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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리포트] 트럼프 재선에 北은 조력자일까, 방해자일까 

레드라인 경계에 선 김정은의 고민 

신년사 생략해 미국 압박과 체제 결속 꾀한 북한, ICBM 발사와 핵실험 시사
트럼프는 11월 대선까지 전략적 대북협상 지연… 한국의 입지 점점 줄어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 사진:조선중앙통신
2020년 김정은의 신년사는 없었다. 정초 새벽에 장문의 메시지를 던지던 관행을 포기했다. 2011년 12월 30일 선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례식을 마치고 삼우제도 생략하며 최고사령관에 오른 이후 최초로 신년사를 생략했다. 하루가 지나 금수산 기념궁전에서 김일성·김정일의 시신을 참배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진이 공개됐다.

2019년 12월 28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개최해 31일까지 ‘장장’ 4일간의 마라톤 회의를 열었다. 통상 하루에 그친 과거 전원회의와 사뭇 차이가 있다. 신년사의 청중은 북한 주민이다. 일부 대남 및 대미 관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남한으로 치면 대통령이 연초에 국회에서 하는 시정연설과 유사하다. 대외관계 메시지는 북한 주민들을 이해시키는 수준이다. 다만 윤곽을 잡을 수는 있다. 2017년에는 대미 대결과 핵 무력을 강조했고, 2018년에는 평창올림픽 참여를 포함해서 남북관계 관련 사안이 다수 포함됐다. 2019년에는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고자 한다면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음을 시사했다.

‘새로운 길’에 관한 김정은의 유체이탈 화법

신년사가 생략된 배경은 세 가지다. 전원회의 결정문이 신년사를 대신한 첫 번째 이유는 김정은의 부담 덜기 전략이다. 김정은이 직접 신년사 마이크를 잡았을 때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새로운 길’이라는 어휘로 미국을 압박해왔다. 2019년 신년사. 4월 12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통해 김정은이 제시한 연말 시한의 ‘새로운 길’은 크리스마스를 지나 기해년이 다 가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김정은은 미국의 양보에 의한 호응을 유도하며 새로운 셈법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가지 않은 길’을 가겠다고 공언했지만, 미국의 반응은 원론에 그쳤다. 그렇다면 새로운 길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김정은이 공언한 ‘새로운 길’은 양날의 칼이다. 미국의 양보가 없으므로 군사 도발에 나서야 하지만, 현실적인 부담이 적지 않다. 애매할 때는 슬쩍 비켜나는 것이 차선책이다. 본인이 정면에 나서 찬바람을 맞기보다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명의의 제3자 화법으로 부담은 줄이고 할 말은 하는 편법을 채택했다. 북한이 제시한 새로운 길이 김정은 개인의 것이 아닌 중앙위원회의 총의에 의한 유체이탈 화법으로 포장했다. 사회주의 독재국가에서 최고지도자의 위상과 체면은 모든 결정 과정에서 핵심 고려사항이다.

둘째,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주민 결속과 충성을 유도하는 방식이 신년사보다 효과적이라는 판단이다. 1987년 1월 1일 김일성은 신년사를 생략했다. 이틀 전인 1986년 12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을 했기 때문이다. 당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발신하면서 신비주의 전략으로 체재 결속을 시도했다. 특히 미국의 제재 압박에 굴하지 않으면서 정면돌파를 결심한 이상, 주민들의 인내와 지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중국 변수다. 지난해 6월 20일 1박 2일 일정으로 평양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은 전통적 북·중 관계의 완전한 회복과 대북 지원을 약속했다. 시진핑은 트럼프를 상대로 3차례 정상회담을 가진 김정은을 격려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미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단거리 미사일 발사 수준의 저강도 도발은 허용하지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추가적인 핵실험은 판을 깨는 수준의 레드라인을 넘는 행위다. 최소 연간 100만 명 수준의 대규모 중국인 관광객의 북한 송출과 80만t 내외의 대북 식량 지원이 본격화되는데 김정은이 직접 도발을 예고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중국은 김정은이 전원회의 결정문에서 “머지않아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며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도발 재개 가능성을 시사한 데 대해 이례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겅솽(耿爽)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월 2일 정례 브리핑에서 김 위원장의 발언에 대한 중국 정부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현재 한반도 정세에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대화에 불리한 행위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북한에 도발 자제를 요청한 것이다.

