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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실체 대해부] 권력의 中核, PK친문의 역주행? 

매번 불행했던 역대 정권 종말의 그림자가… 

■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에 문 대통령 핵심 측근 이름 줄줄이 등장
■ 법에 보장된 검찰총장 ‘의견’ 패싱… 친문패권주의 등장 시간문제
■ ‘폐족’을 자처해야 했던 친노의 실패 곱씹어볼 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인 지난해 5월 10일 서울 삼청동에서 노영민 비서실장을 비롯한 수석 보좌진과 식사를 함께한 뒤 걸어서 춘추관을 통해 청와대에 들어오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바야흐로 ‘친문 전성시대’. 2020년 새해 쏟아지는 거의 모든 뉴스에 약방 감초처럼 등장하는 단어가 ‘친문(親文)’이다. “한국당, ‘친문비리은폐 공수처 사라져야’”, “친문세력, 공수처법 기권 금태섭에 비난 공세” 등 정치 기사뿐 아니다. “또다시 백원우 소환한 검찰, 친문 직접 겨눈다”, “검찰인사, ‘PK친문의 검찰 길들이기 시나리오’” 등 검찰발(發) 기사에도 어김없다. 급기야 경제 뉴스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삼성도 코드인사, 준법감시위원장에 친문 김지영 내정”, “국책은행 낙하산 점령, 친문보은” 등등.

국내 언론이 대통령과 공적 또는 사적으로 긴밀한 인사들의 말이나 행동에 포커스를 맞춰 깨알 보도를 해온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래서 등장한 말이 노무현 정권의 ‘친노(親盧)’, 이명박 정권의 ‘친이(親李)’, 박근혜 정권의 ‘친박(親朴)’에 이어 친문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 권력의 친위그룹 동향은 언제나 ‘따끈따끈한 뉴스’였다. 특히 ‘제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이 작동되는 한국형 대통령 중심 정치체제에선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다고 최근 친문 관련 기사의 ‘폭포수’ 현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히려 권력 오작동 우려에 대한 경고 신호등으로 읽어야 하는 건 아닐까. 최근 친문 행태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매번 불행하게 끝났던 역대 정권 종말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탓이다. 대통령 성(姓)씨를 낀 ‘친○’이 단순히 대중의 관심을 넘어, 득세에 이어 독주로 치달으면 정권도, 나라도 결딴났다. 한국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던져준 숙제 중 하나다. ‘친문 전성시대’를 현시점에서 톺아봐야 할 이유다.

◇ 친문의 태동과 진화

친문이 정치세력으로 여론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2012년 연말 18대 대선을 겨냥한 당내 경선이 서서히 시동을 걸던 그해 8월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제1야당 민주통합당 소속 초선 의원. 금배지를 단 지 세 달도 채 되지 않은 ‘정치 초보’였지만 자타 공인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혔다. “절대 정치를 않겠다”며 강하게 손사래를 쳤음에도, 그의 말마따나 ‘운명’처럼 정치판에 소환된 상태였다. 역시 결정적 계기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죽음이었다. 정계 데뷔 뒤 ‘신데렐라’마냥 급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바보 노무현’을 졸지에 대통령으로 만들었던 열성 지지층인 친노는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의 꿈을 짓밟아버린 당시 권력에 나름의 복수를 다짐했다. 이들이 찾아낸 최상의 도구가 ‘영원한 비서실장 문재인’이었다. ‘노무현의 친구’로도 불렸던 그가 다시 대통령이 돼 노무현 꿈을 이어가는 게 그들로선 최고의 ‘복수’였다는 말이다. 실제 친노 특유의 결집력과 열화 같은 지지를 업은 ‘문재인 후보’는 총선이 끝나기도 전에 야권의 대세가 돼 있었다.

