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이성우의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 이야기(3)] 청와대 자리는 명당(明堂)일까 

“터 자체가 문제” vs “사람의 문제일 뿐 

대통령 재임 시는 물론 퇴임 후로도 하나같이 불행했다는 평가
8·15 광복 이후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 도약 반론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자리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 / 사진 : 이성우
"명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땅의 기운이다. 하지만 땅을 가진 자들의 탐욕은 끝이 없으니 이제 운명을 바꾸는 명당의 힘은 그들만의 것인가?”

영화 [명당]의 도입부에 나오는 내레이션이다. 영화 [명당]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이 경기도 연천에 썼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지사(地師)의 조언에 따라 천하의 명당 터라는 충남 예산 가야산 자락의 현 위치로 이장했다는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 내용을 모티브로 제작된 영화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하응은 “예산군 덕산면 대덕사의 탑이 있는 자리는 그 귀함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큰 길지”라는 지사의 말을 듣고 주지에게 돈 1만 냥을 주는 대신 절을 불태우도록 했다. 지사가 정해준 자리에 있던 탑을 헐고 보니 터가 모두 암석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암석을 파내고 관을 묻은 후 나중에 누가 옮길까 염려해 수만 근의 쇠를 녹여 붓고 사토(莎土)했다고 기록됐다.

그 덕분인지 고종 5(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 등에 의해 남연군의 묘지가 파헤쳐졌으나 묘광(墓壙)이 워낙 견고한 나머지 도굴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조상 숭배사상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그것도 임금의 조부이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격노했고, 이는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과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화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김병학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따르면 남연군의 묘는 헌종 12(1846)년 최종적으로 이장이 완료됐다. 흥선대원군의 차남인 이재황이 고종(재위: 1863~1907년)에 등극한 것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후다.

상산역사문화연구회장 김기석이 2012년 발간한 [내포에 핀 연꽃 가야산의 절터들]에 의하면 이철환이 영조29(1753)년 충청도 가야산 일대를 4개월여 동안 유람하고 남겼다는 기록인 [상산삼매(象山三昧)]의 내용을 근거로 탑의 자리에 있었던 절은 묘암사였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있다. 또 현재도 진행 중인 남연군 묘역 주변 지역의 발굴 조사 명칭은 ‘예산 가야사지 문화재 발굴 조사 현황’이다. 그 터가 옛 가야사(伽倻寺)의 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사찰의 위치나 명칭에는 이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보면 [매천야록]에서 언급한 지사의 말이 틀리지는 않은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명당은 있는 것인가.

도서관은 한자로 ‘圖書館’이라고 쓰며, 책을 모아놓은 건물이라는 뜻이다. 도서관이라는 단어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단어다. 동양철학은 [주역]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는데 이 하도와 낙서가 주역 원리의 기본이 됐다는 것이다.

[주역]은 중국 복희씨 때 황하(黃河)에서 용마가 지고 나왔다는 하도와 거북이 등의 무늬였던 낙서를 읽었던 연원이다. 태극에서 출발한 이진법의 음양론은 사상(四象)이 되고, 다시 팔괘(八卦)가 되고, 팔괘가 두 번 겹쳐져 64괘를 낳는다.

풍수의 기원은 '주역'으로부터


▎천하제일복지 각자 바위. 실제로는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천하/제일/복지로 구분돼 각자됐다. / 사진 : 이성우
그 당시 하도와 낙서는 고귀하고 신령스러운 것으로 신성시됐으며, 세상 만물의 이치를 담고 있다고 해 왕실의 많은 보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귀중한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에 하도와 낙서도 함께 보관했는데 이 장소를 도서관이라 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이러한 주역의 기본 이론은 의학·풍수·정치·명리학 등 여러 분야로 발전해 왔으며, 풍수지리도 이러한 주역을 바탕으로 했다. 풍수지리란 땅의 성격·형태·방위 등을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함으로써 좋은 터전을 찾는 이론이다. 풍수는 장풍득수(藏風得水)란 말을 줄인 것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바람은 감추고(숨기고) 물은 얻는다’는 의미다. 장(藏)이라는 단어에는 곳간이나 광이라는 의미도 있어 바람을 가둔다는 뜻도 있다고 보인다.

우리나라의 경우 계절풍의 영향을 받다 보니 북쪽으로 산이나 구릉이 있다면 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 찬바람을 잘 막아줄 것이다. 따라서 집과 논밭은 햇볕이 잘 드는 남쪽을 향해 앉히되 농사를 짓기 쉽도록 가까이에 물줄기가 있는 장소, 즉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라면 풍수지리적으로 괜찮은 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우리 조상들은 땅도 살아 있는 생명체로, 인간과 마찬가지로 기(氣)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좋은 기가 모여 있는 땅에 도읍을 정하거나 집을 지으면 나라가 오래 번성하거나 대를 이어 잘살게 되고, 훌륭한 자손도 많이 나온다고 봤다.

