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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34)] 사막의 거처를 읍내로 옮긴 사연 

야만을 피해 쌓은 견고한 성 

사막의 오아시스를 놓고 혈투를 벌이듯 목숨 걸고 관광객 쟁탈전
베두인의 광기 어린 소유욕이 부른 생명의 위협에 사막 수행 포기


▎사막에서 새로 마련한 보금자리. 여행객의 숙소로 이용하기 위해 바위를 깎아 짓다가 만 건물을 필자의 숙소로 정비했다.
흑심을 품고 나를 마사지해주겠다고 덤벼드는 베두인 남자를 거절하는 방식은 완곡해야만 했다. 나는 동그래진 두 눈을 굴리며 타야에게 온갖 고상한 말투를 써가면서 내 텐트로 슬쩍 피했다. 다음 날 아침, 타야의 동생 칼리드가 캠프로 와서 내 이름을 광포하게 불러댔다. 나는 선잠을 깬 채 문을 열고 나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게 있냐고 물었다. 칼리드는 목청이 찢어지듯 으르렁거렸다:

“간밤에 누가 여기 있었어? 내가 모를 줄 알아! 뭔 일이 있었는지 다 알겠구만. 지난밤에 누가 여기서 잤냔 말야? 내 캠프에서 뭔 짓들을 하고 있냔말야.”

나는 하도 어이없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참고 그를 진정시켰다. 간밤에 온 것은 이 캠프의 진짜 주인이자 그의 형인 타야였다고 말했다. 재미있게도 이 말을 듣자 칼리드는 더욱 화가 나서 소리치기 시작했다.


▎새 거처를 정리하면서 찾은 전갈. 갈색 전갈은 독이 약해 치명적 위험이 없다.
“그래 그는 나의 형이야! 형이지. 말해두지. 그는 나쁜 놈이란 말야! 진짜 진짜 나쁜 놈이야. 그놈이 부인이 둘이나 되는 것 잘 알지? 생각 좀 해보라구. 두 여자를 거느리고 있는데 또 다른 여자들을 탐내고 있는 거야! 썩은 놈이야. 한번 생각해보라구!”

나는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억지로 참았다. 칼리드의 논조가 타야가 지난밤에 칼리드 같은 베두인 소년들을 가리키면서 했던 말과 똑같은 푸념이었기 때문이다. 서로 뜯어먹지 못해 안달이다.

나는 나의 입지를 굳게 세웠고, 내 주변으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탐욕과 드라마에 흔들리지 않도록 냉정하게 처신했다. 그런데도 나는 굶주린 상어들이 작은 고기 한 마리를 상금으로 놓고 우글거리고 있는 수족관의 그 고기 한 마리 신세가 되어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11월경 나는 상어들이 그들의 상금이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기도 전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러나 아직 사막 그 자체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아직도 사막의 삶으로부터 충분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느꼈다. 수도자가 느끼는 어떤 궁극적 해탈 같은 것에 아직 못 미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겨우 사막이라는 환경에 몸이 적응되어 가고, 나의 마음이 개운하게 되어 글을 좀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타야의 캠프에서 죽치고 살기는 점점 어려워졌다. 상어 같은 남자들 때문이 아니라 겨울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10월 말경이 되자 텐트 안에서 자도 밤에는 한기가 엄습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추웠기 때문에 그곳에서 겨울을 넘긴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밤에 태울 것을 구하는 것도 매우 어려웠다. 그리고 태우고 난 숯덩이를 텐트 안에 들여놔 보았자 연기가 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살라의 마을에서 찾은 견고한 ‘겨울의 성’


