지향을 갖고 오랫동안 함께 활동해온 탓에 유대관계가 남다르고, 업무에서도 손발을 맞추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 요소다. 노무현·문재인 두 대통령이 정치·사법 개혁을 추진하면서 비슷한 생각을 가졌거나 함께 일한 경험이 있는 민변 출신을 선호한 배경으로 볼 수 있다. 두 대통령의 법률가적 경험도 같은 변호사 출신을 선호한 이유로 해석된다.

법치의 테두리 안에서 정치권력을 통제하려면 법률적 지식과 철학에 기초한 가치판단 기준을 가진 법조인이 적격이라고 보는 것이다. 권력기관인 국가정보원의 지휘봉을 고영구 변호사에게 맡긴 것이나, 재야 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한 것이 그 예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1월 27일 당선인 신분으로 대구에서 국정토론회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정당이나 정치적 견해, 경제·노사 정책 등에 관해 의견이 다른 사람을 전부 정부 안에 끌어넣으라고 하는 조언에 대해선 실천하기 어렵다”고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정부 안에 의견이 다른 사람, 이해관계와 기반이 다른 사람이 함께 있으면 도저히 손발이 맞지 않고 잡음만 나와 효율적으로 일할 수 없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도 한번 영입한 인재는 어지간하면 내치지 않는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1월 14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겪은 고초,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빚을 졌다”고 언급한 것은 문 대통령의 이런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무부 인권정책 수립에 참여했던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권 최측근 부패 의혹을 파헤치던 검찰 기구를 대폭 줄이는 명목으로 ‘인권’을 가져온다면 어처구니없는 ‘인권의 정치화’ 또는 ‘이념화’이자 보편적 인권 이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함(민변 회칙 3조)’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민변이 새겨들을 만하다.

앞서 열거한 장점만큼 우려되는 면도 없지 않다. 참여정부 때부터 지속해서 제기됐던 민변의 권력화, 나아가 권력을 향한 비판 기능 상실이 그것이다. 민변의 권력화는 타율적이다. 요인과 평가자의 시각이 모두 외부에 있다. “회원 개인의 역량과 의지에 따른 것일 뿐, 민변이 조직적으로 진출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변명도 가능하다. 실제로도 민변은 권력화 비판에 “개인의 일”이라고 선을 그어왔다.

하지만 비판 기능 상실은 민변 조직의 내적 의지에서 기인한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공개한 2017년 현 정부 출범 이후 정책 의견서는 7건이다. 여성·아동·교육·북한·소수자 인권 문제가 대부분이고, 사법행정 개혁은 1건뿐이다. 같은 기간에 발표한 논평과 성명, 보도자료는 690여 건이다. 대부분 적폐 청산 및 개혁과제의 조속한 이행과 소수자·약자 인권에 관한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정부 정책이나 도덕성을 직접 비판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도덕성 논란이 벌어졌을 때도 이에 대한 비평은 나오지 않았다.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비리에 관한 감찰 무마 의혹, 울산시장 선거 청와대 개입 의혹 등 정권의 도덕성 문제가 불거졌을 때도 이에 관한 진상규명 촉구나 관련자 문책을 요구하는 의견도 내지 않았다. 최근 벌어진 검찰 인사 논란에도 민변의 침묵은 이어졌다.

이에 대해 민변 관계자는 “정치적 사안에 일일이 의견을 내진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 9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논란이 불거졌을 때, 민변은 잇따라 논평을 내고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의 감찰 지시를 “권력 입맛에 맞는 정치 검찰로 길들이기”라고 비판했다. 민변은 “전례 없는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감찰 지시는 검찰 조직을 흔들어 다시 권력의 입맛에 맞는 정치 검찰로 길들이려는 시도”라며 “국정원의 불법 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난 시점에 감찰을 전격으로 발표한 것은 매우 석연치 않다”고 지적했다.

2012년 10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매입 의혹 사건 수사와 관련해서도,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최교일(현재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서울중앙지검장에 대해 “부실수사를 총괄 지휘한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2016년 1월 대검찰청이 ‘반부패수사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하자 이를 “대검 중수부의 부활”로 규정하고, “검찰총장의 지시로 소수의 검사가 수사하는 구조는 정치적 중립에 취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반부패 수사 TF 설치를 반대한다”고 했다. 반면 현 정부가 적폐 수사를 위해 특수부를 대폭 강화했다가 조국 사태 정국에서 특수부를 축소하는 검찰 조직 개편을 단행한 데 대해 민변은 아무런 논평을 내지 않았다.