이러한 풍수사상은 삼국시대부터 민간에 뿌리내렸던 토속신앙에서 비롯돼 현재의 풍수지리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이 대세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 제4대 왕인 탈해왕(脫解王)이 집터를 잘 잡아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말여초(羅末麗初)에는 풍수지리 사상이 국가 왕실에까지 지배적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특히 개성 일대나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고려의 왕사(王師)인 도선국사(道詵國師)나 조선의 왕사인 무학대사(無學大師) 등은 당대 풍수지리의 대가였다.

이후 풍수지리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조상을 복지(福地)에 편안히 모시려는 풍수지리적 동기에 후손들의 부귀영화에 대한 염원까지 더해졌다. 그러다 보니 왕실이나 사대부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도 널리 퍼지게 되면서 완전히 정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풍수지리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공간, 즉 주거지와 관련된 입지는 양택(陽宅), 죽은 사람을 위한 공간, 즉 묘지와 관련된 입지는 음택(陰宅)으로 구분한다.

우리 속담에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다. 잘되면 내 탓이란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일해서’의 의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집터는 좋은지, 대문이나 창문의 방향은 어떤지, 지붕·벽지·가구의 색상은 나하고 맞는지 등등 이런 것들까지 신경 써서 노력한 결과가 좋다면 다 내 탓에 해당하는 것이 되며, 이는 양택풍수가 저변에 깔렸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못되면 조상 탓이란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집 한 채는 고사하고, 시골에 밭 한 뙈기도 물려받지 못했다는 원망과 이는 조상의 묏자리가 시답지 않아서 자기 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음택풍수를 염두에 둔 말이라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조상의 묏자리를 잘 쓰면 그 조상으로부터 좋은 기운이 후손에게 나타나서 가문을 번창시키고 재산을 일으킨다고 생각해 명당에 묘를 쓰고자 노력했다.

조선시대 왕실도 예외는 아니다. 수도를 옮기는 것을 천도(遷都)라고 한다면 능을 옮기는 것은 천릉(遷陵)이라고 한다. 사는 곳을 다른 데로 옮기는 것을 이사(移徙)라고 한다면 산소를 옮기는 것은 이장(移葬)이라고 하겠다.

천릉은 지금의 태스크 포스와 같은 천릉도감(遷陵都監)이라는 기구를 설치해 진행했다. 통상 천릉을 하게 되는 이유로는 지금의 능 터가 풍수지리상 흉지(凶地)로 밝혀진 경우, 천재지변으로 능 터가 파괴돼 복구가 불가능한 경우, 먼저 모셨던 능 터에 새로 모시게 되는 왕이나 왕비를 합장할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조를 보면 태종 10(1410)년 9월 22일 천릉도감에서 덕릉(德陵)·안릉(安陵)의 천장(遷葬)하는 제도를 아뢰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덕릉은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 이안사의 능호이며, 안릉은 목종의 비 효공왕후(孝恭王后)의 능호다. 당시 덕릉과 안릉은 경원부(慶源府) 공주(孔州, 함경북도 경원)에 있었는데 여진족의 잦은 침입으로 골머리를 앓다 함흥부(咸興府) 의흥부(義興部,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장했다.

한양 정도(定都) 때부터 시작된 논쟁


▎[북궐후원도형] 중 천하제일복지 각자 바위와 복지천. 대통령경호실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2007년) 60~61면 재편집. / 사진 : 이성우
태종 10(1410)년 4월 15일 실록 내용을 보면 ‘경원에 부(府)를 둔 것은 능실(陵室) 때문이다. 여진족들 때문에 능을 옮기고 부를 옮기려 한다’고 함으로써 천릉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실록에서 확인되는 천릉은 10번 정도 되는데, 이 밖에도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경술국치 이후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현재에 이르렀으나, 여전히 많은 사람이 풍수지리에 근거를 둔 가장 좋은 땅, 즉 ‘명당’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그런 곳을 찾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뿐만 아니라 웬만한 일반인들도 사업을 번창하게 해준다거나 액을 막아주고 좋은 기운을 준다는 명당을 찾아서 집을 짓거나 묘를 쓴다. 또 역대 대통령 중에도 부모나 조상의 묘를 이장한 후 승승장구했거나 대통령이 됐다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청와대는 구중궁궐이다. 대통령이 되기만 하면 소통이 잘 안 된다. 그것은 대통령의 집무지역과 비서동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그렇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건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청와대는 대통령 경호처와 비서실 및 영빈관을 아우르는 지역과 청와대 본관 및 관저를 아우르는 지역, 크게 두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지금도 두 권역은 담장으로 분리돼 있으며, 청와대 방문객이 춘추관을 지나 녹지원으로 들어가는 초입이 두 권역이 나뉘는 분기점이다.

