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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의 세종 리더십과 부민(富民)의 길(3)] 조선은 전염병 대유행 어떻게 이겨냈나? 

‘천 가지 증상, 만 가지 처방’ 집대성하다 

집권 15년 만에 [향약집성방] 출간… 선진 의학지식 유통
지방 인력 중앙 파견교육으로 ‘한양 중심 의료체계’ 극복 노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여파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입춘을 하루 앞둔 2월 3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뉴시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문제로 세상이 요란하지만, 역사를 뒤돌아보면 문명의 전환기마다 전염병이 크게 창궐했다. 중세가 막을 내릴 때도 세계 곳곳에 흑사병의 공포가 만연했고, 대도시 중심의 현대사회가 열릴 때도 콜레라와 폐렴이 기승을 부렸다.

성리학 중심의 새로운 문명이 기지개를 켜던 세종 때도 전염병이 그게 유행했다. 실록에 따르면, 조선 건국 첫해인 1392년부터 세종 재위 마지막 해인 1450년까지 59년 동안 발생한 전염병 건수가 97건에 이른다. 매년 평균 1.64회 발병한 셈이다.

이로 인해 피해자가 속출했다. 일례로 세종 21년(1439) 윤2월 황해도 지방에서 발생한 악질(惡疾, 난치병)로 235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세종 25년(1443)에는 함길도(함경도) 지방에서 1~9월에 1752명이 질역(疾疫, 유행병)으로 사망했다는 장계가 올라온다.

당시 조선의 의료 수준으로 전염병 유행을 원천 차단할 순 없었다. 그러나 세종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백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왕은 병마와 맞서 싸울 대책을 마련했다.

전염병과 싸우는 오랜 과정에서 왕은 의료제도를 정비했다. 우수한 전문 인력도 양성했다. 또, 의약에 관한 조선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데도 성공했다. 물론 당시의 치료법으로는 전염병 자체를 물리치기 어려운 점도 있었으나, 세종이 만든 의료시설과 관련 법령,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데 역점을 둔 그의 통치 철학은 후세의 귀감이었다. 의료 분야야말로 세종의 통치철학과 리더십이 큰 족적을 남긴 영역이었다.

방역의 시작은 공무원 기강


▎물이 바짝 마른 백사장에서 거행되는 기우제.
15세기 조선의 기후는 불안정했다. 보통 같으면 추울 때 덥고, 더울 때 서늘한 냉기가 깊이 파고들었다.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소(小)빙하기의 전조였다. 그 때문에 흉년이 거듭돼 굶주리는 백성이 많았다.

나라 곡창을 열어 구휼할 수 없을 정도로 굶주림이 깊은 해엔 반드시 전염병이 돌았다. [향약집성방](1433) 등 당대 발행된 의서를 분석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리케치아균)를 통해 옮기는 발진티푸스와 분변에 오염된 물(살모넬라균)을 통해 옮기는 장티푸스가 주로 백성들을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욕설로도 쓰이는 ‘염병’은 바로 장티푸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세종 19년(1437) 2월 9일 자 실록은 전염병에 시달리는 민생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년에는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시냇물도 마르고 우물도 말라붙었다. 국가의 요충인 중부와 남부지방이 모두 흉작에 시달렸다.

겨울이 되자 혹한이 몰아쳤다. 서울의 마전포(삼전동)는 물살이 급해 평소는 한겨울이라도 강물이 얼지 않는데, 날씨가 워낙 추워서 꽁꽁 얼어붙었다. 무려 20여 일 동안 그랬다.

겨우내 나라 안에 굶어 죽은 백성의 시체가 즐비했다. 이어서 봄이 되자 역질(疫疾)이 유행했다. 영양이 부실한 사람들은 병에 걸리기만 하면 죽었다. 백성들은 애지중지 기른 소와 말을 도살했고, 나무껍질도 벗겨 먹었다. 밭에 심은 보리까지 파헤쳐 뿌리를 캐 먹을 정도였다. 가족을 부양하지 못해 식구를 버리고 도망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린 자녀들을 길에 버리고 달아나다가 아이들이 따라오면 나무에 묶어놓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이도 있었다.”