▎새로 단장한 새 거처의 내부. 바위를 깎아 만들어 겨울을 지내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타야가 내가 자기 여자가 될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나의 개에게 무자비해졌다. 관광객이 있을 때에는, 나더러 개를 캠프에서 떨어진 곳에 묶어두고 와서 관광객들과 섞여 놀아주라고 요구했다. 개를 묶어둔 채 관광객 시중을 드는 것을 강요하는 그의 태도가 나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캠프로 누가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게르나스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 버렸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게르나스를 홀로 사막에 묶어두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미 너무도 그렇게 학대를 당했기 때문에,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관광객을 피하기 위하여 게르나스를 데리고 서재바위에 올라가 작은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가벼운 오리털 슬리핑백을 놓고 그 자루에 들어가 잤다. 게르나스도 차가운 바위 위에서 자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매트리스를 차지하기 위해 나를 밀치듯 쑤시고 들어왔다. 겨울이 오니까 슬리핑백 속에서 자는 것도 추위를 막지 못했다. 나는 편안한 침대가 아니더라도 텐트 안에서 자는 것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른 동네의 수장인 살라가 내게 아주 훌륭한 제안을 했다. 그의 아들 모하메드 살라에게 나를 자기 캠프에 게스트로 데려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을 안 해도 좋다고 했다. 모하메드는 나에게 이러한 자기 아버지의 제안을 말하면서 몸서리치게 좋아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막에 온 초지(初志)를 생각하면서 그 훌륭한 제안을 거절했다. 살라의 캠프는 관광객이 없는 날이 없었다. 결국 나는 도시인들의 소음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살라의 훌륭한 제안을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면서 살라의 영역권에서 어딘가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게르나스를 데리고 살라의 캠프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버려진 작은 시멘트구조물을 발견했다. 그 건물은 움푹하게 파인 바위를 활용하여 삼면으로 벽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어 지은 공간인데 정면으로는 철 대문이 나 있다.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 내부는 고약한 냄새 나는 쓰레기 천지였다. 찢긴 담요들, 매트리스들, 염소 음식 찌꺼기, 그리고 온갖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페트병 물병이 있길래 들어보니 그 속에는 스무 마리 정도의 딱정벌레와 거의 죽어가고 있는 자이언트 전갈이 있었다. 자세히 둘러보니 수도꼭지도 있길래 틀어보니 물이 잘 흘러나왔다. 덕지덕지 때가 낀 싱크대 속으로 물이 잘 빠져나갔다.

다음으로, 나는 타일을 붙인 바닥을 점검했다. 쓰레기가 쌓여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헤집어 보니 타일이 깨끗했다. 그다음에 벽들을 점검했고 또 천정을 점검했다. 완벽한 공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지구 상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이 된 것처럼 웃고 있었다.

2013년 11월, 타야의 캠프에 있는 나의 텐트보다 훨씬 크고 유용한 새로운 주거를 만드는 데 온갖 세심한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 시멘트 구조물은 원래 한 캠프를 위한 부엌으로서 지어진 것이었는데 완공이 되질 않았던 것이다. 부엌이어서 바닥에 타일이 깔렸고, 또 바위로 된 정면 아래에는 기역자 선반이 긴 의자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전체가 타일로 덮여있었다. 그 타일로 된 부뚜막 같은 선반 위에는, 앉을 수도 있고 또 물건들을 놓기에 아주 편리했다. 싱크대는 물탱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장소를 유용한 공간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춰진 못했지만, 물탱크에 연결된 목욕실도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도 있었는데 사막의 화장실은 사막에 구멍 하나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여튼 그마저 아름다운 변소가 될 수 있도록 개조될 수 있었다.