필자가 근무하기 시작한 1980년대 후반만 해도 청와대 지역은 겹겹이 통제되는 철책과 철조망으로 구분돼 있었다. 그 때문에 청와대 본관에 가려면 출입증을 바꿔야 하는 부서들도 있었고, 몇 개의 출입권역을 지나야만 출입이 가능하기도 했다. 이러한 철책과 철조망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점진적으로 철거돼 나가기는 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도 남아 있는 지역이 더러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이야기다. 노 대통령이 취임 후 어느 날 구(舊) 본관 터와 관저 주변 지역을 둘러보다 이런 말을 했다. “여기 설치돼 있는 철책과 철조망만 걷어서 팔아도 엿을 많이 바꿔 먹을 수 있겠네!” 소통의 물리적 제한을 에둘러 이야기한 것이리라. 그 후 이 지역의 철책과 철조망도 다 없어졌다. 그러나 철책과 철조망이 없어졌다고 소통이 잘되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2017년 4월,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통령후보는 “대통령 집무실을 지금의 청와대에서 광화문 정부청사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발표하면서 소통의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하지만 2019년 1월 3일 유흥준 대통령 광화문 시대 자문위원은 청와대 춘추관에서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몇 가지 이유를 들며 대통령 집무실의 광화문 이전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장기적 과제로 남긴다고 발표했다. 유 위원과 기자들의 질의응답 내용을 들어보면 한 가지 눈에 띄는 게 있다. “풍수상의 불길한 점, 수많은 풍수상의 근거로, 풍수상 근거가 있다면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과연 풍수상의 근거가 무엇이었기에 청와대를 옮기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 하나로 언급했을까? 정말 풍수상 근거가 있기는 한 걸까?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계획할 때부터 경복궁의 입지에 관한 풍수 논쟁은 줄곧 있었다. 태조는 최윤·윤신달·유한우 등 서운관(書雲觀) 소속 지관들과 자초(自超, 무학대사)·하륜 등을 대동하고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여러 장소를 물색한 후 한양을 도읍으로 결정했다. 10개월의 공사를 거쳐 태조 4(1395)년 9월 경복궁이 완공됐으나 정종은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경으로 환도했으며, 이후 보위를 물려받은 태종도 경복궁이 아닌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즉위했다.

6년 후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재천도하지만 경복궁 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6년간 비어 있던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하지 않고 창덕궁을 새로 지어서 이어했다.

태종실록에는 태종이 창덕궁을 짓기 1년쯤 전인 태종 4(1404)년 10월 4일 한양과 무악 중 어느 곳이 도읍으로 정할 만한 곳인지 논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기록을 보면 태종은 조준·하륜 등 대신들과 당대 최고의 풍수사 이양달·윤신달 등을 부른 후 “내가 지리서를 보니 ‘먼저 물을 보고 다음에 산을 보라’고 했다. 만약 지리서를 참고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참고한다면 이곳은 물이 없는 땅이니 도읍이 불가한 것은 분명하다. 그대들이 모두 지리를 아는데, 처음 태상왕(이성계)을 따라 도읍을 정할 때 어찌 이 까닭을 말하지 아니했는가?”

태종은 이렇게 얘기하면서 이곳(경복궁) 터를 잘못 잡았음을 질책하고 있다. 경복궁의 명당 여부에 관한 논의는 세종대에 와서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그러다 보니 임금이 직접 백악산에 올라가서 산세를 살펴보는 일까지도 생길 정도였다. 실록에서는 성종대까지도 논의하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통해 풍수사들에 따라 명당 터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하제일복지’가 새겨진 바위의 발견


▎현재는 어정(御井)으로 불리는 천하제일복지천과 청와대 불상. / 사진 : 국가기록원(이성우 제공)
그러나 실록에서 청와대 지역의 풍수와 관련된 별도의 논쟁 기록은 찾기 어렵다. 청와대 지역은 조선 후기 고종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경복궁의 후원 지역으로 포함됐으며, 그 이전인 철종 당시까지는 경복궁 궁장(宮墻) 바깥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백악산의 돌을 채취하지 않도록 병조에 지시했다’는 세종실록 13(1431)년 3월 19일 자 기록이나 ‘궁성 북쪽 주산의 내맥이 행인의 통로가 됨이 마땅치 못하므로, 담을 쌓아 막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라며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는 세종 15(1433)년 7월 21일 자 기록처럼 지맥 보호 차원에서 내리는 여러 가지 조치 내용은 확인 가능하다.

