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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 논설위원의 ‘온 리버티(on liberty)’]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인지 편향 네 가지 

진실보다 더 그럴듯한 음모론 

“동양대 총장은 태극기 부대”… 상상력을 인과관계로 호도
편향 먹고 자라는 반(反)지성주의는 ‘악마의 마지막 피난처’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송파구 서울동부구치소 앞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지지자들이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반(反)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가 처음 정의한 개념입니다. 이성과 합리가 무시되고, 지성과 지성인을 배척하는 현상을 뜻하죠. 호프스태터는 1950년대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친 미국 사회를 해부하며 포퓰리즘과 결합한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민주적 가치를 무너뜨리는지 분석했습니다. ([미국의 반지성주의])

반지성주의가 판치는 사회에선 제일 먼저 광기와 폭력이 자유주의의 싹부터 자릅니다. 선동가는 대중의 반지성을 등에 업고 비판적 지식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죠. 사고 회로가 마비된 대중은 선동가를 신격화하며 정치는 종교로, 시민은 신민으로 전락합니다. 국가와 국민 사이에는 자연법상의 권리를 위탁한 사회계약이 아니라, 신과 그의 뜻을 대리하는 사제를 향한 맹목적 믿음 ‘신약(covenant)’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식된 민주주의와 시민의 부재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10명이 넘는 역대 최다 후보가 출마했다.
‘온리버티’는 2019년 ‘조국 사태’가 남긴 반지성주의의 상처를 해부합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야 날아오른다”는 헤겔([법철학])의 말처럼 실체적 진실은 일련의 사건이 모두 완료된 뒤에야 천천히 드러납니다.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조차 이슈의 한가운데에선 진실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해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세상을 탐색했죠. 한국 사회를 둘로 쪼개놓은 ‘조국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인지, 자유주의의 눈으로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한국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살펴보겠습니다.

스스로 ‘민주주의’ 개념을 발명하고 오랜 역사를 거쳐 발전시켜온 서구사회와 달리 한국의 민주주의는 갑작스럽게 주어졌습니다. 그렇다 보니 민주주의의 개념과 원리에 대한 학습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죠. 1945년 해방 직후 미 군정청에 등록된 정당은 300여 개에 달했고 1946년엔 400여 개로 증가했습니다. 그 후에도 정당 간 이합집산과 반복적인 당명 바꾸기가 지속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정당정치는 19세기 산업화의 산물입니다. ‘대의(代議) 민주주의’는 국민의 대표자가 다양한 사회 갈등과 균열을 대리해 조정하고 해결하는 정치체제입니다. 서구사회에선 자본가인 부르주아 계급과 그에 맞서는 노동자 계급이 갈등과 균열의 중심축이었고 이들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이 만들어졌습니다. 중요한 사회 이슈는 대부분 정당을 통해 조정되고 합의점을 찾았죠.

결국 정당은 다양한 시민의 의사가 대표되는 창구이며, 그런 고민이 모여 하나의 이념을 이루고 이를 구체적인 정책을 통해 실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당은 시작부터 본질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념·정책에 따라 정당이 차별화된 것이 아니고 명망가 위주로 판이 짜였기 때문이죠.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정당이 오직 권력 투쟁에만 몰두하고 시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대의 기능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승만의 자유당부터 박정희(민주공화당), 전두환(민주정의당) 등 독재정권은 모두 정당을 사유화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대중의 평화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처럼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이합집산된 정당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회창의 신한국당,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역시 비슷한 이념과 정책 성향을 가진 이들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오로지 권력 획득이라는 공통의 목적 아래 뭉친 이익집단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한국의 정당은 이념과 정책보다는 인물 중심이었고, 그 결과 정당 지도자가 권력을 잃으면 조직도 약해졌습니다. 정당은 이념 정체성에 따라 정책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지도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친위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정치인의 팬덤에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됩니다. 정당이 내놓는 정책보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가의 말 한마디가 더욱 큰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인 것이죠. 민주주의의 운영 주체인 시민의 역량과 성숙도가 낮을수록 정치가의 선전과 선동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미성숙한 시민과 이를 권력 획득·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정치가의 선동이 맞물렸을 때 반지성주의는 쉽게 싹을 틔웁니다.