중국은 2018년 3월 김 위원장의 첫 방중 이후 지난해 북·중 수교 70주년을 거치며 북한의 도발을 비판하거나 우려하는 공식 입장을 일절 발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을 향해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연말에는 러시아와 함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1월 들어 중국의 대규모 대북 식량 지원이 시작됐다. 1월 3일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중 접경 지역인 단둥(丹東) 소식통을 인용해 “중국이 휴일인 1월 1일 새벽부터 북한에 원조하는 식량 운송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또한 “지난해 12월 31일 오후부터 단둥역 화물열차 터미널에는 조선에 보낼 원조 물자(식량)를 실어놓고 출발 준비를 마친 화물열차들이 목격됐다”며 “이 열차는 1일 새벽에 북조선으로 나갈 예정이라는 말을 역 관계자로부터 들었다”고 전했다. 지붕이 없는 화물열차는 10개가 넘는 화차로 연결됐고, 푸른색 비닐 포장이 덮인 상태였다는 전언이다. 이번 식량 수송 작전은 중국 상무부에서 직접 주관하고 있다. 베이징(北京)에서 온 실무책임자가 단둥역 화물 터미널에 상주하면서 수송을 지도·감독하고 있다. 대북 지원 식량의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6월 시진핑 주석 방북 이후 수송된 80만t과 비슷한 규모라는 소식이다. 중국은 북한의 ‘새로운 전략무기’ 도발 가능성을 경고하면서도 대규모 대북식량 지원에 착수했다. 중국이 북한의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등을 경계하면서 대북 경제 지원을 통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北, 미국 대선의 캐스팅보트?


▎북한은 2019년 12월 28일부터 4일간 전원회의를 개최했다. 김정은은 2020년 신년사 대신 전원회의 결정문을 내놓았다. / 사진:조선중앙통신
전원회의 결정문 분석을 통해 김정은의 향후 행보를 전망해보자. 김정은은 당중앙위원회 제7기 5차 전원회의에서 “현 정세와 혁명 발전의 요구에 맞게 정면돌파전을 벌일 데 대한 혁명적 노선”(약칭 ‘정면돌파 노선’)을 천명했다. 북한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보도에서 ‘정면돌파’라는 표현은 23회, ‘자력부흥’이라는 표현은 5회, ‘자력번영’이라는 표현은 4회 언급됐다. 북한의 새로운 ‘정면돌파 노선’은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중단, 북미 교착상태와 대북제재 장기화를 기정사실로 하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및 자강력을 보다 강화하는 전술이다.

정면돌파는 사실상 북한이 과거에 시도했던 행동 패턴의 동어반복이다. 북한이 예고했던 ‘새로운 길’은 없었던 셈이다. 미국의 요구에 굴복해 비핵화에 나서면 제재와 압박으로부터 탈출하겠지만, 핵무기 개발을 포기할 수 없다. 핵을 보유하는 대신 경제적 압박을 감수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체제 생존에 필수적이다. 대응책 중에서 비핵화의 길을 선택한다면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겠지만 핵 보유 카드를 고수한다면 기존 압박 국면에서 독자 생존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 실제 북한은 미국을 움직일 만한 카드가 없다. 북한은 현재 상황을 미국의 약속 위반이라고 판단한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 북·미 정상합의에서 약속한 ‘새로운 북·미 관계 수립’을 외면하고 비핵화만을 요구하는 부당한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북한은 그런 미국을 응징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2018년 4월에 이미 “승리적으로 결속됐다”고 선언한 핵·경제 병진노선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도 무리다. 또한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을 감행하는 것은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도박이다. 북한의 패는 자신의 힘으로 제재를 견디면서 전략무기 능력을 강화하고 핵·미사일 시험 모라토리엄(유예) 철회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압박하는 것 외에 특별한 도깨비방망이는 없다. 북한은 결정서에서 미국의 태도를 “시간 벌기를 해보자는 것일 뿐”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 고민이 필요한 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과연 2월부터 본격화하는 미국 대선 경쟁에 김정은이 어느 선까지 개입할 것인지, 아니면 수수방관할 것인지 평양으로서는 다양한 카드와 시점을 두고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1989년 프랑스 상업위성에 의해 북한 핵 개발이 세상에 공개되고, 1993년 3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1차 북핵 위기가 발발했다. 이후 미국의 대선은 1996년을 시작으로 2000년, 2004년, 2008년, 2012년, 2016년에 이어 2020년이 7번째가 된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전까지 북한은 4번의 미국 대선을 관망했다. 북한은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시작으로 2009년 5월, 2013년 2월, 2016년 1월과 9월에 이어 2017년 9월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미국의 대선이 있던 2016년에 연이어 두 차례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를 주장하며 평양을 상대하지 않았던 오바마 행정부와 민주당을 향해 충격요법을 구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첫해 대북정책을 조율하며 말싸움으로 시간을 보내자 2017년 9월 김정은은 다시 핵실험과 장거리미사일 카드를 꺼내 들었다. 결국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은 트럼프와 김정은의 세 차례에 걸친 초유의 정상회담으로 귀결됐다.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은 절반 이하


