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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2)] 한양 연쇄 방화사건 수습 전말 

열흘 만에 ‘범(汎)부처 합동대책본부’를 꾸리다 

세종 8년 화적 출몰로 도성에서만 민가 2000여 채 소실
병조·공조·의금부·한성부 등 파견 관리들로 ‘금화도감’ 구성


▎2008년 2월 10일 서울 중구 숭례문에서 발생한 화재로 숭례문의 2층 누각이 흰 연기로 가득 덮여 있다.
갑자기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이때 서둘러 위기에서 탈출해야겠지만, 그런 상황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위기를 합리적으로 관리하는 능력은 리더십의 필수 구성요건이다.

화재는 오늘날에도 쉽사리 다루기 어려운 재난이다. 호주에선 지난해 9월부터 퍼져나간 산불로 지금까지 숲 840만㏊가 소실됐다고 한다. 남한 면적의 84%에 달한다. 불길을 막던 소방대원 1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런 비상시국에 호주 총리는 미국 하와이로 휴가를 떠났다가 자국 언론으로부터 호된 질타를 받기도 했다.

소방체계가 충분치 않았던 시절엔 화재가 더욱 위협적이었을 터였다. 세종 치세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종 8년(1426) 연쇄 방화사건이 일어나 2000채의 민가가 소실되면서 많은 인명 피해와 함께 강탈사건이 줄을 이었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역모를 꿈꾸는 사람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유례없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국정을 책임진 세종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부심했다. 화적의 발생은 연이은 흉년의 여파였으므로 여러 가지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우선은 이런 비상시국에 맞서 화적을 어떻게 퇴치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세종은 신하들의 지혜를 모았다.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은 중지를 모아 효과적인 대책을 만들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다. 세종은 화적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금화도감(禁火都監)의 체계적인 운영방안을 마련했다. 화재와 도적의 위협으로부터 서울을 방어할 수 있는 해결책인 셈이다.

병조를 앞세워 화적(火賊)과 겨루다


▎세종 8년(1426년) 2월 15일 점심께 도성에서 발생한 화재로 2000여 채의 민가가 타버렸다. 당시 행정구역인 5부(部) 가운데 중부에서 1630호, 남부에서 350호, 그리고 동부에서 190호가 소실됐다. / 사진:리움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세종 7년(1425) 1월 5일 이후 서울에 야기된 심각한 치안 난맥상을 기록했다. 이런 일은 보통 한성부가 맡는 법이지만 사안이 중대했기 때문에 병조(兵曹)가 나섰다. 그들이 왕에게 아뢨다. ‘도적들이 서울의 산에 본거지를 두고 도처에서 소와 말을 훔쳐 죽입니다. 도적들은 불법적으로 소나무를 도벌해 팔기도 합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병조는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했다. 방어군을 요소요소에 배치해서 수상한 사람을 불심 검문하자고 했다. 인력을 어떻게 배치할지는 실무자인 진무(鎭撫, 중견 무관)가 판단하되, 초소마다 방패(防牌, 방어군) 3명에 오원(五員, 초급 지휘자) 1명을 두자고 했다. 이 방법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서울이 도적으로 골머리를 앓는 일이 줄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이듬해(1426년) 2월 중순 춘궁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도적이 출몰했다. 정체불명의 화적떼가 서울에 나타나 부잣집에 불을 지르고, 물건을 약탈했다. 조정에서는 대응책 마련에 분주했다. 세종은 우선 화재의 진압에 초점을 두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세종은 도성의 신속한 화재 진압을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라며 다음과 같이 명했다.

