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2부)] 중세 중국화와 유교 수용의 주역들(6) 정도전, 이성계를 포섭하다 

주군에게 군사력을 쥐여준 ‘안변책(策)’ 

새 시대 열 인물이라 확신하고 의도적으로 접근
동지 규합→군사혁명→개국이라는 왕건 방식의 혁명 구상·실행


▎조선 초 조정의 실권을 장악했던 정도전(오른쪽, 김흥기 분)과 그의 측근인 남은(이영후 분). KBS 사극 [용의 눈물] 중 한 장면이다.
우왕 8년(1382)은 조선왕조의 건국 연도인 1392년보다 정확히 10년 전이다. 그해 정도전은 만 40세가 됐다. 공자는 40세를 ‘불혹(不惑)’이라고 했다. ‘불혹’이란 세상의 명리(名利)에 미혹되지 않을 정도로 성숙한 연배라는 뜻이다.

10년 가까이 풍상(風霜)을 겪던 정도전은 우왕 8년에 어느덧 불혹을 넘겼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헛된 명리가 아닌 진정 가치 있는 곳에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연배였다. 그런 정도전 앞에 운명처럼 등장한 인물이 이성계였다. 이성계는 정도전보다 7세 연상으로 이자춘의 둘째 아들이었다.

공민왕은 1356년(공민왕 5) 장군 유인우를 파견해 쌍성 총관부를 수복했다. 그때 쌍성총관부의 유력자 이자춘이 내응해 큰 공을 세웠다. 쌍성총관부를 수복한 공민왕은 일종의 군정(軍政)을 실시하고 이자춘을 군정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국경 지역이라는 특수성에 더해 여진족이 많다는 현지 사정을 감안한 조치였다. 함흥·영흥 등의 함경남도 지역에 있는 쌍성총관부는 개경에서 볼 때 동북 방면에 있어서 동북면(東北面)이라 불렸다.

당시 공민왕은 동북면의 가구(家口)를 3가구씩 편제해 이를 1호(戶)로 만든 후 100호를 한 단위로 만들어 백호(百戶)에 예속시켰다. 백호는 다시 총사령관인 군정사령관에게 예속시켰다. 3가구로 편성된 1호에서는 평상시 1명을 정군(正軍)으로 복무하게 하고, 나머지는 생업에 종사하게 했다. 비상시가 되면 3가구에서 각각 1명씩 총 3명을 징발했으며, 위급할 때는 모든 남자를 징발했다.

이렇게 편성된 동북면 가구의 세금이나 공납은 개경으로 상납하지 않고 현지에서 군자금으로 이용하게 했다. 요컨대 공민왕은 동북면의 군권을 비롯해 행정권·경제권을 군정사령관에 집중시켰다. 이에 따라 동북면의 군정사령관인 이자춘은 사실상 왕과 같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공민왕은 이자춘을 견제하기 위해 아들 한 명을 인질로 보내게 했다. 지방의 유력자를 견제하기 위해 인질을 보내게 하는 관행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이른바 상수리 제도라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상수리 제도를 이어서 기인 제도라고 하는 게 있었다. 그 기인 제도에 따라 이자춘 역시 아들 한 명을 인질로 보내야 했다. 당시 지방 유력자들이 인질을 보낼 경우 대부분 둘째 아들을 보냈다.

전화위복… 인질 생활이 큰 기회로


▎서울 종묘의 공민왕 신당에 봉안된 공민왕(오른쪽)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
첫째는 가문을 계승해야 해서 남겨뒀고, 셋째나 막내는 아직 어리거나 사랑스러워 보내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둘째 아들을 인질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자춘 역시 마찬가지였다. 큰아들 이원계는 큰아들이라 보내지 않았고, 막내아들 이화는 막내아들이라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둘째 아들 이성계가 인질로 개경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때가 공민왕 5년(1356)으로 이성계의 나이 22세였다.

이성계는 개경에서 5년간 기인(其人)으로 인질 생활을 했다. 이것이 이성계에게 크나큰 기회가 됐다. 우선 개경의 고급문화를 접하면서 이성계의 식견이 크게 높아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공민왕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었다. 고려시대 기인은 궁중에서 경비를 서거나 무술대회 등에 선발돼 왕 앞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격구가 유행해 왕이 참석하는 격구대회가 자주 개최됐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이성계는 기인으로 있을 동안 단오절 격구대회에 출전해 발군의 실력을 뽐냈다고 한다. 그 기회를 이용해 이성계는 공민왕의 눈에 띄었고 그것이 대운을 불러왔다.

