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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 중앙아시아 ‘중세 300년’ 호령한 예맥 칸국 

750명 유민(遺民)으로 시작한 ‘고구려 굴기(屈起)’ 

옛 고구려 출신 7개 부족 규합해 카자흐스탄 일대에서 건국... 창업주 ‘샤드 토톡’, 연개소문 차남 남건(男建)의 후손?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알타이(Altay) 지구의 한 카자흐족 노인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 사진:Xinhua/연합뉴스
지난 호에서 필자는 오늘날 ‘모든 튀르크인의 선조’라 불리는 오구즈(Oguz) 칸의 계보를 살폈다. 오구즈칸에게는 24명의 손자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24개의 튀르크 부족을 이뤘다. 이들 부족 가운데 일부는 오스만 튀르크와 셀주크 튀르크처럼 제국으로 발돋움한다.

그런데 오구즈 칸의 위 항렬로 올라가면 고구려 왕가의 흔적이 발견된다. 그의 증조부로 기록돼 있는 알라일리 칸(Alaili Han)은 고구려 을지왕(乙支王)의 튀르크식 이름일 가능성을 지난 호에서 밝힌 바 있다. 튀르크 사서인 [튀르크 멘의 계보]에 따르면, 오구즈 칸의 고향 역시 “캉글리(고구려), 키타이(거란), 주르체(여진)에 가까운 모골 땅”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흔적은 비단 오구즈 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그의 5촌 당숙에 해당하는 인물은 오늘날 카지흐스탄 이르티시 강 일대에 연원한 부족국가를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743년 세워진 뒤 300여 년간 존속된 ‘키멕 칸국(Kimek Khanate)’이 그것이다.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접경에 있는 키르기스스탄에서부터 카스피 해 북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북부까지 영향력이 미친 것으로 알려진 나라다.

페르시아 사서가 전하는 건국 신화


▎러시아 옴스크(Omsk)주의 주도(州都) 옴스크시를 가로지르는 이르티시 강의 겨울 풍경. 키멕 칸국의 젖줄 역할을 했다. / 사진:REUTERS/연합뉴스
페르시아 사서에 따르면, 키멕 칸국의 창업주는 ‘타타르 칸의 둘째 아들 샤드 토톡(Shad Tutuk)’으로 기록돼 있다. 1061년에 세상을 떠난 페르시아 역사가 가르디지(Gardizi)는 자신의 저서 [소식의 장식(ZainalAkhbar)]에서 샤드 토톡의 행보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인) 타타르(Tatar) 칸이 죽고 형이 통치권을 쥐자, 이를 시기한 아우 샤드(Shad)가 형을 죽이려 했다. 모반이 실패하자 그는 사랑하는 시녀를 데리고 큰 강물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다. 나중엔 타타르의 친척 7명, 즉 이미(Yimi)·예막(Yemak)·타타르(Tatar)·바얀디르(Bayander)·킵차크(Kypchak)·라니카즈(Lanikaz)·아질라드(Ajilad)가 그곳으로 갔다.

샤드의 시녀가 그들에게 ‘에르 투시(Er tush)’, 곧 ‘서라’라고 소리쳤다. 이후 그 말이 강물의 이름 이르티시(Irtush)가 됐다.

눈이 녹자 (…) 그들은 타타르의 군영으로 사람 한 명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지역은 폐허가 돼 있었고, 백성도 없었다. 적이 와서 약탈하고 모든 백성을 죽인 것이었다. 남은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와 이 사람과 함께 (…) 이르티시로 향했다. (…) 750명이 모여 (…) 그들은 7명의 이름을 따라 7개 부족을 이뤘다.”

이르티시 강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북부 알타이 산맥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그보다 북쪽 지방인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서시베리아 일대로 흐른다.

주목할 점은 샤드가 ‘예막’ ‘타타르’ 등과 함께 나라를 이뤘다는 대목이다. 가르디지와 동시대를 살았던 카시가리 마흐무드(Kâşgarlı Mahmud)는 저서 [튀르크어 대사전(Divânu Lügati’t-Türk)]에서 키멕칸국을 가리켜 페르시아-아랍 표음문자로 ‘예맥(Yemek)’으로 기록한다. 그렇다. 언뜻 봐도 고구려의 지배 종족이었던 예맥(濊貊)과 발음이 비슷하다.