이를 기점으로 친노도 서서히 친문으로 변신하면서 외연을 확장한다. 그 이유는 ‘담쟁이 캠프’로 명명된 당시 ‘문재인 경선 캠프’ 이름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정권교체를 위해선 넝쿨의 한 잎이 수천, 수만 잎을 이뤄 담을 넘는 담쟁이처럼 계파와 지역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文과 운명적 관계, 모태(母胎) 친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2009년 5월 29일 광화문과 시청광장을 가득 메운 추모 인파가 운구행렬을 뒤따르고 있다.
당장 캠프 주요 멤버 면면이 친노는 물론 범노(汎盧)를 넘어 비노(非盧)까지 아우른 모습이었다. 공동선대본부장을 맡은 노영민·우윤근·이목희·이상민은 모두 비노. 특히 노영민과 이목희는 김근태(GT) 전 의원이 이끌던 당내 재야 세력 민평련 출신. 여기다 정동채 특보단장, 김한정·이훈 특보는 김대중(DJ) 대통령의 측근들. 은수미 일자리본부장, 진선미 대변인은 각각 노동계와 민변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 친노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친문이 야권에서 본격적으로 나래를 편 것은 2015년 2·8 전당대회에서 문 대통령이 당 대표로 선출되면서부터. 새정치 바람을 일으킨 안철수의 합세로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당 명과 구성원이 대거 바뀐 데다, 당내 가장 큰 지분을 가진 호남을 대표한 박지원과의 맞대결이라 쉽지 않은 싸움이었다. 하지만 ‘제1야당 문재인 대표’ 시대가 열리자 친문은 덩치를 키우면서 순식간에 당내 최대 계파로 우뚝 섰다. 이때 친문으로 합류한 면면은 화려하다. 사무총장 손학규계 양승조, 정책위의장 정세균계 강기정, 수석대변인 박지원계 김영록, 대변인 김근태계 유은혜, 비서실장 DJ 직계 김현미까지. 한꺼번에 당내 각 계파의 에이스 영입에 성공하면서 친문은 한 단계 더 도약했다.

당내 차세대 유망 정치인까지 대거 포섭하며 덩치를 키운 친문이었지만, 여전히 비주류와의 싸움은 버거웠다. DJ 시절 민주당 법통을 이어받은 탓에 당원 구성 자체가 여전히 호남과 노장층 편중이 심했던 탓이었다. 2015년 4월 네 곳의 국회의원 재보선에서 단 1석도 건지지 못한 채 참패했다. 당장 ‘대표 퇴진론’이 고개를 들었다. 이에 친문 주류는 혁신위 구성으로 맞섰다. 지루한 다툼 끝에 그해 연말 안철수와 호남 중진 다수가 당을 떠났다.

19대 총선 직전 터진 사실상 분당사태로 위기감이 커져가던 이때 극적 반전이 일어났다. 혁신위가 정당 사상 처음으로 도입한 온라인-모바일 입당 시스템에 자발적 당원 가입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 불과 1주일 사이에 3만 명이 훌쩍 넘는 입당 열풍은 분위기를 일신하며, 이듬해 총선 승리의 밑거름이 됐다.

언론은 이례적인 온라인 당원 가입 바람을 ‘문재인 구하기’로 해석했다. 친문이 ‘노무현의 기적’을 낳았던 친노 못지않은 정치적 대중성과 파워를 갖추는 계기가 됐다. 또 다른 망외(望外) 소득도 있었다. 서울대 교수 조국의 친문 ‘커밍아웃’. 당내 반발로 표류하던 혁신위에 조국이 전격 참여를 선언하고 나섰다. 스타 지식인으로 각광받던 그가 앞장서 강력한 쇄신 드라이브를 걸자 비주류도 목소리를 낮췄다.

◇ 숨은 실세, 모태 친문

문 대통령 정계 진출 이후 친문 태동과 진화 과정을 추적하다보면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가 있다. ‘모태(母胎)’ 친문을 그냥 지나친다는 점이다. 모태라는 말이 의미하듯, 이들은 ‘정치인 문재인’ 이전부터 막역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그가 정치에 나서지 않았다 하더라도,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말벗도 되고, 기꺼이 동행도 할 정도로 도타운 정을 쌓아왔다. 아예 정치적 타산이 존재하지 않는, 어쩌면 운명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최고 권력, 대통령과의 ‘이심전심(以心傳心)’적 관계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 권력 관계, 자체가 강력한 정치적 힘이기 때문이다. 다들 모태 친문을 숨은 실세로 여기는 이유다.