전염병이 횡행하자 관리들의 기강도 해이해졌다. 병에 걸릴까 봐서 출근을 거부하는 이들도 많았다(세종 6년 2월 4일). 왕은 법을 엄격히 집행해 그들의 기강을 점차 바로잡았다.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자 함부로 버려진 시체들도 많았다. 환자의 시신을 산속으로 가져다가 풀만 덮어 두거나 짚으로 싸서 나무에 매달아두는 이도 있었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족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해 산불에 훼손되거나 여우와 늑대가 뜯어 먹는 일도 벌어졌다(세종 5년 12월 20일).

서울 근교에서도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연달아 일어나자 세종은 한성부에 엄명을 내려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도와 시신을 반드시 매장하도록 했다(세종 9년 7월 9일).

왕의 강력한 의지를 반영해 개선책을 신속하게 마련했다. 세종 9년(1427) 7월 22일, 한성부의 건의에 따라 매장의 규칙을 정하고 어긴 사람은 최고 사형에 처하기로 했다. 이제 시신을 함부로 내버리지 못하게 됐다.

전염병이 창궐하자 남의 논밭을 가로채는 이들도 있었다. 전염병에 걸려 제때 경작을 하지 못하면 ‘이것은 주인 없는 땅’이라면서 빼앗아가는 경우가 있었다. 세종은 가난한 백성의 생계를 위협하는 이러한 행위를 중대한 범죄로 인식하고 법을 마련해 보호했다.

“특별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남의 전답을 경작한 경우에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5년 이내로 주인에게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세종 3년 1월 19일)

애써 백성을 보호하고, 즐거움도 슬픔도 그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왕의 책무였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조선의 국왕으로서, 세종은 전염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일단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왕은 피해 규모를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뒀다. 또, 구제 요령을 법으로 정해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관리가 나오지 않게 했다. 궁지로 내몰린 백성이 안타까워 모든 백성에게 약방문을 직접 알려주려고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전염병에 걸린 가족을 성심껏 간호한 효자, 효부 또는 열녀를 찾아내 표창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전염병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왕의 뜻이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됐다.

“노비라도 다 나은 뒤에 일 시켜라”


▎실록에 따르면 12~1월 이상난동과 함께 전염병이 찾아오는 경우가 잦았다. 지난 1월 6일 대구 수성못 인근에 핀 개나리. / 사진:연합뉴스
백성에게 약을 보낸 이야기부터 해보자. 의료 체계가 미비했던 세종 초년의 일이었는데, 왕은 전염병이 유행하자 일종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지방관들은 환자의 치료에 노력하라. 만일 노력이 부족하면 많은 사람이 젊은 나이에도 죽고 말 것이다. 내가 이를 매우 안쓰럽게 여기노라.”(세종 1년, 5월 1일)

그러면서 향소산(香蘇散), 십신탕(十神湯),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 소시호탕(小柴胡湯) 등의 약을 여러 관찰사에게 나눠줬다. 향소산은 보통 감기약으로 사용한다. 전염병의 초기에 사용할 수 있는 약이었을 것이다. 또, 십신탕은 두통과 오한을 물리치는 효과가 있다. 승마갈근탕은 고열과 두통에 듣는 약으로 홍역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끝으로, 소시호탕은 오한과 구토에 쓰는 약이다. 세종이 이런 약을 각지로 내려보냈는데, 시골에는 믿을만한 의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의료기관이 지방에도 갖춰지자 왕은 효과가 있다는 약방문을 기록해 백성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성혜방(聖惠方)이었는데, 열병을 치료하는 한약의 제조방법을 기록한 것이었다.

환자의 철저한 관리에도 왕은 관심을 가졌다. 서울의 환자들은 자신이 담당 관리들을 독려해 지휘할 수 있었으나 지방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지방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각 지방의 관리들은 성의를 다해 환자를 치료해,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게 하라.”(세종 2년 3월 28일)는 왕의 명령은 일회적인 것도 아니었고 형식적인 발언은 더더욱 아니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하늘의 뜻을 전하는 신령한 존재이다. 이것이 성리학의 가르침이었던 만큼 세종에게는 전염병의 구제야말로 국가의 책임이었다. 그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할 때마다 왕은 신하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숙의했다. 그 가운데 효과적인 조치들이 하나둘씩 법으로 정착됐다. 왕이 재위한 지 10여 년이 지나자 관련 법규가 상당히 충실해졌다.