대일 항쟁기 조선총독의 관저가 지어지고, 일본이 패망한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조선총독의 관저를 그대로 이어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하면서 청와대 지역의 풍수 관련 논쟁이 간간이 언급된 적은 있다. 그렇지만 본격적인 논쟁은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본관과 관저를 분리해 새로 짓게 되면서부터였을 것이다.

1989년 8월 말 시작한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장 바로 뒤에서 1990년 2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각자(刻字)된 바위가 발견됐다. 당시 [경향신문]은 ‘청와대 구내 대통령 관저 신축공사장 바로 뒤에서 가로 250㎝, 세로 120㎝ 크기의 거대한 바위가 발견됐으며, 이 바위에는 해서체로 천하제일복지라는 글씨와 함께 낙관 자리에는 연릉오거(延陵吳据)라는 이름이 새겨 있었다. 금석학의 권위자인 임창순 옹을 초청해 감정해 본 결과 이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300~400년 전 조선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글씨체는 중국 청대(淸代)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기록했다.

같은 해 10월 29일 자 [서울신문]에서는 ‘천하제일복지’ 각자는 중국 남송(南宋) 시대에 살았던 본관(本貫)이 연릉인 ‘오거’라는 사람의 글씨를 집자(集子)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오거의 글씨 가운데 ‘천하제일복지’라고 쓴 것은 없으나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고 쓴 대형 횡액(橫額)은 지금의 중국 남경(南京) 부근 명승지 진강 어귀에 있는 금산사(金山寺)에 남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천하제일’은 금산사의 글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복지’라는 글은 오거의 글씨가 있는 서첩이나 비문 글씨 등에서 두 글자를 찾아 넣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언론은 이 바위가 관저 공사를 하면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청와대 경비를 담당하던 근무자들은 공개적으로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이 바위의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바위에 글씨를 새긴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신문]의 의견처럼 여러 가지 정황을 봐 ‘150여 년쯤’ 전에 새겼고, 추정 오차를 20∼30년으로 본다면 글씨를 새긴 시기는 1860년대로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1865~1868년)하면서 청와대 지역이 경복궁의 후원 구역으로 포함된 시기다. 그렇다면 ‘천하제일복지’ 바위는 이 지역을 고종 임금의 휴식을 위한 장소로 조성하면서 당시에 새롭게 새긴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300~400년 전 청와대 일대를 둘러본 누군가가 이곳을 제일가는 명당·길지(吉地)로 여겨서 바위에 새겨 놓았든, 150여 년 전 흥선대원군의 뜻에 따라 새로 후원 구역으로 조성한 청와대 지역 전체가 명당이나 길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바위에 글씨를 새겨 놓았든 글자 그대로만 놓고 해석한다면 ‘이곳은 좋은 땅이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1990년 새롭게 대통령의 관저를 건립했지만 청와대가 ‘흉지다, 아니다’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흉지론(論)을 펴는 이들은 역대 대통령들이 재직 중이나 퇴임 후 하나같이 험난한 길을 걸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흉지론자들은 이를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청와대 터가 경복궁과 달리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절한 터가 아니기 때문이라거나, 북악산은 바위가 크고 많아 살기가 강한 산인데 청와대가 북악산의 살기를 직접 받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청와대 터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흉지론과 길지론의 실체


▎가까이서 본 천하제일복지천. 대통령경호실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2007년) 85면 전재(轉載). / 사진 : 이성우
반면에 청와대 길지론을 펴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청와대를 거쳐간 주인들의 삶이 결과적으로 봤을 때 순탄하지 않았던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결과들이 청와대의 터가 문제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최고 권력자들의 불행은 대통령 및 그 측근 등과 관련된 정치 시스템상의 문제로, 개인들의 욕심이 화를 자초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현재의 청와대는 고려시대에도 궁터였을 만큼 명당 자리이고 국가적으로도 광복 이후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거듭날 만큼 국가의 기운은 융성한데 땅이 무슨 문제냐는 주장이다.

