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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베토벤 탄생 250주년… ‘악성(樂聖)’이 인류에게 남긴 것 

“오늘의 비극과 고난이 내일의 우리마저 괴롭힐 순 없어” 

TV·라디오 등에서 접할 수 있는 친근한 작품들
예측불허의 불협화음과 유연성이 영생 원동력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조명한 영화 [카핑 베토벤]에서 베토벤으로 분한 배우 에드 해리스가 열연하고 있다.
2020년 지구촌 클래식 음악계가 공유하는 핫(hot) 아이콘은 단연 ‘베토벤(1770~1827)’이다. 올해가 그의 탄생 250주년이다. 출생지 독일 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베토벤 생전의 본거지였던 빈, 그리고 그 밖에 런던·파리·뉴욕·도쿄·베를린 등 문화도시라 불리는 곳들은 모두 베토벤을 테마로 한 페스티벌을 대대적으로 개최한다. 이 축제들을 하나하나 이어보면 1년 내내 축제가 끊기는 날이 없을 정도다.

사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생경하지 않다. 딱히 올해와 같이 이른바 ‘꺾어지는 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베토벤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전 세계 콘서트홀과 공연장에서 베토벤의 작품이 단골 메뉴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그의 음악을 듣고자 굳이 티켓을 사서 공연장에 가거나 음반을 구입할 필요는 없다. 클래식 FM 라디오만 켜도 베토벤 작품은 늘 방송을 탄다. TV에서는 식기세척기 광고 뒤로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이 울려 퍼지고, 저 유명한 교향곡 5번 ‘운명’도 라면 광고의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 3악장에 맞춰 손가락으로 태블릿 스크롤을 박진감 있게 훑는 모습을 보여주는 구글 플레이 온 광고는 그 패러디 영상들이 한동안 유튜브를 휩쓸었다.

미디어가 없는 곳에도 베토벤은 존재한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한동안 쓰레기 수거차가 후진 신호음을 울리며 도착을 알렸는데, 그 선율이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피아노에 입문해서 바이엘을 뗄 때면 배우기 시작하는 이 소곡집은 베토벤이 ‘4월 27일 엘리제의 추억을 위하여’라는 메모를 첨부한 바가텔 곡이다. 이 선율을 딴 응원가로 유명한 모 대학의 여자축구 동아리 이름은 ‘FC 엘리제’다.

심지어 베토벤의 음악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까지 향한다. 1977년 태양계 너머로 쏘아 올린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와 2호에는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과 현악 4중주 13번 중 ‘카바티나’ 악장이 레코드로 실려 있다. 정말 외계인이 존재해서 이 우주선의 내용물을 본다면, 베토벤은 지구를 넘어서 전 우주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있는 셈이다.

평생 평민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남자


▎악성 베토벤의 초상화.
이 같은 ‘베토벤 신드롬’은 베토벤 생전에 시작돼 그의 사망 후에도 단 한 번도 사그라든 적이 없이 계속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그는 선배 작곡가들과도 차별된다. 이전 작곡가들의 작품들은 동시대 잠깐 연주되고 나면 한동안 역사라는 무덤에 묻혀서 후세들의 발굴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바흐라든가, 그가 존경했던 스승인 모차르트나 하이든조차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베토벤에게는 ‘발굴’이란 단어가 필요치 않았다. 베토벤 사후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관심은 더 증폭돼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했다. 이런 베토벤의 신화는 어떻게 창조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몇 가지 키워드로 살펴보자.

① 2만여 명이 운집한 장례식

1827년 3월 26일 빈에서 거행된 베토벤의 장례식은 그가 남기고 간 음악에 신비주의를 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2만여 명의 추모객 가운데는 베토벤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음악을 들어보지 못했거나 일면식도 없는 외지인들도 있었다.

보통 아침에 치르는 장례식을 오후로 연기한 것도 이 같은 장거리 조문객들을 배려한 것이었는데, 그만큼 이 장례식은 개인의 추모를 넘어선 대규모 이벤트로 치러졌다. 그럼에도 몰려든 인파의 수준이 예상을 훌쩍 넘어서자 경찰이 나서 질서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추모하는 뜻에서 빈의 상점·레스토랑·카페들은 모두 문을 닫았으며 베토벤과 아무런 인연이 없던 빈 음악원조차 휴교에 들어갔다. 장례식이 거행된 성당을 떠난 베토벤의 운구행렬이 화려한 영구마차에 실려 베링 공동묘지로 옮겨질 때는 200대의 마차가 베토벤의 영구마차를 호위하는 대장관(大壯觀)을 연출했다. 그의 장례식 풍경은 여느 국장과 달랐다.