21세기에도 여전한 386의 운동정치


▎지난해 12월 28일 서울 서초구 서초역 일대 도로를 경계로 검찰 개혁 촛불 문화제(왼쪽)와 조국 장관 사퇴 촉구 집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반지성주의를 주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386 정치인들입니다. 현재의 집권세력인 그들은 여전히 권위주의와 민주화운동의 프레임에 갇혀 있습니다. 운동으로서의 민주화가 끝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에 빠져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은 ‘독재 타도’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분법이 어느 정도 효과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선악의 이분법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후퇴시킬 뿐입니다. 다양성과 개방성, 관용과 존중 등을 가치로 하는 민주주의에서 피아 구분이 명확한 운동권적 사고방식은 오히려 민주주의를 좌초시킵니다. 소재만 다를 뿐 상대 정파를 ‘빨갱이’로 낙인찍어 권력을 유지했던 반공주의와도 그 본질은 같습니다.

이처럼 메시지의 내용과 상관없이 메신저에게 낙인이 찍히면 합리적인 토론이 마비되고 이성적인 공론장이 붕괴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은 이데올로기와 정책적 차이에 따라 구별되기보다는 그저 투쟁을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패를 갈라 싸울 때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기 위한 용도일 뿐인 것이죠.

권위주의 세력이 냉전반공주의를 통해 가치의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아군과 적군만 존재하는 이분법적 사회를 만들었듯, 지금의 집권 세력도 ‘적폐·친일’이라는 프레임으로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선악의 이분법으로 프레임을 만들고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회 균열을 정당이 대표하지 못하는 것은 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큰 위협입니다. 균열 지점을 정확히 짚지 못하는 것은 ‘대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이며, 그 결과 시민들의 혼란과 갈등이 커집니다. 광장이 둘로 쪼개져 치열하게 싸우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선거에선 어떤 균열을 축으로 경쟁이 이뤄지는지, 정당은 무슨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문재인을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 ‘박근혜를 지지하느냐 하지 않느냐’ 뿐입니다. 이 같은 ‘진영 논리’가 한국 정치의 기저에 흐르며 반지성주의를 키우고 자유주의를 억압합니다. 단순히 두 개의 정치세력이 패를 갈라 진영 싸움을 벌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시민단체·언론 등 시민사회도 진영 논리에 동원돼 두 개의 세력으로 수직계열화 돼버렸습니다.

윤성이 경희대 교수(한국정치학회장)는 “정책만 놓고 보면 한국 사회의 이념 갈등은 크지 않지만 어떤 대통령, 어느 정치세력을 지지하느냐를 따지면 갈등이 첨예해진다”며 “이념에 따라 정파가 나뉘는 게 아니고 정파 갈등이 이념 갈등을 부추긴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 세력 간에 합리적 토론이나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이슈를 ‘내 편 네 편’으로 가르며 대립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죠.

인간은 원래 불합리하다?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월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 참석해 다른 의원들을 바라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더욱 큰 문제는 내부의 건전한 비판까지 차단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지적도 진영 논리를 벗어나는 순간 매장되기 일쑤입니다. ‘조국 사태’ 때 조 전 장관을 비판했던 김경율 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과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진보층 내부에서 궁지에 몰렸던 게 대표적인 사례죠. 더불어민주당 금태섭 의원은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조 전 장관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대한민국 사회를 둘로 쪼개 놓은 ‘진영 논리’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일까요. 그 핵심에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성과 합리를 마비시키는 반지성주의가 있습니다. 2019년 하반기 ‘조국 사태’를 통해 우리 사회의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커져 왔는지 ‘인지적 편향’의 이론으로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따져보겠습니다.

행동경제학에서 자주 쓰이는 ‘인지적 편향’은 인간의 판단과 의사결정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의 의사 결정 과정을 시스템1과 시스템2로 나눠 설명하죠. 시스템1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빠르게 작동하며, 시스템2는 복잡한 계산을 포함한 집중력과 주의력을 필요로 하는 방식입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

전통적인 주류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놓고 시스템2를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에서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시스템1의 인간을 전제합니다. 시스템2에서 인간의 비이성적 판단과 의사결정이 나오는 이유를 설명하는 개념 중 하나가 인지적 편향입니다.

이는 다시 네 가지로 크게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생각과 말에 그치기보다는 실행하는 게 무조건 낫다는 행동 편향, 평소 생각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확증 편향,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소식에 더 끌리는 부정 편향, 실체적 진실보다 잘 짜인 이야기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이야기 편향입니다.

‘조국 사태’는 네 가지 편향이 복합돼 나타나면서 반지성주의를 키웠습니다.