이성계가 27세 되던 1361년(공민왕 10) 4월에 아버지 이자춘이 세상을 떠났다. 이자춘이 죽자 공민왕은 동북면의 군정사령관으로 누구를 임명할지 고민했다. 관행대로 하면 이자춘의 큰아들 이원계를 임명해야 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이원계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지 못했다. 반면 이성계는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이미 5년간 궁중에서 경비를 섰고, 격구 대회에서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것도 보아온 터였다. 잘 모르는 이원계보다는 잘 아는 이성계가 훨씬 든든하고 믿음직했을 것임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자춘은 1361년 4월에 죽었는데, 그해 10월 이성계가 동북면 상만호(上萬戶)로서 1500명의 친병(親兵)을 거느렸고, 다음 해 1월에는 역시 동북면 상만호로서 2000명의 친병을 거느렸다고 한다. 상만호는 상위의 만호(萬戶)라는 뜻이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부족을 단위로 해 백호·천호(千戶)·만호(萬戶)라고 하는 군 지휘관을 뒀는데, 보통 만호가 총사령관이었다. 결국 동북면 상만호는 동북면의 총사령관이라는 뜻이었다. 이로써 이자춘 사후에 이성계가 아버지를 뒤이어 동북면의 군정사령관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이자춘이 세상을 떠나던 즈음 동북아 3국은 격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원나라에서는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른 한족 반란군들이 창궐했다. 홍건적이라 불린 그들은 비밀 종교결사 백련교를 기반으로 삽시간에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중국의 홍건적과 함께 만주의 여진족 그리고 몽골고원의 몽고족 잔당들도 크게 창궐했다.

일본에서는 두 명의 천황이 각각 정통성을 주장하는 남북조 시대가 장기화됐다. 남북조 내란의 여파는 해외로 퍼져나갔다. 군량과 병력을 보충하고자 하는 해외 약탈이 자행됐던 것이다. 왜구라 불린 그들은 고려 해안은 물론 중국 연안 그리고 동남아 각국까지 약탈했다. 왜구의 피해는 특히 고려가 심했다. 지리적으로 일본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해군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의제(義弟) 퉁두란과 함께 여진족 토벌에 나서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이흥민이 글씨를 쓴 경복궁 근정전의 현판.
이에 따라 고려는 북쪽의 홍건적과 몽고족·여진족은 물론 남쪽의 왜구로 몸살을 앓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자춘을 계승해 동북면 상만호가 된 이성계는 1361년 10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친병 1500명을 거느리고 강계 지역으로 출동했고, 다음 해 1월에는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개경 수복 작전에 참전하게 됐다. 당시 이성계가 거느린 2000명 내외의 친병은 이자춘이 기른 군대였다. 이후 20여 년에 걸쳐 이성계는 홍건적과 왜구 그리고 몽고족·여진족 등과 1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 고려 최고의 명장으로 떠올랐다.

이성계가 48세 되던 우왕 8년(1382) 즈음 만주의 여진족 중에서 호발도(胡拔都)가 창궐하기 시작했다. 호발도는 오랑캐라는 뜻의 호(胡)와 장수라는 뜻의 발도(拔都)가 합쳐진 말로 그는 뛰어난 무술 고수로 알려졌다. 만주의 호발도는 고려 쪽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압록강 주변을 약탈하곤 했다. 그 규모가 점점 커져서 우왕 8년(1382) 1월에는 1000명을 거느리고 의주를 공격하기까지 했다.

우왕은 이성계를 파견해 호발도를 토벌하고자 했다. 우왕 8년(1382) 2월 전후로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동북면을 떠나 개경으로 출동했다. 호발도는 이 기회를 역이용하고자 했다. 이성계가 자신을 토벌하기 위해 동북면을 비운 틈을 타, 역으로 동북면을 기습한다면 식은 죽 먹듯 쉽게 뺏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우왕 9년(1383) 6월, 호발도는 동북면을 기습·침략했다. 침략 통로는 예전 몽고족 나하추와 마찬가지로 만주-강계-개마고원을 거쳐 함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이성계가 빠진 동북면은 속 빈 강정과 같았다. 호발도는 손쉽게 함흥과 영흥을 점령했다. 공민왕 때 어렵게 수복했던 동북면은 다시 호발도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호발도는 길주에 주둔하면서 함경도 전체를 자신의 영향권 안에 편입하고자 했다.

