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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좁아진 취업문마저 막아버린 코로나 

“‘인생 시험’이 연기된 기분 아시나요” 

공채, 어학·자격 시험 대대적 연기에 취준생 ‘멘붕’
초조한 마음에 마스크 쓰고서라도 카페·독서실行


▎2월 25일, 노량진 학원들이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잇따라 휴원하자 점심시간임에도 노량진 거리가 한산한 모습이다. / 사진:연합뉴스
토익(TOEIC). 취업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영어 능력을 측정하는 가장 대표적인 시험이다. 4년제 대학 졸업자의 스펙에서 토익 점수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학 대부분이 ‘토익 ○○○점 이상’을 졸업 요건으로 지정해 놨으며, 심지어 일부 기업은 그것을 서류 전형의 필수 조건으로 내걸기도 한다.

취업 시장에서 토익이 갖는 위상은 이처럼 엄청나다. 그런데 2월 29일 예정돼 있던 토익 시험이 취소됐다. 1982년 시험이 도입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코로나19 확산세 탓이었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YBM 한국토익위원회는 3월 15일 예정된 시험도 덩달아 취소했다.

토익의 메카 강남역 학원가도 술렁였다. 해커스, 파고다 등 유명 어학원은 3월 1주차(3/2~3/8)를 무수업일로 지정했다. 코로나19 확산을 예방하고, 본격적인 학원 개강에 앞서 건물 방역을 실시하기 위함이다.

토익 시험의 성수기는 방학기간이다. 여유가 있을 때 미리 점수를 따놓으려는 대학생들, 채용 시즌을 대비해 점수를 올려보려는 취업준비생들이 한꺼번에 쏠리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2월 29일 토익 시험은 방학 중 마지막 시험이었기에 (예정대로 시행됐다면) 특히 미어터졌을 것”이라 말했다.

대학 마지막 학기를 앞둔 한승종(26·남)씨는 최근 강남역 해커스어학원에서 ‘토익스피킹 2주 단기 강의’를 수강했다. 토익이 대표적 스펙이 된 요즘, 취업 시장에서 영어회화 시험 점수 역시 필수가 됐다. 2월 28일 종강한 한씨는 바로 시험을 치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험 주관사인 YBM 한국토익위원회가 2월 29일부터 3월 11일까지의 여섯 차례 시험을 모두 취소했기 때문이다. 한씨는 “토익스피킹은 2주간의 수업과 스터디를 통해 감이 올랐을 때 바로 시험을 봐야 좋다고 들었다”면서 “3월 11일 이후의 시험도 취소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몇 년을 준비한 시험인데…”


▎제55회 공인회계사(CPA) 1차 시험이 열린 2월 23일, 서울 성동구 한양대학교에 마련된 시험장에서 응시생들이 마스크를 쓰고 줄을 서 있다. / 사진:뉴시스
비교적 응시 기회가 많은 토익 등의 시험과는 달리 1년에 단 한 번 있는 시험을 준비해오던 이들은 그야말로 멘붕(‘멘탈붕괴’의 준말) 상태에 빠졌다. 2월 23일, 정부가 코로나19 위기 경보를 최고 수준인 ‘심각’ 단계로 격상시키면서 공무원 시험 연기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2월 25일, 인사혁신처는 29일 예정돼 있던 국가공무원 5급 공개경쟁채용(행정고시), 외교관 후보자 선발 1차 시험을 4월 이후로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나흘 전 시험 연기 통보는 당사자들에게 날벼락과도 같은 충격이다. 이어 28일에는 국회가 3월 14일로 예정돼 있던 입법고시를 4월 이후로 잠정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공무원 입직 경로 중 가장 난도가 높고 품이 많이 들어가는 시험들이 모두 늦춰졌다.

행정고시를 준비한 지 3년 차가 된 박모(28·남)씨는 “시험 연기는 안전 차원에서 필요한 조처였고, 수험생 전원에게 동일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다만 만에 하나 증상이 생겨 올해 시험을 아예 치러보지도 못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집에만 있는다.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고 심경을 밝혔다.

