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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르포] ‘회식의 종말’ 맞은 서울 도심 상권의 두 얼굴 

간판 내리는 을지로, 간판이 필요 없는 ‘힙(hip)지로’ 

인근 직장인 겨냥 대형 선술집들 “2차, 권리금 사라진 지 오래”
옛 공구 상가 개조한 카페는 ‘나만의 아지트’ 콘셉트로 인기


▎서울 지하철 1호선 종각역 인근 교차로에 위치한 건물에 ‘전층임대’ 현수막이 걸려 있다.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10분 거리다. / 사진:박지원 인턴기자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일대는 손꼽히는 직장인 상권으로 통한다. SKT타워, 하나금융그룹 명동사옥 등 유력 대기업 사옥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정보업체 상가정보연구소에 따르면, 이 일대 상권 내 대기업 수만 142개, 일일 유동인구는 26만여 명(2017년 기준)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을지로입구 상권에서도 돋보이는 식당 중의 하나가 미래에셋센터원 빌딩 꼭대기 층에 자리 잡은 일식·중식당 ‘파로 그랜드(Faro Grand)’다. 이곳은 SK 계열인 워커힐 호텔엔 리조트(이하 워커힐) 외부사업부가 직접 운영하는 레스토랑이다. 도심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스카이라운지가 압권이다. 스페인어로 ‘등대’를 뜻하는 ‘파로(faro)’에 걸맞게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였다. 창가에 앉으면 북악산 중턱 청와대가 넉넉히 보인다 해서 정치적 야심을 품은 이들에게 은근한 인기를 끌기도 한다. 이런 전망 덕에 점심시간 창가 테이블 자리는 오후 2시가 다 되도록 만석이었다.

하지만 평일 저녁에는 시민들이 이 식당에서 서울의 매혹적인 야경을 감상할 수 없다. 주중 저녁에는 일반인을 받지 않고 인근 SK그룹 임직원들에게만 개방하기 때문이다. 워커힐 관계자는 “SK텔레콤 제안을 받아 지난해 11월부터 저녁 시간대는 SK 계열사에 임대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저녁 시간대 파로 그랜드로 향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는 SK그룹 사원증을 목에 건 사람들만이 간간이 올라타고 있었다.

“저녁 영업보다 임대가 나을 정도”


▎지난 1월 10일 을지로3가역 인근 공구·인쇄소 상가 골목이 20~30대 행인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의 목적지는 ‘간판 없는 카페·와인바’다. / 사진:박지원 인턴기자
이 레스토랑은 평일 점심보다 저녁 매출이 더 높다. 대략 45대 55의 비중으로 알려져 있다. 매출의 과반을 차지하는 평일 저녁 시간대를 SK 계열사 내부용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저녁 시간대를 ‘사내용’으로 돌린 배경과 관련해 SK그룹은 임직원 간 소통 강화를 내세웠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임직원들 간 네트워킹 강화 차원에서 6개 ICT 계열사들끼리 비용을 분담해 파로 그랜드라는 공간을 임대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업계에 따르면 이런 소통 강화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불황을 타는 요식업계의 현실도 한몫한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문재인 정부 들어 52시간제 시행 등의 여파로 직장인들의 저녁 회식이 대폭 줄어들고 최저임금은 급격하게 올랐다. 매출에서 차지하는 인건비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자영업자들의 한숨이 깊어지는 요즘이다.