물론 베토벤 이전에도 이런 장례식이 없는 건 아니었다. 19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였던 빈에서 명사의 장례식은 국가적 기념행사로 치러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규모의 장례식은 보통 국왕이라든가 귀족, 그리고 정치인과 같은 사회적 지도층이나 귀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장례식에 군중들이 모여든 것도 평소 직접 얼굴 보기 힘든 고위 신분의 인물들을 먼발치에서나마 직접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의 음악가에게 이런 국장(國葬)이 치러진 것은 베토벤이 처음이었고, 적어도 합스부르크 시대, 그 이후에도 거행되지 않았다.

그의 관은 귀족이나 왕족 대신 시인·배우·작곡가·음악가 등 소시민들이 둘러쌌고, 장례 미사에 초대받은 극소수의 선택받은 이들 중에는 베토벤에게 잔소리를 퍼붓던 하숙집 주인과 파출부 노릇을 했던 아낙네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풍경 속에서 ‘베토벤’이라는 아이콘은 그의 음악을 전유하던 귀족과 부르주아를 넘어서 계급을 초월한 시민들의 뇌리에 각인됐다.

이런 색다른 풍경으로 인해 베토벤이 서민 계급을 대변하는 영웅이라는 신화가 태어났다는 얘기도 있지만 이는 다소 과장된 허구다. 오히려 평민이라는 자신의 계급을 평생 콤플렉스로 생각했던 베토벤은 평민이면서 다른 평민들을 무시했고 귀족 행세를 하다가 망신도 여러 차례 당했다.

베토벤의 장례식에 서민들이 몰려든 이유는 그보다는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개천 용이었기 때문이다. 생전에 평범한 소시민으로 출발해 엘리트 문화의 아이콘이 된 성공 스토리는 서민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그의 사망과 함께 예술도 끝났다?


▎베토벤의 고향인 독일 본에 세워진 베토벤 기념관.
이날 장례식에서는 베토벤의 셋방 동기였던 작가 그릴파르처가 직접 쓴 추도사를 발표했다. 이 추도사에서 그릴파르처는 “베토벤의 지위는 ‘영원히 침해될 수 없으며’ 베토벤의 뒤를 따를 사람은 그를 계승하는 자가 아닌 새로 시작하는 자만이 가능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의 사망과 더불어 ‘예술은 끝났기’ 때문이다. 망자의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이 추도사는 실현됐다. 이후로 작곡되는 모든 고전음악들은 베토벤에 비교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으며, 베토벤 이후 인정받는 교향곡이 탄생하기까지는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② 남달랐던 예술가의 자존심

베토벤이 활동하던 시기 클래식 음악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평민계급인 음악가들의 최대 인생 목표였고, 그것은 베토벤의 인생 목표이기도 했다. 빈에 유학 와서 자신과 음악적 생각과 다소 괴리가 있는 하이든을 사사(師事)한 것도 고향인 본에서 궁정악장 자리를 차지하는 데 유리한 경력이 될 거란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연금이 보장되는 공무원 자리를 꿈꾸는 베토벤의 모습은 사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리히노프스키 이후 베토벤은 후원자들과 거리를 유지하게 됐다. 리히노프스키와 함께 공유했던 가족 같은 친밀감이 자신의 예술적 삶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작곡가는 불편하지 않을 만큼 후원자와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사생활과 창작의 자유를 보호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회적 상황은 베토벤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며 계급 기반 자체가 흔들리자 대다수 유럽 왕실과 귀족들은 경제적 압박을 느꼈다. 먹고살기 힘들어졌을 때 문화 비용부터 접는 것은 이 시대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왕궁들은 예산 부족을 이유로 거느리고 있던 궁정악단 단원들을 정리해고 하거나 아예 악단 자체를 해산시켜 버렸다.

베토벤이 빈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합스부르크 황실 오케스트라와 극소수 귀족 전속 악단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고향 본도 마찬가지였다. 1794년 프랑스가 본을 포함한 라인란트를 점령하면서 자신을 후원하던 본의 선제후는 피난을 떠나버렸다. 빈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게 된 베토벤에게 가장 그럴듯한 목표는 황실 음악가가 되는 것뿐이었는데, 이는 본의 궁정에 취직하는 것보다 어려운 시도였고, 결국 평생 그 야망은 달성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귀족들과의 우호적인 친분은 베토벤을 경제적 위기에서 어느 정도 구원해 줬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모르지만 귀족들은 베토벤에게 대단히 관대했다. 후원자 중 한 명인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베토벤이 낡고 더러운 다락방에서 자취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자신들의 저택으로 거처를 옮겨 줬다.