그리해 전염병이 유행하면 세종은 부디 조정에서 정한 법대로 실천하라고 지방관들에게 주문했다. “올해는 전염병이 더욱 심하므로 (중략) 일찍이 내가 정한 여러 해 동안의 조항을 자세히 살펴라. 병든 백성을 치료해 꼭 살리도록 마음을 다하라”는 식이었다(세종 14년 4월 21일). 지방관이 전염병에 대처하는 방법은 [육전(六典)]에 모두 실려 있었다(세종 16년 6월 5일).

물론 왕은 관리들이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지도 따졌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 서울의 시내 곳곳을 살펴보게 한 일도 있었다. 더러는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 보고를 사실대로 하지 않는 관리들도 있었다.

세종 18년(1436) 1월 15일의 실록에 보면, 함길도(함경도)의 피해 상황에 관한 신하들의 보고가 크게 엇갈렸다. 찬성사 하경복은 현지에서 보고하기를, 전염병으로 사망한 백성이 전체 인구 8만 명의 절반도 넘는다고 했다. 왕은 조수량을 함길도에 보내 사실 여부를 철저히 조사했다.

넉 달 뒤 조수량은 사망자 총수가 3262명에 그쳤다고 보고했다. 대신들은 허위보고를 올린 하경복을 엄벌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은 그를 관직에서 쫓아내는 데 그쳤다. 이전에 15년간이나 변방에서 고생하며 백성을 보살핀 공적을 고려한 것이었다(세종 18년 5월 12일). 신하의 잘못을 따질 때조차 세종은 그가 혹시 과거에 잘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렸다. 그의 조정에서는 신하들이 억울하게 큰 벌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밖에도 왕은 전염병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도 부단히 했다. 재위 초기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으나 전염병에 관한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 세종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영양도 부실한 백성이 날씨가 추울 때 비위생적인 곳에 집단거주하며 육체노동에 종사한다면 전염병이 발생하기 쉽다는 것이었다(세종 12년 12월 5일). 이후 왕은 춘궁기에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았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할 점이 있다. 전염병이 유행할 때 세종이 가장 걱정한 것은 최하계층인 노비들의 안위였다. 그들에 대한 왕의 배려는 특별했다. “공노비와 사노비를 막론하고 그들이 두진(痘疹, 모든 발진성 질환)이나 전염병에 걸렸을 경우는 병세가 심하지 않더라도 완전히 다 나은 뒤라야 일을 시키라. 병이 다시 도져서 목숨을 잃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세종 16년 갑인(1434) 1월 19일).” 왕은 형조에 이런 특별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의지할 곳이 없는 노비들을 위해 스스로 부모의 역할을 떠맡은 거였다.

그런데 전염병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을 줄이는 데는 가족의 충실한 간호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재위 기간 중 세종은 가족을 구완하는 데 정성을 쏟은 효자, 효부 및 열녀를 발굴해 표창했다. 충청도 천안의 전직 관리 진원달과 영동의 관리 정소 및 서울의 선비 복숭로가 그러했다. 왕은 그들의 효행을 칭찬하고 관직에 임용했다(세종 16년 2월 3일).

지방·계급 등 의료 사각지대 발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에서 묘사한 의원 풍경. 조선 초 지방 의생으로 토관(土官, 지역 출신 관리)을 임명해야 할 만큼 인력 수급이 어려웠다. / 사진 : 넷플릭스
이처럼 세종은 실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전염병을 조기에 물리치고자 노력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바로 의료제도의 정비였다. 세종은 의료 사각지대를 없애려 했다. 당시 핵심 의료기관인 삼의사(三醫司, 전의감·혜민국·제생원)는 왕실과 도성의 환자를 맡는 데 그쳤다.

어느 지방이든 유능한 의원이 필요했으므로, 세종은 지방 의생(醫生)의 교육에 주목했다. 왕은 예조와 논의해, 각지의 의원과 의생들이 오직 본업에 집중하게 했다. 또 해마다 각도에서 유능한 의생을 2~3명씩 선발해 전의감과 혜민국에 보내도록 해 전문 교육을 받게 했다(세종 9년 11월 2일). 한편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 제주도에는 의학 서적을 보내어 의학 생도가 전문지식을 쌓도록 도왔다(세종 11년 1월 29일).