“서울에 있는 행랑(行廊, 길게 늘어선 건물)에는 방화장(防火墻, 방화벽)을 쌓아라. 또, 성안의 도로를 넓혀 사방으로 통하게 하라. 궁궐이나 전곡(錢穀)을 보관하는 관청과 가까이 위치한 가옥은 사정을 감안해 철거하라. 행랑은 10간마다 우물 하나를 설치하고, 개인 집은 5간마다 우물을 파라. 아울러 관청마다 우물을 두 개씩 파서 소방수를 확보하라. 종묘·대궐 안 및 종루의 누문(樓門)에는 소방도구를 만들어 비치했다가, 화재가 일어나면 바로 달려가서 꺼라. 군인과 노비가 일하는 관청도 소방시설을 마련하고 인근에 화재가 발생하면 소속된 인원을 데리고 가서 화재를 진압하라.”(실록, 세종 8년 2월 20일)

요샛말로, 방화벽도 만들고 소방도로도 뚫고 소방수도 넉넉히 준비했다. 여기에 임시 소방대까지 조직한 셈이었다. 이쯤이면 화재 진압에 필요한 조치는 제법 규모를 갖췄다고 하겠다.

화적들은 공격목표를 정하면 갑자기 불을 질렀다.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화재감시 시스템을 만들었다. 즉, 주민들에게 밤낮으로 지붕 위에 올라가 화재를 감시하게 했다. 범인을 잡는 이에게는 현상금이 주어졌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세종은 화적을 체포하기 위한 보다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세종 8년 2월 25일, 병조에서는 화적을 체포하기 위한 세부 방침을 만들어 왕에게 보고했다. 세종은 병조의 계획을 검토한 뒤 즉각 시행을 명령했는데, 그 대강은 아래와 같았다(같은 날짜 실록 참조).

1. 서울 각 마을의 중심지에 모든 주민이 집집이 인원을 차출해 초소를 만들고 5명씩 교대로 지키며, 두 시간(更)마다 순관(巡官, 경찰)과 별순(別巡, 특별 경찰)이 검열한다.

1. 방화범을 체포한 양민에게는 관직을 내릴 것이며, 노비는 양민으로 신분도 올려주고 면포 200필을 지급한다.

1. 방화범이라도 자수하면 죄를 용서하며, 도둑들이 서로의 죄상을 고발할 경우에도 죄를 용서하고 면포 200필을 상으로 준다.

“화적 발생은 동전 사용 강요와 연관”


▎조선 태종 3년(1394)에 발행된 조선통보. 화폐가치 안정을 위해 발행된 동전이었지만, 기대했던 효과는 얻지 못했다.
치안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자면 다른 관청들의 협력도 필수적이다. 가장 먼저 대책을 마련해 왕의 요구에 반응한 것은 예조였다. 세종 8년 2월 25일. 예조판서 신상은 화적들의 처벌 수준을 높이자고 제안했다. 중국의 역사적 선례를 토대로 화적들을 반란자에 준하는 극형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세종은 당시 서울의 치안 상황을 일종의 국가비상사태로 보고 방화범에 대한 극형에 동의했다.

이어서 세종은 그해 2월 26일, 의정부와 육조의 신하들을 한 자리에 불러서 요샛말로 국가비상대책회의를 열었다. 도둑을 퇴치하고 화재를 진압할 최선의 방법을 누구든지 허심탄회하게 건의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회의에서는 여러 대신이 의견을 내놓았다 그들의 견해는 두 가지 주제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같은 날, 실록 참조).

첫째, 민심 수습이다. 좌의정 이원은 국법을 조금 완화해 동전의 사용을 백성들에게 강제하지 말자고 제안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동전의 사용을 의무로 정해두고 이를 어기는 이들을 엄하게 단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시기인 만큼 서울의 이재민들이 현물화폐를 마음껏 홀용, 의복·식량·목재 및 기와 등을 마음대로 구입할 수 있게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이조참판 성엄도 동전의 사용을 강요하면 백성들이 원한을 품게 되므로 금령을 풀어주자고 말했다.