제일 먼저 조 전 장관을 둘러싼 광장의 시위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 9월 28일 서울 서초동 집회입니다. 검찰개혁 사법적폐청산 범국민시민연대 주최로 오후 6시부터 서초동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한겨레신문]은 집회 주최 쪽 추산 200여만 명이 참석했다고 보도했습니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경북 영천에서 중2 딸의 손을 잡고 새벽 6시에 상경했다는 한 시민은 “딸의 중간고사가 코앞이지만, ‘조국 장관 사태’를 지켜보며 시민으로서 한 사람이라도 나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조국 장관 청문회와 그 이후 검찰과 언론이 모두 한 사람을 몰아세우고 괴롭히는 게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무언가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집회에 나온 이들이 많았습니다. “행동 편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행동하지 않는 건 죄악으로 여겨진다”는 강준만의 지적처럼 조 전 장관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내건 ‘조국 수호’라는 구호처럼 일단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행동 편향은 강 교수의 표현처럼 “과도한 혐오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곧바로 이어진 인터넷 실검 전쟁에서 소위 진보 진영의 네티즌들은 조국 전 장관을 비판한 언론에 대해 ‘기레기꺼져’ ‘기레기아웃’ ‘가짜뉴스아웃’ 등을 검색 순위에 올렸습니다. 행동 편향은 깊은 성찰과 진지한 고민 없이 실천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는 조 전 장관을 반대하며 광화문에서 맞불 집회를 벌인 보수 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는 집단에서 나타나기 쉬운 확증 편향은 진영 논리를 강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확증 편향이 위험한 것은 자신은 객관적이고 정확한 팩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본인 자신 또한 그 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같은 사실을 알고 있고 의견만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면, 대화나 토론을 통해 합의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확증 편향이 심한 사회에서는 각자 다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서로가 믿는 것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를 찾기 힘들죠. 취득하는 정보와 팩트부터 다르기 때문에 두 집단의 골은 더욱 깊어집니다.

확증 편향과 가짜뉴스


▎팟캐스트 ‘나는꼼수다’ 진행자 김어준(오른쪽) 등이 2012년 8월 1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몰려든 팬들에게 서명을 해주고 있다.
이처럼 서로 다른 팩트를 갖게 되는 이유는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현실과 무관치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언론은 게이트키핑이라는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쳐 사실을 뉴스로 가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주관적인 편집과 사실의 배제는 일정 부분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전통의 주류 미디어는 겹겹의 게이트키핑 과정을 통해 주관을 거르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레거시 미디어의 영향력이 줄면서 가짜 뉴스를 적극 유포하는 대안 미디어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겐 마땅한 게이트키핑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때문에 정치 셀럽들의 유튜브·팟캐스트 등 뉴미디어는 자기 진영의 사람들을 결집하고 확증 편향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언론의 본질을 이야기할 때 공정성과 객관성을 제일 높은 가치로 꼽지만, 대중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극적이고 편파적인 언론사를 좋아합니다. 2011년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조사 결과 폭스뉴스 시청자는 오바마 행정부의 강력한 경기부양책 때문에 실업률이 증가한다고 믿는 비율이 다른 방송사보다 12%p 높았습니다. 무슬림이 미국 내 ‘샤리아(이슬람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17%p나 높았죠. 이는 방송 시청 시간이 길수록 심각했습니다.

확증 편향은 보통 부정 편향을 함께 수반합니다.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부정 편향은 뉴스를 소비하는 중요한 패턴 중 하납니다. 부정 편향은 내 편과 네 편을 쉽게 나누고, 나와 다른 이들을 ‘악’으로 규정하기 쉽습니다. 선거철마다 정책·공약 선거보다 상대 후보를 흠집 내는 네거티브 선거가 파괴력을 발휘하는 이유도 부정 편향의 효과입니다.

‘조국 사태’ 때도 진보와 보수 각 진영은 반대편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보수 진영은 조 전 장관의 부정적 뉴스를 생산하는 언론을 집중적으로 보고, 진보 진영은 반대로 조 전 장관을 비판하는 이들의 부정적인 면을 들춰냈습니다. 조 전 장관 딸의 입시 문제가 거론되자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아들 문제로 맞불을 놓은 게 대표적인 사례죠.

또 조 전 장관의 아내인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위조 문제가 논란이 되자 정 교수가 몸담은 동양대 최성해 총장에 대한 ‘신상털기’가 이뤄졌습니다. 최 총장이 정 교수에게 불리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최 총장에 대한 온갖 부정적 뉴스가 흘러나왔고, 진보 진영의 사람들은 이를 확대 재생산했습니다. 그 결과 동양대는 교육부의 전격적인 감사를 받았고, 최 총장은 법인 이사직에서 물러났죠.