이에 우왕은 이성계를 동북면 도지휘사로 임명해 호발도를 토벌하게 했다. 우왕 9년(1383) 7월, 이성계는 개경을 떠나 다시 동북면으로 향했다. 그때 저명한 신진사대부 이색은 한시를 지어 이성계 장군을 전송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장군의 용맹함은 장수 중 으뜸이니(松軒膽氣蓋戎臣)/ 만리장성이 장군의 한 몸에 맡겨졌네(萬里長城屬一身)/ 바삐 다니며 어려웠던 날이 몇이던고?(奔走幾經多故日)/ 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봄을 즐겨보세(歸來同樂太平春)/ 지금 형세는 종묘사직에 관계되는데(如今大勢關宗社)/ 하물며 그 선봉장은 귀신 같다고 하네(況是前鋒似鬼神)/ 두 왕을 같이 모셔 정이 얕지 않으니(聯袂兩朝情不淺)/ 다만 시율을 지어가는 길을 전송하노라(只將詩律送行塵)”

당시 이색은 신진사대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 이색에게 이성계 장군은 “만리장성이 장군의 한 몸에 맡겨진 것 같은” 인물이었다. 즉 이색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는 이성계 장군에게 고려의 존망이 달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고 의지했다. 이색이 귀신 같다고 했듯 호발도는 무술로 이름 높은 장수였다.

그런 호발도를 토벌하러 출정하는 이성계를 염려도 하고 또 격려도 하고자 이색은 위와 같은 시를 지었던 것이다. 당시 이색의 마음이 곧 신진사대부들의 마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정몽주는 동북면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임명돼 이성계군(軍)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우왕 9년(1383) 8월, 철령을 넘어 동북면에 도착한 이성계는 의제(義弟) 퉁두란을 불렀다. 당시 퉁두란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장례 중이었다. “국가의 일이 급하니 그대가 상복을 입고 집에 있을 때가 아니다. 상복을 벗고 나를 따르라”는 이성계의 부름에 퉁두란은 상복을 벗고 하늘에 제사한 후, 활과 화살을 차고 출동했다. 이성계와 퉁두란은 마천령을 넘어 길주 벌판에 주둔했다. 먼저 퉁두란이 선봉으로 나서서 호발도와 일전을 벌였지만 견디지 못하고 후퇴했다.

드높아진 명성, 몰려드는 신진사대부들


▎목은 이색의 위패를 모셔놓은 충남 서천의 문헌서원.
뒤이어 이성계가 단기필마로 돌진하자 호발도 역시 단기필마로 돌진해 나왔다. 이성계와 호발도는 칼을 휘두르며 마주쳤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호발도는 말에서 떨어졌지만 이성계의 칼에 맞지는 않았다. 호발도는 재빨리 일어나 말에 올라타려 했다.

그때 이성계는 말을 뒤돌려 활로 호발도의 등을 쐈다. 그러나 갑옷이 두꺼워 깊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성계는 다시 호발도의 말을 쏘아 꿰뚫었다. 말과 함께 거꾸러진 호발도를 이성계가 쏘려는 찰라, 적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몰려왔다. 고려 병사들도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하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됐다. 사기가 한껏 오른 고려 병사들에게 호발도의 병사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겨우 목숨만 건진 호발도는 만주로 도망쳤고 다시는 동북면을 넘보지 못했다. 이색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이 기대했던 그대로 이성계 장군이 호발도를 물리쳤던 것이다.

호발도를 격퇴하면서 이성계 장군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그와 함께 불우한 신진사대부들도 이성계에게 몰려들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당시 42세의 정도전에게 이성계는 새 시대를 열 인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호발도를 격퇴한 이성계는 9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승전보를 직접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이성계와 함께 조전원수로 참전했던 정몽주 역시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당시 성리학 혁명을 이미 결심하고 기회를 엿보던 42세의 정도전은 정몽주를 이용해 이성계에게 접근했다. 이와 관련해 [삼봉집]에는 ‘계해추(癸亥秋)’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는 1383년(우왕 9) 가을에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기증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정도전군(軍)이 동쪽으로 떠나는 길은 멀고도 먼데(鄭生東去路悠悠)/ 철령 고개는 높고 나팔 소리는 쓸쓸하네(鐵嶺關高畫角秋)/ 장군의 군막에 들어간 손님 중 누가 제일일까?(入幕賓中誰第一)/ 달 밝은 밤에 사람들이 유공루(庾公樓)에서 달구경 하리라(月明人倚庾公樓)”

시에서 알 수 있듯 이 시는 이성계 장군을 따라 함흥으로 가는 정도전에게 정몽주가 써준 것이었다. 위의 시에서 ‘장군의 군막에 들어간 손님 중 누가 제일일까?’라고 한 것은 이성계 장군의 군막에 참여한 정도전이 최고 인재로 이성계의 신임을 받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것은 ‘달 밝은 밤에 사람들이 유공루에서 달구경 하리라’라는 마지막 구절에서 명확해진다.