이런 생활이 여러 해 지속하면서 베토벤은 공작 가문의 ‘손님’에서 ‘가족’이 됐고, 공작부인은 베토벤의 두 번째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가 됐다. 심지어 베토벤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몰래 그의 악보들을 사들이기까지 했다.

오히려 이런 과잉친절을 부담스러워한 것은 베토벤 쪽이었다. 베토벤이 새로 살 집을 구해 독립해 나가자 공작은 베토벤의 재정적 안정을 위해 연급을 자신의 경제적 능력이 닿을 때까지 무한정 지급했다. 이런 리히노프스키 가문과의 교류는 가문이 결국 시대의 격변을 못 견디고 무너질 때까지 무려 12년간 지속했다.

귀족과의 친분은 절실한 생계 지원뿐 아니라 빈의 최신 문화적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소통창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런 교류는 베토벤에게 자신이 귀족과 똑같은 상류층이라는 환상을 심어 줬다. 귀족이 아니면서 귀족들과 동등하게 어울리고, 그들처럼 사치스런 의상을 입고 분칠한 가발을 쓰는 것이 허용됐다. 청소하는 하인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으며 부엌 귀퉁이에서 식사하던 동시대 선배 작곡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에게는 어림도 없는 호사였다.

“공작? 제 따위가 뭔데?”


▎베토벤이 생전에 연주와 작곡에 사용하던 피아노.
더욱 놀라운 점은 베토벤이 이런 귀족들에게 고분고분한 음악가가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는 후원자들의 요청에 걸핏하면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베토벤이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후원자들은 베토벤이 혼자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 때 옆방에 숨어 들어가 벽에 귀를 붙이고 몰래 연주를 듣곤 했다. 베토벤의 성질을 모르는 한 귀족이 베토벤이 혼자 피아노 연주 중인 살롱 문을 무심코 열자 베토벤은 바로 연주를 멈추고 불쾌한 표정을 짓고는 모자를 쓰고 방에서 나가 버렸다.

이런 성품으로 인해 가장 가까운 가문이었던 리히노프스키 공작과의 관계가 늘 평화로울 수만은 없었다. 베토벤을 실레지아 별장에 초대한 공작은 프랑스 장교들이 찾아오자 베토벤에게 조심스럽게 피아노 연주를 부탁했다.

이에 베토벤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런 건 하인에게나 부탁하라”고 거절하고는 화를 내며 빈으로 돌아왔다. 그 길로 베토벤 제일 먼저 한 일은 방에 있던 공작의 흉상을 집어 던져 박살 낸 것이었다. “공작? 제 따위가 뭔데? 운 좋게 귀족 딱지나 달고 태어난 주제에.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이 유명한 일화는 귀족들에 대한 예술가의 자존심을 표현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지금까지 회자한다. 공작과 베토벤은 어영부영 화해했지만 이후 관계는 예전 같지 않았다. 공작이 가끔 찾아와도 베토벤은 바쁘다는 핑계로 그를 상대하지 않았고 공작은 일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쓸쓸히 돌아갔다. 심지어 그마저도 귀찮아한 베토벤은 공작이 찾아와도 문조차 열어 주지 않게 됐다.

베토벤의 이런 불같은 성미에도 불구하고, 후원자의 행렬은 끊어지지 않았다. 귀족들은 이런 베토벤을 인내심을 가지고 존중해 줬다. 그들이 몰락한 이후 그 자리를 대신 채운 신흥 부르주아들도 베토벤에게 관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날로 괴팍해지는 베토벤의 곁을 묵묵히 지키며 그의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함’을 귀히 여겼다. 인신공격 수준의 차가운 대접을 받으면서도 베토벤이 풍기는 숭고하고 고귀한 아우라에 이끌렸다. “예술가는 자유로운 영혼”이라며, 그들의 일탈과 방종을 관대하게 묵인하는 관습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다.

③ 청각장애를 극복한 음악

베토벤의 음악이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연주되는 이유는 그 긴 세월 동안 현대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음악들의 운명이 사조나 장르, 유행에 좌우된 반면 베토벤은 그 모든 시대적·사회적 사건과 경향을 초월해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이 영생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음악적으로 그의 작품에서 빈번하게 들려오는 예측불허의 리듬과 불협화음, 그리고 유연성은 지금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베토벤 이전의 고전음악에서는 이런 측면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완결무결하고 조화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으며, 불협화음은 악마의 소리로 금기에 해당했다. 하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말년으로 갈수록 복잡한 일탈과 자유가 두드러졌으며 심지어 재즈적 즉흥성까지 보여 준다.

