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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2부)] 태종 이방원, 불교개혁 돌입하다(7) 

절 242곳만 남기고 통폐합, 비보 사찰 재산 90% 몰수 

토지 9만결, 노비 8만 명 등 환수로 새 왕조 재정 튼튼해져
불교 왕국 유산 청산, 명실상부한 성리학의 나라로 탈바꿈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 태종 이방원(앞줄 가운데, 유동근 분)이 측근인 이숙번(왼쪽, 선동혁 분), 조영무(장항선 분) 등과 함께 궁궐로 들어오고 있다.
정도전과 조준 등은 우왕 14년(1388) 6월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실권을 장악하자 대대적인 국가 개혁에 돌입했다. 당시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개혁은 국방력 강화와 국가재정 확보였다.

정도전 등은 사전(私田)개혁과 함께 불교개혁을 통해 국방력도 강화하고 국가재정도 확보하고자 했다. 조준이 앞장서서 추진한 사전개혁은 비교적 손쉽게 성사됐지만, 불교개혁은 그렇지 않았다. 사전개혁은 권문세족의 대토지를 대상으로 했지만, 불교개혁은 백성들의 불교 신앙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고려가 불교국가였기에 대부분의 백성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고,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고려 말에는 총 1만3000개의 사찰이 있었고, 그 사찰에 20만여 결(結)의 토지와 10만여 노비 그리고 15만여 스님이 속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려 말 인구는 총 400만 정도, 경작 토지는 총 60만 결 정도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이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이렇게 엄청난 불교 사찰의 토지와 노비 그리고 스님들을 국가에서 몰수한다면 국가재정 확충과 국방력 강화는 손쉽게 성취될 수 있었다. 예컨대 사찰 노비 10만여 명, 스님 15만여 명 중 젊은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한다면 10만 병력을 너끈히 충원할 수 있었다. 또한 20만여 결 토지를 몰수해 세금을 거두면 수십만 석 군량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려 시대 불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태조 왕건을 비롯한 고려 왕실의 불교 신앙에 근거했다. 비보(裨補) 사찰을 창건하고 그 사찰에 토지와 노비를 공식적으로 지급한 대표자는 단연 왕실이었다. 고관대작과 백성들도 왕실을 따라 사찰을 창건하고 토지와 노비를 시주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 등이 추진할 수 있는 불교개혁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국가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는 3000여 비보 사찰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개혁이고 두 번째는 민간 시주로 운영되는 1만여 일반 사찰을 대상으로 하는 불교개혁이었다. 이 같은 불교개혁은 궁극적으로 불교 신앙과의 대결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보 사찰을 개혁하려면 왕실의 불교 신앙과 대결해야만 했고, 일반 사찰을 개혁하려면 백성의 불교 신앙과 대결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위화도회군을 주도한 이성계의 핵심 참모인 정도전·남은·조인옥 등은 새로운 이념과 가치관 즉 성리학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성리학의 이념과 가치관으로 왕실의 불교 신앙도 바꾸고 백성의 불교 신앙도 바꾸고자 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회군 직후 옹립한 창왕이 “요물고(料物庫)에 소속된 360개의 장(莊)과 처(處)의 토지 가운데 선대왕이 사찰에 시름없는 것은 모두 요물고로 환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한 것이었다.

‘요물고’란 왕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창고였다. 왕실에는 왕과 왕비를 비롯해 대비·후궁·왕녀·왕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에 360여 곳의 농장이 설치됐는데 그것이 바로 360여장과 처였다. 이들 장과 처는 각각이 거대한 규모의 농장이었으며 그 농장에는 수많은 노비가 있었다.

고려 시대 왕들은 태조 왕건 이래로 독실한 불자였기에 틈나는 대로 토지와 노비를 시주했다. 그렇게 시주한 토지 중에 요물고의 토지가 많았는데 이것을 환수하라는 것이 창왕의 명령이었다.

창왕의 명령으로 실제 환수된 요물고의 토지가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줄잡아서 수천 결의 토지가 환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상황에서 환수된 규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환수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것도 왕실에서 환수했다는 사실이었다.

왕실이 사찰에 시주했던 토지를 환수한다는 것은 사실상 왕실의 불교 신앙이 사라졌음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정도전 등은 창왕이 선대왕이 시주한 모든 토지를 환수하게 함으로써 이제 고려 왕실이 불교 신앙에서 벗어났음을 천명하고자 했을 듯하다.