진짜 문재인 사람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나선 당시 문재인(왼쪽) 변호사와 노무현 변호사. 이 두 사람의 추종자들이 대한민국 신권력의 핵심을 이룬다.
모태 친문은 대략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인권변호사 문재인’과 동지적 삶을 살아온 이들이다. 1980년대 부산 민주화 현장을 함께 지켰던 참여정부 마지막 민정수석 이호철과 비슷한 시기 노동자 등 소외된 약자 인권옹호를 위해 공동 변론에 나서기도 했던 울산시장 송철호가 첫손가락에 꼽힌다. 문 대통령이 몸담았던 ‘법무법인 부산’의 동료 변호사도 빼놓을 수 없다. 법인 대표직을 물려받은 정재성은 어떠한 공직도 마다하고 있지만 모태 친문의 핵심으로 부를 만하다. ‘대표 변호사 문재인’과 한솥밥을 먹으며 인권지킴이로 나섰던 김외숙은 법제처장에 깜짝 발탁된 뒤 현재 청와대 인사수석을 맡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경희대 법대 72학번 동기로 ‘40년 지기인 박종환 자유총연맹 총재도 오랜 세월 고락을 같이한 케이스다.

공직을 마친 뒤 지역으로 돌아와 인연의 깊이를 더한 이들도 ‘진짜 문재인 사람’으로 인식된다. 경남지사 김경수와 김해을(乙) 국회의원 김정호가 대표적 인물. 둘 모두 퇴임 후 낙향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라 연고도 없던 봉하마을에 갈 정도의 의리남(男). 당시 인근 양산에 터 잡은 뒤 수시로 김해를 오갔던 문 대통령은 이들을 각별하게 여겼다고 한다. 특히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 김경수와는 퇴임 직후 봉하마을에 불어닥친 ‘노무현 죽이기’ 광풍에 맞서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면서 운명적 관계로 발전했다. 이들과 변호사 시절 동지들은 같은 지역적 배경 탓에 통칭 ‘PK친문’으로 불린다.

나머지 부류는 참여정부 청와대 시절 공적으로 인연을 맺은 인물들. 이호철과 함께 흔히 ‘3철’로 꼽히는 민주연구원장 양정철, 국회의원 전해철이 대표 선수. 특히 양정철은 ‘변호사 문재인’을 현실 정치라는 ‘링’으로 불러낸 뒤 정치 근육을 키우고 실전 전술까지 세세히 코치한 ‘문재인의 책사’, 정무기획비서관으로 문재인 비서실장을 모셨던 윤건영은 ‘문재인의 남자’로 통한다. 문 대통령의 국회의원 입후보 때부터 숱한 정치적 고비를 함께 헤쳐 나온 뒤 얼마 전까지 국정기획상황실장을 맡았다. 재선 의원 경력에도 1급인 민정비서관 자리를 마다하지 않던 백원우도 과거 민정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일할 때 문재인 수석과 인연을 맺었다. 지난해 중반 자리에서 물러나기 전, “조국 민정수석보다 더 세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과거 공직기강비서관이었던 김조원도 당시 문재인 수석과 맺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 이젠 그 자신이 민정수석이 됐다. 감사원 출신인 그는 ‘문재인 당 대표’가 비주류 공세로 한창 흔들리던 때 기꺼이 당무감사원장을 맡아 분위기 수습에 힘을 보탰다. 일각에선 옛 공직 경험으로 맺어진 이들에 대해 정치적 셈법과 무관한 모태 친문으로 분류하기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당시 이들 신분이 정무직 공무원이었던 탓에 정치적 이해타산의 결과로 보는 게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문재인 비서실장은 현실정치 얘기만 나오면 펄쩍 뛰곤 했다. 이런 모습을 직접 지켜봤던 그들로선 그의 정치적 가능성보다는 인간적 도리에 초점을 맞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집권 1년 반 만에 다시 등장한 친문


▎2019년 4월 당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왼쪽)과 윤건영 국정기획상황실장. 두 사람은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 일시에 사라진 친문