동전 문제에 관해 대제학 변계량은 가장 광범위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개진했다. 그는 화적의 발생이 국가에서 동전의 사용을 강요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동전은 백성의 편의를 위해 도입한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로 인해 백성들이 국가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변계량은 백성들이 편의에 따라서 동전이든 현물이든 마음대로 사용하게 하자고 말했다. 세종은 신하들의 이러한 충고를 경청했다. 왕은 시간을 두고 숙고한 끝에 결국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했다(화폐 문제는 다음 기회에 별도로 다룰 예정).

그날 회의의 두 번째 주제는 금화도감이었다. 원로대신으로 영돈녕의 직책에 있던 유정현이 금화도감의 운영방안을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세종은 그 제안을 평가하면서 신속한 실행을 독려했다. 훌륭한 지도자는 정책을 식별하는 안목을 갖추게 마련이다. 유정현의 제안을 간단히 소개해 본다.

1. 한양에 도읍한 지 33년째지만 지금처럼 재난이 심한 적은 없었다. 사태의 핵심은 무뢰배들이 농업에 힘쓰지 않고 불을 질러 남의 재산을 도둑질하는 데 있다. 서울을 구역별로 나눠 금화도감(禁火都監)의 제조(提調, 고위 책임자)에게 1개의 부(部, 거주구역)를 맡기는 것이 옳다. 제조는 구역 주민 가운데 무위도식하는 수상한 사람들, 예컨대 밤이면 술을 마시고 낮에는 잠을 자는 등 행적이 의심스러운 사람을 파악해서 각 마을(各坊)의 색장(色掌, 책임자)에게 붙잡아오게 한다. 수상한 사람의 내력은 물론 그가 생활비로 사용하는 돈의 출처도 세밀히 추적해 조사한다면 도둑이 저절로 줄어들 것이다.

1. 외지에서 온 사람 중에 이렇다 할 생업이 없는데도 씀씀이가 큰 사람은 수상하다. 한성부에서는 집주인(主戶) 및 이웃 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관가에 고발하게 하며, 혹시라도 숨기고 고발하지 않는 자는 경우에는 법에 따라 처벌할 일이다.

1. 절도죄를 세 번 이상 저지르면 자자(刺字, 범죄 사실을 문신)하고, 사면된 경우라도 다시 조사해 경기도 밖으로 축출하며 그들의 행동거지를 엄히 사찰한다.

1. 성중에 연못을 조성해 물을 저장한다.

1. 소방수를 담은 독은 다섯 집마다 1개소씩으로 하고, 실제 저장했는지를 조사한다.

촘촘한 피드백으로 완성한 ‘금화도감’


▎1426년 화적 준동을 계기로 세종은 도성 내 소방 시스템을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2020년 개봉한 영화 [천문]의 한 장면. /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이미 결정된 사안이라면 빨리, 전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좋다. 세종의 기대에 부응해 이조는 금화도감의 운영 세칙을 당일로 제정했다(실록, 세종 8년 2월 26일). 담당관청인 이조가 세종에게 보고한 글이 남아 있다. 그들은 서두에서 도성 안에 화재 방지를 전담하는 기관이 없어,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지 못한 점을 개탄했다. 그리고는 금화도감의 관직을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맨 위에 제조(提調) 7명을 두고, 그 아래 사(使)를 5명, 부사(副使)와 판관(判官)은 각기 6명씩으로 정한다. 여기서 그 세부 내용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겠으나, 중요한 사실은 금화도감이 이제 하나의 상설기관이 됐다는 점이다. 또, 이 관청은 병조와 삼군부를 비롯해, 의금부, 공조 및 한성부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합동으로 운영한다는 사실이다. 여러 부서가 통합적으로 운영하는 금화도감이 제대로 가동되기만 하면 화적들이 발붙일 곳은 사라질 것으로 전망됐다. 세종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해 3월 3일, 금화도감은 운영 경험을 토대로 소방업무에 관해 몇 가지 구체적인 사항을 세종에게 보고했다(실록 기사 참조).