물론 두 낱말의 발음이 비슷하다 해서 지칭하는 대상도 같다고 단정할 순 없다. 실제 오늘날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역사서에선 ‘Kimek’란 명칭이 더 많이 쓰인다. 우연의 일치로만 봐야 할까?

그러나 이 문제는 아랍-페르시아어 철자법을 알면 답이 풀린다. 예컨대 ‘키멕은 예맥으로 불린다’고 하는 말을 페르시아어로 쓰면 ‘Kimak ra Yimak miguyand’이다. 이 문장을 다시 아랍-페르시아 문자로 쓰면 ‘ نیوگ یم کمی ار کمیک ’다. 알파벳으로 풀어 쓰면 ‘dnayugim kamiY ar kamiK’다. 아랍-페르시아어는 오늘날 우리말과 달리 거꾸로(오른쪽에서 왼쪽) 쓰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중요한 낱말인 ‘예맥( کامیا )’은 손으로 쓰면 ‘예( یای )’가 ‘키( یک )’로 읽히기 쉽다. 필체에 따라 ‘예맥( کامیا )’을 ‘키멕( کمیک )’으로 읽기 쉽다는 이야기다.

동로마 사료에서 발견하는 고구려


▎11세기 역사서 [튀르크어 사전]에 수록된 세계지도. 당대 튀르크인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사료다. / 사진 : 위키피디아
또 아랍-페르시아 표음문자로 적힌 이 ‘예맥( کامیا )’ 부족은 ‘타타르’ 종족과 한 집단을 이루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필자는 지난 호에서 고구려 관칭인 대대로(大對盧)가 중앙아시아에선 ‘타타르’로 불렸을 가능성을 확인한 바 있다. [튀르크멘 계보]에는 ‘타타르 8칸’의 이름들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 ‘대대로 개소문(蓋蘇文)’ 가문의 후손 8명의 계보와 대칭을 이룬다.

중국 사서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대목이 나온다. 1053년 송나라의 역사가 구양수가 펴낸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도 “타타르(達靼, 달달)는 말갈의 남은 씨앗(靺鞨之遺種)이다. 원래 (…) 어떤 것은 발해에 속했다”는 말이 나온다. 달달(達靼)은 발해, 곧 ‘말갈’의 후손 또는 친족이라는 이야기이다. [신오대사]는 중국 당나라가 멸망한 901년부터 송나라가 세워진 979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예맥 칸국’은 키멕 칸국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또 이 나라의 창업주는 고구려의 대대로 가문의 후손으로 볼 수 있는 정황도 확인된다. 처음에는 7개밖에 안 되는 씨족 연합체로 출발한 이 나라는, 점차 아랍과 페르시아, 그리고 파키스탄과 인도에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성장한다.

고대 종족이 고향으로부터 수만 리를 이동해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이 가능할까? 오늘날 우리는 현대에 와서야 유럽과 동아시아가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동로마제국 시대 역사서를 보면 놀랍게도 고구려가 모습을 드러낸다. 6~7세기 그리스인 역사가였던 테오필락투스 시모카테스(Theophilacte Simocatte)는 [모리스 황제의 역사]를 저술한다.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모리스(582~602)에게 진상한 책이다. 이 책 7권 7장을 보면, 당시 유럽 동부에 출몰한 ‘아바르(Avar) 족’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들은 555년 내부 반란으로 멸망한 몽골계 유목국가 유연(柔然) 칸국의 잔당이다.

테오필락투스 시모카테스는 책에서 ‘(아바르) 카간이 동로마 제국과의 싸움에 패배해 타우가스트(Taugast)의 이웃 나라인 무크리(Mukri)로 도망했다’고 서술했다. 시모카테스는 또 ‘무크리’에 대해 ‘항상 위험 속에 살아서 평생 군사훈련을 했기 때문에 매우 호전적인 나라’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무크리는 다름 아닌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다. 산스크리트(Sanscrit)-당(唐)어 소사전인 [범당잡어(梵唐雜語)]에서 “고구려는 무구리이다(高句麗曰 畝俱理)”라는 대목이 나온다. 당나라 때 고구려는 이미 오늘날의 인도·아프가니스탄·이란 등지에서 ‘무크리’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런 기록으로 미뤄볼 때, 고구려는 600년대 초 이미 강력한 동방국가로 동로마에까지 그 존재가 알려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고구려도 존속 800여년 만인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했다. 그로부터 약 75년이 지난 743년경, 카자흐스탄 이르티시 강 지역에서 새로운 칸국이 세워졌다.