동지적 신념과 정치적 의리로 똘똘 뭉친 모태 친문과 당내 각 계파 에이스를 아우르며 진화한 친문. 여기다 온라인 가입을 통해 ‘팬덤정치’의 바람을 몰고 온 대중적 친문의 등장까지. 친문이 정치적 세를 불려가자 당 안팎에서 견제구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대표적 공격 프레임이 “친문이 끼리끼리 다 해먹는다”는 ‘친문패권’이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서서히 커지던 2017년 1월 18일 [경향신문]은 친문패권을 ‘공공의 적’에 비유하며, 대선정국의 ‘또 다른 변수’로 꼽았다. 대선이 확정된 직후였던 그해 3월 17일 [국민일보]는 “친문패권 있다 vs 없다”라는 장문의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 친문패권 논란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6월 12일 [이데일리]는 “그 많던 친문패권은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기사를 통해 ‘친문패권’ 실종 현상을 전했다. “대선 과정에서는 친문패권주의라는 비판이 흘러넘쳤다. (중략) 정치적 반대자들이 문재인 집권 이후 우려했던 ‘친문패권주의’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계일보]도 집권 한 달 평가 기사에서 친문 퇴조를 긍정적으로 보도했다. 언론의 후한 평가의 직접적 근거는 친문실세의 후퇴였다. 무엇보다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며 일선 퇴장을 선언한 양정철 편지가 던진 울림은 컸다. “저의 퇴장을 끝으로, 패권이니 친문 친노 프레임이니 3철이니 하는 낡은 언어도 거둬주시기 바랍니다.” 담담하게 밝힌 ‘자기희생’에 박수가 쏟아졌다. 곧이어 대선이 끝난 직후 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이호철 소식이 전해졌다. 여기다 법무장관 하마평에 오르내렸던 전해철은 아예 조각 명단에서 빠졌다.

반면 친문 핵심 3철의 공백은 비문 인사들이 메웠다. 총리엔 2012년 당내 경선 때 손학규 후보 선대본부장을 맡았던 이낙연, 대통령비서실장엔 박원순 서울시장 발탁으로 정무부시장을 지낸 임종석, 청와대 정책실장엔 안철수 대선캠프 좌장이었던 장하성, 경제부총리엔 박근혜 정부에서 국무조정실장을 지낸 김동연 등. 친문이 대거 빠진 탕평인사가 현실화되자 “패권은커녕 친문 역차별”이라는 평가마저 제기됐다.

문 대통령이 취임 직후 보여준 말과 행동도 ‘친문, 그들끼리’의 폐쇄성 우려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식당에서 직접 식판을 들고, 5·18기념식장에서 울먹이는 유족을 껴안아 다독이고, 어디서든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파격적 소통의 모습에 “문재인은 다르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무엇보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며 국민통합을 다짐한 취임사는 큰 기대를 자아냈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말에 ‘친문의 보스’를 우려하던 목소리는 자취를 감췄다.

◇ 전진 배치 친문과 검찰의 한판 승부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 시장이 지난해 11월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지법으로 출석하고 있다.
그로부터 1년 반의 세월이 흐른 2019년 1월 10일 청와대 춘추관 대통령 신년기자회견장. “청와대는 다 대통령의 비서들이기 때문에 친문 아닌 사람이 없는데…”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중에선 폭소가 터졌다. 문 대통령 스스로 공개석상에서 친문이란 말을 직접 언급한 것은 아주 이례적 장면. 회견 이틀 전 단행된 청와대 인사에서 중국 대사 노영민의 비서실장 임명과 관련해 “친문 색채를 강화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문 대통령 입장에선 간만에 등장한 친문 논란에 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의지로 읽혔다.

그러나 언론은 ‘원조 친문 발탁, 친정 강화’라는 시각을 물리지 않았다. 비서실장뿐 아니라 정무수석에 강기정을 앉히고 ‘원조 친노’격인 김수현 사회수석까지 정책실장으로 발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개편의 원인이었던 김태우 전 청와대 특감반원 폭로의 후폭풍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청와대가 친정체제를 원했다고 봤다. 사실 러시아 대사 우윤근 금품 수수, 환경부 블랙리스트, 민간인 사찰, 금융위 국장 유재수 감찰 무마 등 의혹 하나하나가 자칫 정권을 뒤흔들 만한 사안이었다. 친문 전진 배치로 정권 장악력을 높인 덕분이었을까. 김태우 폭로는 청와대 표현마냥 ‘미꾸라지 한 마리’의 소동쯤으로 끝나는 듯했다.