나는 그 부엌 구조물을 우선 깨끗이 치우고 하룻밤을 슬리핑백 속에서 자보았다. 온도 변화를 체감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은 겨울에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그 구조물은 서향이기 때문에 정오로부터 해질 때까지 엄청난 일조량을 획득한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바위들이 이 구조물을 바람으로부터 막아준다. 그래서 낮 동안에 받은 열기를 밤새 훈훈하게 유지했다. 게다가 시멘트벽이라는 사실은 염소 털로 만든 텐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내가 사막에서 살아보기 이전에는 딱딱한 시멘트구조물 속에서 산다는 것의 고마움 같은 것을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소음조차 차단되는 단단한 벽과 마루와 천정으로 엮은 구조물 안에서 산다는 것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런 것의 이로움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황토로 두꺼운 벽돌을 만들어 벽을 세웠을 때,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만으로 만든 이전의 보금자리에 비해 얼마나 안온함을 느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지도록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나는 비로소 신석기시대를 다시 살아보고 있다. 나는 이 새로운 구조물에서 산다는 것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을 윈터 캐슬(the Winter Castle)이라고 명명했다. 이 윈터 캐슬은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성(城)이 되었다. 2014년 한 해를 통틀어 이 성은 프랑스에 있는 어떤 호화로운 샤또(Chateaux)보다도 더 풍요롭고 사치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이 새로운 집으로 이사해가는 과정이나 방법에 관해서 나의 가슴에는 꺼림칙한 후회 같은 것이 남아있다. 모하메드 살라는 타야의 적개심에 대하여 매우 광적인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고, 나의 모든 짐을 무슬림 패밀리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비밀리에 운반한다는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 작업은 2013년 12월에 완수되었는데, 그때 나는 잠시 나의 작품전시 때문에 런던과 이스탄불에 체류했다.

사막 캠프로부터의 은밀한 탈출


▎새 거처 근처에 바위가 움푹 패인 곳에 열린 서재를 마련했다.
내가 여행을 떠날 때는 나의 짐 대부분을 그냥 캠프에 남겨 두었고, 중요한 아이템들은 빌리지에 있는 아우데의 집에 맡겨두었다. 그러나 요번에는 나의 모든 것을 꾸려서 일부는 윈터 캐슬 안에 두었고, 일부는 모하메드 살라의 엄마 집에 두었다. 나의 짐들을 차로 나르는 작업을 감행한 것은 모하메드였다. 그는 그 작업을 빠르게 비밀스럽게 감행하였다. 그가 타야의 캠프로 나를 픽업하기 위해서 왔을 때는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둘러보고 소리를 듣고, 또 자동차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재삼 확인했다.

모든 이사작업을 타인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완수했을 때, 나는 암만으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나의 원래 가이드인 아우데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살라의 캠프에서 때마침 라이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냥 당신 신세 안 지고 급히 떠난다고 말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보자고 말했다.

그 순간이 나와 무슬림 형제들과의 사이의 관계 종결이었다. 아우데의 새로 태어난 아이도 보지 못했고, 그의 엄마와 그의 여동생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아우데를 언급하기만 하면 모하메드 살라는 모종의 질투심에 이글이글 타올라 기분 나빠했다. 그는 아우데를 포함한 무슬림 패밀리의 모든 사람이 나를 이용할 생각만 했다고 투덜거렸다. 그들과 관계를 유지해봤자 돈만 털리게 된다는 것이다. 모하메드는 나보다 어렸다. 그래서 나는 교훈 조로 그를 설득하려 했다. 우리가 한 일은 잘못된 일이다, 아우데는 정말 선량한 사람이다, 그들의 양해를 구했어야 한다고 설득을 시도해도 그는 내 말을 항상 자르면서 말했다.

“이러한 방식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에요. 당신은 그들을 몰라요. 당신은 베두인이 아니라서 여기 습속을 몰라요.”

나는 한 베두인 패밀리에서 다른 베두인 패밀리로 옮아갔다. 그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집을 옮기게 되면 새 집에 충실할 뿐 다른 집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타야가 우리가 이사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나는 지금도 그 대답을 알지 못한다. 내가 런던에서 돌아와서 그 서재바위에 있는 나의 책상과 걸상을 옮기기 위해 타야의 캠프로 돌아왔을 때, 모하메드의 동공에 서려 있던 공포 같은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목숨이 오가는 베두인의 현대판 ‘우물’