7개 부족이 공유했던 튀르크어


▎중국 허난성 뤄양시 근교에 있는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석 앞·뒷면.
예맥 칸국은 오늘날 카자흐스탄 국사에서 그 이름이 등장할 뿐, 한국 사람에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예맥 칸국이 존립하던 시기, 주변국의 역사가들이 이 나라의 위치와 언어, 사회경제·정치 체제에 관해 조금씩 기록을 남겼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앞서 소개한 카시가리 마흐무드(1008~1105)다. 그는 오늘날 중국-인도 접경지대인 카슈가르 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카라한 칸국(Kaahanid Dynasty, 840~1211)의 왕자이기도 했다. 카라한 칸국은 위구르 제국(745∼840)이 멸망한 뒤 살아남은 튀르크족이 세운 나라다. 카라한 칸국은 튀르크족이 세운 최초의 이슬람 국가로도 유명하다.

카시가리는 1072~2077년 사이 이라크에 머물면서 [튀르크어 대사전]을 저술했다. 이 책에는 당대 왕조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등장한다. 지도를 통해 카시카리는 예맥 칸국이 자신의 고향 카라한(카시가르)의 북방, 곧 오늘날 카자흐스탄 이르티시 강 주변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지도에서 예맥 칸국의 영역은 ‘타타르’ ‘바스밀’ ‘킵차크’로 표시돼 있다. 예맥이 7개 부족의 연합국가라는 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또 지도를 보면 오늘날 동아시아 3국의 위치도 대략 확인할 수 있다. ‘타타르’ ‘바스밀’ ‘킵차크’에서 오늘날 몽골인 ‘외투켄’을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마신(Masin)’이 바로 중국이다. 당시 ‘마진(摩震, 곧 西震)’으로 불렸다. 마신 바로 옆에는 ‘자이르카(Jairka)’라는 나라가 보인다. 바로 왕건이 세운 고려다. 고려를 몽골-만주어 식으로 부르면 ‘솔고(Solgo)’인데, 이를 다시 카라한 조 튀르크어로 바꿔 부르면 자이르카가 된다. 동쪽 바다에는 후대 서양 여행가들이 보통 ‘자판(Japan)’이라고 기록한 ‘자푸(Jafu)’, 곧 일본이 보인다.

이밖에 멀리 서쪽으로는 오늘날 아랍지역 샴(시리아), 미스르(이집트), 이스칸데르(알렉산드리아), 또 남서쪽으로는 파르스(페르시아·이란), 호라산(이란 북동부와 우즈베키스탄 남부), 그 옆으로는 신드(파키스탄·인도)가 보인다.

이렇게 11세기 중앙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그린 세계지도에서 예맥 칸국 역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시가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타타르’와 ‘예맥’ 언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이들의 언어가 자신의 나라에서 쓰는 튀르크어와 가깝다고 말한다.

“사막 백성들은 각각 다른 말을 쓰지만, 튀르크어를 잘 안다. 카이(Kay)·야바쿠(Yabaku)·타타르(Tatar)·바스밀(Basmıl) 부족도 그렇다.

킵차크(Kıpçak)·오구즈(Oğuz)·토크스(Toxsı)·야그마(Yağma) 부족은 참된 튀르크어 한 언어만 쓴다. 예맥인들(Yemekler)과 바시기르트인들(Başgırtlar)의 말들은 이것들과 가깝다. (…) 언어들 중 가장 쉬운 건 오구즈인(Oğuzlar)의 말이다.”

예맥 건국 신화의 재구성


▎지난해 4월 투르크메니스탄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차량이 수도 아시가바트에서 기마대의 호위를 받으며 대통령궁으로 향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그렇다면 창업주 샤드 토톡은 과연 우리 역사에서 누구였을까?

‘타타르’, 곧 ‘대대로’ 개소문(蓋蘇文) 가문의 역사를 짚으면 그 윤곽이 드러난다. ‘타타르 칸의 아들 샤드’ 역시 고구려 대대로 가문의 일원일 가능성에 주목하고자 한다.