천하제일복지 바위 근처에는‘천하제일복지천(天下第一福地泉)’도 있다. 대통령 관저 뒤에 ‘천하제일복지’라는 각자뿐만 아니라 ‘천하제일복지천’이라는 샘도 있는 것이다. 이샘은 천하제일복지 각자가 있는 바위의 아래와 대통령 관저 뒤쪽 사이에 있는데, 1907년쯤 만든 [궁궐지]에는 ‘천하제복지천’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기록상 ‘천하제일복지천’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북궐후원도형]에 따르면 10칸 규모의 오운각, 1칸 규모의 정자인 옥련정 사이에 천하제일복지 각자 바위, 그리고 그 아래 3단으로 된 계단 사이에 잘 정비된 천하제일복지천이 그려져 있다. 이 샘에서 나온 물은 인공 수조 두 곳을 거쳐 서쪽 계곡으로 흘러가도록 했다. 이 샘은 원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경복궁 중건 당시 신무문 밖에 궁장을 두르고 후원을 조성한 후 오운각 권역을 조성할 때 함께 정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사진(사진 1)은 필자에 의해 최초로 공개되는 사진일 것이다. 경복궁 후원 조성 당시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대통령 관저 공사 이전인 1966년의 사진이라 대일 항쟁기 이후의 형태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샘 왼쪽으로 보이는 3단 계단은 최초 조성 당시의 형태가 어떠했을지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샘의 뒤쪽으로 보이는 불상은 왜성대 총독관저에서 옮겨온 불상의 최초 위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불상도 대통령 관저를 새로 지으면서 위치를 변경했다.

대통령 관저는 대통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전용 공간이다. 대통령 관저는 6공화국 초기까지도 대통령 집무실과 구분되지 않은 채 구 본관 건물의 2층이 사용됐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은 아침이면 관저인 2층에서 본관인 1층으로 출근했다가 저녁에 일과가 종료되고 나면 다시 관저인 2층으로 퇴근했다.

재택근무의 선구자였던 대통령들


▎1990년 10월 건립된 대통령 관저. 대통령경호실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2007년) 80면 전재. / 사진 : 이성우
본관과 관저를 연결하는 계단에는 2개의 셔터가 있다. 셔터를 내리면 본관과 관저가 분리되고 셔터를 올리면 본관과 관저가 연결되는 형태였다. 2층 셔터 버튼은 2층 안쪽에, 1층 셔터 버튼은 1층 바깥쪽에 있다. 2층 셔터가 내려오는 것이 확인되면 1층 셔터도 내린다.

어떻게 보면 당시의 대통령들은 출퇴근 동선이 가장 짧은 재택근무의 ‘선구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구 본관은 대통령의 공적·사적 생활공간의 구분이 어려웠고, 공간 또한 협소해 외빈 접대 등에도 어려움이 따랐다.

노태우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한 첫날 늦은 저녁이었다. 1층 셔터 쪽에서 근무하던 필자에게 “여보게, 여보게, 거기 근무자 있나” 하는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층 계단 쪽에서 나는 소리이기에 “말씀하십시오”라고 했더니 대통령은 “이 문은 어떻게 여는 건가”라고 물었다.

직감적으로 대통령이 셔터 버튼을 잘못 누르는 바람에 셔터문과 셔터문 사이에 갇혔다고 판단됐다. 얼른 다른 쪽 통로를 통해 2층 셔터문을 열어 드렸지만, 사용법을 잘 몰랐던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 첫날의 해프닝이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구 본관 뒤편에 새 관저 건물을 짓게 됐는데 공사는 1989년 8월 28일 시작해 1990년 10월 25일 마무리됐다. 관저는 주거 공간의 기능을 최대한 살렸다. 또 우리의 기술과 자재를 사용하는 한편 자연환경에 가장 잘 순응할 수 있는 우리의 전통 건축양식도 도입했다.

생활공간인 본채와 접견 행사 공간인 별채를 배치하고 앞 마당에는 우리나라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를 만들었다. 대문인 인수문(仁壽門)은 대통령 관저의 정문으로 전통 한옥의 분위기에 맞도록 삼문으로 꾸몄다. 인수문이란 ‘이 문을 사용하는 사람은 어질고 인덕이 많으며 장수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공사를 하면서 관저 자리에 있었던 침류각·오운정·석조여래좌상 등은 경내의 다른 곳으로 각각 이전됐다.

※ 이성우 - 전 청와대 안전본부장.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용인대에서 경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통령경호실에서 25년간 근무했다. 2007년 발간된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대표 저자이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같은 해 ‘대한민국 문화유산상’ 문화재청장 감사패를 받았다. 현재 [청와대와 주변 역사·문화유산] 개정판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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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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