3월 28일 예정된 국가공무원 9급 공개경쟁 채용, 4월 4일 예정된 경찰공무원(순경) 시험 역시 5월 이후로 연기됐다. 국가직 9급 공채의 경우, 매년 약 20만 명이 응시하는 시험이다. 최대 규모의 공무원 채용인 만큼 그 파급 역시 클 것으로 보인다.

이미 5급 시험 연기가 결정됐고, 전염병 사태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에 9급 시험 연기는 어느 정도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6월에 예정된 지방직 9급 공채를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컸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일반적으로 한 해에 국가직, 지방직, 서울직 등에 중복해서 응시한다. 같은 직렬인 경우 겹치는 과목이 많기 때문이다. 국가직 9급 수험생인 윤모(24·여)씨는 “국가직이 5월 이후로 연기되면, 한 달 뒤 지방직에도 응시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부담이 너무 크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지난해 5월 발표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청년층(15~29세)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생 수는 21만9000명으로 전체 취업준비생(71만4000명)의 30.7%에 달했다.

한편 코로나19 위기 경보가 ‘심각’ 단계로 격상된 2월 23일, 제55회 공인회계사 1차 시험이 시행됐다. 공인회계사 시험은 합격자의 평균 수험 기간이 3년 반이다. 시험에 응시했던 고려대 재학생 김모(28·남)씨는 “다행히도 (대대적인 시험 연기 이전에) 막차를 탄 기분”이라면서 “올해가 재시(두 번째 시험)여서 연기됐다면 멘탈이 많이 흔들렸을 것”이라 말했다. 그는 “1년에 단 한 번 있는 기회인데 시험일이 다가올수록 전염병 사태가 악화돼 이중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그는 시험 주최 측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기자에게 책·걸상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시험장 사진을 보여주면서 “시험 전에 일부 수험생들이 ‘시험장을 확충해 응시자 간 자리 간격을 넓혀달라’고 주장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2월 26일 노원구에서 발생한 확진자가 공인회계사 시험 당일 남자친구를 시험장에 데려다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된 바 있다.

이에 더해 소위 7대 전문직이라 불리는, 1년에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는 시험들은 이미 연기가 확정됐거나 시행이 머지않았다. 2~3월에 치러질 예정이었던 변리사, 관세사, 감정평가사 1차 시험은 모두 연기됐다. 오는 4~5월에 치러지는 노무사, 법무사, 세무사 1차 시험의 경우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수험생 입장에서는 불안감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기업 채용시장도 ‘꽁꽁’ 얼었다


▎서울 중구 서울도서관 입구에 ‘코로나19로 인한 휴관’을 알리는 알림판이 놓여 있다. / 사진:연합뉴스
기업 취업은 앞서의 공무원, 전문직 시험에 견줘 응시 기회는 많지만, 받아줄 곳은 흔치 않아 보인다. 통상 채용 과정에서는 서류 전형에서 통과한 지원자들이 인·적성 시험 등의 필기 전형을 치르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시험은 삼성의 직무적성검사(GSAT, Global Samsung Aptitude Test). GSAT는 전국 각지, 심지어는 뉴욕·LA에서도 시행되며, 수만 명의 지원자가 응시한다. 지난해 삼성은 3월 11일부터 상반기 공채를 시작했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일정은 아직 발표하지 않았다.

삼성을 제외한 기업들의 상황도 여의치 않다. 현대자동차는 채용을 진행하던 중 코로나19 사태가 악화된 탓에 면접 일정을 연기했다. SK는 당초 예정됐던 상반기 공채를 3월 초에서 3월 말로 늦췄다. 다만 “채용 규모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 밝혔다.

졸업을 유예하고 취업을 준비 중인 최정훈(27·남)씨는 현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했다. 그는 “지난해 하반기에 최종 면접에서 떨어져 이번 상반기가 취업 재수”라 밝히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건 알지만, 상반기 채용 일정이 하반기로 모두 밀려버리면 자동으로 취업 삼수를 해야 한다”며 우려를 표했다.

약 28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네이버 취업준비생 카페, ‘독취사(독하게 취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에는 “채용 연기로 인해 막막하다” “알바조차 잘렸다” 등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취업준비생들의 하소연 사연이 매일 수십 개 이상 올라온다.