파로 그랜드의 경우 SK 임직원들에게 임대되는 주중 저녁 시간대에는 뷔페 라운지로 운영된다. 셰프가 제공하는 중식이나 일식이 아닌 외부 업체에서 공급하는 뷔페 음식이 제공되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저녁에 뷔페를 제공하면 요리사를 따로 둘 필요가 없어 주방의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면서 “인건비만 놓고 보면 점심 영업만 하는 게 이득이라는 셈법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파로 그랜드를 운영하는 워커힐 측은 “2012년 개업한 이후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던 파로 그랜드 매출이 2016년부터 5%가량 등락을 거듭한 끝에 최근까지 유지되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새로운 영업 방식으로 돌아서는 업체는 파로 그랜드뿐만이 아니다. 요식업계 관계자는 또 “저녁 시간 을지로 오피스 상권은 쇠락한 지 오래”라며 달라진 영업 환경에 관해서도 귀띔했다. “그렇지 않아도 외국계 기업이 많은 상권에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이 매출에 결정타를 날렸다. 폐업하거나 업종 전환을 고려하는 업체들이 점점 늘어난다고 판단된다.”

서울 도심 오피스 상권의 위축은 통계 수치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NH농협은행이 발표한 ‘주 52시간제 이후 고객 동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주 52시간제 시행 후 서울의 기업 밀집 지역의 야간 유동 인구는 30~40%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8년 7월 첫걸음을 뗀 주 52시간 근무제의 여파로 회식 문화가 사라지는 현실과도 맞물린다. 고재윤 경희대 호텔 관광학 교수는 “이에 더해 일과 삶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입사원들의 출현도 ‘회식의 종말’을 앞당기는 데 한몫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오피스 상권의 쇠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파로 그랜드가 자리한 을지로 일대를 꼽을 수 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에서 중부경찰서 앞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을지로 골뱅이 골목은 직장인들이 2차 장소로 즐겨 찾는 코스이기도 하다. 4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이 거리를 찾는 발걸음이 최근 들어 확 줄어들고 있다고 상인들은 말한다.

골뱅이 골목에서 22년째 영업을 하고 있는 조순휴(66)씨는 “2019년 한 해 매출이 예년에 비해 30% 정도는 감소했다”고 말했다. 조씨는 “회식을 하더라도 1차로 끝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면서 “밤 10시가 넘으면 아예 법인카드를 못 쓰게 막아두는 회사도 있었다”며 매출 하락의 원인을 짚었다. 또 “인근에 권리금 없이도 들어올 수 있는 가게가 숱하다”면서 “아들이 가게를 물려받을 생각으로 직장을 그만뒀는데 가업을 잇게 하는 게 과연 옳은 건지 판단이 안 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근처에서 100명 이상 수용 가능한 대형 호프집을 운영하는 유정현(49)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유씨 역시 2018년과 비교했을 때 2019년 매출은 참사 수준이라고 했다. 그는 “송년회로 들썩인 연말에도 매장을 가득 채우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라면서 “지난해 특히 매출 부진으로 속앓이가 심했다”고 전했다.

그러다 보니 건물 소유주들이 요식업 임대를 기피하는 경향도 감지된다. 을지로입구역 인근에서 20여 년간 부동산 중개업을 해온 최희정(가명)씨는 “건물주들이 사무실이나 의류 매장처럼 정돈된 느낌을 주는 점포를 들이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철문 열자 순번 기다리는 손님 장사진


▎고급 일식·중식당 ‘파로 그랜드’에서 강북 도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사진:박지원 인턴기자
폐업 등으로 비게 된 점포는 그대로 방치될 뿐 새 임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경기 침체의 여파로 창업을 꺼리는 분위기에다 건물주들은 건물주대로 기존 임대료를 고집하는 통에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다고 최희정씨는 고개를 젓는다. “을지로입구역 일대 임대료는 3.3㎡당 월 25만~45만원 수준에서 형성돼 있다. 청계천을 따라 빈 점포들이 속출하는데도 임대료를 내리려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장사를 해보려는 중년 부부들이 퇴직금을 들고 제법 찾아왔는데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을지로라고 해서 모두 같은 을지로는 아니다. 을지로3가 역 9번 출구와 11번 출구 사이의 공간은 요즘 뜨겁게 달아오른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힙지로(힙한 을지로)’라 불리는 이 일대는 청년들의 창업 열기로 북적댄다. ‘힙지로’는 1020 세대가 자주 쓰는 ‘힙(hip)하다(쿨하다, 느낌이 있다)’라는 단어와 ‘을지로’의 합성어인 셈이다.