지방의 군사시설이나 도서지방에도 의원을 배치했다. 세종 16년(1434) 5월 이후의 일이었다. 심지어 옥에 갇힌 죄수들의 건강까지도 세종은 염려했다. 섬에 의원을 파견하는 일은 별로 효과가 없어 수년 만에 중지했으나, 각지의 의료기관이 내실을 갖춘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작업의 결과, 세종 20년경이 되면 서울과 지방 모두 의원의 근무평정과 승진에 관한 법규가 완비됐다.

세종 대 지방에 배치된 의생의 정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세조 12년(1466) 기록을 통해 대략의 규모를 추정할 수 있다. 지방행정 단위의 크기순으로 부(府)는 10명, 대도호부(大都護府)와 목(牧)은 8명, 도호부·군(郡)·현(縣)은 6명이다. [경국대전]에 나온 지방 행정조직의 수를 기준으로 하면, 지방 의생의 총합은 2038명에 달한다.

중앙 기관의 의녀처럼 훈련받은 지원인력까지 갖추긴 어려웠을 것이다. 세종은 대신 환자 보호에 유능한 지역의 무녀(巫女)를 동원했다. 세종 6년(1424) 전국 각도에 전염병이 창궐했을 당시 세종은 지역의 무녀(巫女)들을 시켜 환자가 먹을 죽을 끓이고, 병상을 살피도록 했다.

전염병이 강해질 기미를 보이면 왕은 대책 마련에 고심했다. 왕명으로 한성부를 비롯해 동서활인원(活人院)·전의감·혜민국·제생원 등 관련 부처가 치료 방법을 공동으로 논의했고, 장차 사용할 약재도 미리 준비했다(세종 15년 6월 15일). 전염병이 심한 곳에는 서울의 우수한 의원을 파견해 현지의 의생들을 지도하게 했다. 세종 23년(1441) 1월 14일, 황해도에서 큰 업적을 이룬 이복이란 의원은 왕에게서 옷 한 벌을 상으로 받았다.

의료제도를 정비할 때 세종은 일반 백성과 천민의 구제를 우선으로 삼았다. 그러자 관리들이 역차별을 받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세종 14년(1432) 7월 30일, 성균관 사성(종3품) 김최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아들딸도 둘이 죽었고 노비들도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법에 명시된 규정이 없어서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평민이 전염병으로 죽으면 장례를 돕는 법이 있었으나 관리를 도울 방법은 아직 부재했다. 왕은 이 문제를 즉각 처리했고, 그다음 달에는 전직과 현직을 망라해 3품 이하의 관리가 병을 앓으면 의원을 보내어 치료하게 했다.

세종은 누구라도 최소한의 의료 및 복지 혜택을 기대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여러 가지 현실적 제약 때문에 한계는 분명히 있었겠지만, 왕은 결코 포기할 줄 몰랐다.

'향약집성방', 15년 노력의 결실


▎지난해 5월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서 열린 왕실 내의원 체험행사에서 어린이들이 전통 의관복장을 갖춰 입은 한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다.
왕은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핵심은 의원의 질을 높이고 의학 지식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것이었다. 그에 관한 세종의 노력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의원의 전문 지식을 강화하는 문제, 여성 의료인인 의녀를 양성하는 문제, 그리고 조선의 실정에 알맞은 의학 전문서적을 편찬하는 문제이다. 왕은 실용을 추구하며 모든 문제를 하나씩 극복했다.

먼저 의학 전문지식에 관한 것부터 알아보자. 즉위 초부터 왕은 의원의 자질을 향상하려고 한문으로 된 의학 서적을 학습하게 했다(세종 3년 4월 8일) 특기할 점은 의녀에게도 그러한 학습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실이다(세종 5년 3월 17일). 의녀들은 제생원에 출근해 전문서적을 공부하고, 환자를 진료했으며, 침과 뜸(針灸)도 시술했다(세종 16년 7월 25일).