▎2018년 2월 북한군 창군 70주년을 기념해 북한이 공개한 ICMB 화성-15형. / 사진:조선중앙통신
북한의 향후 도발 시나리오와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을 전망하기 위해서 미국 대선과 북핵 등 외교 문제에 관한 상관관계 등을 조망해보자. 미 대선은 2020년 11월 3일에 치러지지만, 이미 일정에 돌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 18일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재선 도전을 공식 선언한다. 민주당 역시 6월 26~27일에 플로리다주에서 대선 경선 주자들의 첫 번째 TV토론을 열 예정이다. 레이스에 돌입한 2020년 미국 대선은 ‘트럼프 vs 반(反)트럼프’ 라는 대결 구도가 출발 시점부터 매우 선명하고 격렬하다. 이는 대통령직 수행 전에 단 하루도 공직 수행 경험이 없는 독특한 대통령의 재선 도전이라는 트럼프의 한계에서 비롯된다. 1980년대 이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제외하고 모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해 미국 사회에서는 재선이 당연시됐지만, 재선을 앞두고 트럼프처럼 양극화된 지지율을 보인 경우는 유례가 없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4개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인 외교적 과제를 안고 있다. △미·중 무역협상 △이란과 전면 대결 △북한 핵 협상, △베네수엘라 사태 등이다. 트럼프의 재선 캠페인에서 차지하는 4개 현안의 정치적 비중은 매우 다르다. 트럼프의 재선 캠페인은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Keep America Great Again)”에 맞춰져 있고, 이에 부합하는 것은 미·중 무역협상이 우선이다. 이란의 군부 책임자를 드론으로 제거한 만큼 호르무즈 해협 봉쇄 등, 긴장 국면이 지속되겠지만 막대한 군비가 소요되는 확전은 자제할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 캠페인 과정에 외교적 성과가 더해지면 한결 유리하겠지만, 무리하면서까지 외교적 성과를 추가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노이 회담 합의 무산 이후 ‘잘못된 합의(bad deal)보다 노딜(no deal)이 낫다’는 기조가 확고하다. 북핵 문제를 현재 상태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성과인데 자칫 무리한 합의를 해서 언론과 민주당의 비난을 자초할 이유는 없다. 결국 재선 캠페인 중 북핵 카드를 꺼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솔레이마니 암살이 주는 메시지


▎‘하늘의 사신(死神)’으로 불리는 미국의 드론 MQ-9 리퍼. 북한 수뇌부에도 공포의 대상이다.
새해가 밝았지만,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신년 친서를 보내며 상황 관리에 집중하고, 북한의 태도 변화를 통해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ID)’ 타협이 성사되기까지 트위터 외교로 시간을 보낼 것이다. 상호 간의 친서 교환, 실무 협상 가능성 언급 등 다양한 외교적 행위 및 언사가 오가겠지만, 북핵 문제는 2020년 대통령 선거 이후로 순연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북한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이뤄지고,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겠지만, 가능성은 절반 이하다.

김정은은 미국 대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관여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 직면할 것이다. 우선 소극적인 개입 시나리오다. 북한은 교착 국면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화 시킬 수 없다면 재선에 예민한 트럼프를 자극하기보다는 방사포 수준의 저강도 도발로 긴장을 유지하며 대선 결과를 관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트럼프는 재선 여부에 몰두하기 때문에 북한이 선제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시도하기에는 리스크가 적지 않다. 특히 브로맨스를 연상시키며 트위터에서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트럼프를 군사 도발로 자극해 대선에서 궁지에 몰리게 하는 것이 김정은에게 어떤 실익이 있는지 미지수다.