이런 베토벤의 말년의 음악 양식은 당대 사회적 경향과 어긋나는 것이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발발된 여러 전쟁과 넘쳐나는 혁명사상, 그리고 철학에 지쳐버린 사람들은 음악을 들으면서까지 고민하거나 공부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

귀족들의 교양의 도구였던 예술은 19세기에 접어들어 향락의 대상이 됐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자극적 선율과 쾌락을 원하는 빈 사교계에는 무도회를 위한 음악이 쏟아져 나왔고 오페라극장은 오락 예술의 근거지가 됐다. 시민들이 이런 즐거움에 치중하는 동안 국가는 국민에게 부당하게 가하는 감시와 억압·폭력을 은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이런 문화에 대한 반항을 품고 있었다. 그는 예술의 본래의 기능인 미학과 윤리적 기능을 복잡하면서도 보다 세련되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부활시켰다. 그의 음악은 자연스레 시대의 변화를 좇고 삶의 고민과 갈등을 논하게 됐다.

베토벤의 추종자들은 이런 그의 음악에 빠져들어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베토벤의 음악을 함께 듣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작품이 품고 있는 내적 반항과 자유주의 철학을 공유하며 사회적 금기와 억압으로부터 해방감을 느꼈다.

시대의 변화 좇고 삶의 고민과 갈등을 논하다


▎일본 도쿄 고쿠기칸(國技館)에서 거행된 다국적 아마추어 합창단 5000명의 베토벤 공연. 고쿠기칸은 1984년부터 세계 평화를 위해 매년 2월 이 행사를 열고 있다.
이런 음악들은 심지어 온전한 상태도 아닌 청각장애 속에서 탄생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의 재능을 천재적이라 치켜세웠고, ‘고난을 극복하고 환희로’라는 베토벤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저 유명한 교향곡 9번 ‘합창’이 초연될 때 귀가 먹어 청중들의 박수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베토벤의 일화는 작곡가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까지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베토벤의 성취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베토벤 음악의 현대성은 청각장애를 ‘딛고’ 만든 산물이 아니라 ‘그로 인한’ 결과물이라는 견해다.

미 텍사스에서 활동하는 음악학자 로빈 월리스는 베토벤과 유사한 청각 질병에 걸린 아내를 옆에서 8년 넘게 지켜봤다. 그러면서 베토벤이 소리를 듣기 위해 시도한 무수한 노력의 흔적들을 그가 남긴 악보와 편지와 생의 기록들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매번 최신식 보청기로 갈아치우고, 소리를 진동으로 느끼기 위해 피아노 다리를 잘라내고, 공명기를 사용했지만 결국 말년의 베토벤은 자신의 아내처럼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것으로 그는 봤다.

그처럼 부조화 그대로 분열된 채 방치된 음표들은 베토벤이 소리를 들을 수 없어 악보를 통해 시각적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들일 것이라고 월리스는 저서 [베토벤을 들으며(Hearing Beethoven)]에서 주장한다. 베토벤의 음악이 실제 난청인들은 감상하기 절대 쉽지 않으며, 베토벤이 귀가 먹어갈수록 점점 더 긴 작품을 쓰고, 더욱 교묘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주제 동기들을 활용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만약 월리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 인류는 한 개인에게 찾아온 핸디캡 덕분에 영원한 문화유산을 얻은 셈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모든 개인이 자신의 불행에 베토벤처럼 대처하지는 않는다. 베토벤 또한 자신의 청력 상실이 성공의 열쇠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고민할 만큼 그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민하고 좌절했다.

하지만 소명을 찾으려면 베토벤과 같은 인내가 필요하고, 그렇게 찾은 소명을 따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월리스는 우리가 베토벤에게서 배울 점은 선택받은 자만이 타고나는 천재적 재능이 아닌 모두가 가질 수 있지만 구하지 않는 인내와 용기라고 했다.그는 ‘실패자란, 오로지 소명에 귀 기울이지 않은 사람을 부르는 말’일 뿐이라고 적고 있다.