‘조국대전(大戰)’에서 ‘친문대전’으로


▎지난 1월 8일 울산 시민단체 회원들이 송철호 울산시장의 사퇴와 송병기 울산경제부시장의 구속 수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사진:백경서 기자
하지만 뒤늦게 본격화한 검찰 수사로 결국 뇌관이 터졌다. 타깃은 친문실세 개입 의혹이 구체적으로 제기된 감찰 무마건이었다. 느닷없는 감찰 중단, 여당 수석전문위원을 거쳐 부산시 경제부시장으로 이어진 유재수의 석연찮은 영전 배경을 집중 파헤치기 시작한 것. 여권의 시선은 검찰 수사 의도에 쏠렸다. 묵혀뒀던 몇 달 전 고발사건을 새롭게 들춰낸 것 못지않게, 시기와 수사 대상 모두 심상찮았기 때문. 법무장관과 검찰이 맞붙은, 이른바 ‘조국대전’이 검찰 승리로 끝나가던 시점에, 그것도 친문실세를 겨냥한 수사였다. 언론은 ‘조국 넘어 친문 정조준’ ‘친문 향한 검찰 칼끝’ 등의 기사를 전했다. 검찰 수사 칼날은 모태 친문 좌장격인 울산시장 송철호로 향했다. 그의 당선을 위해 청와대가 2018년 지방선거에 앞서 권력을 동원해 사실상 관권선거를 벌였고, 민주당도 적극 개입했다는 혐의였다. 발끈한 청와대가 마침내 칼을 빼들었다. 1월 8일 밤 대통령 인사권을 동원해 검찰의 친문 수사 지휘 라인 전원 물갈이에 나선 것. 반면 참여정부 또는 현 정권과 인연이 있는 검사들을 대거 요직에 전진 배치시켰다. [중앙일보]는 ‘윤석열 손발 다 자르고, 친문 앉혔다… 검찰 대학살’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 친문, 친노의 실패에서 배울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해 11월 8일 청와대에서 열린 반부패정책협의회에서 인사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 사진기자단
이제 조국대전은 ‘친문대전’으로 번졌다. 정권 핵심축을 이루는 대통령 친위그룹과 국가 최고 사정기관이 맞붙은 사상 유례없는 싸움. 또다시 쫙 갈라진 광장의 대규모 충돌이 불 보듯 빤하다. 서로를 겨냥한 가시 돋친 말과 터무니없는 가짜뉴스가 증오와 적개심을 부채질할 것이다. 국민들 마음이 편안할 리 없다. 취임식 날 ‘국민통합’을 힘줘 다짐했던 문재인 정부였다. 그래서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개혁에 저항한다고 검찰만 타박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 번도 경험 못한” 진영 간 극한 대립과 충돌에 대한 집권세력 책임론이 나온다. 무엇보다 현재 드러난 친문을 둘러싼 의혹과 행태만으로도 스스로 ‘죽비’를 자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친문 뿌리 격인 친노가 단숨에 의기투합했던 것은 ‘바보 노무현’이 내건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에 꽂혔기 때문이다.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노무현의 꿈’이 스러지자 그 안타까움에 친노는 친문으로 거듭났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와 함께.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친문 의혹의 실체는 “우리 편이 먼저다”쯤으로 보인다.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에 친문실세 이름이 줄줄이 등장했다. 경남지사 김경수가 전화하고, 국정상황실장 윤건영이 챙기고, 민정비서관 백원우가 거들자 민정수석 조국이 적당히 사표 수리로 끝냈다는 게 검찰의 주장. 물론 이들은 적극 부인하고 있다. 그 뒤 유재수는 여당 수석전문위원을 거쳐 부산시 경제부시장으로 출셋길을 내달렸다.

이때 그의 뒷배를 봐준 인물로 한국당이 지목한 이는 PK 친문 핵심 이호철. 정작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도대체 유재수가 뭐길래? “노 대통령의 비극을 듣자마자 장기휴가를 내고 봉하로 달려와 장례식을 끝까지 지킨 늘공(늘 공무원) 유재수 의리에 친문들이 적잖이 감동했다.” PK친문 동향에 밝은 지역 인사의 귀띔이다. 정권 출범 직후 유재수가 요직인 금융위 정책국장으로 간 것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사적 인연으로 똘똘 뭉친 친문의 ‘우리 편 챙기기’는 울산시장 선거 관권개입 의혹 출발점이라는 의심도 사고 있다.

