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2부)] 중세 중국화와 유교 수용의 주역들(8) 세종대왕 

불교의례 ‘1000년 성역’ 허물었다 

건국 이후 임시방편으로 운영되던 국가의례, 집현전 통해 종합·표준화
고려 상징 연등회·팔관회도 사라져… 유교 국가 조선, 문화적 토대 확립


▎SBS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 역할을 맡은 한석규가 먼 발치를 바라보고 있다.
한국사에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1000년 동안 주류 사상은 불교였다. 그때 불교는 통치이념으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례와 가정의례·사회의례로도 작용했다.

예컨대 고려시대에 가장 중요시된 국가의례는 연등회와 팔관회였다. 정월 보름에 거행된 연등회는 고대사회의 봄 축제를 계승하는, 10월 보름에 거행된 팔관회는 고구려의 동맹을 계승하는 불교의례였다.

고려시대 연등회와 팔관회의 중요성은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고려사]에 따르면 태조 왕건은 동왕(同王) 26년(943) 4월 박술희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를 전했다고 한다. 그 내용은 후대 왕에게 당부하는 열 가지 귀감으로, 10개 조항 중 3개 조항이 불교와 관련될 정도로 불교가 중요시됐다.

그 3개 조항 중 하나가 연등회와 팔관회에 관련됐는데 그 내용은 “내가 지극히 바라는 것은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다. 그 이유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통해 하늘의 신령 및 오악(五嶽)·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대의 간신들이 이 행사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한다면 결단코 금지해야 한다. 나도 처음에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연등회와 팔관회를 거행하는 날짜가 국가의 기일(忌日)을 침범하지 않게 해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기도록 해야 하겠다고 했으니, 마땅히 이대로 시행하라”였다.

이런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 태조 왕건은 고대사회의 제천행사를 불교행사인 연등회·팔관회와 통합해 고려 최고의 국가의례로 만들었다.

연등회와 팔관회 이외에도 고려시대의 중요 국가의례 또는 사회의례는 대부분 불교의례였다. 예컨대 가뭄·홍수·역병·전쟁 같은 국가비상사태 때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거행됐던 국가의례는 이른바 ‘소재도량(消災道場)’이라 불리던 불교의례였다. 또한 왕실 사람들을 위시해 양반·농민·노비 등 고려 사람들의 관혼상제와 관련된 가정의례와 사회의례 역시 불교의례였다.

이 같은 불교의례는 팔만대장경의 [의궤(儀軌)] 등을 근거로 시행됐다. 아울러 불교의례를 시행하는 주체는 당연히 스님이었고, 장소는 사찰이었다. 이 같은 국가적·사회적 불교의례 및 불교신앙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고려시대 궁궐과 개성은 물론 방방곡곡에 수많은 사찰이 건립됐다.

태조, 새 왕조 혼란 피하려 ‘점진적 유교화’ 지시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정비해 자신의 국가경영 싱크탱크로 삼았다. 김학수 작 ‘집현전 학사도’. / 사진:세종대왕기념사업회
고려 성종 때 최승로는 상소문을 올려 국가적·사회적 폐단 28가지를 비판하고 그 시정을 요구했다. 이른바 ‘시무(時務) 28조’라고 하는 게 그것이었다. [고려사]의 ‘최승로 열전’에는 ‘시무 28조’ 중 22가지가 수록돼 있는데, 그 22가지 중 10가지가 불교와 관련된 폐단이었다. 이로써 고려가 건국되고 100년도 되지 않아 불교가 국가적·사회적으로 다양한 폐단을 야기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물론 불교가 주류 종교로서 국가적·사회적으로 수많은 특권을 확보하면서 급격히 타락했기 때문이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입각해 고려 성종은 불교 폐단을 시정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노력은 후대 왕들에게도 계승됐다.

하지만 고려 말에 이르러 국가적·사회적 차원의 불교 자정 노력은 거의 유명무실화되고, 그 결과 불교는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또 타락하게 됐다. 그런 현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일군의 지식인들이 바로 안향으로 대표되는 성리학자들이었다.