부정 편향에 빠진 상황에선 자기 생각과 의견에 맞지 않으면 일단 적으로 만들고 부정적인 이슈들을 재생산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에 대해 ‘믿고 거르는 종양일보’, ‘역시나 한걸레’ 같은 과격한 표현이 댓글에 난무하는 것도 부정 편향 때문이죠. 기자를 ‘기레기’로 규정하고 나면, 메시지를 보기도 전에 메신저부터 공격하는 효과가 있어 부정 편향은 더욱 강해집니다. 이처럼 한국의 언론과 뉴스 소비자는 확증·부정 편향의 덫에 빠져 있습니다.

연관 없는 팩트들에 인과성 부여

이야기 편향은 가짜 뉴스나 근거 없는 음모론이 대중 사이에서 설득력을 얻는 현상입니다. 이를 가장 많이 활용한 집단 중 하나는 ‘나는 꼼수다(나꼼수)’ 멤버들입니다. 처음 이들은 “국내 유일의 가카 헌정 방송”을 표방하며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꾸준한 의혹 제기로 진실을 밝히는 데 일정 부분 역할을 한 측면도 있지만, 문제점 또한 많았습니다.

나꼼수의 기본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은 팩트와 팩트를 연이어 나열하고, 이들 사이에 ‘합리적 의심’이라는 프레임을 적용해 ‘상상력이 뛰어난’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선후 관계나 심지어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팩트들까지 ‘합리적 의심’에 따라 인과성을 부여하죠. 수용자들에겐 그들의 이야기가 매우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나꼼수가 만들어낸 과도한 편파와 음모론의 폐해는 매우 컸습니다.

부정적 측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비합리적인 접근 방식이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잘 짜인 각본같이 딱 떨어지는 서사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보다 더 설득력 있어 많은 이들에게 소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은 ‘음모론의 나라’라는 진단이 나올 정도로 음모론이 공론장에 자주 등장합니다.”

‘조국 사태’ 당시 가장 많이 나온 음모론은 검찰 수사가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 전 장관의 검찰 개혁이 두려워 윤석열 검찰총장이 표적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주장이죠. 이런 논리에 따라 조 전 장관 지지자들은 검찰 개혁을 외치며 각종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건건 윤 총장의 발목을 잡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행동도 그 연장선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더불어민주당은 조 전 장관에 대한 각종 의혹이 쉴새 없이 터져 나오자 적극적으로 음모론을 폈습니다. 그러자 [한국일보]는 “민주당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구하기가 산 넘어 산이다. 연일 새로운 의혹이 터지면서 온 여권이 ‘궤변 총력전’에 동원되거나 진영논리에 빠져 논란을 자처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조 전 장관의 딸 표창장과 관련해 여권의 회유 의혹을 제기한 최성해 동양대 총장을 “태극기 부대”라고 비하한다는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에 따르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송기헌 의원은 지난해 9월 5일 최 총장을 향해 “우리가 파악하기로는 ‘태극기 부대’에 가시던 분”이라며 “우리한테 우호적인 사람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민주당은 당 페이스북에 “최 총장은 한국교회언론회 이사장이며, 극우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올렸다가 ‘극우적 사고’라는 표현을 뒤늦게 뺐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일보]는 “평소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던 민주당이 편 가르기 발언으로 최 총장을 깎아내렸다”고 평했습니다.

한편, 보수 진영에서는 33년 만에 화성 연쇄살인 사건 용의자가 밝혀진 것이 ‘조국 사태’를 덮기 위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제기됐습니다. 이 같은 음모론은 결국 ‘진영 논리’만 심화시킵니다. 음모론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모든 이슈를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눠 생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강준만 교수는 “여론조사 결과가 우리 편에 유리하면 국민의 위대한 선택이고, 불리하면 반대파의 공작과 음모라고 돌린다”며 “누가 어떤 주제로 글을 쓰든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우리 편에 유리한가, 불리한가이다”라고 지적합니다.

대중을 선동하는 정치가

개인들이 인지적 편향에 따라 진영 논리에 빠져드는 사이 정치권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이 음모론을 제기하며 지지자를 결집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죠.

특히 ‘조국 사태’ 국면에서 자유한국당은 조 전 장관 개인에 대한 비리 문제를 넘어 정권 차원의 게이트로 확대 재생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보수 진영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정권 퇴진’ ‘문재인 out’ 같은 구호들이 나오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주최한 집회를 찾아가 ‘숟가락을 얻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서울·고려대 학생들이 주최한 집회에서 정치인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학생증이나 졸업증명서를 검사하는 일까지 벌어졌을까요.