조 전 장관이 도덕성 논란에 휩싸여 장관 임명 반대 여론이 들끓었을 때도 민변은 찬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임명 직후 내놓은 짧은 논평은 “필사즉생의 각오로 검찰 개혁에 임할 것을 요구한다”는 훈수에 그쳤다.

스스로 권력화하자 권력 견제 기능 약해져


▎문재인 정부 들어 민변 출신의 3부 권력 요직 진출이 크게 늘었다. 왼쪽부터 이석태 헌법재판관과 김선수 대법관, 최강욱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하지만 법조계에서 우려하는 것은 단지 민변과 정치권력의 일체화에 그치지 않는다. 권력 3부 곳곳에 민변 출신들이 포진해 있다 보니, 이들을 활용해보려는 사건 관계인이 생겨난다는 점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이를 전관예우에 빗대 ‘민변예우’라고 비꼰다. 전직 민정수석 A 변호사는 은밀히 이뤄지는 민변예우의 실체를 이렇게 전했다.

“민변 출신이 요직에 두루 들어가 있어 의뢰인이 민변 소속 변호사를 선호한다. 특히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단체의 감시에 놓여 있는 기업들이 민변 회원들 가운데 연줄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민변 소속이란 것 자체가 변호사의 커리어가 되는 거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하면 이런 쏠림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국회를 통과한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 검사는 변호사 자격 10년 이상 보유자로 재판, 수사 또는 일정한 조사 업무 실무를 5년 이상 수행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재판이나 수사는 판·검사 출신이 해당하지만, ‘조사 업무’는 정부의 공식적인 조사 기구가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나 세월호참사특조위 등의 조사 기구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변호사라면 공수처 검사의 자격을 갖추게 되는 셈이다. 이 같은 조사 기구에는 대개 민변 출신 변호사가 참여해 실무를 도맡는 경우가 많다.

‘민변예우’의 신(新)적폐 싹튼다


▎2017년 9월 25일 광화문 광장에서 민변 회원들이 공수처 설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또 공수처 수사관의 경우도 ‘변호사 자격을 보유’했거나 ‘7급 이상 공무원으로서 조사·수사 업무에 종사’한 경험이 있으면 된다. 마음먹기에 따라 현 정권에 우호적인 민변 출신 변호사들을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으로 임용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닌 셈이다. 한 대형 로펌에 속해 있는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현 정부의 기조로 볼 때 검찰 출신을 공수처에서 쓰지 않을 것은 거의 명백해 보인다. 그렇다면 진보적 성향의 판사 출신이나 민변 소속 변호사를 등용할 것은 불 보듯 빤한 일 아니냐”고 말했다.

법조계 일각에선 민변이 공수처에 대거 진출할 경우 사법 체계의 정점을 민변이 장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검사장 출신인 한 변호사의 말이다. “판·검사는 공수처 수사 대상이다. 공수처가 출범하면 실적을 내야 하니, 전관예우 적폐 근절을 명분으로 판·검사 수사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 동종업계여서 가장 접근하기 쉽고 실적을 내기도 좋은 아이템이다. 그렇게 되면 사법 영역에서 민변의 영향력은 지금보다 더욱 막강해질 수밖에 없을 거다.”

회원 수가 1000명에 이르는 만큼 저마다 고민의 깊이도 제각각이지만, 회원들 사이에도 민변에 대한 외부의 비판을 어느 정도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 중인 한 민변 회원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어서 몇몇 권력 의지를 전체의 모습으로 보는 건 지나친 해석”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 사견이라며 부연했다. “다만 현 정부 들어 비판 수위가 예전과 다른 건 분명해 보인다. 정치권에 진출한 선·후배 회원들을 의식해 비판 수위를 ‘마사지’한다는 지적도 일면 타당하다.”

전직 고위 검찰 관계자는 이렇게 충고했다. “민변의 문제는 스스로 권력집단과 동일화한다는 데 있다. 권력과 일체화하면 알게 모르게 권력의 놀음에 취하게 된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교훈을 되새겨봐야 한다.”

민변 회원인 로스쿨 출신의 30대 김모 변호사는 일부의 모습을 모두인 것으로 확대 해석하지 말아 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도 소수 약자 보호와 인권 개선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 변호사들이 있다. 저들을 위해 밤새 불 밝히고 있는 그들이 선배들이 닦아놓은 민변의 정신을 계승하는 원동력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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