고려 말 성리학자들은 공민왕대에 중앙정계로 진출하면서 이른바 ‘신진사대부’라고 하는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그들은 공민왕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리학적 개혁을 추진했는데 그 개혁은 대부분 불교의 가정의례를 유교의례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공민왕대에 목은 이색 등은 불교의 화장(火葬)을 야만적이라 비판하며 유교의 3년 상 시행을 추진했다. 나아가 신진사대부들은 관례·혼례·제례 등도 유교화하고자 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거쳐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왕조의 주도세력은 가정의례는 물론 국가의례도 유교화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가정의례보다 국가의례를 유교화하는 작업은 훨씬 어려웠다. 국가의례를 유교화하기 위해서는 불교의례를 대체할 유교의례가 필요한데 그에 관한 연구나 참고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이 가정의례를 유교화하고자 했을 때 핵심 근거 자료는 [주자가례(朱子家禮)]였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자가례]는 주희가 저술한 가정의례로서 관례·혼례·상례·제례 등 이른바 4례(四禮)를 핵심으로 했다.

관례는 미성년자가 성년이 됐을 때 치르는, 혼례는 남녀의 결혼에 관한, 상례는 죽음 그리고 제례는 조상신에 관한 가정의례였다. 즉 [주자가례]의 관례·혼례·상례·제례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성년이 되고 혼례를 치르며 나이 들어 죽은 후 가정의 조상신이 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삶의 마디 4개를 가정의례화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가정의례는 바로 [주자가례]의 4례로 대표됐다. [주자가례]는 안향에 의해 수용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고려 말의 성리학자들과 신진사대부들은 바로 이 [주자가례]를 근거자료로 가정의례를 유교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 건국 후 가정의례에 관심을 가진 성리학자들은 [주자가례]를 깊이 연구했다. 기원으로 따지면 [주자가례]는 중국에서 성립됐으므로 그것을 조선 사회에 적용하려면 연구와 변용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주자가례]의 근거가 되는 [예기(禮記)] [의례(儀禮)] [주례(周禮)] 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이 결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들이 수많은 가정의례 연구서를 저술하게 됐다. 예컨대 17세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김장생의 [가례집람(家禮輯覽)]과 [가례집람도설(家禮輯覽圖說)], 유계의 [가례원류(家禮源流)] 등이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의례는 가정의례와 달리 개인 차원에서 연구·적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국가의례는 말 그대로 국가기관에서 거행하는 의례였기에 개인 차원에서 연구해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가의례는 공식적으로 국가기관에서 연구하여 적용해야만 효과가 있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됐을 때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의장법제(儀章法制)는 모두 고려의 고사에 의거한다”는 대원칙을 제시했다. 이 같은 대원칙은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따른 혼란과 불안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즉위교서의 선언대로 의장법제를 모두 고려의 고사에 의거해 거행하게 되면 유교국가 조선의 건국이라고 하는 역사적 의미가 퇴색할 수밖에 없었다.

‘예’는 세상에서 실천하는 하늘의 이치


▎고려시대의 대표적 불교 행사인 팔관회 재현 행사에 참석한 왕과 왕비.
이성계는 “의장법제는 모두 고려의 고사에 의거한다”는 대원칙을 선언하면서 동시에 “관혼상제는 나라의 대법(大法)이니 예조에 의뢰해 유교경전을 상세히 규명하고 고금(古今)을 참작하게 해 법령을 정하고 그로써 인륜을 두터이 하고 풍속을 바로잡겠다”고 하는 국가의례 개혁방침을 천명했다. 즉 이성계는 신왕조 개창에 따른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의례를 점진적으로 유교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례] 등의 유교경전에 의하면 국가의례는 길례(吉禮)·가례(嘉禮)·군례(軍禮)·빈례(賓禮)·흉례(凶禮)의 다섯 가지 의례로 구성됐다. 길례는 천지신명과 조상신 등의 제사에 관한 국가의례였고, 가례는 왕실의 관례와 혼인·환갑·신년행사 등에 관한 국가의례였으며, 군례는 왕의 군사훈련, 빈례는 왕의 외국사 신접 대에 관한 국가의례였고, 흉례는 왕과 왕비의 죽음과 장례 등에 관한 국가의례였다. 즉 국가의례는 왕의 개인적 삶과 주권자로서의 통치행위에 직결되는 다섯 가지 유교의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길례·가례·군례·빈례·흉례로 구성된 국가의례에는 왕의 일생에서 나타나는 중요 마디뿐만 아니라 내치·외교·국방에 관련된 의례도 포괄됐고, 그것이 다섯 가지로 구성됐기에 5례라 불리기도 했다.