▎필자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된 베두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
나는 그 책상과 걸상을 윈터 캐슬 가까이에서 찾아낸 새로운 동굴에 안치했다. 그 새 자리 또한 완벽한 바위동굴 쉘터였다. 바위 구조의 한 부분이 움푹 파여 거의 완벽한 반원의 돔을 형성하고 있었다. 내가 공을 들여 구비해놓은 나의 서재 시설을 옮기는 것이 최후의 작업이었다. 모하메드는 이 작업을 재빠르게 수행하기 위하여 그의 사촌을 데려왔다. 우리는 이 작업을 낮에 해야만 했다. 밤에, 어두운 길에 그 높은 바위산에서 무거운 책상을 실어 내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 전 과정이 매우 스릴이 있었고 애가 탔다. 나중에 모하메드에게 물었다.

“그때 타야가 우리가 물건 나르는 것을 보았다면 뭔 일이 일어났을까?”

“당신이 알 일이 아니오. 내가 빌리지에서 타야를 볼 때마다 그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 증오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소. 기껏해야 그는 나를 감옥에 가두려 하겠지. 물론 더한 짓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가 말한 “더한 짓”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야 타야가 나에게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그는 나에게 자기와 어떠한 관계 설정을 해야 할지 확실히 말하라고 협박 조로 말했다.

“남자친구가 있으면 나한테 지금 솔직히 말해줘! 내 캠프에 어떤 놈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내가 총을 쏘면 어떡하겠어? 그놈이 마침 너의 남자친구라면 어떡하겠느냐구!”

당시 나는 그 말은 아주 더러운 조크라고 생각하고 그냥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농담이 아닐 수도 있었다. 옛날에 이 부족들은 샘물에 대한 권리를 놓고 서로 싸우다가 서로 죽이곤 했다. 그것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베두인의 전승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수원(水源)을 놓고 싸우지는 않는다. 물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관광객에 대하여 비슷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살라의 맏아들 알리는 이 동네에서 가장 조용하고, 가장 상식적인 인간으로 정평이 있다. 그런데 나는 그가 피스톨을 들고 집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의 관광객을 훔쳐간 놈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나는 사막의 관광캠프를 재정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와디 럼에 사는 베두인들의 샘물이었던 것이다.

2013년 세모의 며칠로부터 2014년 마지막 며칠까지 꼭 일 년 동안, 와디 럼의 윈터 캐슬은 내가 향유했던 가장 소중한 홈이 되었다. 내가 요르단에서 보낸 2년 반의 세월 속에서 와디 럼의 사막의 광야에서 보낸 달들의 합계는 11개월에 이른다. 그런데 그중 6개월을 나는 윈터 캐슬에서 보냈다. 윈터 캐슬에서 보낸 6개월의 체험을 몇 줄의 문장 속에 담을 수는 없다. 그 기간이야말로 내 생애의 가장 소중한 추억들이 담겨있다. 그리고 가장 드라마틱하기도 했다. 고통과 광기와 축복과 평화로 가득 찬 세월이기도 했다. 여기 내가 사막의 홈을 버리고 뉴욕으로 다시 삶의 터전을 옮기게 된 몇 개의 사연만을 적어놓으려 한다.

새 보금자리에서 겪은 크리스마스의 악몽


▎아이들이 쏜 총에 맞은 게르나스는 다행히 금세 건강을 회복해 필자와 함께 새 보금자리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에게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은 2013년 크리스마스 직후에 일어났다. 나는 크리스마스 며칠 전에 런던에서 돌아왔다. 나는 두 서양인, 스칸디나비아 여인 한나와 살라의 큰아들과 함께 볼런티어로서 장기투숙하고 있는 호주 청년 마이클, 두 사람에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약속했다. 볼런티어라는 것은 투숙비 없이 일하면서 지내는 사람인데 마이클은 매우 덩치가 크고 충직했다. 베두인들은 크리스마스가 무엇인지 감이 없지만, 서양인들은 자기 고향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모종의 향수를 느낄 것임이 틀림없었다.