을지로3가 주변은 과거 ‘탱크도 만든다’던 공구 상가를 포함해 조명, 타일, 인쇄 등의 업종이 곳곳에 밀집해 있다. 대략 2~3년 전부터 청년들이 그 상가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개성 있는 공방, 카페, 식당들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가게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2층 이상에 자리하고, 변변한 간판을 갖추지 않아 눈여겨보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지도에는 여기라고 나오는데?” 을지로3가 골목을 찾은 방문객에게서 곧잘 듣는 말이다. 어스름이 짙어가면서 20~30대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 손에 스마트폰을 쥔 채 삼삼오오 골목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스마트폰과 건물을 번갈아 보며 행선지를 찾아가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디지털 네이티브(디지털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라 불리는 요즘 세대에게도 힙지로에서 길을 찾는 건 일종의 도전이다.

지도 앱을 활용해 용케 가게 앞까지는 갔으나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입구를 못 찾는 이들도 눈에 띈다. 이들은 기자에게 카페 ‘호텔수선화’가 어디냐고 물어왔다. 호텔수선화는 출입구에 작고 낡은 표지판만 붙어 있고, 4층에 위치해 찾기가 어렵다. 그곳을 가자면 2, 3층의 인쇄소 복도를 거쳐야 하는 까닭에 ‘여기가 맞나’ 하는 의문이 문 앞에 다다를 때까지 이어진다. ‘웨이팅 안내’가 붙어 있는 투박한 철문을 마주하고서야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다.

인스타그램 업로드 수, 3년 만에 20배↑


▎2019년 6월 을지로3가역 인근 노가리 골목에서 열린 맥주축제. 테이블이 도로를 가득 채운 탓에 행인들은 한 줄로 다녀야 한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철문과는 대조되는 풍경이 펼쳐진다. 어둑어둑하지만 따뜻한 느낌의 조명이 은은하게 깔린 내부에서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철커덕철커덕 분주하게 돌아가는 아래층 인쇄소와 달리 이곳은 웃음과 대화, 여유로움이 넘친다. 평일 오후인데도 대부분의 테이블이 찼고 여성 고객들이 특히 많아 보였다. 그곳에서 만난 한 여대생은 “을지로가 왜 ‘힙지로’라 불리는지 와보니 알 것 같다”며 “골목골목을 다니며 길을 찾는 게 재미있고, 또 인테리어가 독특해서 SNS에 올릴 사진을 찍기에 좋다”고 미소를 머금었다.

스마트폰으로 안 되는 게 없는 시대에 사는 20대는 역설적으로 을지로의 ‘복잡함’ ‘불편함’을 ‘신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을지로 골목에서 만난 한승희(22·여)씨도 같은 케이스. 서울 용산에 사는 한씨는 을지로를 찾은 이유에 대해 “원래 강남이나 홍대 쪽에서 자주 노는데 을지로가 뜨길래 와봤다”면서 “그쪽은 상권이 딱 구획돼 있는 반면, 을지로는 좁은 골목에 인쇄소와 식당, 카페가 뒤섞여 있는 게 미로 같은 재미를 준다”고 말했다.

‘힙지로’의 부상은 지난해 서울연구원이 발간한 학술지 [서울도시연구] 제20권 제2호에 실린 논문 ‘인스타그램 위치정보 데이터를 이용한 을지로 3·4가 지역 활성화의 실증 분석’(김은택·김정빈·금경조)에서도 확인된다. 논문에 따르면, 2018년 을지로 3·4가 지역의 인스타그램 업로드 수가 2015년에 비해 20배 가까이 치솟았다. ‘해시태그’로 쌓이는 인스타그램의 빅데이터는 도시 공간, 소비 문화 연구에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찾기 어려운 공간’이라는 점에서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의 역할이 더욱 빛을 발한다. 퓨전 양식 레스토랑 ‘을지로미팅룸’의 공동대표 박찬희(28)씨는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았는데 SNS를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20~30대들이 특별하고 프라이빗(Private)한 공간을 원하는, 일종의 ‘나만 알고 싶은 ○○’ 감성을 잘 저격한 것 같다”고 식당이 뜨는 비결을 풀이했다. 현재 을지로미팅룸은 평일 저녁에도 기다란 웨이팅 줄이 보일 정도로 을지로의 ‘핫플레이스’로 꼽힌다.