‘유공루’란 중국 진(晉) 나라 때 호북성 총독 유량(庾亮)의 누각이란 뜻인데, 유량은 달 밝은 밤에 핵심 참모들과 함께 누각에 기대어 달구경을 하며 환담을 했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즉 ‘유공루’는 정도전이 이성계의 핵심 측근이 되기를 바라는 정몽주의 마음을 담은 비유라고 할 수 있다.

1383년(우왕 9) 가을에 정도전이 이성계 장군의 군막에 참여하게 된 것은 당연히 정몽주의 소개 때문이었다. 1383년 9월에 이성계가 승전보를 전하고자 개경에 왔을 때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소개를 부탁했고, 그 부탁에 따라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소개. 하지만 이성계는 개경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함흥으로 향했기에 정도전 역시 이성계를 따라 함흥으로 갔던 것이다. 그때 정몽주는 정도전이 이성계 군막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위의 시를 써줬던 것이다.

[삼봉집]에는 1383년 가을 이성계 장군을 따라 함흥으로 향하던 정도전의 속마음을 보여주는 시가 몇 수 실려 있다. 예컨대 ‘과고동주(過古東州)’라는 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장군 깃발 멀리 따라 동주를 지나가니(遠隨戎旆過東州)/ 나팔 소리 높은데 가을이 저무네(晝角聲高欲暮秋)/ 호화스러운 지난 역사를 물을 곳이 없는데(徃事奢華無處問)/ 찬 연기 시든 풀은 거친 들판에 얽혀 있네(冷煙衰草鎻荒丘)”

‘선(先) 혁명, 후(後) 추대’ 방식을 그리다


▎1970년 제2한강교 입구 녹지대에서 정몽주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위의 시에 언급된 ‘고동주’는 ‘옛 철원’이란 뜻인데,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웠던 태봉의 수도가 바로 철원이었다. 그 철원에서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세운 국가가 바로 고려였다. 장차 성리학 혁명을 통해 고려왕조를 뒤집어엎으려 결심한 정도전이 철원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철원을 이성계 장군의 부대를 뒤따라 들어가면서 정도전은 ‘호화스러운 지난 역사를 물을 곳이 없는데’라고 노래했다.

‘호화스러운 지난 역사’란 궁예의 태봉 시대를 지칭한다. 정도전은 찬란했던 태봉의 궁예가 어쩌다가 왕건에게 축출됐는지, 또 왕건은 어떻게 혁명에 성공했는지 궁예와 왕건에게 직접 묻고 싶었을 것이다. 혁명을 꿈꾸는 정도전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궁예와 왕건은 먼 과거의 인물이기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찬란했던 태봉의 역사도 찬 연기와 시든 풀로 덮인 거친 들판에 잠겼을 뿐이었다. 이런 역사의 현장을 보면서 정도전은 한때의 명리보다는 영원한 역사를 추구하는 삶이 진정 가치 있는 삶임을 또 한 번 마음속에서 되새겼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 성리학 혁명을 결심한 정도전은 왕건 방식의 혁명을 구상했을 듯하다. 주지하듯 왕건의 혁명은 왕건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 개국공신들이 주도했다. 그 개국공신들이 주동이 돼 먼저 군사혁명을 일으킨 후 왕건을 추대했다.