게르나스가 원래의 주인인 살라의 첫 부인, 그러니까 모하메드와 알리의 엄마와 함께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좀 떨어진 곳에 있는 게르나스를 찾아오는 일을 미루고 있었다. 아카바에서 물건과 식품을 사와야 했고, 또 윈터 캐슬이 완벽하게 리모델링 되기까지 빌리지에서 머물 곳을 간단히 수리하느라 바빴다. 빌리지의 임시숙소는 모하메드 엄마 집과 연결된 구조물이었다.

나는 윈터 캐슬을 위해 암만에서 아주 훌륭한 침대가 배달되도록 돈을 지불했다. 나는 그 침대가 도착할 때까지 임시로 빌리지에서 머물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약속대로 나는 조촐하고 실속 있는 크리스마스 파티를 마련했다. 마왕 달걀(삶은 계란을 반 잘라 노른자와 마요네즈와 기타 소재를 섞어 다시 노른자 있는 곳에 놓는 요리)과 맛있는 비프 스튜를 준비했다. 두 서양 크리스천과 영문은 모르지만, 마냥 즐겁기만 한 모하메드 대가족의 다양한 식구들이 참석해서 내가 만든 음식을 즐겼다.

총상을 입고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게르나스


▎단독 건물로 지어진 화장실에는 수세식 변기와 샤워기를 설치했다.
나의 파티에는 프랑스 포도주도 있었는데, 단지 맥주와 알코올 도수 높은 양주를 마셔 버릇했던 그들에게 포도주는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술은 물론 이슬람 사회에서 금지되어 있지만, 베두인들은 술을 숨겨두고 슬금슬금 마신다.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술을 서로 숨겨두고 몰래 홀짝홀짝 마신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보드카 한 병을 꿀꺽 마시기도 한다. 요르단은 금기가 심하게 계율화 되어있지 않은 편이다. 더구나 베두인들은 자체의 공동체 룰에 따라 움직일 뿐 정부의 법적 구속을 당하지 않는 편이다.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요리하는 날인 동시에 청소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게르나스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나에게는 자가용 차가 없기 때문이다.

12월 26일 아침, 나는 늦게 일어났다. 긴 여행의 여독과 도착하자마자 많은 육체노동을 한 데서 쌓인 피로가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우선 커피를 찾았다. 마이클이 마시는 싸구려 아라비아커피나 살라의 작은 가게에서 파는 아줌마 커피 한 봉지를 찾으려고 하고 있을 때, 나에게 하늘과 땅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순간 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들은 것은 다음 세 마디였다:

“게르나스 갓 샷(Gernaas got shot)”

아니, 게르나스가 총 맞았다니? 나의 반응은 논리적이었다.

“뭐라구? 죽었단 말야?”

모하메드는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차를 몰고 떠났다. 베두인 남성들은 여성에게 설명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나보고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을 뿐이다. 나는 즉시 문밖으로 나가 멍하게 하염없이 애타게 거리를 헤맸다. 몇 대의 트럭이 지나갔다. 베두인 운전사들은 내가 걱정되어 조심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모하메드가 나타났다. 자동차 문을 내리면서 나에게 광적으로 소리친다. “집에 들어가요! 지금 당장!”

그는 차를 몰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얼빠진 나를 그냥 내버려 두고. 도대체 게르나스에게 뭔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어디서 그를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위로는 못 할지언정 설명도 하지 못할 손가? 그러나 베두인 빌리지에 있는 차 없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기다림’밖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베두인 여성들은 한평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나는 집 앞에 트럭이 주차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급히 밖으로 나갔다. 게르나스가 픽업트럭의 뒤편에서 헐떡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 가련한 게르나스여!”