PK친문 좌장 송철호 당선을 위해 청와대가 당시 울산시장 김기현 비위 첩보를 사실상 생산하고, 경찰에 하명 수사를 지시했다고 검찰은 본다. 또 김기현의 역점사업은 ‘킬’ 시키고 대신 송철호 공약은 살렸다며 기재부에 이어 청와대 균형발전비서관실까지 압수수색에 나섰다. 아직 결정적 증거는 없다. 그러나 울산시 경제부시장 송병기 수첩에는 비위 첩보, 공약 작성은 물론 당내 경쟁자 주저앉히기를 위한 권력의 전 방위적 노력이 담겨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단상과 소회, 풍문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개연성이 짙다.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권에 제기된 관권선거 의혹은 그 자체만으로도 치욕이자, 정당성을 흔드는 일. 그렇다면 좀 더 겸허한 자세로, 하지만 적극적 의지로 실체적 진실 규명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현재까진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모르쇠를 넘어 공세적 반박만 있을 뿐이다. “빈약한 논리와 (VIP라는) 단어 몇 개로 진행하고 있는 (검찰의) 대통령(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여론몰이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국민이 그 허구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2019년 12월 23일 윤도한 국민소통수석) 검찰 수사에 대한 여권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는 말이다.

4년 전 당시 집권세력 친박도 느긋했으나…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가운데)이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국정농단 진상조사 특위에서 천경득, 유재수, 김경수, 윤건영을 텔레그램 4인방으로 지칭하며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국민이 검찰 수사의 ‘허구성’을 알고 있다면, 그 수사는 결코 성공하기 어렵다. 그런데 정부는 전격적으로 검사장 인사를 밀어붙였다. 이른바 ‘윤석열 사단’은 공중분해 됐다. 법에 보장된 검찰총장 ‘의견’도 패싱했다. 오히려 총장의 항명을 거론하며 징계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상당수 언론은 친문의 ‘내로남불’과 박근혜 정권과 ‘데자뷔’(기시감)를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2013년 국정원 댓글 사건 때 채동욱 총장 찍어내기와 윤석열 좌천으로 검찰 수사를 저지했던 박근혜 정권과 이에 한목소리로 규탄에 나섰던 전·현직 법무장관 조국과 추미애 언행을 거론하면서 말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정권 초반 사라지는 듯했던 ‘친문패권’의 재등장은 시간문제다. 당시 여론이 환호했던 탕평인사와 파격 소통, 통합 행보의 역주행에 대한 우려와 맞물린 탓이다. 실제 청와대와 내각에 친문 색채가 두드러지고 있다. 노영민 비서실장 체제로 재편된 청와대와 최근 김현미·유은혜 두 장관의 유임이 상징적이다.

특히 인사수석 김외숙과 민정수석 김조원이 맡은 청와대 인사·검증 체제는 친문 코드인사 편중을 예고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검찰은 물론 언론과도 충돌을 마다하지 않는, 신(新)친문 윤도한과 대변인 고민정이 포진한 청와대 공보라인. 그 행태는 분명 파격임에도 소통과는 정반대다. 드러난 위선적 언행에 분노한 다수 여론도 무시한 채 밀어붙인 친문 조국의 장관 임명, 그로 인한 광장의 충돌과 국론 분열. 여기다 이에 흥분한 친문 열성 지지층의 문자폭탄까지. 통합과는 담 쌓은 전형적 뺄셈의 정치다.

그래도 여권은 자신만만해 보인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 사분오열된 보수 야당, 무엇보다 친문의 배타적 결집력이 믿는 구석이다. 그런데 왠지 익숙하지 않은가. 4년 전 이맘때, 당시 집권세력 친박도 느긋했다. 항상 앞서는 지지율에다 민주당 분당사태, 콘크리트라 불리던 친박 지지층의 결속력까지 복사판이다. 그렇다면 결말까지 똑같을까.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그럴 것이다. 굳이 친박까지 벤치마킹할 필요가 없다. ‘폐족’을 자처해야 했던 친노의 실패만 곱씹어도 된다. 같은 뿌리인 만큼 학습효과는 탁월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인식과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 jwhn20@naver.com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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