정도전은 우선 창왕이 요물고 토지를 환수하게 한 후 다음 단계로 비보 사찰의 수조지(收租地)와 공노비를 환수하려 했을 것이다. 국가재정 확충이나 국방력 강화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그 정도는 환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창왕 즉위 년(1388) 12월에 조인 옥은 상소문을 올려 비보 사찰의 수조지 세금을 국가기관이 걷게 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수조권 환수의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조정 실권 장악

나아가 일부 신진사대부는 민간의 불교 신앙까지 부정하고 일반 사찰의 사유지와 사노비도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성균박사 김초였다. 그는 공양왕 3년(1391) 5월에 상소문을 올려 불교의 비보설(說)이나 천당·지옥설을 허무맹랑한 사기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해 국용으로 전용하고, 스님들과 노비들도 환속시키거나 군대에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이 상소문을 본 공양왕은 불열(不悅), 즉 기분 나빠했다고 한다. 공양왕은 불심이 깊었다. 이는 그 이전의 왕인 창왕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창왕이 요물고 토지를 환수하라고 명령한 것은 이성계 일파의 압력 때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이성계는 불교개혁에서 사전개혁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성계 본인이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 때문이었다. 불교개혁을 과감하게 추진하기에는 이성계의 불교 신앙이 너무 강했고 새로운 이념과 가치관이 약했다. 이런 이성계가 건재한 동안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가 추진하는 불교 개혁이 더는 진척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불교개혁은 사실상 정지되고 말았다.

그런데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재위 7년째인 1398년 8월 26일 밤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태상왕으로 밀려나고 정안군 이방원이 권력을 잡았다. 그때 정안군 이방원은 세자 방석을 비롯해 정도전과 남은 등도 살해했다. 그렇게 정도전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정안군 이방원은 형을 왕으로 옹립하고 자신은 세자가 됐다. 그리고 2년 후인 1400년에 마침내 왕이 됐는데, 그가 태종이었다. 태종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한국사에서 왕이 등장한 이래 과거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유일무이한 왕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한국사에 등장했던 왕 중에는 과거시험 1차에도 떨어질 만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왕은 혁명이나 세습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므로 과거시험을 볼 기회 자체가 없었지만, 만약 보았다면 떨어졌을 왕도 적지 않았다.

반면 태종은 정식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해 당당하게 합격한 유일무이한 왕이었다. 우왕 9년(1383)에 우현보와 이인민의 주관으로 개최된 과거시험에서 33명이 선발됐는데, 이방원은 10등으로 합격했다. 당시 이방원은 17세였고 진사 자격으로 과거에 응시해 합격했다.

태종이 과거시험을 준비할 때 공부한 것은 성리학이었다. 그 성리학으로 진사시험은 물론 최종 시험에도 합격했다.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어울린 사람들 역시 이수인 같은 신진 사대부였다. 이런 사실에서 고려 말 태종은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 간주할 수 있다.

태종은 젊은 시절 열심히 성리학을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실천에도 힘쓴 사람이었다. 태종은 25세 되던 공양왕 3년(1391)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무덤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려 했다. 불교가 횡횡하던 당시 시묘살이나 삼년상은 성리학을 공부한 극히 일부 사람들이나 하던 일이었다.

예컨대 정몽주나 정도전 같은 신진사대부들이 시묘살이와 삼년상을 실천했다. 그들은 공히 불교를 믿지 않았고 불교개혁을 주장했다. 태종 역시 정몽주나 정도전과 같은 입장이었다. 이런 태종이 왕이 되면서 불교개혁은 급물살을 탔다.