개소문의 세 아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당나라에 저항한 둘째아들 남건(男建)이 샤드의 직계 조상일 가능성이 크다. 2005년 중국 허난(河南)성 뤄양(落陽)시에서 발굴한 장남 남생의 묘비를 보면 아우 남건의 행적도 대략 확인할 수 있다. 남건은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당의 포로가 됐다가 금주(黔州)로 유배 갔다. 오늘날 티베트 남쪽 운남 지방에 해당한다. 이후 그의 행방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한문 사서에 적히지 않은 남건 가문의 이야기는 오직 페르시아 가르디지가 쓴 ‘타타르 칸의 아들 샤드’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남생의 묘비에 적힌 이야기를 가르디지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유사성이 보인다. 괄호 속 내용이 가르디지의 기록에 대한 필자의 풀이다.

“타타르 칸(*대대로 개소문)이 죽고 형(*남생)이 통치권을 쥐자 아우 샤드( *남건)가 이를 시기해 형을 죽이려 했다(*형남생이 이끄는 당군에 저항하여 형과 당군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하고(*전쟁에 져서) 그는 사랑하는 시녀를 데리고 큰 강물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다(*남건은 포로로 잡혀 당나라로 유배를 갔다가 카자흐스탄 이르티시 강으로 탈출한다).

그러자 나중에 타타르의 친척 7명, 즉 이미·예막·타타르·바얀디르·킵차크·라니카즈·아질라드가 그곳으로 갔다.

눈이 녹자 그들은 타타르의 군영(*본국 고구려)으로 사람 한 명을 보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한 지역은 폐허가 돼 있었고, 백성도 없었다. (…) 남은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와 이 사람과 함께 (…) 이르티시로 향했다.”

샤드토톡을 찾아온 부족 이름들을 보면 ‘예막’ ‘타타르’ ‘바얀다르’ ‘킵차크’ ‘이미’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타타르 샤드의 친족들이다. 이 5개 부족 가운데 우선 ‘예막(Yemak)’은 고구려 ‘예맥(濊貊)’이다.

[튀르크멘의 족보]는 오구즈 칸이 이란과 미스르(이집트)로 원정할 때 데려간 ‘칼-라치’인을 기록하고 있다. 본대에서 뒤쳐져 왔기에 오구즈 칸이 ‘왜 뒤쳐졌냐?’고 물었더니, 이들 부족은 ‘식량이 모자라 굶주려 그랬다’고 답했다. 그래서 오구즈 칸은 ‘남아서(칼-) 굶어라(아치)’ 라는 뜻으로 그 이름을 줬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들의 뿌리는 ‘아이막(Aymak, 예맥) 일(il, 백성)’이라고 기록돼 있다.

다음은 샤드 자신이 속한 타타르 종족인데, 이는 오구즈 칸의 큰할아버지 타타르의 후손 지파다.

바얀디르는 오구즈 칸의 넷째 아들 괵 칸(K’ok Han)의 아들인 바얀디르(Bayandir)의 후손 종족이다.

킵차크는 정체는 [사국사]에 등장한다. 이 사서에 따르면, 오구즈 칸의 군사 하나가 전사한 지휘관의 아들을 자기 양자로 삼고 ‘킵차크(Kipchak)’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전사자의 아내가 말라비틀어져 구멍이 뚫린 나무 ‘쿠복(kubok)’, 즉 고목(枯木) 안에 들어가 아들을 낳았다는 데서 기원한 이름이다.

이미는 오구즈 칸의 다섯째 아들 탁 칸(Tag Han)의 아들 이미르(Imir)와 같은 이름이다.

이렇게 5명의 친척이 모두 오구즈 칸의 할아버지 모골 칸과 그 형 타타르 칸 대에서 갈라져 나온 타타르-모골 가문 친족들이다. 다만 라니카즈와 아질라드 두 종족에 대해선 아직까지 그 어원을 밝혀내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가 발해로 이어진 시대에 그들의 일부는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로 가서 예맥 칸국을 세웠고, 그 영향력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너머까지 미쳤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오늘날의 우리도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국가들에 관한 안목을 넓히고, 동반자 입장에서 다가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전원철 -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했다.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며, 체첸전쟁 당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하는 등 유엔 전문 기관에서도 일했다.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몽골제국의 기원, 칭기즈 칸 선대의 비밀스런 역사] 등 다수의 역사 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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