채용 정보 플랫폼 잡코리아는 지난 2월 21일 신입직 취업준비생 1731명을 대상으로 ‘코로나19가 취업준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문 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조사 결과, 63.5%의 취업준비생이 코로나19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들은 채용 규모 축소, 채용 일정 연기를 가장 크게 걱정했다.

[채용트렌드2020]의 저자인 윤영돈 윤코치연구소 소장은 “몇몇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의 얘기를 들어본 결과, 전염병 사태가 진정 국면에 들어서더라도 6월까지는 채용시장 회복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취업준비생들에게 “컴퓨터 활용 능력 자격증, 운전면허증, 전화 봉사활동 등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도 긍정마인드의 중요성을 [월간중앙]에 강조했다. “신분이 불안정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취업준비생들은 기존에 갖던 불안감에 전염병 사태가 겹쳐 스트레스 정도가 훨씬 심할 것이다. 어렵더라도 ‘준비할 시간이 많아졌고, 외부 유혹에 흔들릴 일이 적어졌다’ 이런 식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는 게 필요하다.”

“그래도 집에만 있을 수는 없다”


▎평일 오후 신촌 인근 한 카페의 모습. 오갈 데 없는 이들로 내부가 거의 채워졌다. / 사진:박지원 인턴기자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연일 증가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전 국민이 외출을 꺼린다. 그럼에도 취업의 압박을 느끼는 취업준비생들은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꿋꿋이 집 밖으로 나온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보다 집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는 데서 오는 불안감이 더 큰 탓이다.

실제로 대학가 인근의 카페, 독서실 등에는 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이 많았다. 신촌에서 스터디카페를 운영하는 최모(52·남)씨는 “원래 방학 때 손님이 많아졌다가 개강 시즌이 다가올수록 그 수가 적어지는 게 일반적”이라면서 “올해는 개강이 연기돼서 그런지 손님이 줄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만난 이화여대 재학생 이모(24)씨는 “학교 도서관이 전부 휴관”이라며 스터디카페에 온 이유를 밝혔다.

서울 내 주요 대학들은 코로나19 예방 차원에서 개강 전까지는 도서관 열람실을 잠정 휴관하거나 이용 시간을 단축하는 등의 대책을 실시하고 있다. 대학 도서관뿐 아니라 서울시 공공도서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시 내 도서관 173곳은 3월 둘째 주까지 휴관 예정이며, 상황에 따라 휴관이 연장될 수도 있다.

아예 스터디룸을 대관해 그룹 스터디를 진행하는 이들도 있다. 최씨는 “저녁 시간대에는 여전히 스터디룸의 절반가량 예약이 찬다”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스터디룸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언론사, 금융권 등을 준비하는 취업준비생들이었다.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정재영(27·남)씨는 “언론사 준비는 개별 문제집 공부보다는 글쓰기 공부가 핵심이어서 각자의 논작에 대한 피드백 과정이 필요하다”면서 “스터디원끼리 오프라인 모임을 잠정 중단할지에 대해 논의해봤는데 일단 마스크를 쓰고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정부는 초중고 개학, 대학 개강 연기의 효과를 보기 위해 학원 휴원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교육부 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로 인해 휴원한 학원은 3월 5일 기준 전국 8만6435 곳으로, 휴원율은 42.1%다. 교육부는 발표에서 “영업을 강행하는 학원에 대해 집중 합동 점검을 실시하는 동시에 경영 안정 지원 방안도 적극 강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학원 외에 개인 공부를 하는 공간인 독서실, 스터디카페 등은 교육부 정책의 사각지대에 있다. 독서실은 법상 학원으로 분류돼 학원법의 적용을 받는다. 따라서 독서실 휴업률은 학원 휴원 집계자료에 포함될 뿐 따로 파악되지 않는다. 스터디카페 역시 공간임대업에 속하기 때문에 교육부의 별다른 지침을 받지 않는 상황이다.

코로나19로 한국사회 나아가 지구촌이 몸살이다. 아직 사회에 첫발도 내딛지 못한 이들에게는 집단적 감염 사태가 더 큰 몸살로 다가오는 듯하다.

- 박지원 월간중앙 인턴기자 vbt07@naver.com

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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