1. 소방관이 통행금지(人定) 시간 이후에 불이 난 장소로 달려가다가 경찰관(巡官)에게 제지당해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방관들에게 신패(信牌, 비표)를 지급해 밤중에 소화 작업을 할 때 문제가 없게 해야 합니다.

1. 화재가 발생하면 군인은 병조가 통솔하고, 관청의 종들은 한성부에서 지휘하는 것이 좋습니다.

1. 먼 곳에서 화재가 일어나거나, 깊은 밤의 화재사건이라서 제때 불을 끄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의금부에 명해 밤낮으로 종루(鍾樓)에서 사방을 감시하게 하고 화재가 발생하면 종을 쳐서 소리로 알려야 합니다.

이처럼 화적들의 소요를 계기로, 세종은 여러 신하의 중지를 모아 도성의 화재감시와 소방관의 출동업무에 관한 행동 지침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화적의 발생은 재난이었으나, 이를 극복하려는 세종의 강한 의지가 결국에는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문제 해결 방식으로 결실을 보았다고 평해도 좋겠다.

금화도감의 운영은 효과적이었다. 세종 8년 2월 28일 자실록에서 우리는, 다수의 화적이 체포돼 의금부에 갇힌 사실을 알 수 있다. 왕은 금화도감의 제조 하연에게 이 사건의 수사 경과를 물었다. 하연은 화적들의 출신지가 함길도(함경도)로 파악된다며, 정확히 말해 북청, 길주 및 영흥 출신이라고 대답했다.

한 달 만에 드러난 7인의 방화범


▎전통 복장을 한 소방대원들이 2006년 5월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소방학교에서 1890년대 궁중 소방대 훈련을 재현하고 있다.
세종은 피의자들 가운데 함길도 출신 두지와 귀생은 범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을 환기하며 엄정하고 정확한 수사를 당부했다. 과연 그들 두 사람은 범인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아마도 세종에게는 수사 속보를 보고하는 다른 계통이 있었던 것 같다.

세종은 도적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대신들과 함께 사건의 근본적인 이유를 따져 들어갔다. 왕은 중국 역사책에 나오는 기록을 인용하며 송나라 때에는 대화재 사건으로 5만7000여 호가 소실된 적이 있었지만, 한국의 역사에서는 이렇게 큰 불난리가 없었음을 상기시켰다. 형조 참판 고약해는 백성의 마음이 바르지 못해 이런 변고가 일어나는 법이라며 자신과 같은 대신들의 덕이 부족한 탓이라고 스스로 문책했다. 세종은 “나의 부덕(不德)이 가장 큰 문제”라며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백성의 고난은 지배층의 도덕적 결함에 기인한다는 유교 정신에 충실한 자기진단인 셈이다. 지도자의 도덕적 품성은 어느 시대나 요구되는 미덕이다.

세종 8년 3월 5일에도 화재가 일어나 서울 중부의 20호를 태웠다. 범인은 바로 체포됐고, 더는 서울에서는 화재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기승을 부리던 화적떼의 준동이 두어 달 만에 사실상 종료됐다.

사건 직후 체포된 화적 이영생과 장원만은 취조과정에서 의미 있는 정보를 제공했다. 일당인 송오막지와 김불자 등 6~7명이 배를 타고 교동과 강화 방면으로 나갔는데, 그들이 곧 불을 지르고 재물을 약탈할 계획이라는 것이다. 이 정보에 따라 조정에서는 현지의 군사를 동원해 그들을 모두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로부터 열흘쯤 지난 세종 8년 3월 15일, 의금부는 화적 사건을 일단 마무리했다. 체포된 방화범은 장원만 등 7명이었다. 종(奴)이 3명으로 진내, 근내, 석이였다. 백성도 3명인데 이영생, 김천용과 그 아비 김영기였다. 이 사람들은 재물을 노리고 도성의 부잣집에 닥치는 대로 불을 질러 2000여 호를 불태우고, 많은 인명피해를 일으킨 것이었다.