[논어]에서 공자는 유교 공부의 목표를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언급한 바 있다. 즉 인간적 욕심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는 것이 유교 공부의 목표라고 천명했던 것이다. 그 ‘예(禮)’에 대해 주희는 “예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요, 인사(人事)의 의칙(儀則)”이라고 해설했다. 주희의 이해설에 성리학자들이 예를 무엇이라 생각하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천리의 절문이란 ‘하늘 이치의 마디와 문양’이란 뜻이고, 인사의 의칙이란 ‘사람 일의 의례와 규칙’이란 뜻이다. ‘하늘 이치의 마디와 문양’이란 하늘 이치에서 나타나는 중요 마디와 그 중요 마디에서 나타나는 천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봄·여름·가을·겨울의 하늘에서 나타나는 일월성신의 변화 등이 바로 ‘천리의 절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람 일의 의례와 규칙’이란 사람의 일생과 사업에서 마땅히 실천해야만 하는 의례와 규칙이란 뜻인데, 이 같은 ‘인사의 의칙’은 각자가 제멋대로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문왕·주공·공자 같은 유교 성인(聖人)들이 ‘천리의 절문’에 입각해 제정한 것이었다.

결국 성리학자들에게 ‘예’란 사람들이 세상에서 실천하는 하늘의 이치 즉 천리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이처럼 국가의례 또는 가정의례의 근거를 천리에 둠으로써 성리학자들은 ‘예’의 권위를 한없이 드높일 수 있었다.

그런데 조선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가 모든 국가의례를 유교화하려면 당연히 5례 전체를 완비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과거 1000년 간 지속되던 불교의례를 갑자기 변개하는 것이나 같았고, 그것은 큰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았다.

세종이 교정하고 의정부 검토 거쳐 확정


▎중요무형문화재 111호인 사직대제가 서울 종로구 사직동 사직단에서 사직대제보존회 주관으로 열리고 있다.
이에 따라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언급한 대로 국가의례를 일시에 유교화하지 않고 그 대신 중요한 국가의례 순으로 유교화하는 방식을 취하게 됐다. 예컨대 종묘와 사직에서의 제사, 왕의 즉위식, 중국 사신 접대 등과 같은 국가의례를 순차적으로 유교화했다. 그때그때 예조에 명해 필요한 국가의례를 마련해 거행하는 방식이었다. 이 같은 태조 이성계의 방식은 정종·태종 등 후계 왕들에게도 계승됐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점진적이기에 혼란을 줄인다는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있었다. 그때그때 예조에서 새로운 의례를 마련하다 보니 일관성이 결여됐고, 또 일이 닥칠 때마다 급하게 마련하다 보니 급박하다는 불편도 있었다. 그래서 5례를 모두 마련하고 그에 입각해 국가의례를 표준화할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런 필요성에서 5례를 완비한 왕이 바로 세종이었다.

태종의 양위로 1418년(태종 18) 8월 10일에 즉위한 세종은 다음해 12월 집현전을 설치했다. 세종은 집현전에 젊고 유능한 관료들을 배속해 유교경전을 깊이 연구하게 했다. 그들의 유교 연구는 단순한 연구로 끝나지 않았다. 경연(經筵)에서 또 국가의례 정비에서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가 빛을 발했던 것이다. 이 같은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세종대의 찬란한 문화 창조가 가능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국가의례 즉 5례의 완비였던 것이다.

세종도 재위 중 상당 기간은 태조 이성계, 정종·태종처럼 일이 생길 때마다 예조나 집현전에 명령해 그때그때 국가의례를 마련하게 해서 이용하는 방식을 답습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세종은 재위 26년(1444) 10월 11일 변효문·하위지·서거정 등에게 명령해 집현전에서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게 했다. [오례의주]는 길례·가례·군례·빈례·흉례 등 다섯 가지 국가의례에 관한 주석서인데, 그 주석서를 집현전 학자들로 하여금 집현전에서 연구하게 했던 것이다.

당시 집현전이 최고의 국정자문기관이면서 동시에 최고의 자료보관처였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1444년까지 52년 동안 임시방편 식으로 운영되던 국가의례를 종합하고 표준화하고자 [오례의주]를 상정했던 것이다.