다행스럽게도 게르나스는 누워있지 않고 서 있었다. 좋은 징후였다. 나는 게르나스를 안아 내렸다. 뛰어내리자마자 게르나스는 비틀거렸으나 걸어갈 수 있었다. 나는 그의 상처가 깊지 않다고 판단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자세히 살펴보니 게르나스는 가슴과 다리에 몇 개의 상처가 나 있었다. 여기서 가까운 타운에는 수의사가 없었다. 그렇다고 암만 같은 큰 도시로 데려가 의사를 찾는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더 많은 신체적 부담을 줄 수도 있다. 나는 게르나스를 회복할 때까지 알리 집 정원에 두기로 했다. 간단히 약을 바르며 정성껏 먹였다. 게르나스는 왕성한 식욕을 과시했다. 그의 식욕은 나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사막의 새 궁전 생활을 시작하다


▎은은한 조명을 밝힌 침실 내부. 태양광 전기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내려받은 [왕좌의 게임]을 시청 중이다.
2주 내로 그는 완벽하게 건강을 회복한 듯이 보였다.

1년 후에 뉴욕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해보고 철저한 검사를 해보았는데, 게르나스는 새 사냥용 산탄총에 맞은 것임이 밝혀졌다. 게르나스가 목줄을 끊고 밖에 돌아다니게 되면 자동차 뒤따라가기를 좋아하는데 동네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던 산탄총으로 그를 쏘아버린 것이다. 조그만 구슬 같은 조각이 흩어지면서 박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 구슬 조각은 납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의 몸에 한 다스 정도의 산탄 알이 박혔지만, 그것을 빼낼 필요는 없다는 진단이 나왔다. 게르나스는 지금도 그 산탄 알을 몸에 지니고 있다.

윈터 캐슬의 내장 정비가 끝났을 때, 나는 소지품을 들고 게르나스와 함께 사막으로 이동했다. 빌리지에서 게르나스는 항상 위험에 직면한다. 총에 맞는 위험뿐 아니라, 아이들이 개만 보면 돌을 던진다. 성서에서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던지듯이 아무 의미 없이 돌을 던지는 것이다. 광막한 사막만이 게르나스에게는 안전한 곳이다. 그러나 게르나스는 자동차만 보면 뒤쫓아가기를 좋아한다. 그만큼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반가워 따라가는 그에게 총알을 안긴다. 나는 게르나스가 자동차를 따라나설 때마다 가슴이 철렁 가라앉는다. 제발 총소리가 들리지 말게 하옵소서! 자비로우신 알라여!

게르나스는 새로 단장한 윈터 캐슬을 자기의 새집으로 알았다. 5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옛 캠프로는 다시 가지 않았다(내 걸음으로는 15분 정도). 게르나스는 개방된 사막에서는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나의 새집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내가 부르기만 하면 새집으로 돌아왔다. 매일 밤, 그는 내 집 문밖에서 내가 깔아준 낡은 매트리스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잤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짖는 메아리 소리가 타자의 소리라 믿고 계속 짖어대기도 한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갔다.

하이킹하고, 잡일하고, 집수리하고, 게르나스를 위해 요리하고, 살라의 캠프를 방문하고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지만, 특별히 비극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1월 중순경, 나는 나만 쓰는 아름다운 수세식 도기 변기와 샤워기를 설치했다. 2월 말까지 나의 윈터 캐슬은 5성급 호텔 못지않게 변해버렸다.

퀸사이즈의 침대는 단단한 나무로 되어 아래는 큰 서랍들이 장착되어 있었고, 위로는 내가 잠자본 중에서 가장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스프링 매트리스가 놓였다. 그리고 오리털 이불, 그 이불을 덮는 400수 이집트면 커버, 푹신한 오리털 베개, 아름답게 수놓은 방석들, 순면 베드 스프레드, 조립식 클로제트, 고색창연한 앤티크 큰 거울, 책상과 걸상, 선반, 한 박스의 양초, 다양한 벽장식, 요리 재료, 보온병과 스피커, 발전용 솔라패널들, 장도리 같은 수리용 공구들, 빗자루, 소독약품 등… 근대적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사막의 나의 작은 공간 속으로 유용하게 밀집되었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2003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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