따라서 그런 역사를 잘 아는 정도전이 구상하는 성리학 혁명이란 자신이 중심이 돼 혁명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사혁명을 일으킨 후 이성계를 추대하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성계 장군을 따라 철원을 지나면서 그 같은 혁명 구상을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과고동주(過古東州)’라는 시를 노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정도전은 아직 이성계 장군의 신임을 확보한 상황이 아니었다. 단지 정몽주의 소개로 이성계 장군의 군막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즉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 장군의 수많은 참모 중 한 명일뿐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위의 시 첫 구절인 ‘장군 깃발 멀리 따라 동주를 지나가니’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정도전은 핵심 참모가 아니었기에 이성계 장군 가까이 있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성계 장군의 깃발을 멀리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함흥에 도착한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정도전이 함흥에 도착한 직후 이성계 군대의 호령이 엄숙하고 기강이 정제된 것을 보고는 이성계 장군에게 몰래 말하기를 “훌륭합니다.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했다 한다. 그러자 이성계 장군은 “무슨 말입니까”라고 물었고, 정도전은 “왜구를 동남방에서 물리친다는 말입니다”라고 얼버무렸다 한다. 정도전의 속셈은 이성계 군대라면 혁명도 문제없을 것이라는 뜻이었지만 그 속셈을 감추기 위해 왜구 격퇴로 얼버무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성계 장군은 그 같은 정도전의 속셈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당시 이성계 장군은 정도전을 잘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가 말하는 속뜻도 잘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함흥에 도착한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 장군의 신임을 확보하고 핵심 측근이 됐다. 수십 년 동안 이성계 장군을 괴롭히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면서부터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성계 장군은 호발도를 격퇴한 후 ‘동북면을 안정시킬 대책’ 즉 ‘안변책(安邊策)’을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안변책’은 비록 이성계 명의로 기록돼 있지만 실제는 정도전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이성계 장군이 ‘안변책’ 같은 글을 한문으로 직접 작성할 만한 실력이 안 된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그렇게 추정된다. 그런데도 [고려사]나 [태조실록]에서 그 ‘안변책’을 이성계 장군의 작품으로 기록한 이유는 제1차 왕자 난에서 정도전이 숙청된 이후 편찬됐기에 가능한 정도전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마침내 성리학 혁명 기반 다져

‘안변책’에 의하면 당시 동북면의 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공민왕 때 시행됐던 ‘군정(軍政) 체제’가 해체되고 그 대신 권문세족과 불교세력의 영향력이 급증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당시 동북면의 ‘군정 체제’를 해체한 세력은 당연히 권문세족과 불교세력이었다. 그들은 동북면도 고려 영토의 일부라는 논리를 내세워 군정 체제를 해체했고, 그런 논리로 이성계의 군사적, 행정적 기반을 해체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이성계 장군은 개경은 물론 동북면에서도 정치적·군사적 도전 세력들과 투쟁해야 하는 절박한 입장으로 내몰렸다. 이런 절박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이성계 장군의 정치적 부상에 따른 견제에서 나타났기에 그 해결책 역시 정치적 측면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 장군은 전쟁터에서는 명장이었을지 모르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숙맥과 같았다. 그런 이성계의 정치적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해결책을 정치적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안변책’이었다. 즉 ‘안변책’에서는 동북면이 위험해지면 개경도 위험해진다는 정치적 논리로서 동북면에 공민왕이 시행했던 군정을 다시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권문세족과 불교세력도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결국 정도전은 이성계의 정치적 부상을 경계하는 권문세족과 불교세력의 정치공세를 ‘동북면의 특수성’이라는 논리로 타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정도전의 정치적 논리를 이용해 이성계 장군은 동북면에서의 군사적·행정적 특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성계 장군은 정도전을 깊이 신임해 핵심 측근으로 삼게 됐다. 이성계의 핵심 측근이 된 정도전은 갑자년인 1384년(우왕 10) 이성계의 추천을 받아 복직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이 되기까지 했다. 지난 10여 년간의 정치적 몰락을 일거에 만회하는 화려한 부활이었다.

정도전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지은 ‘효일(曉日)’이라는 시를 이용해 이색을 포섭하려고도 했다. 그 시는 산동반도 앞의 ‘오호도(鳴呼島)’라는 곳에서 지었는데, 충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전횡(田橫)을 기리는 내용으로 다음과 같았다.

“새벽 해가 솟으니 바다가 온통 붉은데(曉日出海赤)/ 새벽 해는 곧바로 외로운 섬을 비추네(直照孤島中)/ 당신의 일편단심은(夫子一片心)/ 바로 이 새벽 해와 같구려(正與此日同)”

이 시를 본 이색은 “삼봉은 이윤(伊尹)의 뜻을 품어 뜻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다”고 논평했는데, 이윤 같은 혁명을 도모하는 정도전에게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만약 정도전이 전횡의 충절을 기린다면 그의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데, 오히려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새벽 해를 찬양했던 것이다. 그 새벽 해는 결국 혁명을 상징한다고 이해될 수 있었다.

정도전은 비록 이색을 포섭하는 데 실패했지만, 1388년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성계와 함께 정치 실권을 장악해 성리학 혁명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史)상 이성계와 정도전은 신라 역사를 불교시대로 이끈 법흥왕과 이차돈에 비견되는 역사적 위인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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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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