변효문·하위지·서거정 등이 [오례의주]를 상정할 때 참고한 자료는 세종 재위 시 예조와 집현전에서 마련했던 기왕의 국가의례 그리고 그 근거가 되는 유교경전, 중국 전례 및 고려 전례 등이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즉위부터 재위 26년까지 예조와 집현전에서 마련했던 기왕의 국가의례는 총 300종으로 나타나는데 구체적으로 길례 37종, 가례 88종, 군례 5종, 빈례 4종, 흉례 63종, 기타 3종이었다.

이를 기본으로 변효문·하위지·서거정 등은 유교경전, 중국 전례 그리고 고려 전례 등을 참고해 [오례의주]를 상정했다. 이렇게 상정된 [오례의주]는 세종의 교정을 거쳐 완성됐고, 그 완성본은 다시 의정부의 검토를 거치게 됐다. 하지만 의정부의 검토가 끝나기 전에 세종이 승하하고 말았다.

그러나 변효문 등이 상정하고 또 세종이 교정을 본 [오례의주]는 [세종실록] 부록의 ‘오례(五禮)’로 수록됨으로써 세종대의 문화 창조를 대표하는 업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세종실록]에는 ‘오례’ 이외에도 ‘악보(樂譜)’, ‘지리지(地理志)’, ‘칠정산(七政算)’ 등이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이 같은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 등이 바로 세종대의 문화 창조를 대표하는 업적이었다. 그중에서도 ‘오례’가 맨 앞에 실림으로써 세종대의 문화 창조 중 ‘오례’ 정비가 가장 중요한 문화 창조로 간주됐음을 알 수 있다.

사직·종묘 제사, 조선시대 국가의례 ‘대표’로

[세종실록] ‘오례’ 서문에 의하면 세종 26년(1444)에 시작된 [오례의주]는 문종 1년(1451)에 완성됐다. 즉 [오례의주]가 완성되는 데 총 7년이 소요됐던 것이다. [세종실록] ‘오례’에는 길례 35종, 가례 45종, 군례 8종, 빈례 6종, 흉례 69종 등 총 163종의 국가의례가 수록됐다. 세종 재위 26년 동안 시행됐던 300종의 국가의례를 참조해 163종의 국가의례로 간소화시킨 결과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 ‘오례’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성종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로 편찬됐고, 이 [국조오례의]가 조선왕조의 국가의례 표준으로 이용됐다. [세종실록] ‘오례’ 중 길례는 천지신명과 조상신 등의 제사에 관한 국가의례인데 제사의 중요성에 따라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 3등급으로 구분됐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의례는 대사로 사직 제사와 종묘 제사가 해당됐다. 그다음으로 중사에는 풍운뇌우(風雲雷雨) 제사, 악해독(嶽海瀆) 제사, 선농단 제사, 문선왕 제사 등이 포함됐고 소사에는 명산대천 제사 등이 포함됐다.

[세종실록] ‘오례’의 제사 대상이 되는 천지신명들 즉 토지·곡식·풍운뇌우·산·강·호수·수확과 파종 등은 대체로 농업과 직결되는 자연적 신격(神格)들이었다. 그 외 종묘의 조상신 그리고 말이나 질병에 관련되는 신격들은 국가의 역사와 안보·민생에 직결됐다.

즉 [세종실록] ‘오례’의 길례는 왕이 인간을 대표해 농업과 국가의 안녕에 관련되는 자연적 신격들 그리고 국가 역사에 직결되는 조상신들에게 제사하는 국가의례였던 것이다. 특히 사직 제사와 종묘 제사의 장중함이나 신성함은 명실상부 조선시대 국가의례를 대표할 만했다. 그런데 한국사에서는 고대로부터 하늘의 신격에 드리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무속신앙으로 동아시아 전역에서 유행하던 자연숭배나 귀신숭배의 일종이었다. 하늘의 신격에 대한 제천행사는 고려왕조에 계승됐다. 예컨대 고려 왕은 원구단에서 제천의례를 거행했고, 조선 건국 직후에도 원구단 제사가 거행됐다.