다양한 사회 갈등과 균열 중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선택해 정치적으로 대중을 결집시키는 현상을 ‘편향성의 동원’이라고 합니다. 지난해 진보 진영의 대규모 서초동 집회가 처음 있고 난 뒤 더불어민주당은 집회 참가 규모를 놓고 국민의 뜻이라며 침소봉대했습니다. 당시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통제받지 않는 무소불위 검찰 권력의 폭주에 보다 못한 국민이 나섰다, 어제 200만 국민이 검찰청 앞에 모여 검찰개혁을 외쳤다”고 밝혔습니다.

그러자 자유한국당은 민주당의 ‘숫자 부풀리기’라며 즉각 반발했습니다. 박성중 자유한국당 의원은 “‘조국 지지시위’ 참가 인원은 많아야 5만 명에 불과하다, 현장에 ‘조국 사퇴’ 시위대도 섞여 있었고 ‘서리풀 축제’ 참여한 시민들이 혼재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이 쓰는 ‘페르미 기법’을 적용하면 사람이 서 있을 때를 가정해 3.3㎡당 최대 9명씩 총 5만 명”이라고 설명했죠.

그러나 며칠 후 광화문 보수 집회에선 한국당 역시 ‘숫자 부풀리기’를 시도합니다. 지난해 10월 3일 자 [서울신문]은 “자유한국당은 집회 참석 인원을 300만 명 이상으로 추정했고, 문재인하야 범국민투쟁본부는 200만 명 이상이 참석했다고 주장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날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단상에 올라 “단군 이래 최악의 정권이다, 지난번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시위하는 것을 보셨느냐, 그들이 200만이면 우린 오늘 2000만이 왔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여야 할 것 없이 시민들의 집회 참여를 아전인수식으로 이용하는 행태에 대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일갈합니다. “정당과 정치 엘리트가 여러 균열 중 특정 균열을 선택적으로 동원하고 배제한다,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 효과는 자신에게 유리한 균열을 동원하고 그렇지 않은 균열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반지성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

지금까지 ‘온리버티’는 ‘조국 사태’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의 반지성주의를 인지적 편향의 관점에서 살펴봤습니다. 인지적 편향에 빠진 개인들이 편향성의 동원을 일삼는 정치세력과 맞물리면서 반지성주의는 중우정치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비단 한국 사회만의 일은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성숙도가 높은 지금의 미국 사회도 트럼프 대통령을 전후로 반지성주의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도 극우·극좌의 포퓰리즘 정당이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이처럼 반지성주의는 현대 대의민주주의 사회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 중 하나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결국 시민의 역량을 키우는 것 외엔 방법이 없습니다. 반지성주의와 이로 인한 중우정치는 시민의 수준이 낮고 이를 악용하는 정치세력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의식을 가진 시민들이 비판적 지성으로 정치권을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한다면 정치의 수준도 낮아질 리 없습니다. 4·19 혁명과 6월 항쟁이 독재를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쟁취하는 데 있어 시민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혁명과 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끌어내는 것과 그 이후 제도로서 민주주의를 정착해 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성격의 일입니다. 일상 속에서 민주주의를 확산하고 체화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민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고 성숙한 의식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가 보여주듯 문명을 발전시킨 것은 지성의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정치인의 화려한 수사를 걸러내고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깨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가는 늘 ‘위대한 국민’ ‘현명한 민심’과 같은 레토릭으로 시민을 치켜세우고 눈을 가리려 합니다. 이들은 시민의 표와 지지를 받아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의견에 쉽게 동조하고 맹목적 지지를 보내는 ‘팬덤(fandom)’을 키우길 희망합니다.

그러나 ‘팬덤’의 ‘팬(fan)’은 라틴어 ‘fanátĭcus’에서 유래한 말로 ‘광신자’를 뜻합니다. 옳고 그름과 진위를 따지는 이성의 개념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뜻하는 감정의 언어죠. 정치인에겐 광신적 팬덤이 아니라 비판적 지지자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반지성주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깨어 있는 시민뿐입니다.

※ 윤석만 논설위원/중앙일보 - 국회·청와대·교육부 등 다양한 출입처를 거쳤다. 2012년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고려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경희대에서 미래 사회를 주제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과학·기술·산업만이 아닌 인간과 문화, 의식과 제도의 측면에서 조망하며 미래인문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휴마트 씽킹] [리라이트] [인간혁명의 시대] [미래인문학] 등이 있다.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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