왕은 우수한 의원을 선발해 중국에 가서 새로운 지식도 습득하고, 약재도 매입하고, 전문서적도 사게 했다. 세종 7년부터 의생을 뽑아 중국에 가는 사신 편에 보냈다. 요샛말로 단기 유학인 셈이었는데 효과가 매우 컸다. 결과적으로 유능한 의원이 갈수록 많아졌다. 세종이 기른 고명한 의원으로는 양홍달을 비롯해 조청, 박윤덕, 노중례가 유명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직접 만든 의학 서적이 간행됐다! 세종 15년(1433) 6월 11일, 실록은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 완성을 알렸다. 집현전 학사 권채가 쓴 서문을 보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세종의 명령으로 수년간 의원들이 북경에 가서 서적을 널리 구하고, 또 명나라의 대의원(大醫院)에서 최고의 전문가들과 약초에 관해 노중례 등이 토의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 책은 총 959가지 증세를 기술하고, 1만706가지 처방전을 수록했다. 침구법도 1476조를 언급했으며, 조선에서 자라는 약초(鄕藥本草)의 특징과 약제법까지 기록했다. 무려 85권의 거질이었는데, 편찬 과정에서 노중례와 박윤덕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이 책을 간행하기에 앞서 왕명에 따라 국내에 자생하는 약초를 조사해 [향약채취월령]을 편찬했다. 그 사본이 왜란 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직 남아 있다.

세종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노중례와 박윤덕 등을 독려해 [의방유취](266권 264책)도 완성했다(세종 27년, 1445). 중국에서 간행된 의학 서적을 총망라해 키워드 중심으로 정리한 방대한 의학 백과사전이었다. 돌이켜 보면 세종이 즉위할 무렵 조선은 의학의 황무지나 다름없었는데 불과 20여 년 만에 굴지의 의학 강대국이 됐다. 이것은 세종의 지도 아래 일어난 지식혁명이었다..

세종은 무려 600년 전인 15세기의 지도자였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부족한 점도 있었다. 그 당시의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이 많았기 때문에, 때로 세종은 미신적인 전통에 의존했다.

절절한 시대정신이었던 ‘민본(民本)’


▎세종 15년(1433) 세종의 명에 의해 전의감 노중례 등이 편찬한 의학서 [향약집성방]. 향약이란 ‘조선에서 생산되는 약’이란 뜻이다. / 사진:연합뉴스
한번은 서울에서 전염병으로 457명이 사망했다. 그때 동서 활인원에는 1000여 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었다. 사태가 심각했기에 좌찬성 황보인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자고 제안했다. 숙고 끝에 세종은 이를 수용했다(세종 29년 5월 1일). 의학적으로 효험을 기대하기 어려웠으나 백성의 마음을 위로하는 방편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염병과의 대결이 오래 이어지자 왕의 질병 관리 능력은 크게 향상됐다. 재위 20여 년이 되자 왕은 이 분야에도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경험 많은 왕의 한 마디가 귓전에 남아 있다.

“만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죽게 하면 죄를 물을 것이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세종 26년 3월 16일)

우수한 의약 전문가를 양성한 결과, 왕의 자신감도 강해진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현장에 투입할 우수한 인력이 다수 확보됐으니 말이다. 세종은 재위 중에 의료 체계를 완비했는데, 그 시기 세계 여러 나라의 의학 수준과 비교해보면 혁명적이라 하겠다. 국가가 의원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전국 어디든 의료시설을 갖춘 것 하며, 신분과 계층 및 젠더를 초월한 의료복지를 구현한 점은 대단한 쾌거였다. 세종에게는 국가의 근본이 백성이라는 투철한 신념이 있어서, 민본이란 두 글자는 허망한 지적 허영심의 표현이 아니라 당대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느 시대라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지만 이해관계가 뒤얽힌 복잡한 현실 속에서도 세종과 같은 지도자는 무에서 유를 이룬다.

※ 백승종- 역사가이자 역사칼럼니스트. 전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튀빙겐대 대학원에서 한국학과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튀빙겐대 한국학과 교수를 비롯해 서강대 사학과 교수, 경희대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로 있다. 저서로 [상속의 역사]와 [신사와 선비] 등 20여 종이 있으며, 2012년 한국출판평론학술상과 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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