6명의 화적이 의금부의 취조를 거쳐 처형됐다. 세종 8년 6월 8일. 화적 여경이 환열(轘裂,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임) 당했다. 그달 6월 27일에는 또 다른 화적 종 벌응, 수이, 석을동 3인이 참형(목벰)을 받았다. 또한 7월 8일에도 화적 이금도를 능지처사(凌遲處死)했고, 9월 12일에는 화적 송오마지에게도 환열형을 집행했다. 요컨대 서울 화적사건으로 13명의 화적이 처벌됐다.

세종은 당초의 약속대로 화적의 체포에 공이 있는 백성들을 후하게 포상했다. 세종 8년 4월 13일 앞서 발생한 종루의 화재(그해 2월 16일) 때의 유공자인 봉상시의 종 흔장과 가각고(架閣庫)의 종 측금을 양민으로 올려줬고, 군기감의 영사(令史, 구실아치) 최훈 등 34인에게 면포를 상으로 줬다.

같은 해 6월 2일에도 이 사건에 공을 세운 사노(私奴) 도지를 비롯해, 장수(杖首) 이철, 제용감 권지직장(權知直長) 장의생과 마산역의 종 석구지에게 공적에 따른 상을 줬다. 또한 그해 6월 9일에는 내자시의 종 서인보에게 양민의 신분을 부여하고 면포 200필을 지급했다.

요컨대 40여 명의 관리·평민·노비가 화적 포상의 혜택을 입었다. 옛말에 ‘신상필벌(信賞必罰)’이라고 했다. 상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는 꼭 줘야 하고 죄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해야 기강이 서는 법이다. 세종은 화적 사건을 계기로 백성들이 국가를 더욱 믿고 따르게 되기를 바랐다.

혼란 틈타 변란을 꿈꾼 자들

혼란한 틈을 이용해 정치적 야망을 펼치려는 사람도 있었다. 세종 8년 3월 20일 의금부가 왕에게 아뢴 바에 따르면, 부사직 벼슬을 지낸 김용생이 문제의 인물이었다(아래는 같은 날의 실록을 참조). 그는 조선왕조가 망할 거라는 예언을 퍼뜨렸다. 즉, “종묘의 소나무에서 까마귀가 울고 하늘의 기후가 크게 변해 비가 쏟아지고 구름이 시커멓게 몰려오면, 그때 왕조가 바뀐다”고 했다.

김용생은 사적으로 원한이 깊은 병조판서 조말생과 곡산군 연사종을 해치려고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말생은 나라를 망치려고 때때로 사람을 시켜 무기를 불태운다. 또한 사종은 장군인데도 임금의 행차를 따르지 않고 서울에 남아 역모를 꾀한다.” 그는 이런 거짓 예언을 조작했다고 한다.

의금부는 김용생에게 난언(亂言) 죄와 무고(誣告)의 죄를 적용했다. 참형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는 것이 옳다고 했는데, 세종은 그대로 실시하라고 명했다.

수도 서울에서는 더는 화적이 날뛰지 못했다. 워낙 방비가 철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안이 느슨한 황해도 지방에서 강도떼가 들끓었다. 아마도 서울 사건의 잔당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세종 10년(1428) 윤4월10일 실록 기사를 보면, 강도들이 민가를 불사르고, 행상(行商)을 살해한 후 재물을 강탈했다. 그들의 무대는 상업이 활발한 재령과 평산 등지였다.

이후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대책을 세웠다. 같은 해 5월 6일, 병조를 통해 구체적인 해결방안이 마련됐다. 해당 지방관이 끝까지 도적을 추적하되, 상관인 감사와 절제사들도 휘하의 진무(鎭撫)를 출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때 진무는 필요한 군사를 스스로 뽑아도 된다고 했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황해도에 출몰하던 화적이 자취를 감췄다. 세상을 어지럽힌 화적들도 세종조의 조직적 대응에 무력화된 것이다.

※ 백승종 -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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