단식으로 맞불 놓은 태조 이성계


▎개성공단에서 12㎞쯤 떨어진 곳에 있는고려 시대의 사찰 영통사. 불교 천태종의 지원으로 2000년 완전히 복원됐다.
태종대(代) 불교개혁은 동왕 2년(1402) 4월의 서운관 상소문으로 촉발됐다. 서운관은 비보 사찰이 국가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태조 왕건이 창건한 70개 비보 사찰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혁파하고 토지와 노비는 몰수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3000개로 추산되던 비보 사찰 중에서 70개만 제외하자고 했는데, 이는 비보 사찰 전부를 없애자는 주장과 같았다. 이 제안대로 하면 3000비보 사찰에 소속된 10만 결의 수조지, 5만의 공노비에 더해 소유지와 사노비도 국가재정으로 전용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국가재정은 매우 튼튼해질 것이지만 불교는 크나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태종은 이 상소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의정부에 내려 논의하게 했다. 하지만 의정부에서는 이 제안이 너무 과격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불교개혁도 좋지만, 아직 민간의 불교 신앙이 강력한 상황에서 너무 급격하게 개혁을 밀어붙이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정부에서는 상당히 완화된 대안을 제시했다. 70개 이외에 상주하는 스님이 100명 이상의 거대 사찰도 존속시키자는 안이었다. 의정부는 100명 이상의 상주 스님을 보유한 거대 사찰을 함부로 폐지하려다가는 거대한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이렇게 제안했을 것이다.

태종은 의정부의 제안이 합리적이라 판단하고 그렇게 추진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태조 왕건이 창건한 70개의 비보 사찰 그리고 상주 스님 100명 이상의 거대 사찰을 제외한 모든 비보 사찰이 청산 대상에 들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모르나 2900개 내외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뒤이어 태종 2년(1402) 6월에는 예조에서 상소문을 올려 나이 젊은 남자 스님과 여자 스님은 모두 환속시키자고 제안했다. 또한 부녀자의 사찰 출입도 엄금하자고 했다. 이것은 비보 사찰은 물론 1만여 일반 사찰에도 크나큰 타격을 주기 위한 제안이었다.

당시 불교 신앙의 주류는 아무래도 남성보다는 여성이었다. 그 여성들을 절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면 절의 입장에서는 핵심 신도들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게다가 젊은 남자 스님과 여자 스님을 환속까지 시킨다면 모든 사찰이 조만간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계는 태종의 불교개혁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 방법은 태상왕 이성계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당시 이성계는 회암사에 머물렀고, 회암사에는 이성계가 존경하는 무학 대사가 있었다. 태종 2년(1402) 7월부터 이성계는 단식을 시작했다. 보름쯤 지나자 이성계의 얼굴은 수척해졌고 건강도 악화했다. 이런 소문을 들은 태종은 부랴부랴 회암사로 달려갔다. 만에 하나라도 이성계가 단식하다 사망한다면 자신은 아버지를 굶어 죽게 한 불효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이성계를 만나기 전 환관을 시켜 무학 대사에게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 말은 ‘내가 태상전께 잔치를 열어 드리고자 하는데 만약 태상왕께서 고기를 드시지 않는다면 장차 대사에게 허물을 돌리겠다’는 것이었다. 이로 보면 태종은 이성계의 단식을 무학 대사가 사주했기 때문이라 판단한 듯하다.

당시 태종은 비보 사찰의 토지와 노비 환수, 젊은 남자 스님과 여자 스님의 환속, 부녀자들의 사찰 출입 금지 등 불교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무학 대사가 이성계를 단식하게 했다는 의심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태종은 무학 대사에게 본인이 단식하게 했으니 책임지고 취소하게 하라고 압박했을 것이다. 허물을 돌리겠다는 말은 실패하면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태종의 협박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무학 대사는 실제 죽음의 공포를 느낀 듯하다. 태종의 전갈을 받은 무학 대사는 이성계를 찾아가 “상께서 고기를 드시지 않아 안색이 파리하고 야위어지십니다. 우리는 오로지 상께서 부처를 좋아하시는 은혜를 입어서 미천한 생을 편안히 지내는데, 지금 상의 안색이 파리하고 야위신 것을 보니, 우리들의 생이 오래지 않을 듯합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우리들의 생이 오래지 않을 듯하다”는 말은 태종에게 곧 죽임을 당할 것 같다는 뜻이었다. 이런 무학 대사의 말로 볼 때, 당시 이성계는 죽음을 각오하고 단식한 듯하다. 그런 단식을 그치게 하려면 이렇게 애걸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학 대사의 하소연에 이성계는 “왕이 나처럼 부처를 숭상한다면 내가 당연히 고기를 먹겠다”고 대꾸했다. 이 대답으로 보면 이성계의 단식은 태종의 불교개혁 때문임이 분명하다.