그러나 세종대에 이르러 원구단의 제천의례는 천자의 고유권한이라는 이유로 폐지됐고, 그 대신 ‘풍운뇌우 제사’가 제정됐다. 그 결과 [세종실록] ‘오례’에는 ‘원구단 제사’ 대신 ‘풍운뇌우 제사’가 실렸다. 천자의 ‘원구단 제사’는 1897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부활됐다.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드리는 사직 제사는 이른바 사직단에서 거행됐는데, 사직단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직후에 건립됐다. 장소는 경복궁의 전면 오른쪽에 해당하는 한성부 서부 인달방(仁達坊)이었다. 그곳은 경복궁의 전면 왼쪽 방향에 건립된 종묘에 대응하는 방향이었다.

왕궁의 전면 오른쪽은 방향으로는 서쪽이었다.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음양으로 치면 음이었다. 토지신은 하늘에 대응하여 음이 되므로 사직 제사는 음사(陰祀)라고 불렸고, 음사인 사직 제사를 드리는 사직단은 서쪽에 자리하게 됐다. 아울러 서쪽은 계절로는 가을이 되는데, 이는 결실과 함께 응징 또는 처벌을 상징하기도 했다.

‘오례’ 정비 기점으로 모든 불교의례 폐지

사직단은 토지 신을 모신 사단(社壇)과 곡식 신을 모신 직단(稷檀)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사단에는 국내의 토지 신인 국사(國祀)의 신위를 모셨고, 직단에는 국내의 곡식 신인 국직(國稷)의 신위를 모셨다.

또한 사단에는 중국의 상고시대에 토지행정을 담당했던 후토씨(后土氏)를 같이 모셨으며, 직단에는 농사를 관장했던 후직씨(后稷氏)를 배향했다. 사단과 직단은 동서의 방향으로 나란히 세우는데, 사단을 동쪽에 두고 직단을 서쪽에 두었다. 사단과 직단은 지붕을 만들지 않고 그냥 노천에 드러나게 하며 네모 모양으로 만들었다.

지붕을 만들지 않는 이유는 토지 신과 곡식 신이 자연적 신격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비바람을 막는 시설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모양이 네모인 이유는 과거 사람들이 토지를 네모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모양을 상징해 그렇게 했다.

사단과 직단은 사방의 토지를 상징하는 사방 색의 흙을 방향에 따라 쌓고 그 위를 황색의 흙으로 덮었다. 즉, 동쪽 방향은 동방색인 청색의 흙을, 서쪽 방향은 서방색인 흰색의 흙을, 그리고 남쪽 방향은 남방색인 붉은색의 흙을 쌓고, 북쪽 방향에는 북방색인 검은색의 흙을 쌓았다. 이는 사직이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신 제단이므로 사방의 토지 신을 포괄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다. 마지막으로 그 위를 황색의 흙으로 덮는데, 이는 왕이 사방을 덮는 것을 상징했다.

또한 [세종실록] ‘오례’에서 사직 제사와 더불어 대사로 규정된 종묘 제사는 천명을 받아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역대 왕 및 왕비 등의 조상신에게 드리는 국가의례였다.

태조 이성계는 재위 3년(1394) 10월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그해 11월에는 이성계가 몸소 종묘를 건립할 땅을 살펴본 다음에 종묘 건립을 위해 공작국(工作局)을 설치했고, 다음 달인 12월부터 종묘 건축공사를 시작해 다음해 9월에 완성했다. 그 종묘에서 거행된 제사는 정시 제사와 임시 제사로 구분됐다.

앞서 언급한 풍운뇌우 제사, 사직 제사, 종묘 제사를 비롯한 길례에 더해 왕실의 관례와 혼인·환갑·신년행사 등에 관한 가례, 왕의 군사훈련에 관한 군례, 왕의 외국 사신 접대에 관한 빈례 그리고 왕과 왕비의 죽음과 장례 등에 관한 흉례 등이 종합적으로 [세종실록] ‘오례’에 규정됨으로써 그 ‘오례’에서 제외된 불교의례는 자연스럽게 국가의례에서도 제외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고려시대 최고의 국가의례로 거행되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비롯한 모든 불교의례가 폐지됐다. 즉 세종의 ‘오례’ 정비를 기점으로 조선의 국가의례는 완벽하게 유교의례로 변했고, 그것은 곧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1000년 동안 국가의례를 대표하던 불교의례가 역사의 주무대에서 퇴장했음을 상징했다.

이런 면에서 국가의례를 유교화한 세종은 불교개혁을 결단한 태종 이방원과 더불어 조선왕조를 유교화한 대표적 문화영웅이라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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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호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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