하원 탄핵으로 의회에서 입지가 편치 않은 가운데 여론을 무시하며 트럼프가 북한에 화끈한 선물을 주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거론하며 압박을 가했으나 연말 시한이 다하도록 미국으로부터 나온 것은 한반도 상공에 나타난 최첨단 미군 정찰기뿐이었다. 민간항공추적 사이트 ‘에어크래프트 스폿’에 따르면 미국 정찰기 코브라볼(RC-135S)이 성탄절 오키나와 주일미군 가데나 기지에서 동해 상공으로 출격했다. 동시에 4대의 정찰기가 한반도 상공을 감시하고 있다. 군사적인 대북 압박이 만만치 않은 실정이다.

특히 이란 군부 실세에 대한 드론 암살은 평양 지도부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미국은 이란 군부 실세인 거셈 솔레이마니 쿠드스군(이란혁명수비대 정예군) 사령관을 공습 살해했다. 미국의 경고를 무시한 데 대한 보복이다. 지난 12월 27일 이라크에서 미국 민간인 1명이 로켓포 피격으로 사망한 사건이 이번 공습을 크게 자극한 요인이 됐다. 미국은 그동안 자국민이 공격당했을 때 무력 대응에 나서겠다고 경고했는데, 이란이 레드라인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북한, 어디까지 선 넘을까?


▎김계관 북한 외무성 고문은 1월 11일 “남한이 조·미 사이에 중뿔나게 끼어드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모욕적 언사를 가했다. / 사진:연합뉴스
북한이 군사적인 레드라인을 넘었다고 판단한다면 드론을 통한 평양 압박이 발생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주한미군은 공격용 군사 무인기(드론) ‘MQ-9 리퍼(Reaper)’를 지난해 말 한반도에 배치했다. ‘하늘의 사신(死神)’이라는 별명의 MQ-9 리퍼는 암살 전용 드론으로, MQ-9 리퍼의 전격 배치는 ‘새로운 길’을 예고한 북한에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경고다. 트럼프의 즉흥적인 의사결정은 북한에 상당한 압박이다. 특히 미국의 대북제재를 무력화하자면 중국과 러시아를 통한 외교 전략이 절실하다. 저강도 도발 이상을 감행하면 중·러의 협력과 지지를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미국 대선이 치러지는 올해 말까지 북한이 자체 핵 능력을 고도화하고 ‘레드라인’ 경계에 머물면서 미국을 자극하는 행보를 밟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은 적극적인 개입 시나리오다. 1월 5일 자 북한 [노동신문]은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중지와 동창리 핵실험장 폐쇄 등 ‘선제적 중대조치’를 취했음에도 미국은 한미연합훈련과 첨단무기의 한국 반입, 경제 제재를 지속했다”면서 “우리 제도를 압살하려는 야망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다시금 세계 앞에 증명해 보였다”고 꼬집었다. 이어 “미국의 본심은 정치·외교적 잇속을 차리는 동시에 제재를 계속 유지해 우리의 힘을 점차 소모·약화시키자는 것”이라며 “전략무기 개발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국가의 안전과 존엄을 담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정은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노골화되고 있다면서, 미국이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고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이는 대선을 앞둔 트럼프가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 유예라는 외교적 성과를 과시하면서도, 정작 이에 상응하는 대북제재 완화를 하지 않고 있다는 비난이다. 김정은은 “우리의 전진을 저해하는 모든 난관을 뚫고 나가자”는 말로써 올해 한 해 동안 미국과 대결 구도를 형성할 것임을 예고했다. 비핵화를 하면 북한 경제의 밝은 미래를 보장한다는 트럼프의 제안에 대해서도 가시적인 경제적 성과를 위해 안전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는 말로 명시적인 거부 의사를 밝혔다.

9·19 평양 공동선언에서 북한이 선제적으로 폐기를 약속한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는 건재하다. 김정은은 미국에 “북한의 충격적인 행동을 보게 될 것”이라며 강도 높은 전략 도발을 예고했다. 특히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는 말로 신형 핵무기 투발 수단 실험을 시사했다.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와 같이 트럼프를 직접 자극하지 않는 방식의 전략 도발을 시도할 것으로 전망했으나,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보여준 김정은의 발언은 보다 직접적인 방식을 예고했다. 지난 12월 22일 개최한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소위 ‘자위적 국방력’을 계속 발전시키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김정은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우리는 우리 국가의 안전과 존엄 그리고 미래의 안전을 그 무엇과 절대로 바꾸지 않을 것을 더 굳게 결심하였다”고 밝혔다. 북한의 전략 무기는 제재 완화나 다른 것과 교환 불가다.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 무용론’을 천명한 것이다. 비록 김정은이 미국과의 ‘협상 중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실제 미국과의 협상 중단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처럼 김정은이 ‘시간은 북한 편’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향후 미국과의 비핵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김정은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북한이 북·미 신뢰 구축을 위하여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중지하고 핵실험장을 폐기하는 선제적인 중대조치들을 취한 지난 2년 동안 미국은 이에 화답하기는커녕 대통령이 직접 중지를 공약한 합동군사 연습들을 수십 차례나 벌여놓고 첨단 전쟁 장비들을 남한에 반입하여 북한을 군사적으로 위협하였으며 10여 차례의 단독 제재조치들을 취함으로써 북한을 압살하려는 야망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고 미국을 비난했다.