죽음의 공포 느낀 무학 대사, 태조 설득


▎고려 시대 대표적 불교 행사 중 하나인 팔관회의 재현 모습.
그 뒤의 대화가 더는 실리지 않았기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성계와 무학 대사는 서로 타협했을 것이다. 즉 태종의 불교개혁을 취소시킨다는 조건으로 이성계가 단식을 중지하기로 했을 듯하다. 이성계가 단식한 본래의 의도가 그것이기도 했다. 태종은 무학 대사로부터 불교개혁을 중지하면 단식을 중지하겠다는 이성계의 뜻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선택은 태종의 몫이었다. 이성계의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불교개혁을 중지하든가 아니면 이성계의 단식과 관계없이 불교개혁을 추진하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태종을 만난 이성계는 “무학 대사가 말하기를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면 후생에 반드시 머리 없는 벌레가 된다’고 하기에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왜 단식을 하는지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고 단식을 끊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즉 불교개혁을 중단하지 않으면 계속 단식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이틀 동안 고민한 태종은 다시 이성계를 만났다. 태종은 이성계에게 고기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이 예전 사람의 글을 보고 경연관의 말을 들어보니 ‘70세에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다’고 했는데 지금 부왕께서 왕사(王師)의 말을 들으시고 고기를 끊으시어 안색이 평일과 같지 않으시니, 신이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이성계는 “내가 왕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대사를 좇은 지가 이미 7년이 됐는데 어째서 한마디 말로 나를 가르침이 없는가?’ 하니, 왕사가 말하기를 ‘왕께서 지금부터 술과 고기를 끊으소서’라고 했다. 내가 이를 행하고자 하나, 술은 병이 있으니 끊을 수 없고, 다만 고기만 먹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뒤이어 이성계는 “네가 만일 불법을 신앙해 비록 도선 밀기에 수록되지 않은 사찰이라고 해도 그 토지를 모두 환급하고, 또 남자 스님과 여자 스님의 도첩을 조사하지 말며, 부녀자들의 사찰 출입을 금하지 말고, 또 불상과 탑을 세워 내 뜻을 잇는다면, 내가 비록 파계하더라도 대사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대개 불법은 고려 때도 오히려 폐하지 아니하고 오늘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관리들이 헐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요구에 이성계의 단식 이유가 함축돼 있었다.

실패할 것 같던 개혁, 한양 천도 후 ‘반전’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년 기념행사 때 재현된 한양 입성 어가 행렬.
이성계는 ‘네가 만일 불법을 신앙해’라고 했는데, 이는 불교를 믿으라는 강요였다. 또한 ‘[도선 밀기]에 수록되지 않은 사찰이라고 해도 그 토지를 모두 환급하고’라고 했는데, 이는 태조 왕건이 창건한 70개의 비보 사찰 그리고 상주 스님 100명 이상의 거대 사찰을 제외한 모든 비보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시도를 중지하라는 요구였다.

이외에도 부녀자들의 사찰 출입 금지, 불상과 탑 철거 등 태종이 추진하던 모든 불교개혁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요구는 결국 불교를 탄압하지 말라는 요구였고,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단식하다가 죽겠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이에 태종은 “신이 죽는 것도 감히 사양치 못하거늘, 하물며 이 일이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고는 곧 승지에게 태상왕의 말씀대로 시행하라 명령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왕의 정성이 이와 같고, 대소신료들이 또한 모두 간청하니, 내 감히 좇지 않겠는가”라며 고기를 들었다. 결국 태종은 이성계의 단식에 굴복해 불교개혁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태종 2년의 불교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조선이 창업되고 태종이 즉위한 이상 불교개혁은 더는 거스를 수 없는 사안이었다. 아무리 이성계가 막는다고 해도 양반 관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태종 3년(1403) 6월 사간원에서 불교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은 지난해의 서운관 상소문보다 훨씬 과격했다. 서운관은 태조 왕건이 창건한 70개 비보 사찰은 존속시키자고 했는데 사간원은 그것을 16개로 줄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지난해 태상왕 이성계는 70개 사찰에 더해 상주 스님 100명 이상의 거대 사찰을 제외하는 개혁안에도 단식으로 저항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강력한 불교개혁안을 시행하면 태상왕 이성계의 저항 역시 더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태종은 사간원의 상소문을 궐내에 머물러 두고 내리지도 않았다. 잠시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반전의 기회는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태종 5년(1405) 11월, 태종은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한양의 분위기는 개경과는 판이했다. 고려왕조 500년의 도읍지 개경에는 약 300개의 사찰이 있었다. 당연히 개경 시민들은 열렬한 불교 신도였다. 그런 개경에서 불교개혁을 추진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렇지만 한양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양에는 사찰도 별로 없었고, 백성들의 불교 신앙도 개경만큼 강하지 않았다. 불교개혁을 밀어붙이기 좋은 환경이었다.