④ 슬픔보다 강한 냉소

베토벤이 변혁을 가져온 그 모든 음악적 양식 중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즐거움의 의미다. 르네상스 시절부터 음악가들은 음악에 그들만의 형식으로 ‘웃음’을 심어놓았다. 그 키워드가 바로 ‘스케르초(scherzo)’인데, 우스갯소리·농담·놀이를 의미하는 ‘스케르차레(scherzare)’와 같은 뿌리를 가진다. 기분 좋고 소박하며 무겁지 않은 3박자 춤곡 형식의 악장은 교향곡·소나타·4중주곡 어느 형식에서건 잠시 무거운 긴장을 풀고 가는 중간다리 역할을 해왔다.

이런 스케르초 형식을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한 인물은 베토벤의 스승 하이든이었다. ‘해학’ ‘즐거움’ 하면 음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낙천주의자 하이든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3박자 스텝을 밟는 무도회 미뉴에트를 고전주의 스케르초 형식으로 정착시킨 바 있다.

하지만 그의 제자는 ‘음악적 유희=사교적 미소’라는 견고한 편견을 처음으로 전복시켰다. 베토벤은 스승이 섬세하게 다듬어놓은 즐거움을 해체하며 ‘스케르초’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했다. 교향곡 1번 미뉴에트 악장에는 ‘심각한 조크’라는 이율배반적인 부연을 달아놓았고, 교향곡 2번부터는 아예 대놓고 스케르초는 ‘혁명적 형식’이라 내세운다.

인류의 진보와 승리 암시하는 그만의 스케르초


▎1845년 베토벤의 고향인 독일 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베토벤 동상 제막식 모습.
그의 유명한 교향곡 3번 ‘에로이카’의 스케르초보다도 더 파격적이다. 여기서 드러내는 투박하고 떠들썩하면서도 박력 넘치는 분위기는 스승 하이든의 고상하고 귀족적인 미소와 한참 거리를 두면서 불같이 달아오르던 혁명의 분위기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진취적인 속도로 빠르게 전진하는 음악 뒤로는 씁쓸하게 일그러진 여운을 남긴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는 혁명가의 자조를 일깨우는 것이다. 베토벤은 음악의 해학에 결코 가벼운 웃음으로 넘길 수 없는 무게를 달아놓았다.

일그러진 웃음의 자화상을 묘사하는 데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 바로 저 유명한 교향곡 9번 ‘합창’이다. 태초의 혼돈을 그리며 비탄으로 막을 내리는 1악장 뒤로 바로 시작되는 2악장 스케르초는 앞서 심각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일거에 날려버리며 시답지 않은 농담인 양 그 진지함을 악의적으로 깎아내린다. 야만스러우리만큼 과격하고 공격적인 리듬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광란을 연상시키고, 중간중간 어색하게 끼어드는 팀파니는 이런 베토벤의 비웃음에 당황하고 비틀거리는 절름발이 거인과 같다.

이런 스케르초 악장에 대해 베토벤은 “사실인 것을 알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회상”이라 묘사했다. 즉, 실제 일어났지만 이미 과거의 일이 돼버린 역사적 테러다. 여기서 베토벤은 우리가 이 테러를 대놓고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과거의 해악이 더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극 속에 꽃피는 스케르초는 자신의 웃음소리가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분열의 원동력이 돼 허름하고 부패하고 파괴된 세상을 헤집어 놓는다.

베토벤을 계승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고전주의 시대까지의 미뉴에트-스케르초 전통을 거부하고 베토벤식 스케르초를 추종했다. 차이콥스키도, 말러도, 슈만도 자신들의 스케르초를 통해 슬픔과 고뇌, 찢어지는 마음의 절망을 이중적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음악의 웃음은 비상식적인 세상과의 타협과 화해를 거부하는 신호탄으로 정착했다.

한발 더 나아가 베토벤의 스케르초는 인류의 진보와 승리를 암시한다. 과거에는 치명적이었던 비극과 사건을 하찮게 보고, 미미한 에피소드로 웃어넘길 수 있을 만큼 인류가 전진하고 진보해서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즉 베토벤의 웃음은 현재진행형의 고난과 슬픔에 보내는 냉소이자 미래를 향한 희망이다. 베토벤의 음악이 2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의 음악이 여전히 듣기 좋아서가 아니라, 그가 살았던 부조리의 세상이, 그가 겪었던 비극과 고난이 우리네 삶과 동질화돼 있고, 동시에 그것을 극복할 자극제를 웃음이라는 여유로 선사하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음악은 이렇게 듣는 이를 격려한다.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비극과 부패와 고난이 내일의 우리마저 괴롭힐 수는 없을 거라고.

-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 숙명여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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