특히 “공약에 우리가 더 이상 일방적으로 매여 있을 근거가 없어졌다”고 주장함으로써 핵실험과 ICBM 시험발사 모라토리엄 파기 가능성을 시사했다. 김정은은 더 나아가 “이제 세상은 곧 멀지 않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보유하게 될 새로운 전략무기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확언했다. 향후 북한의 신형 잠수함에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나 다탄두 ICBM 시험발사 시나리오를 예고한 것이다.

북한의 한국 ‘망신 주기’

김정은이 공언한 새로운 전략무기는 무엇일까? 신형 핵무기 투발 수단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전략무기로 부른다. 첨단 장비로 무장한 ICBM과 결합한 다종화된 핵무기다. 지구 재진입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2017년 11월 화성 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보다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엔진 성능 강화 기술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두 차례 동창리 미사일 엔진시험장에서 중요한 시험이 이루어졌다는 북한 발표 내용을 보면 엔진의 추진력을 대폭 증강한 고체연료 가능성이 높다. 다탄두 발사 신기술과 강력한 고체엔진으로 무장한 ICBM은 미사일 방어를 취약하게 만드는 전략적 이점이 있다.

저강도 혹은 고강도 어느 시나리오든지 2020년 경자년 한반도는 긴장 상태다. 북·미 사이에서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는 문재인 정부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다. 김정은은 이번 결정서에서 대남전략,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에 이례적으로 ‘무언급’으로 일관했다. 남북관계가 생략됐다.

결정문이 김정은 신년사를 갈음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간 발표된 신년사를 돌아보면 이례적이다. 과거 신년사는 남북관계를 비중 있게 다뤘다. 특히 지난 4년 동안 북한은 신년사를 통해 대남정책의 기본 방향을 밝혀왔다. 2016년에는 자주와 대화를 강조했고, 2017년에는 한국 정부를 비난하며 민족 공조를 강조했다. 2018년에는 평화체제와 평창올림픽 참가 문제가 다뤄졌다. 2019년의 경우에는 민족 공조 목소리를 높이며 조건 없는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가동을 언급했다. 올해 키워드는 ‘한국 무용론’이다.

북한은 작년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부터 한국 정부에 대한 비난의 수위를 높였다. ‘삶은 소대가리가 앙천대소한다’는 표현과 같이 노골적으로 망신 주기를 하면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하지 않는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지난해 대남 비난 기조는 새해 들어 무시와 조롱 단계로 접어들었다. 1월 11일 김계관 담화는 연초 남북관계에 찬물을 끼얹었다. 북한은 트럼프 친서를 북측에 전달하는 데 흥분한 한국을 겨냥해 노회한 김계관 외무성 고문을 내세워 ‘설레발을 치고 있다’고 남측을 조롱했다. 특히 김계관은 “조·미(朝·美) 수뇌들 사이에 특별한 연락 통로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남한이 중뿔나게 끼어드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면박을 줬다.

남한은 통미봉남(通美封南) 방정식의 종속변수가 됐다. ‘허망한 꿈을 꾸지 말라’는 평양의 메시지는 올해 남북관계의 ‘가시밭길’을 예고한다. 남북관계 개선을 총선 선거 호재로 삼고자 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코너에 몰렸고, 촉진자 정책은 표류 중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독자적인 남북교류를 내세우는 진보진영의 요구는 거세질 것이다.

트럼프는 연초 문 대통령을 ‘나의 친구’로 호칭하며 제재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관리 중이다. 북한은 한·미 간의 약한 고리 찾기에 혈안이다. 제재로 무장한 미국과 대남 불신의 북한 양측으로부터 압박을 받는 청와대의 고민은 총선이 다가올수록 깊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남성욱 고려대 행정전문대학원장,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소장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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