기성세대에게는 핫해진 을지로 풍경이 낯설 수도 있다. 을지로 골목에서 만난 서울시 공무원 이재웅(가명)씨는 후배 직원들의 얘기를 듣고 이 일대를 찾았다고 했다. 그는 “SNS를 잘 안 하는 사람은 가게 찾기가 수월치 않겠다”면서 “소비자들에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아서 불편한데 이런 콘셉트가 되레 인기를 끄는 게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옛 공방 닮은 ‘메이커 문화’ 엿보여


▎을지로 3가 골목의 오후 풍경. 낡은 인쇄소 간판과 '힙지로' 포스터가 좁은 길을 두고 묘한 대비를 이룬다.
을지로가 젊은 층 사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지도 대략 3년이 돼간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특히 ‘핫플레이스’ 앞은 기다려서라도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을지로 역시 반짝 떴다 사그라들었던 각종 ‘○리단길’처럼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2016년, 비교적 일찍 을지로에 입성한 와인바 ‘십분의일’의 이현우(34)씨는 힙지로는 여느 ‘○리단길’과는 다르다며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경리단길 같은 공간은 좁은 지역에 상권이 조밀하게 형성된 반면, 을지로는 업체 간 간격이 넓다. 인쇄소 등 기존의 업종 사이사이에 카페나 술집이 띄엄띄엄 껴 있는 모양새라 임대료 폭증이나 젠트리피케이션의 가능성이 적어 보인다.”

이씨는 “을지로만이 가지는 차별화된 정체성이 있느냐”라는 질문에 “천천히, 느린 문화”라고 답했다. 그는 “많은 가게들이 새로 들어왔지만 다 같이 상생하자는 분위기가 강하다”며 “특히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도전해보려고 들어온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대체로 ‘장사꾼’의 모습은 좀 옅은 편”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몇몇 가게가 공방으로 시작했다가 부족한 수입을 메꾸기 위해 맥주도 팔기 시작한 것을 그 사례로 꼽았다.

2018년 [다시, 을지로]라는 책을 써낸 김미경 작가의 생각도 이와 맞닿는다. 그는 ‘을지로 문화’가 을지로의 청년들이 어떤 의도를 갖고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청년들이 맹목적으로 ‘힙함’을 좇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회를 모색하고 분투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을지로 청년들이 대부분 퇴사 경험이 있다는 점을 짚으며 “이제는 청년들이 영웅적이고 거대한 성공보다는 스스로가 원하는 가치를 주어진 조건하에서 시도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 말한다.

2014년에 문을 연 카페 ‘커피한약방’은 을지로의 1세대로 꼽힌다. 그곳을 관리하는 박용범 이사(36·남)도 을지로의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그는 “숨어 있는 듯한 입지적 특징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 같다”며 “나도 여전히 골목골목을 헤맨다”고 웃으며 말했다. 다만 “그런 유행과는 무관하게 ‘우리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수익을 통한 재투자나 사업 확장 등도 항상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강수 한국창업부동산정보원 이사는 “을지로는 아직 ‘상권’이라고 부를 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골목을 중심으로 성장했기에 대형 프랜차이즈가 진입할 유인은 적어 보인다”며 을지로가 ‘○리단길’과는 다른 경로로 발전하리라는 기대감을 표했다.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박지원 인턴기자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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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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