태종이 한양으로 천도하고 채 보름도 되지 않아 의정부에서 상소문을 올려 불교개혁을 요구했다. 의정부의 불교개혁 요구는 일반 관료들의 요구와는 차원이 달랐다. 의정부는 양반 관료의 대표였기에 그들의 요구는 곧 양반 관료 전체의 요구와 같았다.

당시 영의정은 태종의 핵심 측근 하륜이었다. 하륜 역시 고려 말부터 불교개혁을 추진하던 신진사대부였다. 하륜은 이제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해 불교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을 듯하며, 사전에 태종과 사전협의도 있었을 듯하다.

일반 사찰도 대부분 폐허로 전락

의정부의 불교 개혁안은 기왕의 서운관과 사간원 안보다는 훨씬 포괄적이며 점진적이었지만 그만큼 현실적이었다. 우선 의정부의 개혁안은 비보 사찰만 대상으로 하지 않고 일반 사찰도 대상으로 했다.

그러므로 의정부의 개혁안은 불교 전반에 대한 개혁안이라 할 수 있다. 먼저 3000여 비보 사찰에 대해서는 종파별·지역별로 안배해 통폐합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하면 비보사찰의 반발과 지역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1만여 일반 사찰에 대해서는 군·현을 단위로 대표적인 지방 사찰 하나만 선정해 재정 지원을 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조선의 군현이 200여 개이므로 그 정도의 지방 사찰을 선정해 재정 지원을 함으로써 일반 사찰의 저항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태종은 의정부의 개혁안을 현실적이라 인정하고 그대로 시행하게 했다. 아울러 흥천사·회암사 등 조선 왕실의 원당(願堂) 15개를 추가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의정부에서는 3000비보 사찰과 1만 일반사찰 그리고 조선왕실 원당 15개를 대상으로 재정지원 대상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선정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불교계는 격렬하게 저항했다. 의정부 개혁안대로 하면 불교는 사망 선고를 받는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스님들이 날마다 의정부에 찾아와 선정 작업을 취소하라 요구했다고 한다. 그때 영의정 하륜이 일절 답하지 않자 조계사의 스님 성민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와서 신문고를 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태종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처럼 강력한 태종의 의지에 힘입어 선정 작업은 차질 없이 추진됐다. 그 결과는 태종 6년(1406) 3월 27일에 발표됐다. 당시 선정된 사찰은 총 242개였다. 이렇게 선정 사찰에 지원된 토지는 총 1만여 결, 노비는 총 5000여 명이었다.

이는 기왕의 3000비보 사찰에 지급된 토지 10만여 결, 노비 5만여 명보다 10분의 1 수준이었다. 선정에서 탈락한 비보 사찰은 대부분 폐허가 됐고 그 결과 임자 없는 사유지와 사노비가 속출했다. 그 결과로 몰수된 비보 사찰의 노비는 총 8만에 이르렀다. 이처럼 비보 사찰의 노비 8만과 토지 9만여 결이 환수됨으로써 국가재정은 충실하지만 불교계는 그만큼 위축됐다.

또한 태종은 부녀자의 사찰 출입 금지, 도첩제의 강화를 추진함으로써 일반 사찰에도 크나큰 타격을 입혔다. 태종의 불교개혁은 후계 왕들에게 계승돼 조선 시대 내내 추진됐다. 그 결과 일반 사찰도 대부분 폐허가 되는 운명을 맞았다. 비보 사찰이 거의 사라지고 뒤이어 일반 사찰 역시 대거 사라지면서 조선은 명실상부한 성리학의 나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태종은 한국사상 최대의 불교 개혁자인 동시에 최대의 성리학 옹호자였다고 하겠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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